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정의

1화. 씁쓸한 시작

하늘교 대신전 아침 예배 시간.

제단을 앞에 두고 서있는 이들은 많은 사제들. 앞부분도 아니고 뒷부분도 아닌 중간에 한 소녀가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도 기도 드립니다, 하늘이시여.’

소녀의 이름은 피니온. 하늘교 대신전에 속한 사제이자, 벌써부터 치유의 힘을 가지게 된 신실한 소녀.

피니온은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신실한 예배를 마친 후 아침 식사를 동료 사제들과 함께했다. 식사 메뉴도 평소에 자주 나오던 재료를 아끼지 않은 고기 스튜. 이 요리가 여기까지 오는데 걸린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한 뒤 배를 채웠다.

다음 일과는 대신전 손님을 맞기 전 청결 상태 점검.

어린 나이에 치유 능력이 있다고 해서 바로 고위직을 시켜주는 건 아니었다. 피니온은 어린 나이부터 대신전에 들어와 자라난 아이였기 때문에, 보고 들은 것이 많아 깨우침이 빠른 것이라 모두는 생각했다.

사제는 마음이 깨끗한 게 미덕. 그에 맞게 피니온은 저보다 깨달음이 높으신 상급 사제들의 말을 따를 뿐이었다.

오늘 피니온이 맡은 곳은 대신전 구석의 창고와 그로 향하는 길이었다.

평소에 이 일은 산책과 비슷하다. 조금 더러워졌으면 치우면 되고, 아니면 그저 걸어다니며 확인할 뿐이니까. 홀로 걸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먼지가…….’

창고로 가는 길에 검은 먼지 같은 것이 떨어져있었다. 그 먼지는 창고에 다가갈수록 검은 덩어리가 되어 가더니, 이윽고 창고 문에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문은 완전히 검은색이었다.

검은색은 더러움의 상징.

대신전에 더러운 것이 침입한 게 분명하다!

피니온은 더러운 것에 묻지 않으려고 황급히 뒷걸음질쳤다. 그 과정에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바닥을 굴렀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 어둠에 대한 공포가 더 앞섰으므로 신성력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입고 있던 하얀 사제복 등은 이미 검게 물들고 있었지만 피니온이 알 리는 없었다.

묻어있는 검은 먼지는 먹물, 재 또는 마법일 것이다.

“피니온!”

소리친 건 피니온의 동료 사제, 랙. 평소 같다면 금방 돌아왔을 피니온이 보이지 않으니, 찾아왔던 것이다.

피니온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목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다.

그것은 검은색보다도 더 검은색을 띄며, 살아있는 듯이 꿈틀거리며, 온갖 세상을 물들이듯이 피니온을 향해 다가왔다. 이미 주저앉아있는 피니온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랙은 피니온에게 다가와 검은 것을 떨처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닿지 않았다. 닿기는커녕 랙을 통과해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랙은 황급히 다가가 피니온의 팔을 끌었다.

“잡아, 피니온!”

피니온의 손목을 끌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가벼운 피니온이 그 힘에 끌려갔다. 그러나 움직이는 속도보다 그것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발끝부터 검은 장막에 휩싸여 이윽고는 피니온의 전신을 장악했다. 피니온은 완전히 검게 변해버렸다.

“이게 뭐야…….”

피니온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랙의 손은 아무런 영향이 없고, ‘피니온’만 검게 물들었다.

랙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피니온은 정신을 잃었다.

손이 바닥에 튕기는 순간에 피니온은 그곳에서 사라지고, 검은 것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랙의 앞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정신이 든 것은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낯선 땅.

피니온은 해가 이렇게 따뜻하게 자신을 비출 때까지 자는 일이 없었다.

번뜩 눈을 뜬 피니온은 가장 먼저 자신의 손을 살폈다. 손은 평범했다. 아침을 먹을 때 봤던 평소와 같은 손, 검은 흔적 같은 건 없었다.

그 뒤로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세웠다. 바닥을 딛은 손에 흙먼지가 달라붙었다.

‘여긴, 길?’

옷도 원래대로 하얬다. 목격했던 것은 꿈이었나 아니면 이미 피니온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일까.

흙이 묻은 사제 옷을 탁탁 털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태 피니온이 움직이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었다.

저 멀리 홀로 서있는 인영을 보았다. 그 사람은 키가 크고 갑옷을 입고 있었다.

‘기사?’

기사라면 분명 정의로운 사람일 테다. 피니온이 가끔씩 마주친 성기사들도 분명 그러했으니까.

지나가던 사람이라면 도움을 요청하고,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말을 듣기 위해 그를 불렀다.

“저기요.”

들리지 않았나보다. 그 기사는 여전히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기요!”

크게 소리치고 나서야 피니온의 외침이 들린 건지,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거대한 검이 들려있었다.

뭔가 위화감이 들어 바닥을 쳐다보니 거대한 십자가가 놓여있었다. 하늘의 안배일까.

그는 멀쩡히 움직이는 것 같은 피니온을 돌아보았다. 아마 정신을 잃고 있었을 때의 피니온의 모습도 본 거겠지.

“혹시 기사님께서도 이곳에 강제로 끌려오신 건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납치당한 것 같은데, 약해빠져보이는 네가 있어서 걱정 좀 했다.”

나중에 돌이켜본다면 그 나름대로 순하게 말했지만, 그 시점의 피니온에게는 아니었다. 존댓말이 아닌 데다가 가벼워보이는 그 내용까지.

‘하늘이시여, 어째서 제게 시련을 내리시는 겁니까.’

피니온을 기다리고 있던 건 선연일지 악연일지 모르는 이와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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