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과 노인

 "…." 

 하찮고 귀엽다. 손안에 가득 찰까 싶은 크기, 꽃잎 뒤로 몸을 숨기는 그 신비하고 작은 존재를 시선으로 멍하니 쫓았다. 머리 위에 꽃을 모자마냥 쓰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너무나 신기해 보였다. 문득 풀빛 눈동자가 눈에 띌 무렵이면 애써 모른 척을 하느라고 진땀을 뺀다. 앞으로도 자주 오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을 두고 찬찬히 바라보고 싶었지만, 눈치를 채면 떠나가버릴까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인간을 그렇게나 무서워 하면서 인간 지척에서 쉰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행동을 빤히 빤히 바라보던 중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앞으로도 저 화분은 치우면 안 되겠어. 그런 실 없는 생각을 잠시 하다 잎에 맺힌 물을 마시는 것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귀엽다.' 

 어린아이들이 요정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풀어진 표정으로 미소짓는 표정과 손 안에 겨우 가득 찰까 싶은 크기에 귀여운 외모 하며.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다 늙어서도 다시 동심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으니 그런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빤히 바라보던 중에 눈이 마주쳤다.  

 나즈막히 놀라는 소리를 내더니 한 박자 늦게 이파리 뒤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무척이나 하찮았다.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음에도 떠나지 않는 것은 나를 믿기 때문인가. 나는 해치 않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살풋 미소짓는 낯으로 몇 차례 눈을 끔뻑였다.  

 인내심 있게 얼마동안 기다리면 요정은 잎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 나를 바라본다. 낯가림이 심한 것인지, 겁이 많은 것인지 떨리는 눈동자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살폈다.  

 "앞으로 자주 와도 괜찮을까요?" 

 작은 요정이 적막 끝에 뱉어낸 말은 그것이었다.  

 "편할 때마다 찾아오게." 

 요정은 화답하듯 미소를 짓고는, 내 화분에서 꽃을 한송이 따서는 모자처럼 머리에 썼다. 상기된 낯은 마치 어린아이를 보는 듯 하여, 지루하리만치 여유롭던 노년의 날이 되어서야 평생 꿈꾸지도 못 했던 어느 동화가 찾아온 것인가 내심 기대했다.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넘기다 문득 화분을 바라본다. 어느새 비어비어버린 화분엔 그 요정을 닮은 아기자기한 귀여운 꽃 몇 송이가 놓여 있었다.  

 유리로 된 투명한 화병에 미지근한 물을 채우고, 꽃을 조심스레 꽂아놓으면 그 요정이 다시 찾아올까 싶은 생각이 들어 웃음이 새었다. 눈이 마주쳤으니 이제 다시는 오지 않겠지. 동화가 으레 그렇듯 하룻밤의 꿈으로 끝나지 않겠는가.  

 "다시 오면 좋으련만."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무색하게도, 요정은 매일마다 이 집을 찾아왔다. 손에 닿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편히 와서 쉬다 갔다. 작은 날개로 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아이는 책상 위에 놓인 화병을 보며 풀어진 모습으로 미소짓는다. 화병엔 그 아이가 선물해주었던 꽃들이 꽂혀 있었다.  

 난 기뻐하는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아이와도 비슷한 모습. 나는 늘 침대에 앉아 소설을 읽는 채였다만, 그 아이가 집 안에 들어오면 창틀에 놓여진 화분, 그리고 그 잎의 근르에서 헤실거리는 요정을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매일마다 처음 만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느끼며 나는 매일마다 그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열린 창문으로 아이가 들어오면 책을 덮고 바라보았다.  

 아이는 지금도 애써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 모습이 낯가림 심한 새를 닮았다고 늘 생각했다. 손을 뻗으면 영영 도망쳐버릴 것을 알아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이따금 작은 간식거리를 챙겨다 주는 것 말곤 이 애정을 표현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기에, 이런 애매한 관계는 내 숨이 다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아이와 나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만 손길은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무의식에 뻗은 손끝을 보며 아이는 언제나 멋쩍게 미소지었고, 난 그럴 때마다 미안하다며 말을 뱉었다. 다만 덕에 인생의 끝이 다다라서야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났으니 다행인 일이었다. 아마도 오늘이 그 아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일 것이다.  

 나는 창문 너머에서 다가오는 투명한 날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늘도 와 주었구나. 마치 처음 만났을 적이 떠오르는 여로였다. 그 때도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했지. 그러나 넌 언제나 이곳으로 와주었다.  

 "… 와 주었구나." 

 "많이 아파요?" 

 "으레 늙은이들이 다 그렇지 무얼 새삼스레." 

 넌 지척까지 낯을 가까히 했다 쓴웃음을 지었다. 죽음이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너와도 이렇게 거리가 가까웠던 적이 없었다. 난 죽음이 가까워지는 와중에도 너와의 거리가 좁혀진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떨리는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비적이는 너는 햇살의 온기를 닮았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어느 동화로 이 사이를 정의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인식하고 나서야 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네겐 고마운 마음 뿐이다.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잔잔한 평화를 깨달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늘 궁금했는데,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을까." 

 웃음기 만연한 목소리로 말을 묻는다. 너는 잠시 고민하다 늘 제 머리 위에 모자처럼 쓰고 다니던 꽃을 끌러내려 내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다. 하얀 꽃잎과 노란 중심.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꽃, 처음 만났던 날에 네가 내게 선물해준 그것. 

 "데이지." 

 넌 환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떄마다 찬란한 백금빛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난 그 표정과 따스한 햇살을 닮은 모습을 보며 인간들이 어째서 요정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이 하얗고 어린 요정에게 정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여태 '요정 양'이라고 부른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주곤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마지막 의문이 풀렸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이제 잠들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넌 여전히 내 손 안에 담겨 있었다.  

 "잘 자요." 

 "고맙네." 

 그는 편히 잠들기라도 한 양, 완전히 눈을 감았다. 요정 또한 그의 식어가는 체온을 느끼며 천천히 잠들었다. 어느 평화로운 오후의 일이었다. 

 다음날 편히 잠든 채 숨을 잃은 노인의 손 위엔 데이지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막 따온 것만 같은 생생한 데이지 한 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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