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
수많은 경험들의 조각보, 그 속의 인정과 수용, 깨달음은 되지 못할 인용의 조각들.
애석하게도, 포이베라는 신격의 이름을 타고난 자라 한들 온전히 그 신성을 물려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는 상대의 독백을 선명히 들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정적 속에서 상대가 자아내는 수많은 말들의 가능성을 점치는 것에 더해, 짤막하게 절단된 몇 단어의 문장 하나에 함축된 것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이런, 헤르츠……. 나는 시인이 아니니 그리 한 문장으로 말을 끝내면 네 마음을 전부 알 수가 없어-그 따위의 말을 내뱉는 대신 마주 다행이라는 중얼거림을 더한다. 이마저 상대의 독백에서 등장하는 상냥이라는 단어의 일부였을까. 만약 그가 상대가 자아내는 백지의 응시 속에서 수많은 활자를 읽어낼 수 있었더라면 꽤나 긴 답을 남겼을 것이 뻔했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 세상이 나에게 상냥했기에 나는 상냥을 배우고, 나에게 관용을 가르쳤기에 나는 그것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이라고. 헤르츠, 적어도 사람 간의 배움 속에서 일방적인 배움이라는 건 없대. 너만의 덕이라고 하기에는 과분할 수도 있지만 네 지분이 아예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과소평가겠지…….' 그 말을 다하는 대신, 짧은 간극을 뒤로 한 채 '그래, 다행이야.' 라는 두 어절의 모호한 문장만을 남겼다.
카인이 직접 만든 영화를 보았어? 그런 영화를 보면서 나를 떠올려 주다니, 꽤나 영광인데. 네 말대로 우리는 서로를 꽤나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어. 그렇지 못했다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서로를 붙들고 있지는 못했겠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잡지에 대한 잡담을 나누거나, 하염없이 바닷가를 걷는 일도 없었을지도 몰라. 그런 만약을 상상하는 건, 그래, 물론 퍽 끔찍하지만 도리어 현재를 더욱 가치 있게 보도록 만드는 것 같아. 하고 싶었던 말은……. 역시 지금껏의 이해에 대한 고맙다는 말 뿐이겠네.
꽤나 필요한 것이었거든. 얕은 잔파도처럼 일렁이는 말이었지만 필요라는 단어만은 확실한 연흔을 남겼다. 상대의 농담에는 덩달아 혈색이 더욱 선명해진 볼을 한 채 웃음을 띄울 뿐이다. 바라지 않아도 우리는 유명해질걸, 온 세상이 우리라는 파도에 눈길을 주고 있는데. 그런 농-반 즈음은 진담이었지만-을 덧붙이기도 했다.
늘 기다리고 있을테니 마음이 내키거든 한 번 즈음 방문해 줘. 바닷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보니 제대로 된 주소와 숙련된 뱃사공만 있으면 쉽게 찾아올 수 있을 거야. 오기 전에 한 번 연락을 주면 마을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서 네가 머물 곳이나 방문할 곳을 미리 마련해 둘테니, 기왕이면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것보다는 이야기하고 찾아와 주고.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소중한 친구를 마주한다는 건 제법 부끄러운 일이어서도 있지만……. 그래, 소설을 인용해 볼까. 어린 왕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잖아.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할 거야.' 그 말처럼 네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날까지의 매일을 기쁜 마음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거든.
당연스레 환대해 주겠지만 너무 많이 울지는 마, 나도 덩달아서 울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건 역시 우스울 것 같거든. 그런 짓도 한 번 즈음은 저질러 보고 싶지만! 그리 덧붙이고는 상대의 자신 없는 답변에 짤막하게 긍정하는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확신이 없는 자에게 간단히 심어줄 수 있는 확신은 없다-무엇보다 말뚝을 박고 줄을 널어두는 것은 제 일이 아니다. 상대의 정의내림과 인지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 이유를 알아가는 것, 혹은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 즈음이면 모를까……. 그리하여 그는 테티스라는 이름에 얽힌 수많은 이유를 궁금히 여겼다. 하츠카 헤르츠라는 이름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음에도 선뜻 두 번째-혹은 세 번째의 이름을 내뱉은 이유를, 그리 내뱉고서라도 여즉 확실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따위를. 포말이 지니는 무늬 하나하나를 눈에 온전히 담을 수는 없다는 듯 애써 무심한 척 '그래, 너는 너지.'라는 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명확한 답이나 반박, 의문 따위를 내놓을 수 없다면 포용이야말로 가장 쉬운 일이니.
어떤 이야기든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전부 좋아. 재능은 신경쓰지 말고, 네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어. 물론 네가 하츠카 헤르츠, 예비 SF 소설가로서 써내려가는 글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라지만……. 이번에 편지를 주고받는 건 너의 애독자 포이베이기 이전에 너의 친구 포이베니까. 꼭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이 아니어도 돼. 파도가 깎아 둔 절벽마냥 거칠고 투박한 글에도 나름의 멋이 있는 법이잖아. 얼마나 잘 쓴 글인지보다는 역시 네가 쓴 것이라는 게 중요한 거니까.
묵묵히 상대의 뒤를 따르던 걸음은 제 앞의 걸음이 멎음과 동시에 멈추어 선다. 뒷덜미를 간지럽히는 바람, 그 바람에 떠밀려 오는 파도와 검은 것들에 비추어 반짝이는 수많은 하양들이 눈에 들어찬다-그 검정 중 하나는 제 시야요 백 중 하나는 상대의 그림자조차 되지 못할 선명한 인영이다. 충동적으로 흐르는 말을 멈추지 못하는 이가 쉬이 그러하듯 아무렇게나 한 문장을 내뱉었다. 늘 느꼈던 것이지만 너는 정말 달을 닮았구나. 그런 말을 남겼다는 자각조차 없이 상대가 제게 내민 손을 붙잡았다. 확연한 현재의 감각이다.
그래, 이제 슬슬 돌아가자. 바람이 추우니 자칫하다가는 몸살이라도 걸리겠어……. 그리 이야기하고는 모래가 짓밟히는 소리에 '편지는 조만간 방문 앞으로 전해 줄게.' 라는 몇 마디를 묻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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