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 단편

[진혼_웨이란]早霧 아침 안개

첼로 전공 션웨이X피아노 전공 자오윈란, 퇴고 없음

유호 2차 by 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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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공자의 망상 주의




早霧 아침 안개

션웨이 × 자오윈란



w. 유호

 



  평소였다면 아직 아무도 연습실을 찾지 않았을 이른 아침이었다. 일부러 사람이 없을 시간을 골라 연습실을 찾은 션웨이는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첼로 케이스의 어깨끈을 쥔 션웨이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쇼팽 녹턴 Op. 9, No. 2.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선율이 션웨이에게 얼른 다가오라고 종용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바닥에 붙은 듯했던 발걸음을 옮겨 특이한 녹턴이 흘러나오는 연습실로 향했다.

  선율은 그랜드 피아노 연습실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졌다. 악보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 트릴로 프레이즈를 연결하고, 미래의 마디로부터 시간을 뺏어와 박자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연주. 션웨이는 이 제멋대로 아름다운 연주의 주인을 알고 있다.



‘자오윈란.’



  심장이 묵지근하게 내려앉았다. 션웨이는 여린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녹턴은 말 그대로 야상곡이다. 잔잔한 선율은 엷은 구름이 낀 날의 달빛, 혹은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은 수면을 연상시키곤 한다. 그러나 연습실의 문 너머, 자오윈란이 손끝에서 그려지는 녹턴에서는 아침 안개가 느껴졌다. 션웨이는 이른 아침, 산기슭에 피어오른 안개와 그 사이를 파고드는 햇살의 이미지에 전율했다.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 션웨이가 처음으로 자오윈란을 직접 마주한 순간이었고,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띵―.’



  흐름에 어긋나는 소리가 튀어나오며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벌써 다섯 번째 타건 실수였다. 활을 당기던 션웨이의 팔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뒤로 시선을 던졌다. 자오윈란은 입을 잔뜩 삐죽대면서 검지로 엉뚱한 건반을 내려치고는 째릿, 션웨이를 흘겨 보았다. 션웨이를 향한 명백한 시위였다.



“아란, 집중.”

“싫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대, 션웨이.”



  대번에 돌아오는 볼멘소리에 션웨이는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봄 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기악 학부는 학기말 평가를 위해 연주 실기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첼로를 전공하는 션웨이와 피아노를 전공하는 자오윈란은 첼로 피아노 이중주로 평가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 평가는 바로 내일모레로 다가와 있었다.



“평가 이틀 남았잖아. 연습해야지.”

“그 얘기만 다섯 번째야.”

‘그리고 너는 다섯 번째 일부러 틀린 건반을 누르고 있고.’



  션웨이는 속에서 떠오른 말을 삼켰다. 한 번의 합주 연습이 아쉬운 때인데,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속도 모르고 온종일 데이트를 부르짖으며 심술이나 부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널 설득하는 게 낫겠다. 봐봐, 션웨이.”



  션웨이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래도 두 시간 동안 계속 연습했으니 10분 정도는 쉬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레 자오윈란이 말하는 ‘봐봐.’의 뒤에는 궤변이 따르곤 했지만 잠깐은 들어주겠다는 묵인이었다.



“우리가 데이트하러 가도 괜찮은 이유 첫 번째. 너는 첼로 전공 수석이고, 이미 머리보다도 손끝이 먼저 악보를 기억할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괜찮아. 둘째. 절대로 그럴 일 없겠지만 네가 혹여라도 악보를 기억 못 한다고 해도 나랑 같이 연주하잖아. 내 소리 듣고 기억날 거니까 괜찮아. 그리고 마지막. 나는 룽청대학교에 다시 없을 하늘이 내리고 온 세상이 인정할 천재야! 연습이 필요 없어, 자기야!”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꽤 논리적인 이유를 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궤변으로 빠진다. 션웨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야?”

“아냐, 인정해. 너는 항상 뛰어나지.”

“거 봐! 그러니까…….”

“근데 그래도 안 돼, 아란. 혹시 모르잖아.”



  완강한 션웨이의 반대에 결국 자오윈란이 건반 위로 무너져내렸다. 쾅! 하고 온갖 음이 뭉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션웨이는 미동도 없이 평온한 표정만 얼굴 위로 띄웠다. 그는 입술을 닫은 채 자오윈란이 댄 이유를 곱씹었다.



‘세 번째 이유는 몰라도, 첫 번째 두 번째 이유는 받아들일 수 없어, 자오윈란.’



  션웨이는 굳은살이 잔뜩 배긴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첫째. 나는 필사적으로 연습하고 날 몰아붙여서 겨우 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어. 너와 함께하고 싶어서 내 주제에 맞지도 않게 높은 곳을 노렸고, 겨우 네 곁에 머무를 수 있게 됐지.’

‘둘째. 몸이 기억할 정도로 연습하기는 했어. 하지만 내게 너와 함께 연주한다는 건 근육에 새겨진 동작도 잊게 할 만큼 긴장되고 황홀한 일이야. 너와 함께하기 때문에 나는 더 철저해질 수밖에 없어.’



  활을 쥔 션웨이의 손마디가 하얘졌다. 우는 시늉을 하며 건반 위에 엎어져 있던 자오윈란이 슬쩍 고개를 들고 그 모습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한껏 삐죽대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녹턴 쳐줘도 안 돼?”



  웅얼거리는 윈란의 목소리에 션웨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 같은 션웨이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리자, 자오윈란은 몸을 일으키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내가 좋은 거야, 내가 연주하는 녹턴이 좋은 거야? 그렇게 안 된다, 안 된다, 하기만 하더니 머뭇거리는 것 봐.”



  밉지 않은 비난에 션웨이의 귓바퀴가 벌겋게 물들었다. 저급한 속내라도 들킨 것처럼, 그는 당장이라도 자오윈란의 눈앞에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좋아서 네가 연주하는 녹턴도 좋은 거야.

  한 조각의 진심은 부끄러움이 션웨이를 집어삼킬 때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션웨이는 꾹, 물었던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아란. 이틀 남았잖아. 조금만 참고 평가 끝나면 놀러 가자.”

“칫. 알았어. 근데 있잖아, 샤오웨이.”



  회심의 카드를 꺼내도 반대를 표할 정도로 션웨이가 강경한 태도를 보일 때는 자오윈란도 굳이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는 션웨이를 오래 봐왔고, 결벽에 가까운 완벽주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윈란은 션웨이를 불안하게 하면서까지 어리광부릴 생각은 없었다. 데이트 할 날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녹턴이 좋으면 쳐달라고 하면 돼. 보상 같은 게 아니어도 네가 원하면 난 다 해줄 수 있어.”



  녹턴이 뭐 엄청 어려운 곡도 아니고, 잠깐 치고 놀기 좋은 정도인데.



“나한테 뭐든 요구해도 괜찮은 유일한 사람이 너인데 너는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네. 그러지 마, 션웨이.”



  자오윈란의 까만 눈동자가 션웨이를 꿰뚫을 듯 선연히 바라봤다. 올곧은 시선이 션웨이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차마 뱉어낼 수 없었지만, 션웨이가 제일 처음 떠올린 말은 ‘내가 어떻게 감히.’였다.

  션웨이는 끝내 어떤 대답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자오윈란은 그 침묵에서도 션웨이의 답을 짐작했다. 그러나 구태여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윈란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작은 웃음으로 안타까움을 털어낼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연주해줄까? 아니면 역시 야상곡이니까 연습 끝나고 저녁에?”



  윈란의 짧은 침묵에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션웨이가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깜빡였다. 자오윈란이 6옥타브 B 플랫을 누르며 답을 종용했다.



“……지금이 좋아.”



  속삭이듯 션웨이가 답했다. 그는 언젠가의 연습실에서 자오윈란을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 순간부터 션웨이에게 녹턴은 햇살이 어울리는 곡이 되었고, 햇살이 창가를 타고 넘어와 자오윈란을 비추는 순간에 녹턴이 들려오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션웨이의 대답이 떨어지자, 자오윈란은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가볍게 풀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제멋대로이고, 들을 때마다 달라지지만 매력적인 연주였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자오윈란을 수식하는 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천재, 혹은 악동.

  제멋대로, 악보를, 나아가 작곡가를 무시하는 듯한 주법은 악동의 것이었으나, 날아갈 듯하고 숨을 앗아가며,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은 천재의 것이었다.

  자오윈란의 곁에 머무르며 션웨이는 그 누구보다도 자오윈란과 그가 다루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피부로 느꼈다. 그것은 언제나 션웨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늘을 자극했다. 음표가 하늘로 떠오를 때마다 션웨이는 자오윈란에게 깊은 애정과 짙은 소유욕을 느끼곤 했다.



‘네가 만들어내는 작은 소리조차도 모두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나만 갖고 싶어.’



  션웨이에게 자오윈란은 삶의 빛이었다. 생에 유일한 빛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은 본능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션웨이는 자오윈란이 자기만의 빛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기에 윈란을 독차지하고 싶다고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어느덧 녹턴의 끝에 다다랐다. 자오윈란은 마지막 화음을 아르페지오로 처리하고는 션웨이를 돌아봤다. 잠시 눈을 마주쳐오나 싶더니, 자오윈란은 문득 시원스레 입꼬리를 올려 웃고는 션웨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션웨이는 언제나 자오윈란을 향한 수많은 말을 삼켰다. 그러나 그가 삼킨 감정과 욕망은 그의 눈을 통해 흘러넘치고 뜨겁게 빛나곤 했다. 자오윈란은 저를 향한 열망으로 일렁이는 션웨이의 눈을 기민하게 알아차렸고, 그 기꺼운 애정에 입맞춤으로 답했다.



“우리 이제 연습할까?”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션웨이는 목덜미부터 귀뿌리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오윈란은 그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웃고는 말했다. 션웨이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션웨이가 활 털을 매만지고 연습을 준비하는 사이에 자오윈란도 다시 피아노 앞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합주를 시작하기 전, 가장 고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션웨이가 숨을 들이켰고, 자오윈란의 어깨가 느슨하게 긴장을 풀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시작 신호였고,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두 악기의 선율이 어우러졌다.

  조금의 틀어짐도 없는 연주에 션웨이가 만족스러운 숨을 삼켰다. 그는 다운보우를 길게 당기는 짧은 틈에 곁눈질로 자오윈란을 살폈다.

  즉흥에 가까운 연주를 하는 탓에 자오윈란은 언제나 솔리스트로 가장 주목받는 연주자였지만, 콘체르토나 협주를 할 때도 선호를 받는 연주자였다. 그는 음악가라면 누구나 원할 모든 재능을 가진 것 같았다. 뛰어난 습득 능력. 개성 있고 매력적인 곡 해석 능력. 악기를 제 몸의 일부처럼 다룰 수 있는 실력.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의 연주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귀. 함께하는 모든 연주자에게 맞출 수 있는 능력. 그러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는 재능. 그런데 이런 자오윈란이 션웨이와 함께 연주할 때는 고집을 부려 다른 세션의 연주자가 끼어들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첼로와 피아노의 이중주가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더 다양한 곡을 시도하고 풍부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 다른 현악기와 함께하는 트리오나 콰르텟이 더 선호 받고, 곡 자체도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오윈란은 션웨이와의 협주라면 대체로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만 연주하거나 트리오, 콰르텟을 위한 연주곡을 자기 마음대로 편곡해서 첼로 피아노 이중주곡으로 만들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윈란을 이렇게 독차지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마치 자오윈란이 제게 얽매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더 넓은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자오윈란이 스스로 제 발목에 족쇄를 채워 션웨이의 곁에 머물러주는 것만 같았다. 션웨이는 언제나 그것이 제게 과분한 행복이라고 여겼지만, 동시에 한편으로는 도무지 참아낼 수 없는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오윈란은 누구와 함께하든 완벽한 연주자이지만 나와 함께할 때야 비로소 숨겨두었던 날개를 펼칠 수 있다.’



  땅에 머무르는 자오윈란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의지로 날아오르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언제든 날아오를 수 있는 새였고, 지금은 그저 션웨이의 곁에 머물러 있고자 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독차지할 수 있는 지금을 만끽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션웨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칠게 현을 뜯었다.

  윈란과 합을 맞출 때면 세상의 모든 것이 지워지고, 음악마저 지워져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곳에 자오윈란과 단둘이 남는 것 같았다. 맨몸으로 그가 제 몸의 일부분이 될 때까지 끌어안고, 마침내 하나의 영혼으로 합쳐지는 것 같은 감각. 자오윈란은 나만의 것이고, 그도 나만의 것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도취감. 그것이 션웨이의 온몸에 소름을 피워냈다.

  피날레 프레이즈가 다가올 즈음,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시린 빛과 함께 자오윈란의 눈빛이 맞닿아왔다. 음영이 짙에 드리우는 깊은 눈이 션웨이를 바라보며 가늘게 휘었다.

  굳이 큰 동작으로 신호를 주지 않아도 마지막 음이 맞아들어갔다. 같은 곡을 수십 번도 넘게 맞춰보면서, 션웨이는 이 마지막 순간마다 어쩐지 매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나의 영혼을 너와 둘로 나누어 가진 것 같은 이 순간이 얼마나 벅찬지. 너는 알까?



 

 



“자오윈란 진짜 짜증난다. 넌 되도록 후기 낭만파 이전 시대로 넘어올 생각 하지 말라고 내가 전에 말한 적 없니?”



  하여튼 온갖 장르에서 다 일등 해 먹으려고 하지.

  포니테일로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가 익히긴 한 것인지 의심되는 고기를 잔뜩 넣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말했다. 그는 플롯을 전공하는 주훙으로, 자오윈란의 동기 중에 몇 안 되는 ‘자오윈란과 진짜로 친한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자오윈란과 비교적 오래, 깊게 알아 온 친구들은 그를 일컬어 미친놈이라고 칭하곤 했다.



“지난번에는 교수님들 앞에서 브람스 콰르텟 듀엣으로 연주하겠다고 했다가 된통 깨졌다며.”



  평소에도 제정신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션웨이와 ‘단둘이’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자오윈란은 더 제정신이 아니었던 탓이다.

  자오윈란은 주훙의 비난에 코웃음 치며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음악 한다는 것들이 사랑을 이렇게 몰라서야. 이게 다 내가 우리 자기를 사랑한다는 증거 아니겠냐?”

“넌 걔를 사랑한다면서 너랑 같이 교수님들 앞에서 연주해야 하는 걔 입장은 생각 안 하냐?”

“그래서 곡 바꿨잖아. 브람스 편곡은 그냥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 던져본 무리수였어. 나도 즐겁고 션웨이도 즐거운 걸 하고 싶었다고.”

“걘 고전 주력인데?”

“아, 주훙 선생님. 청력 검사받아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몇 번을 말해야 하나요? 그래서 곡 바꿨다고! 기특하게도 슈베르트 D.821로 바꿨다고!”



  우리 샤오웨이랑 내 주력 시대의 중간! 빛나는 전기 낭만파!

  커다란 구렁이와 커다란 고양잇과 동물이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환상이 주훙과 자오윈란의 뒤로 비치는 것 같았다. 옆에서 두 사람이 간식은 안 먹고 으르렁거리는 꼴을 보며 그들이 손대지 않은 샌드위치를 날름 다 먹어버린 린징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빵가루 묻은 손을 툭툭 털며 입을 열었다.



“그냥 네 칭찬이 교수님들 사이에서 자자해서 괜히 이러는 거야. 주훙은 내일이 평가거든……, 악!”



  주훙은 쓸데없는 설명을 보충하는 린징의 발을 콱, 밟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린징은 급하게 고개를 숙이다 테이블에 한 번 더 이마를 박고 차마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자오윈란은 다시 한 번 코웃음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어디 가?”

“어디 가긴. 마누라 보러 간다. 왜?”

“우웩.”



  마누라래. 쟨 대체 어느 시대에 산다니?

  주훙이 정말로 속이 안 좋아진 듯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신경줄이 굵은 자오윈란은 그 정도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주훙과 린징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카페테리아를 벗어났다.

  윈란은 저녁에 션웨이와 만나기로 했던 연습실로 향했다. 당초 약속 시각보다 한참 이른 시간이었지만 연습벌레인 션웨이의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이미 연습실에 있을 것이 뻔했다.



‘연습실에서 보기로 한 김에 개인 과제든 협주곡이든 연습하고 있겠지. 안 봐도 뻔하다, 뻔해.’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복도는 노을빛으로 물들어 아직 찾아오지 않은 가을의 빛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늦여름의 끄트머리, 초가을의 시작 지점을 지나듯 복도를 걷는 자오윈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반가운 첼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복도를 거의 다 통과할 즈음이었다. 빠르지만 정확하고 담백한 음색이 자오윈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음정은 화려한데 들려오는 소리는 어쩜 이렇게 정직한지.’



  평소에 연습하던 곡이 아니라는 티를 내는 것처럼 무게감을 덜어내지 못하고 정확한 박자와 운지에만 신경 쓰는 듯한 멜로디에 웃음이 났다. 자오윈란은 연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들어가려던 계획을 파기하고 연습실 문을 벌컥, 요란하게도 열었다.



“뒤크로?”



  자오윈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션웨이의 활이 현 위에서 삐끗하더니 끼익!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을 냈다.



“아, 아란?”



  고운 눈을 크게 뜨며 션웨이가 의아함을 담아 윈란을 불렀다. 그는 분명 오늘 콘체르토 연습이 있어서 평소보다 늦을 예정이었다. 션웨이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합주가 뒤로 밀렸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그리고…….



‘다 들었겠지……?’



  션웨이의 귓바퀴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자오윈란은 션웨이가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부끄러움에 빨갛게 변하는 일련의 과정을 흡족하게 지켜보다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섰다.



“흐응. 우리 자기가 언제부터 현대 음악에 관심이 깊었어?”



  이실직고하는 게 좋을 거야. 뒤크로 앙코르(Ducros: Encore)? 어떤 놈이랑 연주하려고 그런 화려한 걸 연습해?

  주훙이 말했듯, 션웨이의 주력 시대는 바로크와 고전 시대였다. 그는 낭만파와 현대 음악의 변칙적인 분위기를 좀처럼 선호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절기교와 변칙 패턴을 쏟아부은 듯한 곡을 연습하고 있으니 의문보다도 흥미가 생기는 것이다.

  자오윈란이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눈을 마주치려 하자, 션웨이는 그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면서 괜스레 고개를 뒤로 물리며 우물쭈물했다.



“이번엔 네가 나한테 맞춰줬으니까. 다음엔 네가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어. 뭐가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 입술을 꾹 물며 웃음을 참고 있던 자오윈란은 조곤조곤 이어지는 션웨이의 해명에 결국 목화가 피어나듯 탁,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곧장 션웨이의 뺨을 감싸고 그의 얇은 입술 위에 쪽쪽, 쪼듯이 입을 맞췄다.



“아이구 예뻐. 이 예쁜 거 누구 거야?”



  자오윈란은 언제나 션웨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넘치도록 표현할 때면 제 감정을 자오윈란에게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션웨이는 바짝 굳어버리곤 했다. 그래도 표현을 어려워할 뿐이지, 그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자오윈란은 알 수 있었다.



‘입술도 우물거리고. 눈도 깜빡거리고. 기분 좋았구나, 샤오웨이. 귀여워.’



  가슴을 울리듯 낮게 웃은 자오윈란이 션웨이의 손에서 넥을 뺏어들고 순식간에 첼로를 옆으로 빼냈다. 그는 흘러넘치는 애정을 못 견디겠다는 듯 션웨이를 꽉 끌어안고 양옆으로 기우뚱거렸다. 또 한 번 움찔거리던 션웨이도 이내 자오윈란을 마주 안으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좋아? 내가 현대 음악 연주하는 게?”

“응. 그런데 네가 현대 음악을 연주해서가 아니라 네가 나로 인해 새로운 걸 해나간다는 게 좋아.”



  션웨이는 자오윈란의 어깨에 턱을 걸친 채 그의 목소리가 전하는 잔잔하고 기분 좋은 울림을 온몸으로 느꼈다. 조금의 그늘도 없이 온유하기만 한 미소가 션웨이의 얼굴에 머물렀다.



“아. 근데 자기야. 네 솔로 오랜만에 들으니까 너무 좋다. 최근엔 나랑 맞추기만 했잖아.”



  션웨이는 윈란의 발화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



“듣고 싶은 거 있어?”

“바흐 아무거나 해줘.”



  그 말에 션웨이는 자오윈란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바흐? 너 바로크 안 좋아하잖아.”



  졸려서.

  션웨이가 말끝에 한마디를 덧붙이자, 자오윈란은 검지 끝으로 션웨이의 입술을 꾹 눌렀다. 윈란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웃음이 걸쳤다.



“그런 얘기 밖에서는 하지 마. 교수님들 알면 귀찮아져.”

“…….”

“그리고 나 네가 연주하는 바흐는 좋아.”



  션웨이가 긴 숨을 내쉬었다. 제가 연주하는 바흐가 좋다고,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이가 말하는데 그 이상의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한 악장만 할 거야.”



  활 털을 만져보고는 송진을 새로 바르며 션웨이가 혹시 몰라 덧붙였다. 자오윈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가 들려주고 싶은 만큼만 들려줘도 좋아.”



  자오윈란은 션웨이를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한 연습실 안쪽 의자에 앉아 제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감상할 자세를 취했을 즈음, 션웨이가 G현의 묵직한 저음으로 곡의 문을 열었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1악장이었다. 자오윈란이 숨을 깊게 삼켰다.

  그는 바흐를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헨델은 듣기만 해도 당장 성당으로 나가 미사를 봐야할 것 같아서 안 좋아했다. 그런데 션웨이의 손끝이 짚어내고 활이 그어내는 바흐는 신기할 정도로 좋았다.

  묵직하고 둔하게 울리는 저음은 듣고 있는 사람의 몸이 첼로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첼로의 바디와 함께 전율하게 한다. 뱃속을 울리고 온몸을 빈틈없이 채우는 소리. 자오윈란은 션웨이가 만들어내는 그 선율이 자신을 완전하게 만든다고 여겼다.

  션웨이를 만나기 전까지 자오윈란은 언제나 자신의 어딘가가 심각하게 결핍되었다고 느꼈다. 그의 재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과 세상으로부터 커다란 칭송과 사랑을 받아도 자오윈란은 언제나 공허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처음부터 의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점점 다양한 기교로 이루어진 곡을 선호하게 된 것은 제 공허를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그의 어두운 면을 화려한 포장으로 감싸고자 한 것이 아닐까, 낭만과 현대의 해체주의적인 음악이 아니면 온 세상에 제 밑바닥을 보이게 될지도 모른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아닐까. 인제 와서 그렇게 추측해볼 뿐이었다.

  그런 자오윈란의 앞에 션웨이가 나타났다.



「뭐, 뭐야? 언제부터 있었어?」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 듣는 이 하나 없는 고요한 연습실에서 떠오르는 대로 이른 아침의 야상곡을 연주하고 있을 때였다. 션웨이는 아침 안개만큼이나 고요하게 자오윈란의 세상에 나타났다.



「……미안해.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럼…….」

「아니, 아니. 잠깐만. 너 션웨이지? 첼로 전공?」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너 말이야, 내 연주 듣고 그냥 갈 거야? 나만 무급으로 독주회 연 것 같잖아.」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자오윈란은 뻔뻔하게도 그리 말하며 션웨이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내 연주를 들었으니 너도 내게 연주를 들려달라고.

  그때도 션웨이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1악장을 연주했다. 모두에게 익숙한 1번의 프렐류드가 아니라 다른 넘버에 가려져 쉬이 귀에 익지 않는 곡. 하지만 나직한 저음은 자오윈란의 마음 한 구석의 구멍을 메워냈다.



「‘너였구나.’」



  그 당시엔 그 생각만 들어서, 션웨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음악에는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침의 여린 햇살이 밀려드는 먼지 가득한 연습실에서, 활을 유연하게 움직이는 션웨이는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그의 곁에 날리는 먼지가 햇빛을 받아 별가루처럼 반짝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오윈란은 평생, 어쩌면 언젠가 살아왔을지도 모르는 전생부터 션웨이를 기다려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온전한 삶을 얻었다고. 이제야 충만하다고. 조금의 공허도 느껴지지 않는 그 안정감은 곧 션웨이를 향한 사랑으로 화했다. 자오윈란은 깊은 시선으로 제 앞에서 무게감 있는 연주를 이어가는 션웨이를 바라봤다.

  손에 땀이 맺히는 것 같다고, 션웨이는 생각했다. 그는 운지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연주를 이어갔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자오윈란의 눈빛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나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지만 션웨이는 자오윈란이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는 일면을 알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호수였다. 언제나 잔잔하고, 가끔 이는 파문조차도 고요히 품어내는, 하지만 동시에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지점을 가진 호수.

  자오윈란은 제 그늘을 구태여 드러내려 하지 않았지만, 션웨이는 그가 음악을 대하고, 션웨이 자신을 대할 때에는 숨김 없는 제 진심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션웨이는 자오윈란의 앞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것이 두려웠고, 동시에 주체할 수 없을만큼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지금도 자오윈란은 션웨이의 연주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삼켜낼 듯 그를 바라보고 잇었다. 그것이 션웨이가 두려움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것만을 안겨주고 싶은 사람이 내게서 결핍된 것을 얻어가서는 안 되잖아.’

‘하지만…….’



  그 두려움은 분명히 실재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 션웨이는 자오윈란의 눈에서 저를 향한 열망을 읽어낼 수 있었고, 저만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그 눈에 다시 없을 쾌감을 느꼈다.

  션웨이는 마지막 음을 글리산도*로 미끄러뜨렸다. 그답지 않은 변주 시도였고, 프레이즈 끝의 화음을 아르페지오로 처리하는 자오윈란에 대한 모방이었다.

  (*:  활을 한번 움직이는 동안 지판 위에서 음고가 있는 두 음을 짚어서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주법. 기타의 슬라이딩 주법으로 생각하면 쉽다.)

  몰아치는 듯 연주하는 곡이 아니었음에도 어쩐지 숨이 차올랐다. 션웨이는 턱 끝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 음으로 가득했던 연습실에 션웨이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

“…….”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으레 연주의 뒤에 따라붙곤 하는 박수도 보내지 않고, 자오윈란은 그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션웨이의 손에서 첼로를 뺏었다. 윈란은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션웨이의 턱을 들어 올리고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질척하게 혀가 섞이고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샤오웨이, 혹시 오늘도 연습이나 하자는 얘기는 안 할 거지?”



  굳이 연주해야 한다면 난 널 연주하고 싶은데.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자오윈란이 말했다. 다음 순간, 그는 그대로 그랜드 피아노 위에 엎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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