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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들

2호점 by 파문

감상

작은 짐승의 굴이다. 아르카나는 버틴이 파내고 꾸며 낸 가방 속 공간의 감상을 짧게 남겼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미련이 깊기 때문에 도토리를 쌓아두는 설치류 마냥 물건이 많았다. 부질없는 일이네요, 버틴 씨. 아르카나는 대바늘 같이 뾰족한 자신의 검정 완드를 휘둘렀고, 타르 같이 끈적한 주문은 너무나도 쉽게 버틴의 수집품들을 갉아먹었다.

단순히 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복도로 이어진 곳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으니, 아르카나는 친히 하나하나 그 공간들을 둘러봤다. 이곳에 머무는 이들을 향한 애정이 절절히 느껴져서, 아르카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버틴, 내 사랑스럽고 어리석은 아이. 동물 한 쌍씩 실어둔 방주처럼 온 시대의, 전 세계의 마도학자들을 여기에 숨겨두려는 거니? 모아둘 필요가 없었다. 버틴은 여전히 ‘재건의 손’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되돌아가면 지켜낼 필요가 없다. 학대받고, 버려지고, 숨겨야만 살 수 있는 이들이 모여 가식적인 ‘규칙’을 뒤집는다면 이들을 위한 공간은 작은 가방 속이 아닐 것이다.

그날이 온다면, 버틴은 이런 가방 속에 사랑하는 인간들을 모아둘 것만 같았다. 우스웠다.

*

잠든 버틴의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버틴이 눈을 감은 채로 영영 일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드루비스의 불안은 아주 작았지만, 썩은 뿌리처럼 쉽게 뿌리 뽑히지 못했다. 이유는 여태껏 재단이 원하는 대로 살아왔던 이가 견뎌온 세월이 자신보다 적었기 때문에, 만약 떠난다면 보통 이들과는 다를 것만 같았다. 다 타버린 숲에 서 있었던 과거의 자신은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괴롭다면 떠나셔도 돼요. 그런 공허한 말들만 늘어놓고, 부스러져가는 모든 걸 바라보고 말았을 텐데, 현재의 저 자신은 매 순간과 아무도 모를 미래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니 당신이 쓰러지지 않기를, 먼 곳으로 떠나지 않기를 바라. 쓰러지고 싶을 때, 무언가라도 붙들고 싶을 때는 언제든 불러달라는 말 대신 드루비스는 버틴의 앞머리를 쓸어 정리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

잡고 있는 글라스 펜의 끝에, 주문처럼 시구가 걸렸다. 때가 되었다, 밤이 오리라. 날카로운 파편이 크리터의 등에 꽂혀도 주춤거리게 할 뿐, 멈추게 할 기미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가상 몽유로 만들어진 허구의 크리터는 소네트가 다른 시구를 다 외우기도 전에 거리를 좁히고 펜, 손, 어쩌면 아래팔의 절반까지 물어 뜯었다. 꿈이라는 인지를 훨씬 넘은 통증에 결국 소네트의 눈 앞은 경고문처럼 붉어졌다. 아직 이 정도로는 안 되는데. 눈이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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