[호우] 꽃집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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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퇴근하던 순영. 그 날따라 날이 너무 좋았고 맡았던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기분이 좋아 산책하듯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혼자 축하파티라도 할까 하고 상가를 천천히 훑다가 초록빛이 가득한 가게가 눈에 띄었다. 여기에 꽃집이 있었구나 하고 순영은 그 꽃집을 유심히 봤다. 마침 손님이 커다란 꽃다발을 양손에 안고 나왔고 뒤이어서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밝은 미소로 배웅을 하고 있었다. 첫눈에 반하는 시간이 7초라고 했던가? 그거보다 빠른 거 같은데. 마침 축하파티도 하려했으니 꽃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하고 저녁 메뉴는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자기합리화하며 꽃집 문을 열었다.
"어서오세요~"
주인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곤
"선물하실 거 찾으세요?“
라고 물었다. 순영은 뭐라 말하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고 귀여워서 넋을 놓고 있었다. 자신의 말을 못 들은 건지 대답이 없는 순을 향해 재차 말했다.
"손님 어떻게 오셨을까요?"
"아.. 아! 저 그 좋은 일이 있어서...“
"여자친구 분 선물하시게요?"
순수한 물음에 순영은 놀라며 대답했다.
"아니요! 자축하려구요 맡은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됐거든요. 가볍게만 해갈까 해서."
애인이 없다는 걸 필사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구구절절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그 남성손님은 주로 여자친구 분 선물하려고 오셔서요."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화분으로 보시나요? 아니면 생화?"
순영은 죽어나간 화분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생화로요."
"따로 원하시는 꽃은 없으시고?"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아는 꽃 종류가 몇 없기도 했고 직접 골라주는 꽃을 받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요즘 한참 나오는 제철 꽃이에요"
안 쪽으로 들어가더니 샛노랗고 작은 꽃 한 묶음을 들고나왔다.
"프리지아라는 꽃이에요. 봄에만 나오거든요. 무엇보다 향이 좋아요.“
향을 맡아보라는 눈빛으로 꽃을 순영의 눈높이에 맞게 갖다 댔다. 순영은 향을 맡고 꽃과 자신보다 눈높이가 약간 낮은 그를 번갈아가며 봤다.
"좋네요. 무엇보다 그 쪽처럼 귀여워요.“
꽃은 여자가 하는 일이라는 고정관념과 아담한 체구, 귀여운 외모 탓에 종종 이런 오해를 받아온 지훈이었다. 딱 봐도 관심있어요 하는 멘트인지라 차분히 대답했다.
"종종 오해들 하시는데 저는 남자입니다.“
"네? 알고 있어요. 너무 귀여우셔서요 혹시... 불편하셨나요?"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괜히 김칫국 마신 상황이 되자 지훈은 부끄러워 귀 끝이 살짝 빨개졌다. 그저 저 손님이 빨리 나가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순영은 지훈의 빨개진 귀를 보고 마냥 귀여워했다.
"프리지아라고 했죠? 한 묶음 주세요."
"ㅇ..아 네..! 서비스로 3줄기 더 드릴게요.“
”아 혹시 꽃말도 있나요?“
”프리지아 꽃말이요? 물론 있죠.“
”당신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지훈은 대답하곤 빠르게 다발을 포장해서 건네주었다. 계산 직후 이제 나가겠거니 하고 한숨 돌리려는 순간
"제 명함이에요 얼굴 보러 자주 올게요~"
지훈 손에 순영의 명함을 쥐어주곤 그대로 떠나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훈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가 더뎠다.
'그러니까 방금 저 잘생긴 사람한테 명함을 받은거지???'
첫인상이 꽤 날카롭게 잘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런 사람에게 꽃 선물을 받을 상대가 부럽다고도 생각했다. 지훈은 손에 쥐어진 명함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팀 팀장 궍숝영 대리..."
이름도 잘 어울리네. 분명 얼굴 보러 자주 온다고 했지.
"...다음에 오면 내 명함도 줘야겠다."
간만에 느끼는 이 간질거림에 내일이 기대되는 지훈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을 일상을 보내던 지훈에게 신경쓰이는게 생겼다. 명함을 주고 간 사람. 벌써 호감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교류가 있었다고 그런 게 생기겠는가. 잘생기긴 했다만.
'오늘 올까?'
라고 생각을 해버렸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거리에 보이기 시작했다. 내심 오지 않을까 반 정도는 기대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손에 나름대로 제작한 지훈의 명함을 꼭 쥐고. 그러나 올 것처럼 굴던 그 손님은 거리에 사람이 줄어드는 와중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자주라고 했지 당장 오늘이라곤 안했으니까.“
지훈은 살짝 실망했지만 끝내 자기합리화를 하며 손에 쥐던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꽃통 물을 갈고 외부에 진열했던 화분을 내부로 옮기며 마감을 하던 때 지훈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순영이 멀지 않은 곳에서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아직 안 늦었죠?“
지훈은 정장을 입고 급히 달려오는 순영의 모습이 시트콤 드라마에서 본 것 같아 웃음이 터졌다. 순영은 훈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늦게 끝나셨나봐요. 순영씨"
"어? 제 이름 외우신 거예요?"
"명함 주셨잖아요."
"그래도 기분 좋네요. 저를 아니까"
고작 이름 하나 불러줬다고 뭐가 저리 좋은 걸까.
"오늘도 꽃 해가시나요?"
"마감 거의 다 하셨잖아요 얼굴 보러온 거예요"
"...그거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럴리가요. 이렇게 달려왔는걸요."
씨익 웃는 순영의 표정에는 진심이 담긴 눈빛이 있었다. 그걸 본 훈은 자기도 모르게 귀를 붉혔다.
"아 마감 마저 하세요 시간 끌어서 미안해요"
순영은 기다리겠다며 가게 옆쪽으로 비켰다. 설마 같이 퇴근할 생각인가? 본 지 겨우 이틀 됐는데? 훈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가게 문이 잠긴 것까지 확인한 지훈은 순영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순영에게 다가갔다.
"다 끝났나요? 그럼 이만 들어가볼게요."
"네? 아 들어가세요."
순영은 웃으며 돌아섰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림이었기에 훈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분명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처럼 굴던 사람이 왜 저렇게 가버리는거지?
"저기 순영씨!"
"네?"
이대로 가는 게 어이없던 탓에 무심코 순영을 불러버렸다. 이게 아닌데 어쩌지?
"아 저 그게..."
순간 지훈은 주머니 속 명함이 생각났고 단숨에 순영에게 다가가 명함을 꺼내들었다.
"제 명함이요"
순영은 놀랐는지 동공이 커졌고 지훈이 건네준 명함을 받았다.
「 플로리스트 이지훈 」
지훈이구나 이름도 예쁘네.
"플로리스트 멋지네요 지훈씨.“
"그냥 꽃하는 직업인데요. 뭘.."
"그냥이라뇨 이것도 전문이고 기술인데요"
이런 식으로 훅 치고 들어오기 있냐. 쿨하게 가던 사람이 맞나 싶네.
"그런데 혹시 오늘 저 기다리신 거예요?"
"네? 아니요?"
훈은 갑자기 정곡을 찔려 즉답을 해버렸다.
"그래요? 마치 준비된 것처럼 명함 주시길래."
"ㅅ..손님들한테는 하나씩 드려요."
"그렇구나~"
어제 꽃다발 안고 가신 분은 그런 거 안 들고계시던데.
"명함 고마워요. 지훈씨 조심히 들어가요~"
"아 잘 들어가세요..!"
순영은 능글맞게 웃으며 인사하며 돌아섰다. 지훈은 멀어지는 순영을 보며 넋을 놓다가 긴장이 풀렸는지 정신이 들었다.
...완전히 말려들어버렸네. 내가 들이대는 거 같잖아!
"지훉아!!"
"요란하게도 들어오네"
순영이 지훈을 보러온 지도 한 달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급속도로 친해졌고 동갑인걸 알고 말도 놓았다.
"어떻게 맨날 찾아오냐 안 지겹냐?"
"너 보러오는건데 어떻게 지겨울 수가 있어."
말은 잘한다. 그래놓구선 마감하면 쏠랑 집으로 가버리면서. 도대체 속을 알 수가 없다 매일 찾아오고 말까지 놨으면서 여태 퇴근시간 외에 만나자고 한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한 적도.. 나한테 관심이 있긴 한건가? 있기야 하겠지 매일 찾아오는 거 보면 그럼 다른 쪽으로 관심있다거나? 아니 근데 왜 내가 매달리는거 같지?
"신종 사이비인가..."
"어?“
아차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 아니 낮에 이상한 손님이 와서."
"뭐? 어떤 놈이야."
순영은 순식간에 표정이 굳어졌다. 대충 얼버무린건데 생각치도 못한 반응에 지훈은 당황했다.
"무슨 종교신문을 주더라고 갑자기 생각나서 사이비인가 했지."
"그런 사람들 많으니까. 조심해 가까이하지 말고."
내가 너를 사이비로 의심 중이었다. 임마. 반응 보니까 사이비는 아닌 거 같다. 그럼 단순히 나랑 친해지고 싶었던건가? 이러면 나만 김칫국 마신 꼴 되잖아. 그런데 나 왜 계속 쟤 생각만 하고 있지. 그래 쟤는 단순히 나랑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거고 그 이상은 아닌 거야. 이렇게 정리하면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 안 해도 돼. 가게 마감이 끝나갔고 훈은 셔터를 내렸다.
"그래 내일 봐"
"아 지훈아“
순영의 목소리에 지훈은 뒤돌았다
"나 내일부터 바빠져..."
"야근?"
"웅.. 그래서 자주 못 올거야."
"수고해."
지훈의 말을 듣고 순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무 아무렇지 않은 거 아냐?"
"아니 뭐.. 아예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뭐야 왜 또 저러는데. 오 박사님이 매일 보고 싶은 건 친구사이가 아니랬다고.
"꼭 이 시간에만 안 만나도 되잖아. 다른 날에 약속 잡든가."
"그래도 돼???"
축 처졌던 순영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사실 순영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번호를 따였으면 따였지 남의 번호를 따본 적이 없었다. 순영이 먼저 행동하게 만든 건 지훈이 처음이었다. 먼저 말을 걸고 호감을 표현하는 것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망설여졌다 지훈에게 받은 명함에 있는 전화번호는 저장했다. 카톡 프로필도 봤다 프사는 꽃다발이고 배사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 지훈이었다. 지훈이 너무 예뻐서 30분동안 넋 놓고 보기만 했다. 아 아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뭐라고 연락하지? 채팅방을 들락날락하면서 고민했다.
저녁 드셨나요? 나중에 저랑 저녁...
너무 속보이는데.
잘 들어가셨어요?
평범하고 답장하기 애매해.
이런 고민만 하다가 인사 하나 보내지도 못하고 시간이 너무 흘러버린 것이었다. 하필 순의 프로필이 기본이라 지훈도 이 사람 카톡은 거의 안 쓰나보네 하고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톡 하나도 못 보내는데 데이트 신청이 가당하기나 할까. 막상 훈이랑 얘기할 땐 무자각 플러팅을 해버린 탓에 이 정도로 쑥맥인 줄을 지훈은 당연히 몰랐다.
친구사이에 약속잡는게 뭐라고.
"안될게 있냐. 날짜 잡으면 되지."
"그럼...! 카톡으로 얘기할래?"
"뭐야 너 카톡하긴 하냐? 그래 이따 카톡해~"
아싸!!! 카톡이랑 데이트신청 둘다 뚫렸다!!!
순영은 내적 환호성을 질렀고 지훈은 애가 왜 저리 신났지 하고 의문이 들 뿐이었다.
지훈의 답장을 보자 순영은 멈칫했다
아 맞네... 뭘 할지 생각을 안했네
보통 호감가는 상대랑 데이트하면 뭘 하지?
일단 물어볼까.
『지훈아 잘 들어갔어?』
「엉」
『이번 주 시간 돼?』
「아ㅋㅋ 바로 약속 잡는거야?」
「나 주말에는 쉼」
『그럼 토요일에 볼래?』
「ㅇㅇ 근데 뭐할건데?」
어떻게보면 식상하지만 무난한 루트다.
아직 알아가는 단계니까 이정도만 해도 되겠지.
『따로 하고싶은 거 있어?』
「그닥? 애초에 잘 나가지 않아서 그냥 가볍게 밥먹고 카페가도 돼」
"그러고 보니까 어떤 메뉴를 좋아하는지를 모르네"
그렇게 매일 저녁마다 찾아갔으면서 막상 이런 사소한 얘기를 많이 안 했다. 친해지기만 했지 서로에 대해 잘 몰랐다.
자연스럽게 카톡도 시작했겠다. 순영은 이야기 조금씩 지훈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식부터 주로 마시는 음료 취향으로 시작해서 수다의 장이 열렸다. 지훈은 간만에 해보는 긴 대화라 활력이 생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먼저 연락하는 타입도 아니고 친구들도 몇 없었다. 손님들과 하는 스몰토크가 대화의 전부였다. 그 손님들 마저 단골 아니면 더 친해질 기회가 없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썸남은 아니지만(맞음) 친구가 생긴거에 의의를 뒀다. 밤이 되고 나서야 내일 출근해야 하지 않냐며 잘 자라는 말과 함께 톡이 종료됐다.
분명 바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못온다고 했다. 그런데 왜 전보다 더 많이 본 기분일까. 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알림이 울렸다.
『지훈아아 나 일하기 싫어ㅠ』
이틀 동안 이런 식으로 수시로 연락이 왔다. 싫다는 게 아니다. 한적한 동네의 꽃집이라 심심하지 않고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 보내는 건 좋다. 그저 직장인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자주 농땡이를 피워도 되는건가 싶은거다.
「지금 놀고있는거 아니냐」
『일하고 있다고ㅜㅜ』
칼답 하는 주제에 일은 무슨.
『빨리 퇴근하고 지후니 보러가고 싶다』
순영은 톡을 보낸 후 지훈의 톡 프로필을 봤다.
꽃의 요정님을 사진으로밖에 못보다니 이건 고문이야. 라며 소리없는 포효를 했다. 시도때도 없이 들어오는 일거리를 처리하면서 간간이 지훈과 연락하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답장을 본 훈은 멈칫했다. 또또 이렇게 훅 들어오네 원래 성격인건가. 남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친구사이의 대화를 하다가도 종종 이렇게 플러팅이 날아왔다. 어찌 적응하려 해도 적응이 안되네.. 첫 인상이 강렬했고 거의 번호 따는 상황이었으니(맞음) 마음이 흔들렸으나 애써 무시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건 그렇고 너 바쁘다 해서 점심 먹을 곳은 내가 알아보고 있는데 위치는 어디가 편해?」
그러고 보니 얘도 이 동네 사니까 이쪽으로 퇴근하는 거겠지? 집에서 가까운 곳이 편하려나.
『상관없어~~~』
오냐 그럼 대충 가까운 곳으로 알아보마. 그러고는 한참을 검색하고 리뷰를 줄줄이 읽어봤다.
"석민아 옷 좀 빌려줄 수 있냐?"
"갑자기? 내 옷은 좀 크지 않아?"
내일이 데이ㅌ...아니아니 권순영이랑 만나기로 한 날인데 막상 입을 옷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지훈은 꽃일을 하기에 옷장이 온통 어두운 색 옷에다 곧 작업복인지라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정장룩으로 쫙 빼입고 다니는 권순영과 후줄근하게 입고 앞치마 맨 자신의 모습이 꽤나 볼만하게 느껴졌다. 너무... 무신경했나..? 아니지! 옷 신경쓰느라 꽃 관리에 소홀해질 수 있잖아. 그게 더 안좋아. 나는 이게 근무복이니까. 라며 직업정신 발휘와 동시에 합리화를 했다. 어찌됐든 당장 내일 입을 마땅한 옷이 없는 건 틀림없었다. 지훈은 고민하다 동생 석민에게 부탁한 것이다.
"근데 형"
"왜"
"데이트 나가?"
"ㅁ..뭐?"
지훈은 당황했는지 어버버 거리며 대답했다
"데이트는 무슨 친구랑 약속.“
석민은 방에서 옷을 고르는 지훈을 보며 말했다
"친구 만나는데 옷까지 빌려간다고?"
"뭐 그럼 안 되냐."
"안 된다는게 아니라... 형 원래는 평소대로 입고 다녔잖아. 갑자기 신경 써서 그르치..."
"제대로 입는 날도 있어야지."
지훈은 석민의 옷장을 뒤적이며 이 옷 저 옷 대봤다. 역시 좀 큰가. 석민도 똑같이 느꼈는지.
"형 윗도리만 빌릴 거지? 차라리 찬이 옷 빌리는 건?"
"걔는 아직 오지도 않았잖아..."
"전화해보면 되지! 기다려봐."
석민은 막내동생 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짧게 끊기고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민은 대뜸 지훈이 형이 옷 빌려달라는데 너꺼 빌려줘도 되냐고 물었다.
"큰 형 소개팅나가?!!?!? 당연히 되지!!! 다녀오고 후기 알려달라 그래! 나 바쁘니까 나중에 전화할게!"
하고 전화는 끊어졌다.
지훈은 이마를 짚으며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생각하는 게 똑같다며 궁시렁거렸다. 그냥 적당한 거 집어가려했는데 두 동생 놈들 때문에 괜히 옷이 더 신경쓰였다. 데이트...는 결단코 아니니까 너무 꾸민 티는 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고른 오늘의 룩. 흰 셔츠에 청바지. 지훈 자신이 보기엔 지나가는 사람들처럼 무난하고 깔끔해보여 만족스러워했다.
어차피 동네주민이라 훈의 가게 근처에서 보기로 했는데 괜히 긴장한 탓에 조금 일찍 나와버렸다. 괜히 가게 유리 앞에서 이미 잘 펴져 있는 넥카라를 만지작거리고 괜히 머리도 만졌다.
"지훉아?"
누군가 훈을 불렀다.
"어... 왔냐?"
순을 본 순간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이라 대답이 늦어졌다. 매일 정장 쫙 빼입은 것만 보다가 사복을 보니 인상이 달라보였다. 그러니까 평소의 순영이는 저렇다는 거지? 정장도 좋지만 사복이 약간 더 지훈의 취향이었다. 순영은 늦지 않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가게 앞에 나와있는 지훈을 발견하곤 달려갔다. 어라 평소랑 분위기가 좀 다른 거 같은데 하고 지훈을 불렀다. 지훈이 뒤돌아서자 순영에게만 특수효과가 보였다. 앞치마 맨 지훈도 꽤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사복이 더해서 미칠지경이었다. 특히 저 소매 도대체 뭔데?!
"? 권순영 왜그래?"
"아무것도 아냐 가자!"
안 그래도 작고 뽀얀 애가 저렇게 입으니까 귀여움이 더 돋보이는 것이었다. 본인이 예쁘고 귀여운 거 알겠지...? 그치 모를리가 없지.(모름) 일부러 저렇게 입은거겠지.(빌린거임) 옆에서 속으로 주접 오만자가 나오는 동안 그저 밥이 빨리 먹고 싶은 지훈이었다.
그 날따라 순은 뚝딱거렸다. 살짝 튀어나온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질 뻔 하고 물을 따라주다가 쏟았다. 지금은
"ㅋㅋ 야 권순영 입가에 묻었어"
칠칠맞게 묻히고 먹고있었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낼 것처럼 보였던 첫인상은 어디가고 하나하나 챙겨줘야하는 어린이가 앉아있는건지. 의외라고 생각하다 이게 본 모습이겠거니 하고 정정했다. 난 오히려 이 쪽이 더 좋을지도? 햄스터 같기도 하잖아.
"아 그 미안 못 볼꼴 보였네."
"미안할 일은 아니잖아."
"그냥 좀 너무 덤벙거린 거 같아서."
"ㅋㅋ왜 난 인간미 있어보여서 귀엽고 좋은데."
지훈 의도치않게 훅 들어갔다. 순영 목까지 빨개졌으나 티 안 나게 조용히 마저 식사를 이어갔다. 와중에 볼록 튀어나온 순영의 볼을 본 지훈은 정말 햄스터 같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요정님이 나한테 귀엽다고 했다...'
카페에 가서도 한 가지 생각만 하는 순이었다. 칠칠맞은 모습을 보여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호감으로 보였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미팅, 소개팅을 나갔을 때도 이렇게 긴장된 적이 없었는데 진정으로 호감 있는 상대랑 있으니 달달 떨렸다. 아니 이제 안 떤다 케이크 한 입 먹고 맛있다며 눈이 커진 지훈을 보고 모든 긴장이 풀려버렸다. 순영은 그런 지훈을 보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 너무 먹기만 했나."
케이크를 오물오물 먹던 지훈이 말했다.
"응? 아니야 맛있으면 됐지."
"그래도 모처럼 데이ㅌ..."
지훈은 입을 합하고 막았다. 미쳤어 미쳤어 데이트라니 그냥 약속이잖아!
귀까지 빨개진 지훈을 본 순영은 그저 웃었다.
데이트라는 단어도 부끄러운건가? 귀여워.
"그... 전부터 궁금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거야?"
지훈은 빠르게 말을 돌렸다.
"설계라고 해야하나. 도면 같은 거 그리고 있어."
"오 뭐야 의외네."
"그래?"
"너는 성격상 사무실보단 바깥이 어울려서."
"출장도 자주 다녀"
일부러 말 돌리는 거라는 걸 바로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넘어가주는 순영이었다. 서로의 직업도 알았겠다. 마인드맵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지훈아 꽃은 언제부터 하기 시작한거야?"
단순히 호기심이었다. 순영은 정말로 지훈과 꽃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도 꽃과 함께 있으면 빛나는 사람이 지훈이라 단언했다.
"음 따지자면 유치원 때부터인가?"
"그렇게 어릴 때부터?"
"엄마가 꽃을 하셨거든 덕분에 나도 꽃이랑 같이 자랐어."
그런데 나도 처음부터 좋아하던 건 아니야. 알잖아? 어린애들 사이에서 남자애가 꽃 가지고 놀면 어떤 시선인지. 그래서 엄마가 꽃집하는 것도 최대한 숨겼고 나도 밖에서는 꽃을 멀리했어. 엄마 일을 도울 정도로 좋아하는데 말이야.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야 당당해지기 시작한거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지훈의 목소리와 표정이 밝고 즐거워 보였다. 이렇게 자기 얘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어떻게 참았나 싶었다. 동시에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지훈이 멋있게 느껴졌다. 예쁘고 귀여운 외모에 생긴 호감이 사랑으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그 일에 열정을 가지고 진심으로 임하는 지훈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데이트는 둘 다 새로운 감정을 접하며 마무리되었다. 야근과 출장이 잦은 탓에 주말 약속도 잘 못 잡게 되어 톡과 전화만 주고받았다. 톡만 하다가 별안간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순영의 주장에 못 이겨 전화통화가 하루 일과의 일부가 되었다.
"오냐."
"찌후나아아아"
"목소리는 쌩쌩한데."
"아니야 나 너무 힘들어. 흑흑"
"그래 고생 많았어. 빨리 씻고 자."
"나 안보고싶어?"
"어차피 곧 끝난다며."
받아치기도 어렵네. 얘 성격이 워낙 치대는거라서. 훈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순 회사가 맡은 중요한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 되었다. 당장 지훈에게 전화해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었으나 퇴근하고 서프라이즈로 찾아가고싶어 꾹 참았다.
"대리님 오랜만에 표정이 좋으시네요."
후배 민규가 커피를 건내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김사원 고생 많았어요 오늘이면 다 끝이네요."
"에이 제가 뭐 한게 있나요 대리님이 팀장이셔서 대부분 다 하셨으면서."
"다같이 고생한거죠."
"아 오늘 퇴근하고 회식이라는데 가실거죠?"
"아... 몸이 안 좋아서 일찍 들어가려했는데. 제가 과장님께 따로 말씀드릴게요."
몸? 당연히 멀쩡하다. 그저 지훈이를 보러 달려가고 싶을 뿐이다. 가서 저녁 같이 먹자고 할까 지훈이 디저트 잘 먹던데 사갈까. 회식을 재끼고 지훈과의 시간을 보내려 머리를 굴리는 순이었다.
『지훈아 케이크 좋아해?』
생뚱맞은 질문에 지훈은 또 무슨 속셈이래. 하고 생각하고 답장했다.
「있으면 먹지.」
『저번에 보니까 잘먹길래ㅎㅎ 알겠어~』
뭐야 설마 약속 잡으려는건가? 이번엔 자기가 알아볼건가보네.
"ㅋ 귀엽네"
어 방금 내가 뭐라했...? 미쳤나봐!
폰을 떨어뜨릴뻔 했다.
슬슬 마감할 시간이 되어 매장정리를 시작했다. 그 놈을 얼마나 오래봤다고 어차피 오늘도 못 올텐데 온다는 말도 없었고 하고 생각했다. 화분정리 할 때 즈음에 항상 시끄럽게 등장했는데 그러질 않으니 좀 허전하네. 잠시 후 매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순간 기대 찬 눈으로 돌아봤다.
"형!"
"아 뭐야 너였냐?"
동생 석민이었다
"너무 실망하네 섭섭하게... 누구 기다렸어?"
"기다리긴 무슨 어쩐일이야?"
"아 그게 꽃다발이 필요해서."
"전화하면 되지... 어떤건데?"
순영은 정각이 되자마자 회식 못 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리 찾아둔 카페에서 케이크를 사 갈 계획이었다. 시간이 조금 빠듯해서 서둘러야 했지만 서프라이즈 계획은 완벽했다.
"감사합니다~"
카페 마감 직전에 가까스로 도착해 무사히 케이크를 구매했다. 이제 마감을 시작할 훈의 꽃집으로 가면 되었다. 혹여나 이미 퇴근했을까봐 가슴졸이며 걸음 속도를 높였다. 마음 같아선 뛰고싶었지만 케이크가 망가질라 뛰지도 못했다. 놓칠 뻔한 지하철을 타고 무사히 역까지 도착해 잽싸게 꽃집으로 향했다. 지훈의 작은 정원이 보이고 밖으로 나오는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지훈ㅇ...."
순영은 지훈을 부르려다 멈칫했다. 지훈 뒤에 웬 훤칠한 남자가 뒷 따라 나오고 있었다. 지훈은 남자와 꽤 친한건지 키득거렸다. 순영은 남자를 자세히 보고 싶어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꽃다발을 나한테?"
"아 한 번만 받아주라~"
꽃다발? 지훈한테 선물한건가? 순영은 이 맥락에 꽂혀서 후의 대화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 권순영?"
"아..."
저 사람이 형의 애인?!?? 하고 석민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애인이 있는 줄 몰랐네 미안... 이건 너 주려고 사온 거니까 먹어"
지훈의 손에 케이크만 쥐어 주곤 도망쳐버렸다.
어? 어??? 방금 뭐라고?????
지훈과 석민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벙쪄있었다.
"형! 쫓아가봐야하는거 아냐? 완전 오해하고 있잖아."
"오해는 무슨 친군데..."
"뭐? 남자친구 아니었어?"
"아 그니까 데이트가 아니라..."
잠깐만 애인? 쟤 설마 나랑 얘를 사귀는 걸로 본거야? 도대체 왜?
"저 사람 딱 봐도 형 좋아하잖아!"
"어?"
"어? 같은 소리하네 여태 몰랐어? 대놓고 티나던데."
훈은 머리를 도로록 굴리며 여지껏 봐왔던 순영을 떠올렸다. 그럼 그게 다 호감의 표시였다고?
"형 안 쫓아가? 해명해야지"
"...자기 혼자 오해 한건데 쫓아가기까지 해야해?"
"전화라도 해봐 형의 사랑스러운 둘째 동생이라고 얘기는 해야할 거아냐."
"아니 미운 동생이야 오늘은 애초에 너만 안 왔어도."
와 형 나 진짜 삐진다? 하는 석민을 뒤로하고 지훈은 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전화하는 건 처음인가 첫 전화가 이런거라니.
연결음이 길게 들리다가 끊겼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받지 않았다. 아니 통화하면 끊으라해도 안 끊던 놈이 안받아? 어린 애도 아니고 왜 저래.
지훈은 살짝 동요하며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순영아 왜 전화 안받아」
「네가 오해하는거 같은데 만나서 얘기 좀 해」
좀처럼 1이 없어지지 않았다. 항상 칼답하던 녀석인데... 보면 답장하겠지.
"피곤하니까 너 일단 가라."
"뭐? 저녁 사주는거 아니였어?"
"다음에 사줄게 꽃다발은 최대한 비슷하게 잘해줄테니까."
동생을 보내고 폰을 의식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답장은 커녕 1이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아 왜 그랬지."
순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주저앉았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창피했다. 남자친구가 아닐 수도 있는 건데. 왜 그렇게 얘기하고 도망쳐버린걸까.
"그렇지만 둘이 너무 친해보였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권순영 너 이렇게 감정적인 애였어? 이제 지훈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래. 지훈에게 전화왔을 때도 변명할 겨를이 없어 받지 못했다. 아 지훈이에게 처음 온 전화였는데 이불 킥을 이럴 때 하는건가.
「네가 오해하는거 같은데 만나서 얘기 좀 해」
알아 지훈아 창피해서 너한테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어. 순영은 알림창에 뜬 메시지를 보고 차마 읽지는 못하고 머리만 쥐어뜯었다. 무슨 전형적인 드라마같은 클리셰가 나한테 벌어지는거지. 진짜 남자친구면 어떡하지? 아냐 지훈이가 오해라고 하잖아. 친해보이던데 그냥 친구인가? 친구 사이에 꽃다발도 주나 설마 썸은 아니겠지...?
"지훈이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서 무서워..."
이씨 지훈이한테 더 들이댈 거 그랬나. 티 안내겠다고 살짝살짝 했는데.(아님 티 왕창 났음)
"샤워나 하자."
너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 일단 씻고 내일 아침에 답장하자.
"아직도 안 읽었다고?"
지훈은 채팅창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오해를 얼마나 하고 있는 건데. 환장하겠다.
"내가 바보같이 친구라고 생각해서는..."
밤새 순영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순영은 항상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해왔다. 그걸 단순 우정으로 치부해버린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판단했다.
"이걸 어떻게 풀어준담."
우선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생각을 해보자. 오해를 풀면서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내일은 답장이 오겠지.
아침이 되자마자 폰부터 확인했다. 역시나 안 읽씹 상태다. 지훈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밤에도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고 톡도 계속 보냈다.
「권순영 왜 연락 안 받아?」
「내가 다 설명할게. 전화 좀 받아줘」
어제 그 어이없는 오해로 설마 나한테 정이 떨어진 건 아니겠지? 아니면 진짜 애인이 있는 줄 아는 건가? 설마 선 긋고 있는 거냐고. 마감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연락 하나 없자 별의별 생각이 들기 시작한 지훈이었다.
“내가 찾아가는 수밖에 없나...”
오해는 걔가 먼저 멋대로 했는데 왜 내가? 라고 생각하기엔 나는 순영이를...
좋아한다.
이 말로 정리가 됐다 순영이 연락을 피하면 지훈이 들이박으러 가는 수밖에 없다. 누가 자신과 동생을 애인사이로 오해하나 싶었지만 그 바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그리고 사람을 그렇게 꼬셔놓고 그런 오해를 하면서 잠수타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래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고백으로 혼내줄까.
어떻게 답장할지 고민하다가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다. 사실 그냥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고 보내도 된다. 그렇지만 창피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훈의 대답이 무서웠다. 아무사이 아니라는 대답은 어디까지나 순이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게 아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면서도 지훈이 너무 보고 싶었다. 꽃을 사랑하는 요정같은 지훈을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어차피 집 가는 길이니까 슬쩍 보고만 가야겠다’
그리고 밤에 답장하자.
훈은 매장을 보면서 틈틈이 꽃다발을 만들었다. 동생이 부탁한 다발 먼저 만들고 고백용(...) 다발을 만들 생각이었다. 훈의 실력이라면 꽃다발 정도야 10분정도면 만들지만 이상하게도 손님이 많았다. 잡고있으면 손님이 오는게 반복돼서 저녁시간이 돼서야 완성할 수 있었다. 수국이 메인인 살랑살랑하고 하늘하늘한 오늘의 비장의 무기였다.
다발이 완성이 됐으니 이제 어떻게 순영을 잡느냐가 관건이었다. 역 근처에서 잠복하고 있다 급습하는건 공개고백이나 다름없어서 꺼려졌다. 확실한 건 가게 앞으로 지나갈거고 가게 근처는 저녁 쯤되면 한적해진다는 것이다. 문 닫은 척 가게에서 밖을 보다가 순이 지나가면 들이닥치는게 그나마 무난하다고 생각되어 가게에서 잠복하기로 했다.
순영이 지나갈 때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사실 지훈은 순영이 자신의 가게를 피해서 갈까봐 걱정을 했으나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순은 가게 앞에서 나타났다.
짤랑짤랑
가게 문에 달린 방울이 흥겹게 울렸고 순영보다 작은 체구가 순영을 들이닥쳤다
"잡았다 권순영..."
"ㅇ..어어 지훈아..?"
"너 내가 딱 한 번만 말할테니까 똑바로 알아들어"
지훈은 심호흡하고 뒤에 숨겨놨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보였다. 순영은 꽃다발을 보고 또 전에 일이 생각나 심기가 불편해졌지만 지훈이 잘 들으라니까 티 내지 않고 지훈만을 바라봤다.
"...나는 꽃은 기쁨과 슬픔을 전달해주는 아름다운 매개체라고 생각해."
꽃을 통해 기쁨과 행복을 나누고 슬픔을 공유하니까.
플로리스트는 그래서 꽃에 진심을 담아서 해야한다고 생각하거든.
훈은 꽃다발을 순에게 건내며 말했다.
"이게 내 진심이야 좋아해 권순영."
*수국 꽃말: 진심
순영은 지훈의 고백에 어버버하다가 뒤늦게 긴장이 풀렸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눈만 빼꼼 훈을 쳐다봤다. 그러곤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하아 지훉아........... 그럼 전에 그..."
"아 걔 내 동생이라고 그래서 받을거야 말거야."
부끄러운지 훈은 틱틱거리며 말했고 순영은 낼름 지훈의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당연히 받아야지 지훈아."
우리 지훈이 언제 이런 걸 준비한거야? 혼자만 멋지게 고백하고.
"그럼 너도 하든가."
지훈은 귀까지 새빨개져서 말끝을 흐렸다.
우리 지훈이가 기회를 주면 또 해야지.
"네가 꽃 하는 게 좋아 꽃을 만질 때 유독 행복해보여서..."
말끝을 흐리던 숝영은 작게 숨을 고르고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난 그런 네가 좋아졌어 지훈아"
"나랑 연애해볼래?"
The end
외전(1)
해가 지고 있는 저녁 시간 둘은 손을 마주 잡으며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사귀게 된 날부터 퇴근 후 동네 한 바퀴 도는 것이 그들의 하루일과가 되었다. 순영의 회사 이야기를 하거나 지훈의 꽃집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걷기도 했다. 매일 보는 동네 풍경이 둘이 함께 걸으면서 보면 이상하게도 더 예쁘게 보이기도 했다. 텅 빈 동네 놀이터에 있는 그네를 타며 지고있는 노을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들의 일상은 평범하면서도 특별하게 흘러갔다. 평소와 별반 다를게 없었던 어느 날은 순영이 대뜸 지훈에게 질문을 했다.
"지훈아 혹시 다른 사람한테도 꽃다발 주면서 고백해 본 적 있어?“
"어... 처음이었을 걸."
얘는 지금 몇 달 전 얘기를 갑자기 왜 꺼내는거람. 지훈은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순영은 대답을 듣자마자 얼굴빛이 환해졌다.
"내가 처음이야? 다행이다 사실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로맨틱하게 고백했나 하고 조금 질투났거든.“
지훈이 연애 경험이 아예 없을 리는 없고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인지라 전 연애도 꽃으로 로맨틱하게 했을까 하고 궁금하면서도 질투가 나던 순영이었다. 다행히도 지훈은 순영의 우려와 다르게 전 연애에는 꽃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애초에 연애를 한 지 오래됐기도 했고 그닥 좋은 연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 애인이라 칭하기도 싫었고 꽃 한 송이 아니 이파리 하나 주기도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지훈은 생각하기도 싫은지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고 말했다.
”행운인줄 알아 나한테 꽃 받는거 쉽지 않다?“
”응 나 복받은거 맞지?“
”복... 까지인가?“
”당연하지 그 날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데.“
나 아직도 기억한다? 꽃에 진심을 담아ㅅ...
"야야야야야 시끄러워!"
지훈은 새빨개져서 와악하고 소리질렀다. 흑역사를 좋다고 상기시키는 저 웬수... 아 아니 흑역사까지는 아니지만 지훈에게는 조금 많이 부끄러운 과거였다. 물론 그 덕분에 순영과 사귀게 된거지만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부끄러웠던 건 사실이었다. 그 때를 생각하니 지훈은 귀까지 빨개졌다. 순영은 그런 지훈이 귀여워서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지훈은 갑작스러운 뽀뽀에 놀라 순영을 쳐다봤다. 잔뜩 붉어진 얼굴에 동그래진 눈이 순영이 보기에 너무 사랑스러웠다.
”야 누가 보면 어쩌려...“
쪽
순영은 지훈이 뭐라 말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지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지훈은 순식간에 말문이 막혀버려 무어라 말하지도 못하고 뻐끔거리기만 했다. 사귄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이런 스킨십에 부끄러워하는 지훈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지훈아 더 해도 돼?“
”.........“
”응? 지훈아.“
”......언제부터 물어봤다고...“
순영은 지훈을 꼬옥 껴안으며 입을 맞췄다.
외전(2)
"안녕 처남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처남이라는거야 도대체.“
지훈은 누구보다 빠르게 순영을 마중나가며 말했다. 자기 동생들을 보고 뻔뻔하게 처남이라고 칭하는 녀석이 내 애인이라니.
"오 매형 오셨어요?“
”큰 형 바로 뛰쳐나가는거 봤어요?“
"이석민 이찬 너네 조용히 안하냐“
오늘 순영이 저녁을 대접한다고 해서 이가네 형제들까지 지훈의 집으로 모인 것이었다. 순영이 등장하자마자 둘째, 셋째가 더 신나서 친한 척 하는 것이다. 아주 놀고들 앉아있네.
”누가 매형이라는 거야“
"자기야 우리 날짜도 잡혔잖아"
"...아"
맞다 우리 결혼하지. 부케 만들 생각에 머리 싸매고 있었더니 자각을 못했네. 내 부케인데. 그렇다. 얼마 전 상견례를 끝내고 결혼 날짜가 잡혔다. 결혼 준비하랴 일하랴 바쁜 일상을 보내다보니 결혼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선 식장 디자인은 결혼 업체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다. 사실 지훈이 혼자 다 해볼까 했다.
”지훈아 우리 결혼식인데 너가 너무 고생하잖아.“
라며 만류하는 순영이의 말에 지훈은 수긍했다. 아 권순영이 프리지아와 수국을 꼭 많이 넣어 달라 해서 아마 향기로운 수국밭이 될 예정이다. 다행히 식이 열리는 계절도 딱 맞아서 두 꽃 다 확보가 수월할 예정이었다. 부케도 수국으로 하자는 거 간신히 뜯어말렸다 ...아예 안 넣을 것도 아니긴 하지만.
"자기야 설마 까먹은건 아니지?"
지훈은 순간 움찔했지만 완전히 까먹은 건 아니었기에 바로 반박했다.
"내가 지금 누구 부케 만드려고 몇날 며칠 고민하고 있는데.“
그래도 부케 정도는 본인이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동의를 얻어 지훈이 직접 부케를 만들게 되었다. 부케 하나 만드는 것도 신경쓸 게 많은데 공간 장식까지 맡았으면 머리가 터졌을지도 모른다. 순영의 말을 듣길 잘한 지훈이었다.
"그치~ 그냥 어색한거지?"
"솔직히 실감이 안 나"
일상이 바빠서 실감이 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떻게 얘가 내 남편? 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첫인상은 훤칠하고 잘생긴 인기남이었는데 지금은 철부지 어린애 같은 애인이다. 그리고 그 애인이 곧 남편이 된댄다. 이게 맞는건가... 물론 맞긴하다. 아니 그래도 뭔가 어색하다. 훤칠하고 귀여운 애가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것도 신기했는데 애인이 되고 이젠 곧 남편이랜다. 사실 순영이 지훈에게 너무 과분한 존재로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순영은 지훈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었다. 이런 연애는 처음이기도 했고 지훈 인생에 순영 같은 사람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연애 자체도 새롭고 낯서는 마당에 결혼까지 결정됐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만 이런가보다. 쟤네들은 벌써 처남, 매형 이러고 있으니. 내 예비신랑 참 이럴 때는 철부지 어린애 같다니까. 어찌됐든 이렇게 된 김에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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