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ainy day
[민원] 소나기 뒤에 무지개가 뜨겠지
소나기 뒤에 따라올 무지개를 찾아서.
a rainy day
여름방학을 약 일주일쯤 앞둔 평범한 하루였다.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를 맞이하며 원우는 눈을 비비고 식탁에 앉았다. 흐트러진 교복을 보며 쯧, 하고 혀를 찬 엄마가 내어준 식빵 한 쪽, 우유, 과일 몇 개를 집어먹는다. 볼에 바나나를 밀어 넣고 으적으적 씹고 있는데 엄마가 틀어놓은 뉴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나왔다. 여름 날씨 뭐 다 똑같이 덥겠지. 틀어진 텔레비전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엄마를 신경도 쓰지 않고 손에 든 핸드폰만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 일기예보보다 저를 데리러 올 민규가 더 중요했다. 지금쯤 문자가 올 때가 됐… 어, 민규다.
<[형! 나 지금 출발]
<[배고프다ㅠㅠ]
[ㅠㅠ]>
[이따보자]>
원우가 손도 안 댄 바나나 한 개를 집어 들고 교복 단추를 잠갔다. 손안에 바나나를 내려놓고 단추를 잠가도 바나나는 사라지지 않을 텐데 그럴 순 없었다. 민규 줘야지. 배고프다고 하니까. 까먹으면 안 돼. 둔한 손길로 교복 셔츠의 단추를 다 잠근 원우가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챙겨 어깨에 맨 뒤 거울 앞에 선다. 별 다를 바 없는 머리를 슥슥 손으로 만진 뒤 이리저리 얼굴을 확인한다. 좋았어. 책상에 놓인 에어팟을 잡아채서 방 밖으로 나선다. 내려가야지.
“아들! 오늘 오후에 비 오는데? 민규랑 버스 타고 가지?”
“비와?”
“하교하는 시간쯤 비 온다는데?”
“몰라! 기상청 안 믿어!”
“으유. 민규한테 말 해보고. 다녀와!”
“엉! 엄마 나간다!”
“조심히 다니고!”
“웅!”
잊지 않고 챙긴 바나나를 꼭 쥔 채 원우가 집 밖을 나섰다.
민규는 원우의 한 학년 후배다. 중학교를 같이 다니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로 진학한 친구. 아, 동생이지. 그래도 민규가 하는 걸 보면 꽤 의젓하게 굴어서 동생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연상 연하라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원우는 한 두살 차이는 그냥 다 친구 하는 거지 하고 생각하긴 한다. 민규는 원우를 제 동생 같다고 가끔 생각하고, 원우도 민규를 제 동생 같다고 가끔 생각하니까 서로 비슷한 정신연령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 친구인 거지. 서로의 귀여운 선배님이자 후배님인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재작년 말, 그 민규가 원우의 집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김민규를 보고 원우가 어? 민규? 하고 소리 내 뱉었는데 그 흘러가는 말소리를 캐치한 민규가 자전거를 그대로 멈춘대서 둘의 사이는 예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날은 그냥 ‘형, 여기 살아요?’하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묻는 민규에게 ‘응.’하고 대답해준 뒤 둘은 헤어졌지만.
그냥 아는 동생이 집 근처로 이사 왔다는 것으로 끝났던 일은 개학하고 달라졌다. 평범한 등굣길.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간 원우는 같은 교복을 입고 조르륵 서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민규를 발견했다. 웬만한 애들보다 한 뼘은 더 큰 민규를 몰라보는 게 더 이상하긴 하겠지만. 반가운 마음에 ‘어?’하고 소리를 낸 원우가 민규의 뒤로 가 등을 톡톡 두드렸다. 귀에 매달린 줄 이어폰을 툭 뺀 민규가 뒤를 돌아본다. 말간 얼굴의 원우와 눈이 마주쳤다. ‘형도 세봉고 다녀요?’하고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은 번호를 주고받았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등굣길과 하굣길에서 뻔질나게 얼굴을 마주했다. 바로 옆 아파트다 보니까 등교를 같이하는 건 그럴 수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학원도 집 근처에서 다녀서 하교 시간이 비슷한 건 우연이었다. 우연을 잡아 두 사람은 등하교를 같이하게 되고,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기왕 이렇게 같이 다닐 거 학원도 그냥 같이 다니자. 하며 학원을 옮기는 일도 스스럼없이 했고 시험 기간엔 같이 스카를 끊어 다니기도 했다. 학년만 다를 뿐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절친이 되어있었다.
“형! 가자”
“엉”
원우가 능숙하게 민규의 가방을 받아서 들고 자전거 뒷자리로 올라탔다. 살집이 워낙 없는 원우를 위해 민규가 엉성하게 깔아놓은 방석 위로 자리를 잡는다. 오늘은 옆으로 앉은 원우가 민규의 허리에 한 팔을 감는다. 자전거가 비틀거리며 출발하고 안정적으로 주행하기 시작하자 민규의 허리에 감겼던 원우의 손이 떨어져 나왔다.
“다친다. 형”
“괜찮아. 이거만 까고.”
손에 꼭 쥐고 있던 바나나를 까면서 민규에게 대꾸했다. 이 앞 횡단보도에서 멈출 때 먹여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바나나의 꼭지를 꺾고 죽 밑으로 끌어내린다. 노란 껍질을 죽죽 찢듯이 까 내리니 딱 횡단보도 앞이다. 원우가 안장에서 내려 민규의 입에 잘 까진 바나나를 물렸다. 제 입 앞으로 쑥 들어온 바나나를 의심 하나 없이 받아 문 민규가 웃었다.
“형밖에 없다.”
민규가 빠르게 바나나를 입 안에 집어넣고 웃자 원우가 끄덕인다. 민규가 알맹이를 쏙 빼먹고 남은 바나나 껍질을 받아든 원우가 다시 뒷 안장에 앉았다. 이 횡단보도를 지나면 내릴 일이 없다. 학교까지는 십 분여. 원우가 민규의 허리에 제 팔을 감아 끌어안으며 민규의 등에 얼굴을 기대본다.
원우는 올해부터 민규의 자전거에 얹혀 등교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작년 가을, 갑자기 자전거에 꽂힌 민규가 아빠를 졸라 얻어낸 자전거 때문이었다. 민규가 자전거를 샀다고 했을 때 원우는 퍽 서운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제 마음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꾸욱 눌러 참고 있다가 제 자전거를 자랑하겠답시고 집 앞으로 놀러 온 민규를 보고 원우는 땅 밑으로 푸욱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험성적을 걸고 힘들게 받아냈던 자전거임을 알아서 차마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입술만 댓 발 내밀고 있었다. 앞으로 등하교도 자전거로 해야지! 하고 떠드는 민규를 보고 결국 원우는 속 좁게 픽 돌아서 집으로 가버렸었다.
형 바빠? 조심히 가! 하고 저를 보내줬던 민규를 생각하니 원우는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너랑 같이 다녔던 등하굣길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서운한데 쟤는 좋아한다. 나랑 다니는 게 별로였나? 원우가 입술을 댓 발 내밀고 괜스레 베개를 툭 쳤다. 나쁜 놈. 서운한 마음에 민규가 집 앞 뽑기에서 뽑아 선물로 준 인형을 잔뜩 괴롭히고 있으니 민규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생긴김민규’ 민규가 저장해 놨던 이름을 가만히 보다가 인형을 손에 꼭 쥔 채로 전화를 받았다.
[형! 오늘 왜 먼저 갔는데!]
“몰라.”
눈치 없이 밝은 목소리. 민규의 것이다. 원우가 또 입술을 내밀고 손에 든 인형을 꽈악 쥐었다. 나쁜 김민규. 무심한 톤으로 대꾸하니 작게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우씨 왜 웃어? 원우가 입을 꾹 다물었다.
[형. 내일 뭐 해?]
“왜”
[형 삐졌구나?]
“아니거든?”
[형 내일 나랑 놀러 가자. 자전거 타러 가자]
“나 자전거 없는데 어떻게 자전거를 타러 가.”
결국 툭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제 감출 마음도 없었다. 민규에게 서운한 마음만 남았다. 나도 자전거 사라는 거야 뭐야. 나 자전거 잘 못 타는데. 누가 봐도 엉성하게 자전거를 타는 제 모습을 생각하며 원우는 울상을 지었다. 짜증 나. 김민규. 누가 들어도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은 민규는 그냥 웃기만 했다. 아무런 대꾸 없이 조용한 원우를 달래듯 민규가 말을 건넨다.
[형이랑 같이 학교 다녀야 하는데 내가 형 태워봐야지]
“…….”
[그러니까 나랑 내일 공원 가자.]
“…….”
[내일 집 앞으로 갈게.]
“…응”
민규의 자전거는 원우와 시작해서 지금까지 쭈욱 원우와 함께하고 있었다.
“민규야 오늘 오후에 비 온 데”
“헉? 비?”
“응. 엄마가 그러던데?”
자전거를 세우고 잠그는 민규의 등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민규가 일어나니 원우가 가방을 건네준다. 그리고는 오늘 아침 엄마에게 들은 말을 꺼냈다. 비가 오면 어떡해? 민규가 잠깐 놀란 표정을 하더니 금세 태평하게 바뀐다.
“비 오면 자전거 두고 가야겠다.”
“우산은 있어?”
“몰라”
민규가 씩 웃는다. 대책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구는 게 웃긴다. 누구보다 철두철미해서 사물함에 꼭 우산 하나를 넣어두고 다니는 주제에. 원우가 민규를 슥 흘겨보고 픽 웃었다.
“…늫. 이따 연락해 그럼.”
“알겠오! 올라가”
“엉”
2학년과 3학년이 갈라지는 계단. 원우와 민규가 손을 흔들며 각자의 반으로 향했다.
엄마가 비가 온다고 했지만 설마 했었다. 민규와 자전거를 타고 다닌 뒤로는 비가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더 그랬다. 하지만 그런 원우의 마음을 모르는 하늘은 어둑어둑하다. 소나기라도 쏟아질 모양이었다. 소나기만 내렸으면 좋겠는데. 여름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앞에서 지루한 수학 공식을 쏟아내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원우가 창밖을 내다본다. 시끄러운 목소리가 운동장에서 올라오는 걸 보니 체육 시간 인가보네. 부럽다. 집어넣으라는 수학 공식은 밀어내고 헛생각을 채워 넣는다.
“원우야 가자.”
지루한 수업들이 끝나고 잠시 책상에 머리를 쿡 박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원우가 얼굴을 들고 안경을 집어 드니 지훈과 순영, 준휘가 원우의 반 앞문에서 손을 흔들며 원우를 부르고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원우가 느적느적 급식실로 향했다.
급식을 대충 먹은 뒤 축구를 하겠다고 하는 지훈을 따라 원우는 운동장으로 향했다. 순영과 준휘는 공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원우도 마찬가지. 원우는 육상은 곧잘 하면서도 구기종목에는 약했다. 운동하는 지훈을 보다가 안으로 들어가야지. 교실에만 있는 건 또 싫어하는 변덕스러운 마음이 원우를 운동장으로 이끌었다.
차양막이 쳐진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원우는 눈을 껌벅였다. 공 하나에 사람이 우르르 쫓아다닌다. 날도 흐리고 습한 냄새가 나는 게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도 잘들 논다. 민규도 공놀이를 좋아해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비가 오는데 왜 그걸 다 맞으면서 축구를 하는 거야?’ 비를 싫어하는 원우로써는 이해가 가지 않는 감정이니까. 나름 진지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민규는 아주 해맑게 웃으면서 ‘형, 그게 재밌는 거야!’ 하고 대꾸했다. 쟤네도 다 같은 마음이겠지. 원우가 핸드폰을 툭툭 두드리다가 내려놓고 운동장을 둘러봤다. 어, 저거 민규다. 원우가 벌떡 일어나 민규쪽으로 뛰었다. 수돗가로 향하는 민규에게 장난을 쳐볼까 싶어 속도를 높였다.
“김민, 규…?”
수돗가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간다. 찰박거리는 슬리퍼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민규가 퍽 가까워졌을 때 손을 들고 민규를 부르려다 민규의 옆으로 들어오는 한 여학생을 보고 손을 내렸다. 길쭉하게 뻗쳤던 손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툭 하고 떨어진다. 민규를 부르던 목소리도 쑥 들어가서 몸 안에 갇힌다. 쟨, 뭐야? 원우가 급하게 제동을 걸고 멈추어 섰다.
민규와 그 여자아이가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민규의 등판이 이리저리 꿀렁거린다. 장난치며 손을 씻는 건지 이리저리 몸이 흔들렸다. 먼저 씻겠다며 여자애가 먼저 민규를 툭. 민규가 아 뭐야~ 하고 찡얼이는 소리를 내며 여자아이를 툭. 어깨가 부딪치고 흔들리며 들리는 웃음소리에 원우의 표정이 금세 울상으로 변했다. 가야지. 못 본 척 해야지. 원우가 뒷걸음질을 쳤다. 한 두 걸음쯤 뒤로 걷고 완전히 몸을 돌리려는데 민규가 웃으며 뒤를 돌았다.
“원우형?”
“…!!!”
갑자기 돌아본 민규가 뱉은 제 이름에 원우가 크게 놀라 몸을 급히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뒷걸음질하다 꼬여버린 다리의 위치, 빠르게 뛰어오느라 슬리퍼 앞코에 이상하게 걸려있던 발이 얽혀 중심을 잃은 원우가 휘청거리더니 쾅 하고 넘어져 버렸다. 까만 아스팔트에 무릎이 까이고 나름 덜 다쳐 보겠다고 바닥을 짚은 손바닥도 까였다. 아야. 일단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은 원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탁탁 털었다. 아, 체육복 왜 입었지? 4교시쯤 반바지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걸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무릎을 쳐다보니 빨간 피가 비치기 시작했다. 으, 아파. 짜증 나.
“형!”
민규가 큰 소리를 내며 뛰어오니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지훈도 민규의 목소리를 듣고 뭐야? 하고 두리번거리다 원우를 발견했다. 쟨 왜 엎어져 있냐? 작게 혼잣말을 한 지훈이 웅크려 앉은 원우를 보고 잠깐만. 하더니 축구 대열에서 빠져 원우에게로 뛰어간다.
으 쪽팔려. 그냥 가만히 있을걸.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나 할걸. 괜히 모양 빠지게 엎어져 버려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일단 원우는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킬 마음도 없었고, 이렇게 마주할 마음은 더 없어서 속이 상했다. 저 여자애랑 붙어있는 걸 보고 무너져 내린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개 쪽팔려. 작게 중얼거린 원우가 무릎을 호 하고 불어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얼른 가야지. 급하게 일어나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가는데 누가 원우의 양 어깨를 잡아채고 돌려세웠다.
“형! 괜찮아?”
민규가 몸을 굽혀 원우의 무릎을 쳐다봤다. 벌겋게 올라오기만 했던 무릎은 그 잠깐 사이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업혀요.”
으. 민규가 인상을 쓰며 앞에 쪼그려 앉아 등판을 보여준다. 에? 당황한 원우가 민규의 등을 보고만 있는 사이에 지훈이 다가와 원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으, 빨리 보건실 가자.”
“어…”
원우가 지훈을 보며 끄덕이자 지훈도 마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쪼그려 앉은 민규를 쳐다봤다. 오바하지 마 김민규. 지훈이 민규를 툭 밀어서 넘어트린다. 민규가 엉?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형 그거 걸을 수 있어요? 하고 물으니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아프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도 아니고, 무엇보다 민규의 등에 업혀 가는 건 조금 부끄러워서. 원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훈의 손을 잡았다. 형. 하고 저를 부르는 민규의 눈빛을 무시하며 지훈과 걸어간다. 타이밍 좋게도 무거운 구름은 한 방울, 두방울 비를 떨어트린다. 무릎이 욱신거리고 손바닥은 따끔거린다. 아니, 무릎보다 마음이 욱신거리는 거 같기도 하고.
원우의 마음은 오래 민규를 향해 있었다. 아마도 민규와 같이 학원을 옮길 때쯤이었나? 아니면 같이 스카를 처음 갔던 날이었나. 아무리 짧게 잡아도 6개월간은 혼자 민규를 향한 마음을 키워가며 전전긍긍 못했다는 소리였다. 누가 금방 좋아지고, 금방 싫증 나는 청소년기에 한 사람만 쳐다보는 건 꽤 큰일이었다. 그것도 제 옆에 딱 붙어있는 사람이라 티를 내지도 못하고 속만 끓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무서웠다. 나름 꼭꼭 감춰 내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놨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려고 했다. 자전거를 샀다고 웃는 네 얼굴을 봤을 때. 내가 보낸 카톡에 돌아올 답장을 하염없이 기다릴 때. 학교에서 예쁘다고 하는 여자아이와 네가 잘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 말고 다른 사람과 웃으며 친하게 지내고 있을 때. 너를 생각하는 그 모든 시간에 마음이 수십번도 더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곤 해서 곤란했다. 이 마음을 너에게 다 들켜 버릴까 봐.
민규는 그저 모든 사람에게 착해서 나에게만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내 거라고 꾹 도장을 찍어버리고 싶었다. 내 거라고 말도 못 하는 주제에 민규는 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민규야.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원우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는 밖을 쳐다보며 손에 쥔 펜을 꾹 쥐었다. 아까 까졌던 손바닥이 시큰했다.
수업이 끝났다. 오늘은 학원도 가지 않는 날이니 느지막이 걸어가야지 싶었다. 민규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가기 싫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민규의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고 느직느직 짐을 쌌다. 나가면서 답장해야지.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속상하다고 티 낼 수 있잖아. 민규는 하나도 잘못한 게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당번을 보내고 마지막까지 문단속한 원우가 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에서 나오니 눈앞에 민규가 서 있었다.
“형. 가자”
오늘도 종일 체육복을 입고 있다가 교복으로 갈아입은 건지 흰 반팔티 위에 교복 셔츠를 걸치기만 한 민규가 떡하니 제 앞을 막아섰다. 손에는 커다란 장우산을 들었다. 저 우산은 어디서 난 건지 물어보기도 전에 손이 잡혔다. 저보다 큰 손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얽혀온다. 도망도 못 가게 단단히 잡혀서는 까진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아니, 이건 아픈 게 아니라 간지러운 건가?
“카톡 왜 답장 안 했어.”
“…못 봤어”
“거짓말.”
원우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민규는 말을 한다.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학교. 원우가 입을 꾹 다무니 두 사람 사이에 걷는 소리만이 난다. 탁, 직-. 탁. 원우가 다리를 살짝 끄는 소리가 거슬렸다. 한참 내려가야 할 계단의 시작. 민규가 원우의 손에 장우산을 들려주고 가방을 앞으로 돌려 맸다. 그리고는 원우의 앞에서 등을 보이고는 엉거주춤하게 섰다.
“업혀.”
“싫어. 나 걸을 수 있어”
“업혀.”
“싫,”
“원우야. 그만하고 업혀. 나 속상하게 하지 말고”
뒤도 안 돌아 보면서 그런 말을 해 왜 너는. 원우가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다시 퐁 꺼내고 민규의 등에 업혔다. 얇디얇은 팔을 민규의 팔에 두르니 민규가 몸에 반동을 줘 원우를 완전히 업었다. 몸을 두어번 들썩거리며 원우를 끌어올리고 옆구리로 튀어나온 허벅지를 양손으로 잡았다. 잘 잡아. 민규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엔 별생각도 없었던 계단이 이렇게 많게 느껴질 줄이야. 머쓱한 마음에 원우가 민규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래 그렇게 잡아.’ 다정하게도 말한 민규가 원우를 치켜올리고 다시 걸어간다. 따뜻한 민규의 몸에 붙어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이렇게 다정해서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잖아. 다 네 탓이야. 민규 네가 너무 다정해서 그래. 목덜미에서 올라오는 체향과 교복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향이 섞여 들어온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뛴다.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와 1층의 복도를 걷는다. 민규가 흘러내린 원우를 한 번 더 치켜올렸다. 조용한 복도에 민규의 발소리만 울린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느껴질까 봐 무섭지만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겠나 싶어 민규의 어깨에 볼을 기댔다. 민규의 가방끈에 볼을 기대려 엉덩이를 쭉 뺐다가 다시금 치켜올리는 민규의 힘에 고개를 바로 한다.
“왜 도망갔어.”
“…응?”
민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 봤구나. 원우가 입술을 꾸욱 물었다. 일자 턱에 힘이 들어간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내가 너를 좋아해서라고 말해야 하나. 아니, 그렇게 생각은 해 줄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차서 머리가 복잡해진다. 아니라고 말해야겠지? 뭐라고 말을 해야 오해를 안 살까 싶어 입만 오물오물하는데 민규의 말이 더 빨랐다.
“나랑 눈 마주치고 도망가려다가 넘어졌잖아.”
“…아니야”
“아니긴 전원우.”
픽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원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으. 마음 같아서는 귀 끝을 손으로 잡아서 끌어 내리고 싶은데 민규를 잡은 손을 놓을 수가 없어서 눈만 데굴 굴렸다.
“내가 걔랑 이야기해서 그래?”
“…아, 아니야!”
원우가 부끄러움에 손을 꼭 쥐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덜컹하고 민규의 몸이 흔들렸다. 민규가 웃는다. 가만히 있어. 나 힘들다. 낮게 말하자 원우가 다시 작게 쪼그라들었다. 부끄러워! 걔랑 이야기해서 그런 거 맞는데, 그렇게 쿡 집어서 말하면 부끄러워.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다 들켜 버리잖아. 원우가 변명을 찾아 말을 고르려는데 이번에도 또 민규의 말이 빨랐다.
“형은 나 두고 지훈이 형이랑 가버렸잖아.”
“어, 어?”
“내가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형은 나 두고 갔잖아.”
“…응”
“나도 엄청 서운했어.”
미안해. 작은 원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민규도 서운했겠다. 저를 쳐다보던 민규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떠올리며 원우는 입술을 꾸욱 말아 물었다. 원우의 사과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건물의 유리문 앞에 멈추어 섰다. 민규의 등에서 내려온 원우가 바깥을 내다보며 동태를 살핀다. 한차례 빗방울을 쏟아낸 하늘이 꽤 잠잠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빗방울이 그친 것은 아니라 원우는 민규가 들려줬던 장우산을 펼쳤다. 이제 걸어갈래. 원우가 민규를 쳐다봤다.
“싫어. 업어줄래.”
“나도 싫은데…”
숨을 고른 민규가 다시금 원우의 앞에서 등을 보인다. 빨리 올라타라는 손짓을 하며 저를 돌아본다. 나 정말 괜찮은데. 발갛게 달아오른 귀를 꾹 잡아 누른다.
“빨리.”
“무겁잖아 나.”
“형이 무거워? 형 까시야.”
“그 정돈 아니거든?”
울컥한 원우가 다시 민규의 등으로 업혔다. 자전거 타고 가자. 거기까지만 내가 업어줄게. 원우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을 건네는 민규의 목소리에 원우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원우의 허벅지를 꽉 잡은 민규가 자전거를 묶어놨던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원우가 번쩍 들고 있는 우산이 머리꼭지 위에서 흔들렸다. 둘인데 하나같다. 그렇지? 민규의 말에 원우가 작게 끄덕였다.
빗물을 밟아 찰박거리는 걸음 소리,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살짝 가빠진 민규의 숨소리, 두근두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다양한 소리가 섞여서 원우의 세계를 두드린다. 작은 파동들이 원우의 세계를 두드려 금을 낸다. 달랑거리는 원우의 얇은 다리가 행복을 보여준다. 이대로도 다 괜찮다는 듯이. 그렇게.
행복한 둘만의 시간은 자전거 주차장에서 끝나나 싶었다. 원우를 내려준 민규가 자전거를 꺼내더니 가방을 뒤진다. 하루종일 입고 있었을 게 분명한 체육복을 꺼내선 원우가 앉을 곳에 묻은 빗물을 닦아냈다. 혹시라도 비가 올까 방석 위에 시트지를 대서 만들어 뒀던 원우만의 좌석이다. 민규가 체육복을 뭉쳐서 원우의 좌석을 꾹꾹 눌러 닦아낸다. 원우 지정석이 물기 하나 없이 보송하다. 좋은 것만 해주고 싶은 민규의 마음이 빛난다. 빗물이 묻어 얼룩덜룩해진 체육복이 민규의 가방 속으로 들어간다. 전원우는 바보다. 아무것도 모른다.
“타. 가자”
“웅”
민규의 가방을 받아든 원우가 뒷좌석에 앉으니 민규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는다. 느릿하게 자전거가 출발한다. 페달을 굴리는 민규의 다리에 맞춰 착실하게 속도가 붙은 자전거는 곧 학교를 빠져나간다. 학교를 빠져나가고 5분쯤 지났을까 검은 먹구름은 어디로 갔는지 반짝이는 햇빛이 나타났다. 비구름은 전부 떠나갔나 봐. 작게 웅얼거린 원우가 민규의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주고 몸을 가까이 붙였다. 세게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갈랐다. 눈을 찌르는 머리칼 때문에 얼굴을 민규의 등에 쿡 하고 가져다 댄다. 민규가 웃고 있는지 몸이 들썩인다.
“원우형. 저거 봐.”
“어디?”
“저기 앞에.”
갑자기 멈춰 선 자전거 때문에 민규의 등에 얼굴도장을 꾹 찍은 원우가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민규가 가리킨 곳엔 커다란 무지개가 떠 있었다. 비가 내려 반짝이는 나뭇잎과 건물 사이에 무지개가 둥그렇게 떠 있다. 우와. 원우가 자전거에서 내려 무지개를 쳐다봤다. 예쁘다. 민규야! 나 무지개 처음 봐! 민규가 원우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리곤 원우의 오른쪽에 서서는…
“형, 원우야”
“응.”
“좋아해.”
원우의 눈이 동그래지고 곧 말랑한 뺨에 따뜻한 입술이 꾹 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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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트친비 납부합니다.
그리고, 펜슬 맛보기 차. 여기에 한번 와 봤습니다.
어떠신가용...? 왜인지 포타에서 더 보실 것 같지만 한번 새로운거 나오면 써보긴 해야죵'ㅅ'
단편이라서 가볍게 테스트겸 펜슬로~ 피드백은 스핀으로 주세요!
이번달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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