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건

HUSK

LETHE by 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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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무사히 우리는 탈출했고, 내 동료는 살아있으며, 그리고, 또.

 

또?

 

흡사 알처럼 작게 웅크리려고 하는 미첼을 몇 번이고 다잡아 일으키느라 게이브는 다습한 공기 속에서도 등줄기를 유독 잘게 가르는 땀방울에 한없이 시달렸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그가 그의 RIO를 잃고 큰 실의에 빠졌던 적이 있음은 탑건 동기들이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비단 그의 동기뿐만이 아니라도. 그에게 지나친 관심을 표한 사람들이 몇이었고 태양 같았던 그의 슬럼프에 유감을 표한 이들이 또 몇이었는지? 게이브는 두 번째 트라우마가 되지 않기 위해 무딘 애를 썼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사고 현장에서 그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머잖아 수색대가 우리를 구출하러 오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너무 멀리도 아니야. 아주 조금만, 조금만 떨어져 있자. 미첼. 자. 내 손 보여? 우리는 괜찮을 거야.”

 

힘없이 꺾이는 무릎에 부목을 대어주기에는 대어줄 부목조차 없었으므로 게이브는 끊임없이 말로써 그를 다독여 겨우 그를 나무 등치로 데리고 갔다. 여기는 어디쯤일까. 나무가 무성히 우거진 여름 숲은 하필 군복의 색깔을 집어삼키기 딱 적합했고, 그들이 서 있고 앉아 있는 곳은 너무 기울지도, 너무 평탄하지도 않은 곳이라 산의 어느 즈음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에 더불어, 저기, 우거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산 너머를 향해 해가 지고 있었다.

 

“이것 봐, 미첼. 나뭇가지를 찾았어. 나무 열매도 같이 달려 있던데. 먹어도 되는 것 같아.”

 

그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는 푸르고 흰 부대 마크. 어느 부대 마크더라. 미첼은 흐릿해지는 기억을 끌어모으려 애쓰며 의식 위로 떠오르는 단어들을 어떻게든 붙들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이 정글의 새파란 정적이 둘을 흔적도 없이 삼켜버릴 것만 같았으므로. 체온을 보존하기 위해서 불을 피우는 동안에도 실없고 두서없는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드디어 불을 피우고 나서, 얼마 안 되는 나무 열매를 나누어 먹으려는 순간에, 게이브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미첼은 그것을 삐딱하게 보는 순간조차도.

 

“너는 기도하지 않아?”

“나는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아.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됐거든.”

“군인들은 곧잘 신을 믿는데.”

“믿고 싶어 하는 거지. 나보다 더 거대한 존재가 나의 죄를 가늠해 주리라고.”

“넌 싫어?”

“뭐가.”

“너보다 거대한 존재가 너의 죄를 사해주는 게.”

 

피트 미첼은 땀에 절은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식은땀이 흘러들어 눈꺼풀 안쪽이 따갑고 찝찝했다. 가능하다면 차가운 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나는 천사를 믿지만 구원은 믿지 않아. 하지만 죄의 인과는 믿어.”

“벌을 받고 싶어?”

“그런 속편한 계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아.”

“너답지 않게 깊은 생각을 했네.”

 

미첼은 눈을 치켜떴다. 게이브는 그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거의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고 있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것만은 분간할 수 있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집에 가면 누가 있어?”

“아버지. 형제들.”

“형제가 많은가보네.”

“넌 아니야? 외동이랬나.”

“가끔은 그래서 다행이란 생각도 해.”

“왜?”

“나 하나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

“마치 네게 딸린 사람이 여럿이었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았을 것처럼 말하네.”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허파에 풋내 나는 여름 바람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마음껏 웃었다. 미첼은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제 입가를 몇 번 문지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잘래.”

“그래. 너 먼저 자. 이따 깨울게.”

“그래.”

 

 

 

미첼.

 

미첼, 일어나.

 

저기 사람들이 오고 있잖아. 일어나야지.

 

말했지? 사람들이 찾으러 올 거라고.

우리는 괜찮을 거야.

 

 

 

“미첼.”

 

피트 미첼은 졸음에 취한 채 눈을 끔뻑거렸다. 익숙한 금발의 사내가 눈앞에 있었다. 아이스, 입으로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도 그는 그것을 알아들은 양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첼의 어깨를 감싸 안고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무언가 지시를 했다.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기울어져 있던 의식이 서서히 제 위치를 찾는 기분이었다. 그에 불쾌감을 느끼기에는 지금의 피트 미첼은 제정신도 아니었고, 평소보다 어렸고, 여렸다.

 

“뭘 하려고?”

 

미첼은 깜빡거리는 의식 사이에서 물었고,

 

“그냥, 널 씻기려고.”

 

카잔스키는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코웃음도 치지 않고 슬쩍 밀어내고 말았을 일에도 그냥 그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첼은 수긍했다. 카잔스키는 그것이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는지, 진흙과 풀이나 과즙 따위가 묻고 삭아 들큰하고 풋내가 나는 몸뚱이도 아무렇잖게 품에 안고 욕실로 향했다.

 

그가 그를 돌본다. 단추가 하나 둘씩 풀리면 땀과 빗물에 절어도 흰 피부가 드러나고, 카잔스키는 그 틈새를 꼼꼼히 살피며 행여 상처가 나거나 곪은 구석이 없는지를 면밀히 살폈다. 마치 서류나 이륙 전후 기체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아, 그것보다는 좀 더 다정할까. 그 모든 것을 받고 있고 사실상 돌봄‘당하고’ 있는 미첼로써는 모를 일이었다.

 

“차가워.”

“조금만 참아. 온도 올려줄게.”

 

익숙한 문명의 냄새. 신선한 바디 워시와 샴푸의 냄새를 맡으며 미첼은 찬찬히 두피와 피부 틈으로 야만이 씻겨 나가고 이성이 스미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이렇게 간단한 것을. 사람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어야 좀 더 면밀히 사고할 수 있는 법이야. 그렇지 않아?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안으로 감도는 생각을 간추리며 미첼은 자신이 매달려 있던 망상이나 트라우마에서 겨우 기어오른다. 그 과정을 카잔스키가 볼 수는 없겠지만. 적당히 거품을 낸 샤워볼이 그의 매끄러운 피부 위를 오간다. 무언가를 정성스레 빗질하듯이.

 

그리고 미첼은 조금 생기를 차린 목소리로 카잔스키의 귓가에 대고 종알거렸다.

 

“맞다. 게이브는?”

“게이브?”

“나랑 같이 탄 RIO. 우리 동기 말이야. 날 잘 다독여 줬는데.”

“……, ……아, 그 사람. 사고 관련해서 먼저 구두 진술하러 갔어.”

“피곤할텐데.”

“괜찮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넌 게이브도 아니잖아.”

 

퉁명스러운 대답에 카잔스키는 부드럽게 웃으며 미첼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리곤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미첼.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 Gabe. Gabriel

: 가브리엘(히브리어: גַּבְרִיאֵל, 그리스어: Γαβριήλ, 라틴어: Gabrielus, 아랍어: جبريل)은 ‘하느님의 사람, 영웅, 힘’이라는 뜻으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에서 주로 하느님의 전령(傳令)으로 전해지는 대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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