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왕사

✶2 운명 (23.08.16 재업)

확신을 주기 위한 그 여정은┃칼리안 레인 카이리스+플란츠 룬 카이리스

ESAVIR by Ri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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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임버스(평범한 네임버스는 아닙니다. 자세한 설정은 본문에)

* 3왕자님 생일 축하해요

* 시점은 본문에

* 날조 有

* 스포 有


플란츠 룬 카이리스는 새하얀 천으로 덮인 자신의 손목을 흘끔 바라보았다. 피부에 딱 붙는 얇은 금속 팔찌, 그것도 모자라 품이 큰 셔츠로 한 겹 더 가려둔 손목에 새겨진 그 새하얀 이름을 떠올렸다.

아침에 확인했을 때에도 분명히 있었다. 흐릿해지긴 했지만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네임은 상대가 죽었을 때 지워지니까, 어젯밤엔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저 녀석은 내 동생이 맞다. 그리 생각하며 플란츠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역시 아닌데.

죽은 연두색 눈이 침잠했다. 동공 가운데에서부터 바깥쪽으로 퍼져나가는 빛의 파랑이 빛이 들지 않는 눈에 어울리지 않게 번뜩였다.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살기가 선명했다. 플란츠는 아이가 제 모든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확인해볼까, 창백한 입술의 한쪽 끝이 비뚜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야, 피 눈깔.”

*

네임. 열 살 즈음에 신체 어딘가에 새겨지는, 일생에서 가장 아낄 대상의 이름.

그것은 운명이었다. 한번 새겨지면 바뀌지도 않고, 처음엔 인정할 수 없더라도 이후엔 결국 상대를 가장 아낀다고 자각하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제 네임을 부정하다가도 네임의 필연성을 인정하게 되는 수많은 사례가 전해진 끝에- 결국 '네임'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상호적이지도 않고 형제자매나 부모자식의 이름이 새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로맨스 적인 인식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네임을 별것 아니라고 치부하는 자도 적지 않게 있었다. 카이리스의 삼 왕자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가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운명과 가장 밀접한 드래곤의 핏줄이며 운명이라는 것에 환장하는-정확히 말하면, 그 원리를 밝혀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마법사답지 않게 칼리안은 운명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존재 자체도 잊고 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전하."

그런 그에게도 '운명'이란, 어른들이 으레 말하듯 불현듯이 찾아드는 바람 같은 것이라서.

"손목에 있는 거… 혹시."

그 존재가 타오르는 불꽃처럼 눈길을 끄는 순간이 도래했다.

*

체르밀 궁 3층에 거주하시는 꽃 같은 왕자님은 종종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였다. 예를 들면 제 형님 밥 안 드신다고 그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이 손수 지어서 거주하기까지 했던 헤이시아 궁을 무너트리라고 지시했던 것이 대표적이었다. 독차 마시기 싫답시고 독을 처먹는 짓은 시작에 불과했다. 어느덧 걱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새끼 코끼리가 매정한 반응을 보일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칼리안은 그런 터무니없는 짓들을 태연하게 행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상을 뛰어넘는 짓을 명한다거나 상상도 못한 방식의 자기 파괴적인 행위라서 터무니없다는 것 뿐이지.

“…없는데…”

괴상한 짓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왕자님, 뭘 계속 보고 계시는 거예요?”

때문에 이번엔 진심으로 제 꽃 같은 왕자님이 어디 아프신 거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질문이 얀의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거울로 제 온몸을 살펴보고 뜯어보다가 얼굴로 방향을 틀어서 온종일 뚫어져라 보는 꼴을 본지 거의 하루가 지난 끝에야 나온 인내의 결말이었다. 얀은 자신이 오래 참았다고 확신했다.

얀이 이렇게 물을 정도로 모양새가 이상했나? 귀여운 시종의 진심 어린 걱정에 오늘 하루 제 모습을 점검해 본 칼리안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깨달은 얼굴을 했다. 제 얼굴이 아무리 프레이야의 위대한 유산이라고는 하지만, 온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 정상으로 보일 리는 없었다. 새끼 코끼리, 인내심 많이 길어졌네. 칼리안은 멋쩍게 웃었다.

“그게… 얀, 내 네임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해?”

“…왕자님 네임이요? 턱 밑에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분과 왕자님만의 비밀이라고 한 번도 안 보여주셨었으면서.”

“아. …그랬지. 미안, 까먹었어. 어쩐지 안 보이더라….”

장난스레 서운함을 띤 투정에 돌아오는 나긋한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습관처럼 웃고 다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어색한 웃음이 붉은 입술 위로 아스라하게 맺혔다. 칼리안의 속이 시끄럽다는 것을 눈치챈 얀의 얼굴은 곧장 울상이 됐지만 칼리안은 모른 척 계속 웃었다.

네임. 바꿔 이르면 운명.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실시할 수 있는, 유일하고 고유한 증명.

칼리안은 네임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배신이 너무나 처절했기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것을 잘만 이용한다면 오랜 고민을 해결할 매개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르메인의 손목을 보고 떠올렸던 모든 것 중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볍게 찾기 시작했는데― 안 나왔다. 혹시 네임이 없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피어날 정도로 아무 데도 없었다. 옛 칼리안의 기억까지 살펴봐도 네임에 대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는 거 이참에 내 더없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얼굴이나 뜯어볼까 하고 노선을 약간 틀긴 했지만… 아무튼, 첫 의도는 그거였다. 네임을 찾는 것.

'형님, 여기 좀 확인해주세요. 제 네임이 여기에 새겨진 것 같아요. 형님께서 확인해주세요.'

-잊혔던 기억이 떠오른 건, 얀이 말해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는데, 낮은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작은 거울과 큰 거울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무뚝뚝하지만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알게 된 방법으로 기대감에 부풀어 네임을 확인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확인한 '내' 네임은.

칼리안은 무언가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숨을 멈췄다.

얀을 보고 미소 지은 것은 그래서였다. 안 웃으면 숨을 멈춘 채로 계속 서 있을 것 같아서. 숨이 멈춘 저를 본 얀이 울 것 같아서. 그럼, 그럼 누구보다도 멋지고 무서운 정혼자님이 달려올 테니까. '칼리안'에겐 생각해야 할 게 더 많다는 사실을 되새겨야 하니까.

“얀, 작은 거울 좀 부탁할게.”

“…네, 잠시만요.”

얀이 빠르게 찾아서 건넨 작은 거울을 어설픈 손짓으로 미세하게 조정해서 제 턱 밀을 확인한 칼리안은 간신히 다시 쉬던 숨을 다시금 꺼트렸다. 턱 밑, 옛 칼리안의 네임이 새겨져 있던 자리. 새하얗게 빛나던 이름을 확인한 칼리안이 무너지듯 웃었다.

턱 밑에서 빛나던 이름은 '플란츠 룬 카이리스'였다. 말 지지리도 안 들어 처먹는 완두콩의 이름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가 그 선명한 네임을 확인하곤 뛸 듯이 좋아하던 기억이 선연했다.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이름은.

“…히나.”

가까이에서 자릴 지키고 서 있는 얀조차도 못 들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 나왔다. 아, 그렇지. 히나. 내 세상의 빛이지. 그럼. 그렇고 말고. 히나 말고 내가 가장 귀애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칼리안은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얀이 흠칫 몸을 떨었다.

네임이 바뀌었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절망을 심어준 그를 귀애할 방도가 더는 없었다는 걸까? 히나가 살아나서 원래 네임의 주인이 자리를 되찾은 걸까? 그도 아니면.

가능한 수를 최대한 짚어내던 칼리안이 웃음을 멈췄다. 은색의 딱 붙는 팔찌로 가려진 마른 손목을 떠올리며 툭툭 탁자를 건드렸다. 내 걸로 할 수 없다면 이걸로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툭, 툭. 어떻게 할까. 툭…

“얀, 형님께선 식사하셨대?”

“물어보고 올까요?”

“…아니. 아니야. 나중에.”

나중에. 받아들일 수 있다면.

*

"말을 나누러 오신 겁니까. 싸움을 나누러 오신 겁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질문이 인생에 다신 없을 골칫덩이를, 그러면서도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냈다.

설마 죽이러 올 정도로 바보는 아닐 거란 생각으로 별 생각 없이 던졌던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였다. 먼저 시비 거는 짓은 거의 안 하는 완두콩은 당연한 듯이 말 머리꼬리 다 잘라먹고 '말'이라고 대답했고, 말하자는데 한번 해보자는 셈으로 그 방문에 응했던 그날 밤.

"형님은…… 카밀론 궁에 가실 생각이 없으셨던 거군요."

플란츠의 속내를 알아차린 날.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속내를 말해줬던 날.

"……알겠습니다. 하지만, 전 그것만으로는 형님을 믿을 수가 없어서."

"…뭐."

"손목의 네임. 알려주십시오."

그 얼굴에 담긴 속내가 진심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카밀론 궁에 갈 생각이 없다는 것, 제 어머니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것. 옛 칼리안에게 했던 언행을 제외한 모든 것이 일말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는 것은 알았다. 떠나간 아이가 남겨준 기억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네임을 요구한 것은 뿌리 깊게 남아있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그 시점에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만 그래도 사고에 영향을 미치던 증오 때문이었다. 이미 그 손목에 누구의 이름이 빛나고 있는지 알면서도 물은 것은. …그래도 그런 제 감정을 억누를 명목으로 삼기 위한 수단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래서 그 대답을,

"내 네임은 이미 떠나가 버려서."

정직하다고 판단하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인질의 의도라면 의미 없을 텐데."

"…여전히 손목을 가려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임이 떠나갔으면 가리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요."

"……"

"믿지 않겠습니다."

"그러든가."

실없이 새 나오는 웃음소리가 희미했다. 이미 결론까지 다 냈었을 사람이, 제 말을 믿지 않겠다는 정체 모를 사람에게 참으로 유했다. 그때는 그조차도 아무 의미 없으리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뒤늦게 말수 적은 완두콩의 속내를 헤아려 본다.

어차피 믿든 말든 의미 없게 될 터이니 작은 선의를 베풀었다든가.

아니면 진짜로, 칼리안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교묘한 거짓말이었다든가.

"…하지만, 형님은 믿겠습니다."

고민하다가 내놓은 말이었다. 그 한결같은 숨기는 것 하나 없는 태도에 건네는 호의였다. 증오하면서도 얄팍하게 숨겨놓았던 흐릿한 구원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러든가."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 역시, 한결같았다.

*

그래서.

내 미친 아우님은 이 시간에 나에게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키리에의 네임은 히나입니다. 헤르츠 경의 네임은 세이렌 경이고요. 얀의 네임은 드미레아입니다. 아, 체이스 형님의 네임은 아리안느입니다. 세크리티아의 차기 왕비님이시죠. 사랑꾼이십니다.”

전혀 관심 없는 이들의 우애사, 연애사를 강제로 알게 된 플란츠가 질린 얼굴로 칼리안을 바라보았다.

자, 따져보자. 하나, 지금은 남들 다 자는 시간이다. 둘, 저놈은 그런 시간에 테라스로 쳐들어와서 자던 사람을 깨워놨다. 셋,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꺼낸 얘기의 서두가 저딴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 개쯤 있지만 미친 동생을 대상으로는 끝없이 늘어나는 인내심이 점멸해갔다. 내가 지금 신경줄이 짧아져 가는 게 비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석찬까지만 해도 멀쩡하시던 아우님은 또 왜 이렇게 갑자기 짖으시나. 생기 가득한 연두색 눈이 그런 기색을 담아 나른하게 풀어졌다. 그걸 본 칼리안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웃는 게 아니라는 것을 조금 뒤늦게 깨달아서, 플란츠는 동생 놈이 뒤이어 내놓은 폭탄에 무심코 반응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제 네임은 히나입니다.”

“……”

“알고 계셨습니까? 원래는 형님이셨습니다. 제 네임의 주인.”

“……반말.”

“주인 말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하십니까? 이 아우가 이리도 열심히 서두를 열었는데요. 귀족들 앞에서 얘기할 때도 내켜하지 않는 걸 형님께 이 얘기 한다고 준비도 많이 했는데요. 아우가 하려는 말에 집중해주시면 안되는 겁니까.”

“짖지. 중요해. 왜.”

“하여간…. …제 네임이 왜 바뀌었는지, 이젠 받아들일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짧은 동요 끝에 긴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저도 모르게 서러워질 정도로 짧았다. 칼리안은 마치 앨런처럼 깊어진 큰 눈을 반 정도 접으며 극히 짧은 마지막 질문에 대답했다. 플란츠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굳이 배려할 필요는 없겠지만. …무슨 뜻인지 이미 다 아는 거 아닐까. 축복을 머리에 받은 거 같은 완두콩은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칼리안은 실소를 머금었다.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의 시선이 푸른 카디건의 소매 부분에 머물렀다.

“형님.”

“어.”

“손목의 네임, 보여주십시오.”

네임이 발현되었을 열 번째 생일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가리고 다니던 그 손목. 단 한번, 딱 한 명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던 손목의 네임.

그것을 보여달라고 요구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저도 모르게 손목을 가린 플란츠가 고운 미간을 찡그러트렸다.

이미 거절했었는데. 이유도 분명히 말했는데. 물론 믿지 않겠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보여주기 싫어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 텐데. 이유를 모를 것도 없긴 하지만. 내 동생 쟤 미친 놈이긴 하지만 그것도 신경 안 쓰고 이럴 정도로 바보 같은 놈 아닌데.

플란츠의 낮은 목소리가 더 낮게 울렸다.

“…내 아우님께서, 돌다 못해 기어코 카이리스를 한 바퀴 돌고 오신 모양인데.”

“왜요. 전 이미 말씀드렸는데.”

“알려달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반말.”

“요. 미리 드리는 대가였습니다. 손목, 보여주세요.”

“싫어.”

플란츠는 다른 한쪽 손으로 팔찌가 걸린 손목을 잡아서 가렸다.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사가 너무나 뚜렷해서 칼리안은 피식 웃었다.

순하디 순한 형님이 이렇게까지 거절할 이유가 또 뭐가 있을까. 굳이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사무친 적이 없었다. 지금보다 더 작은 손목에서 새하얗게 빛나던 이름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그려졌다.

“……왜 그렇게 거부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제 거잖아요. 저 기억 있는데요.”

“그럼 왜.”

“보고 싶어서요. 이유 말해주세요. 그때 그건 안 믿으니까요.”

“하…”

깊은 한숨 말고는 나오는 게 없었다. 플란츠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짚을 생각조차 못한 채 여전히 손목을 꾹 쥔 채로 눈을 감았다. 저 시끄러운 놈, 안 보면 이 두통이 좀 가실까 싶어서.

형님, 애처로운 목소리가 플란츠의 귀를 간지럽혔다. 형님, 제발요. 이미 말했던 이유는 믿을 생각도 없다 하니 할 말이 없었다. 형님. 안 믿겠다는 놈 어차피 나중엔 상관 없겠거니 하고 넘어간 게 죄라면 죄일 뿐이지. 형님, 아니 진짜로. 아 진짜.

플란츠는 결국 대충 작게 대답했다. 못 참은 건지 못 이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저놈에게 형님인 건 맞는데 이렇게 짧은 간격으로 계속 들으니 질리다 못해 귀에 딱지가 얹을 것 같아서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잠깐 삼가서 온건한 단어로 바꾸고는 내뱉었다.

“……그냥.”

“그냥… 정말 그냥입니까.”

“그래.”

“그럼 보여주세요. 형님께 굳이 힘을 쓰고 싶진 않습니다.”

“아우님께서 퍽이나.”

퍽이나 힘을 쓰겠다고, 굳이 말하지 않은 뒷말이 선명했다. 나른하게 뜨인 연두색 눈이 생생한 빛을 띄었다. 루시 발바닥 색 연분홍 입술이 한쪽 끝만 비죽하게 올라갔다.

아. 칼리안은 쓰디쓴 침을 삼켜냈다. 조절하지 못해서 내놓은 살기에 죽은 눈으로도 경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팔찌가 있는 손은 잡은 손의 힘을 풀지도 않아서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건만.

가만히 눈을 감은 얼굴에선 한치의 경계심도 볼 수 없었다. 언제 이렇게 신뢰를 쌓은 건지. 이건 순한 건지 독한 건지…. 칼리안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정말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어디에. 왜.”

“많은 부분에. 확신이 필요해서.”

플란츠는 그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생각이 많은 듯, 그 모습조차도 점점 느려졌다. 한없이 고요한 저 두 눈 안에서 무슨 생각들이 흘러가고 있는 걸까. 깊은 생각을 할 때 하곤 하는 얼굴, 그 얼굴에서 눈만 가뭇가뭇 뜨고 있는 모습에 칼리안은 그저 기다렸다.

시간은 어느덧 이른 밤 동쪽 하늘에서 떠오른 별자리가 고개 들어 정확히 위를 봤을 때 보일 정도로 무르익어 있었다. 소리는 체르밀궁 4층의 침실이 조용해진 이상 밤벌레들의 노랫소리가 유일했고, 움직임은 눈앞의 사람과 자신을 제외하면 테라스 바깥에서 불어든 바람이 사뿐사뿐 추는 춤으로 흩날리는 것 외엔 없었다.

따라서- 홀로 움직이는 속눈썹은 조용한 밤 속 유일한 생명이었다. 칼리안은 그 유일한 미동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그 머리가 어떤 결론을 내릴까, 궁금해하면서.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방도를 찾으려고.

“……알겠지만, 모르겠군.”

“…예?”

“왜 갑자기 그 방법을 떠올렸는지.”

긴 침묵 끝에 나온 말이 길다. 칼리안은 웃는 얼굴 그대로 멈췄다.

이정도 길이의 말은 그래도 많이 했지만, 많이 들어봤지만. 이 상황에서 이 길이는, 그렇지.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길이의 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고 그럼에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니까 판단을 보류하고 '왜' 한마디만 던지는 효율적인 질문으로 '아무리 저라도 그렇게 맥락 없이 머리꼬리 다 잘라낸 짧은 말까지 알아듣지는 못하는데요.' 같은 대답을 끌어내서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가 더 늘여서 던졌을 질문이 무려 한 번에 나왔다. 누가 봐도 이 질문, 어색하고 이질적이고 불길하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질문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불길함 하나겠는가? 대답해주기도 곤란하기까지 한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 답을 아는 것이 저에게 르니에리일지 아닐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답해주지 못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누가 축복을 머리에 받은 완두콩 아니랄까 봐,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 단번에 말문을 막아버리는 지점을 잘도 찔러온다.

말문을 잃은 칼리안은 결국 주섬주섬 얀 몰래 챙겨왔던 미지근하게 식은 민트 차를 꺼내서 컵에 따라 한 모금 머금었다. 무자비하게 빈 곳을 찔러오는 완두콩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갑자기 차를 꺼내냐는 듯한 한심한 것을 보는 눈초리가 상처였지만 모르는 척 했다.

아, 식어서 맛이 더 짙게 느껴진다. 칼리안은 순간 성공적으로 플란츠의 시선을 잊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 제 긴 말보다 더 어색한 모습을 또렷하게 보았다.

“말해. 이유.”

“……그냥 떠오른 건데요.”

“속아줄 것 같나.”

“그건 아닙니다만.”

선명하게 치켜뜬 연녹색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칼리안은 필사적으로 그 눈을 피하려고 애썼다. 얀의 민트차의 효과가 떨어졌다.

건수 잡은 완두콩, 무섭다. 이미 여러 번 겪어봤는데 어디까지 알아낼지 몰라서 무섭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 탓할 대상이 저밖에 없다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칼리안은 차라리 도망쳐버릴까 고민하며 고집스레 눈을 감았다. 제 확신과 플란츠의 르니에리 중에선 고민할 게 없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을 노려보다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정말이지 숨기는 것 못하는 아우님은, 이 순간에도 너무나 많은 단서를 스스로 내주고 있었다. 저는 모르겠지만서도.

방 안의 둘 다 범인(凡人)의 머리는 뛰어넘은 지 오래였지만 다른 하나보다도 몇 층을 더 뛰어넘은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칼리안의 패착은 플란츠에게 너무 시간을 많이 줬다는 것이다. 결론을 내린 플란츠는 여유로운 척 눈감은 칼리안을 무시하며 등받이에 느긋이 등을 기댔다.

“전하의 네임이 나인가.”

아니

진짜

어떻게안거야힌트가될만한거하나도말안했는데.

정말이지

시스파니안이시여!

칼리안은 헤이시아 궁 지하에 대해 들켰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땐 그나마 실리케나 브리센과 관련 없다는 말을 하기라도 했지, 이번엔 진짜 말 하나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 결론이 나느냐는 당황 가득한 시선이 여유로운 태도에 꽂혀 들었다. 플란츠는 고양이도 자겠다 못하던 거 실컷 하겠다는 듯이 꼬고 있던 다리를 바꾸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운명 따위 믿지도 않는 아우님께서 네임을 방도로 떠올렸으니, 근처에 있는 사람의 네임을 본 것일 테고.”

평소 행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시작점.

“그렇다면 숨길 이유도 없고 일상에서 계속 곁에 있는 시종의 것은 아닐 테고. 내게 말하는 걸 꺼릴 만한 인물은 전하나 형님… 혹은 브리센의 것일 텐데.”

지금 이 자리에서 숨기려 드는 꼴에서 추론할 수 있는 조건.

“브리센의 것에 아우님이 관심을 가질 일은 없으니 제외. 란델 형님의 것을 보았다기엔 보여주셨을 리 없으니 제외.”

조건에 맞는 이들의 결격 사유.

고작 세 가지 전제를 고려하는 것으로 단 한 명의 인물만이 용의선상에 남았다. 반박하려 들기에는 무서우리만치 출력이 빨라서 듣고만 있던 칼리안이 우울한 어조로 플란츠의 말을 이었다.

“…전하밖에 안 남는군요.”

“전하의 네임을 본 것만으로는 이렇게 깊어지지 않을 테니, 아우님께 상당히 가까운 인물이 전하의 네임인 걸 테고.”

두번째 결론을 도출해낸 조건이 하나 세워졌다. 이걸로 벌써 걸러지는 이가 수십이다.

“전하와 아우님이 공통으로 겹치는 사람은 체르밀의 셋, 발칸의 둘, 지그프리드 공작, 그리고 아우님 어머니 정도인데.”

순식간에 일곱밖에 안 남았다.

“아우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는 전하랑 친한 편 아니고. 지그프리드 공작은 아우님과 친한 편 아니고.”

죽은 사람이 새겨진 네임은 흩어지기 때문에 프레이야가 제외됐다.

르메인이랑 안 친하니까 네임일 리 없을 아르센이 제외됐다. 칼리안이랑 안 친하니까 칼리안을 흔든 원인일 리 없을 공작이 제외됐다.

넷 남았다.

“아우님이나 형님이나 마나실 후작이라면 내 아우님께서 이렇게 내 네임 보여달라고 짖을 필요 없을 테니.”

이건 왠지 모르겠다. 너무 순식간에 건너뛰었다.

“왜 안 짖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마나실 후작이 전하의 네임이었다면 아우님께서 사색에 빠지는 대신 후작 앞에 가서 짖었을 거고. 형님이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을 테고. 아우님이라면 아예 필요 없으니.”

평소 행동 방식으로 추론했다는 것이다. 잠시 두 경우를 상상해본 칼리안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해도 플란츠가 언급한 것 외의 제 반응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르메인의 네임이 칼리안이라면.

제 이름이 새겨진 손목 보겠다고 짖어댔을 리가 없으니.

……결국 하나 남았다.

칼리안이 네임 때문에 이렇게 짖는 원인은 르메인의 네임, 르메인의 네임은 플란츠. 부정할 엄두도 못 낼 만큼 정확하고 간단한 결론에 칼리안은 두 손을 모아 얼굴을 가렸다. 억울한 마음을 가득 담아 손가락 사이로 별짓 안 한 것처럼 태평한 허연 얼굴을 노려봤다.

“……그게 그 짧은 시간에 연관된다는 겁니까.”

“더 알아낸 것도 있는데.”

말해줘? 그리 묻듯 플란츠가 고개를 기울였다. 가벼운 움직임과 달리 그 의도의 무게가 너무나도 무거워서 칼리안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서 더 알아낸 것이 있다고 해봤자 칼리안 자신의 정곡을 후벼파는 것일 게 분명했다. 또 저 머리 무섭다고 느낄 법한 것이거나.

그 거절에, 플란츠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예.”

“전하의 손목에 있는 내 녹색 이름을 본 아우님께서 그냥 나왔을 리는 없고.”

“녹색인 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 아.”

빠르게 사족을 덧붙이던 칼리안은 방금의 질문-같은 말을 후회했다. 깨달은 즉시 말을 끊어내긴 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다 들은 이건 상식 아니냐는 시선이 따가웠다. 나른한 목소리가 질책하듯,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내려앉았다.

“아무리 내 아우님께서 네임에 관심이 없으시다지만.”

“……죄송합니다. 순간 잊었습니다.”

“분홍, 연인. 초록, 자식. 노랑, 부모. 하양, 형제. 파랑 혹은 빨강, 그 외. …아, 보라나 주황도 출현이 확인된 적은 있다던가.”

“알고 있습니다…”

못미덥다는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가 흩어졌다. …업보지. 검은색 외의 색엔 관심도 없었어서. 씁쓰름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칼리안은 화사하게 웃었다. 통할 거란 기대는 얼마 없었지만 빨리 넘어가 달라는 의도였다. 아닌 것 같지만 의외로 동생에게 무른 플란츠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께서 무슨 말을 하셨는데. 그래서.”

“……형님 오늘 제 말문 막아버리려고 작정하셨습니까.”

“짖지 말고. 말.”

“…예에… 별말 없으시긴 했지만요.”

이어진 체념의 의미를 담은 한숨은 칼리안의 몫이었다.

*

오찬을 들고 난 나른한 정오, 르메인이 여느 때와 같이 왕자들과 지금껏 하지 못했던 대화를 하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다. 셋이 다 같이 있으면 왕자들이 서로의 눈치만 보고 전하께선 또 소처럼 굴다가 하나하나의 마음을 채 들여다보지 못할 게 뻔하니 그냥 따로따로 보라는 앨런의 비수 가득한 직언을 받아들인 르메인이 조심스럽게 두드린 문이기도 했다.

플란츠는 몰라도 칼리안은 그 자리에 대해 별 생각 없었다. 르메인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제 차례에서 르메인이 안심한 듯 편한 태도를 취하리라고, 무료한 김에 곤란할 정도로 똑똑한 완두콩의 사고방식을 흉내 내서 예상해보았을 뿐.

말할 것도 없이 그 자리에 유감이 많은 란델은 언제나 그렇듯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거절했다. 그래서 속 모를 마음 약한 완두콩이 이미 한번 거절당해 심란해할 사람에게 또 상처 주는 건 좀 그렇다고 순순히 나갔다. 그랬으니 둘째에게서 조금의 위안을 받으셨을 것이고, 그런 두 아들과의 시간을 지나 외적으론 가장 살가운 막내를 대할 땐 좀 편해지시지 않겠나. 플란츠에 버금가는 명추리를 톡톡히 해낸 칼리안이 예상대로 편한 얼굴의 르메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이리 앉거라."

익숙하지도 않은 완두콩 흉내를 내서일까, 문득 눈앞의 왕이 가엽다는 생각을 한 칼리안은 느리게 눈을 감는 것으로 상념을 털어냈다. 제가 떠올렸음에도 참으로 어색하고 달갑지 않은 감상이다. 분명 무르고 연약한 플란츠의 생각을 따라 되짚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는 아니라지만 속으로는 이미 제 아비에게 받은 자신의 상처를 낫지도 않았는데 흙으로 덮어버린 놈이니까. 방금은 제가 생각해도 그런 놈의 생각을 닮아있었으니까. 인정하기 싫기는 해도.

칼리안은 굳이 르메인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다. 르메인에게 아무 감정도 없다는 것은 결코 그를 용서할 마음이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의 무지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중 한 사람은 뒤늦은 사과를 받을 수도 없었으므로. 완두콩과는 달리 그 아이를 대신하고 있는 제게는 그럴 권한이 없었으니까. 단호하게 선을 그은 칼리안은 조심스레 걸어져 오는 사소한 질문들에 대답을 이어갔다.

오늘은 하늘이 맑더구나. 좋아하는 날씨가 있더냐. 키가 많이 커졌구나. 어떤 집안에선 당연하지만 이 집안에선 이제야 시작된 흔한 질문들에 나름대로 성실히 대답하던 칼리안이 적당한 때에 손을 들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조곤조곤하지만 역시 가까워진 것 같지는 않은 거리를 아쉬운 듯 보던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까지 확인한 칼리안이 꾸벅 인사하곤 자리를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몸을 일으켰다.

르메인의 손목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익숙한 이름을 보기 전까진.

이름. 더없이 익숙하고 난데없어서 놀라운 그 이름. 왜 전하의 손목에 형님의 이름이 쓰여 있는 거지. 너무나 갑작스러워 머리를 굴리지 못하던 칼리안이 이내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네임.

신체 일부분에 새겨지는,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서 인생에서 가장 귀애하는 상대의 이름.

르메인의 '네임'이 플란츠라면.

칼리안은 잠시 숨을 멈췄다가 크게 삼켜냈다. 온갖 상념이 다 들기 시작했다. 아니, 잠시 멈춰. 지금은 불필요한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칼리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전하. 손목에 있는 거, 혹시…"

"아. …미안하구나. 조금 전에 고민하다가 가리는 걸 잊었단다."

"아닙니다. 그거, 혹시 전하의…"

"……그래. 내 네임이다."

르메인은 칼리안의 반응에서야 뒤늦게 제 손목을 보고 당혹을 금치 못했다. 고민하다가 잊었다는 말로 보아 플란츠에게 제 네임을 보여줄지, 그래도 되는지 고민하다가 결국 보여주지 못한 모양이었다. 완두콩이 안 시든 것까지 확인하고 나왔던 칼리안이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빠르게 정황을 판단했다. 르메인은 서둘러 팔찌를 다시 꽉 조여 녹색 네임을 가려내곤 급하게 입을 열었다.

"칼리안. 내 네임이 플란츠이긴 하지만, 난 너희를 다 공평하게 보고…. …아니, 마주하려고 하고 있다.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아뇨, 그건 상관 없습니다.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전하, 그보다 그 네임에 관련해서. 이야기를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임에 대해서?"

여태 정 없던 아비가 인생에서 가장 귀히 여길 대상이 제 형이라는 것엔 별 감정 없고 관심도 없고 그저 궁금하다는 막내의 모습은 급하게 입을 연 르메인이 황당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방금 전, 누가 봐도 크게 놀란 듯한 반응을 했던 아들이기에 더욱.

…아니, 둘째와 막내는 친하게 잘 지내는 모양이었으니.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건가? 앨런 마나실이 본다면 '소 같은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럴 시간에 쓸모있는 생각이나 하십시오.'라고 말투만 정중하게 말할 얼굴로 멍하니 두 눈을 깜박이던 르메인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 없지. 무슨 얘기가 듣고 싶으냐?"

"형님이, 언제부터. …아니, 그냥 전부요. 전하의 네임에 대해."

"전부라… 제법 긴 이야기가 되겠구나."

르메인은 거의 다 마신 찻잔의 가장자리를 쓸었다. 그 외모나 겉으로 드러나는 요소만큼은 거의 모두가 외탁인 플란츠가 유일하게 르메인을 닮은 낮은 목소리가 오래된 기억 상자를 열기 시작한 영향인지 플란츠보다 낮아졌다. 르메인은 손수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을 채워냈다.

"내 네임은 열 살에 생기지 않았다. 그 이전까진 마냥 내 형님… 너희의 숙부가 내 네임이 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상상만 했었지. 하여 언제 네임이 생길까, 어디에 생길까, 누구일까, 간질간질한 기대감을 품고 살았단다."

"……"

"란델이 태어났을 때 즈음까지도 없었지. 정략이긴 하나 내 아내도, 내 자식도 아니라면 내 네임은 누구일까. 있기는 한 걸까. ……기대를 그때쯤 버렸다. 없는 것만 같아서. 네 로젤리타 때만 해도 안 좋았지만, 그땐 나라 꼴이 더 말이 아녔기에."

"…오래 없으셨군요."

"네임이 생기는 기준은 정확히 발견되지 않았고 추측한 것만 있으니 말이다. 내가 이토록 무능한 인사라 내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 생각할 정도로 몰려 있었단다. 그래서- 손목에 첫 네임이 새겨졌을 땐 당황했지."

첫 네임, 칼리안은 숨을 삼켰다.

플란츠가 첫 네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 지칭은.

그리고.

아마도, 그 첫 네임의 주인은.

"분홍빛으로 벚꽃처럼 빛나던 그 이름은…… 그래. 네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

“프레이야, 꽃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때만 해도 네임을 믿지 않았지만, 네임이 생겨서 감정이 생겼는지, 감정이 생길 운명이기에 네임이 새겨졌는지… 사랑하게 되었다. 네임의 운명론을 믿게 되었지.”

“…네임이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그 설 말인가요..”

“그래. 네임은 오래 보아야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는 격언이 너무나 마음에 사무치게 다가와서 말이다. 그즈음의 어느 순간부터 믿고 있단다. …프레이야가 죽기 전에는, 말이지.”

네임은 네임의 주인이 죽으면 흩어져 사라진다.

칼리안은 몇 번 네임이 흩어진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이미 떠나간 네임으로 마음은 아픈데, 흩어지는 데엔 고통이 없어서 서럽다고. 분명 몸은 아픈 곳이 없는데 이곳저곳 뼈마디까지 아프다고, 심장을 잃은 기분이라고…

듣기만 했지 경험해본 적은 없는 이야기였다. 네임을 믿지도 않는 칼리안에겐 공감도 잘 안되는, 그런-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래. '칼리안'은 공감하지 못했다.

"프레이야가 죽은 다음, 내 첫 네임이 흩어진 다음엔 내 손목을 가리고 다닐 필요가 없었지. 하여 빈 손목을 보다가, 무정하게 식어버린 내 마음을 인지하지도 못하다가…"

아, 이제 듣고 싶었던 부분이다. 칼리안은 한 귀로 흘려보내던 르메인의 목소리에 다시금 집중했다.

"손목에서 다시금 빛이 나기 시작한 것은, 칼리안 네가 체르밀 궁으로 궁을 옮기고 며칠 후였다."

"……!"

"다시 네임이 빛난다면, 녹색이라면, 네 이름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도 같구나. 하나 그때의 난 지금보다 더 모자란 놈이었어서. …내 네임이 실리케와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였다. 내 아이들이니 사랑하면서도 지키기 위함이라는 이유로 모르는 척하고, 하필 내 네임이 그 아이라서 편애하게 될까 봐 더욱 모질게 대했다. 그런 치라도 어미이니, 그 아이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듣지 않았고… 보지 않았다."

"……"

"란델에게도, 네게도, 몹쓸 짓을 계속했지만… 플란츠 그 아이에겐, 내가 더했지. 더 그릇된 짓을 많이 했었지."

그런 것 같네요, 칼리안은 내뱉지 못 할 말을 속으로 삼켜 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기민하고 똑똑한 완두콩이다. 르니에리의 향이 날 때부터 주변에 가득한데도 향이 옷에 묻을지언정 그 몸에서 묻어난 적은 없을 정도로 선한 놈이다.

그런 플란츠가, 자신을 도구로조차 보지 않는 아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자신에겐 특히 더 모질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무엇을 이유로 추측했겠는가. 망나니였던 모습이 죄다 연기였던 게 기적이다. 아니, 르니에리에 감싸였음에도 르니에리 향이 나지는 않던 것을 기적이라고 하는 게 옳으려나.

"그런, 처음에는 그런 이유로 시작되었던 무시는… 어느덧 현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사랑하니 아껴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내 의무를 벗어났고, 망각했다. …그 덕에 플란츠와 실리케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만이 그 시절의 유일한 좋은 결과였지."

최악을 피했다고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건 아니지 않은가. 칼리안은 불쑥 튀어나오려는 반박을, 일갈을 조용히 다스렸다. 인내심은 거의 없거나 하나밖에 없는 칼리안이지만 아직 원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르메인을 협박할 수는 없었다.

"……그때는, 내가 실리케와의 아이를 아낀다는 것에 덜컥 위기감을 느꼈고. 며칠 전까지는 내가 가장 귀애하는 대상이 네가 아니라는 것에 의아해하고 있었다만."

"……"

"이제는 내 네임이 그 아이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네임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아. …너무 늦었지만."

"……"

르메인의 깊은 벽안이 온화하게 풀렸다. 저 위의 무서운 분과 정말 많이 닮은 그 눈이 플란츠를 얘기하며 부드러워진 것이 다소 어색하여, 칼리안은 생각에서 벗어났다. 왕가의 과거는 저번 생에서도 같았을 테니까. 그래서, 더 깨졌나 해서. 어울리지도 않게 과거에 빠져있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들을 수 있을까요. 이유. 그리고, 알게 되신 네임에 대해."

르메인도 고개를 들었다. 선명하게, 진지하게, 단단하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을 마주 보았다.

저 눈이 흔들릴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예감이 들었는지.

르메인은 느리게 한 입도 대지 않은 잔을 기울였다.

"……그래. 너라면 괜찮겠지."

"……"

"난 분명 너희를 모두 사랑한단다. 란델은 내가 너무 잘못한 것이 많아서 속죄도 못하며, 기대하지 못하면서도 사랑하고. 너는 내게 아무 감정도 없지만 내겐 가장 강한 행운이라…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예."

"하나 그 아이는… 플란츠는. 내게 분명히 감정이 있을 텐데도 받아주고, 마주 보려 하고, 어찌 보면 너희 중 가장 '자라기' 힘들었을 텐데도 자라서. …은은하지만, 나를 바꿔보려 해주니."

아.

칼리안은 마른침을 삼켜냈다.

"내 돌이키지 못할 과오를 어쩌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해주는 그 아이가, 내 행복일 듯하여. 내가 다른 감정 없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엔 결국 그 아이가 유일할 것 같아서. ……그래서일 것 같구나. 내 네임이 그 아이인 이유는."

칼리안은 르메인이 알 것 같다던 '네임'에 대해서 깨달았다. 아까 전 운명론에 대해서 말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결국엔 인정하게 되니까, 미래와 현재의 가능성을 모두 아울러서 결국엔 가장 귀애하는 대상을 신체에 새겨넣는 거스를 수 없는 섭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뀌지 않는다. 결코. 죽음 외의 그 어떤 이유로든.

그와 동시에, 르메인이 말하는 저 이유가 지극히 희망적이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 좀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 마음 약해 빠져서 자기 잘못 하나로 남의 잘못 열을 용서해줄 것이 분명한 완두콩에게 해야 할지 제 잘못 다 알아놓고 아직도 소처럼 희망하고 느린 전하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 아파 미치겠다.

그래도 일단.

누굴 원망하고 자시고 하기 전에. 우선.

가뜩이나 잔뜩 시든 완두콩 파릇파릇 건강하게 키우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하는 사람 앞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꼴이, 별로 안 죄송하지만 별로니까.

칼리안은 꼭, 능력 좋고 세렌티의 축복을 받은 것이 분명한 자상하신 제 아버지께 이 일을 이르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말을 들은 앨런이 칼리안이 방을 나서자마자 르메인의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몇 시간이고 잔소리와 독설을 박아주고는 남은 일 해줄 기분 아니라며 자택으로 귀가해버린 것은, 음. 칼리안은 모르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완두콩처럼 예측만 했을 뿐이니.

*

기껏해야 며칠 전 얘기지만 아무튼 그것을 전부 다 들은 플란츠의 반응은 간단하고 깊고 짧았다.

진짜

내동생 쟤를 어떡하지.

얘 진짜 나한테 왜 이러지.

그냥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닌 거 같은데.

……조금 전에 이런 생각 했던 거 같은데, 라고 얼핏 생각한 연녹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올라 이 밤에도 붉게 타오르는 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아까 생각했든 어제 생각했든 내일 생각할 예정이든 거의 언제나 하는 생각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쓸데없는 데에 기력을 소모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자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플란츠는 잠시 테라스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헛된 일을 하고 있었다는 후회가 아니라 진짜 피곤했다. 뭐 했길래 이렇지. 하나, 말 많이 했고. 둘, 내 동생 쟤가 짖는 거 몇 시간 동안이나 들었고. 셋, 전하가 또 소짓하신 얘기를 들었고. 넷, 지금 시간 평소에 자던 그 시간이고. 다섯, 낮 동안 논 거 아니라 일하다가 야근하고 왔고.

……방금 놈이 한 얘기나 정리해야지. 정리만 다 하면 진짜 말 안 하련다. 플란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잠시 누르다가 베이지색 엷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었다. 너무 많은 생각으로 무거워서 눈도 감았다. 깊은 생각에 빠졌을 때의 얼굴이 또 한 번 나타났다. 이번엔 자세까지 완벽하게 평소의 그 모습이었다.

할 말을 마치고 플란츠의 말을 기다리는 칼리안은 유독 조용했다. 원래 말 없는 사람이 생각에 빠져들고 말 많은 사람이 입 다무니 아까처럼 다시금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반갑게 사용해 정리는 물론 들은 적 없는 속내까지 모두 생각해내서 머리도 식히고 차분해진 플란츠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전하의 네임 보고, 과거 듣고, 속내 듣고, 희망 듣다가 짜증 나서 마법사에게 일러서 혼내게 시켰다는 거지.”

“정확합니다.”

“그 김에 네임이 어지간해선 안 바뀌는 거 알았으니까 그걸로 아우님 자신에 대해 확신 좀 하고 뱀 만날까 했다고.”

“……네… 아니 형님 본인에 대한 건 신경 안 쓰십니까. 전 그것 때문에 말하기 망설였는데요. 형님 르니에리일까봐 걱정은 되는데 대답하라고 성화시니 안절부절못하다가 싫다고 도망친 아우 앞에서.”

“반말.”

“요. 대체 반말 지적하는 기준이 어떻게 된. ……아니 잠깐, 제가 뱀 만난다는 얘기 했습니까. 저 자신에 대한 확신이라는 얘기는 안 한 것 같은데요.”

칼리안은 넘어가선 안될 말을 가까스로 떠올렸다. 아무래도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아서, 속이 시끄러워졌을 것 같아서 기껏 신경 써줬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 본인에 대해선 일절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상황 정리나 하는 태도랑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저놈의 반말 지적 기준에 정신 팔려서 그냥 넘어갈 뻔했다.

아, 방금 저놈은 기준 말한 거다. 어디 파릇파릇한 분 아니라.

진짜다.

“왜.”

플란츠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말하기 귀찮다는 티가 풀풀 났다. 말 길게 안 할 거니까 이제 그냥 네가 알아서 잘 알아들어라, 라고 말하는 눈이 선명하고 나른했다. 피곤한 기색이 눈으로 그 말 하는 데에서도 새 나왔다.

말 잘 하다가 갑자기 또 왜 이래. 칼리안은 곤란한 듯 웃다가 문득 깨달았다.

완두콩, 평소보다 말 몇 배는 많이 했다.

야근하고 늦게 왔다. 지금 시간 평소라면 제법 깊게 잠들어있을 시간이다.

“…형님 이제 말 귀찮으십니까.”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응'이라든가 '어'라든가의 한 음절도 소리내기 귀찮은 모양이다. 하긴, 평소에 비하면 말 많이 하긴 했지. 피곤할 법도 하고. 칼리안은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멈췄다.

……이런 태도 때문에 말이 점점 더 짧아지시는 거 아니겠지.

에이, 설마.

칼리안은 혀를 차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용건이었던 네임은 이미 플란츠의 르니에리와 비교해서 우선권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 잠 방해하고 확신 얻겠다고 설칠 생각은 없었다.

검으로 무는 일은 몰라도 건강을 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서로를 애증 하는 사이이나 그래도 동생이니.

얌전히 앉아있던 플란츠가 갑자기 일어서는 칼리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피곤하신 듯 보여서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붉은 눈이 졸린 기색 하나 없이 매끄럽게 웃었다. 그와 비교해서 피곤에 절어있던 생기 가득한 연두색 눈이 불만스럽게 좁혀졌다.

“앉아.”

“왜요. 졸리시면서.”

“있어. 할 말. 그리고 반말.”

“…요.”

칼리안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진짜 잘 참는데. 이제 진짜 인내심 많이 늘었는데. 술 마셔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미동 없이 그대로인 플란츠를 바라보았다.

플란츠는 가만히, 느리게, 두어 번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칼리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역시 졸리시면 나중에-”

“에반 먼저 처리하고, 뱀이 이용하려는 엘프도 확인하고, 뱀 처리하러 간다고 했으니까.”

“……”

이건.

“얼마 전에 소공작이 아우님 과거 눈치챘다고 들었고. 그럼 이 시기에 필요할 만한 확신은 하나일 테니.”

설명이다.

제 자신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눈치챈 이유. 데블란을 만나러 갈 것을 알아챈 이유.

그것들을 궁금해했다는 것을 알아서.

또한 일러줄 것이 있어서.

미리 말해주는 설명.

“……그렇습니까.”

“칼리안.”

“네.”

“내 손목은 그대로야.”

믿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때 그대로라는 걸까.

희고 눈부시게 빛나던 그때 그대로라는 걸까.

“내 거짓말을 밝혀내든, 내 솔직함을 확인해내든. 지금 내 손목을 확인하는 건 오히려 르니에리만한 독일 텐데.”

칼리안은 숨을 멈췄다.

“……그냥 묻어두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으면 안 되겠나.”

이것이 바라는 것 하나 없던 이의 부탁이라서. 말로 전하지 않은 배려라서. 숨길 생각 없는 걱정이라서.

형의

마음이라서.

“……네.”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하지 못했다.

숨기지 말고 드러내 줬으면 했던 감정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

"군사권을 넘겨드리는 이 큰일에, 저로서도 왕자님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욕심이 뒤룩뒤룩 찐 녹색 눈동자를 기억했다. 거울로 본 색이 그 눈을 닮아있어서 거울을 치워냈던 적이 있었다.

"왕자님 손목의, 무슨 색인지, 누구인지 모를… 왕자님의 네임."

열 살 생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손목에 팔찌를 차고 다녔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승냥이처럼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리는 주제에 검을 다루는 이라고, 굳은 살이 박여있는 손이 손목의 팔찌를 가리켰다.

…슬슬 귀찮은데, 왕족을 향해 손가락질했다고 처벌할 수는 없겠지. 소용없을 생각을 곤히 지워버렸다.

"그를 보여주시면 왕자님께서 왕관을 쓰실 수 있도록 더욱더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물론, 군사권도 넘겨드리고요."

네임을 알려달라는 말은 귀족들 사이에선 인질로 잡겠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 말을 모르지 않을 에반이 다 늙은 얼굴로 보기 싫은 웃음을 띄었다. 보기 싫은 웃음은 몇 사람 더 가지고 있었지만, 그 누구의 것도 이것보다 더 역겹지는 않았던 것 같다.

"……후작."

그러니 이것은.

"네임의 의미는 그대도 알지 않나.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에 대한 조소.

"그러니 부탁드리는 것이지요."

이미 저 높이 올라가 버린 자에 대한―

"예? 왕자님."

경의.

"……안 되지, 후작. 다른 것을 생각해 봐."

"군사권을 먼저 요구하신 것은 왕자님 아니셨습니까."

"머리를 쓰라고 한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는지… 후작. 다시 한번 생각해."

내 어머니가.

내 네임을.

냅뒀을 것 같냐고.

여전히 어리석은 눈 속이 맹렬하게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실리케 브리센이 제 아들의 네임을 멀쩡히 놔두었을까. 제 네임은 아예 없고 아들의 약점은 모조리 없애려 했을 그 사람이.

멀지않아 결론을 내린 탁한 녹색 눈이 나른하게 뜨여있을 연녹색 눈을 내려다보았다.

"네임의 의미를 물었던 것도 그 뜻이셨던 겁니까?"

"늦어."

"이런… 실례했습니다. 그럼 팔찌는 어째서?"

답지 않게 날카로운 질문.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진짜로 가늠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보이도록 꾸며냈다.

연기를 못하지는 않았으니까. 칼리안과는 다르게.

"……한 달이던가. 어린 몸에 습관이 들었던 그 짧은 기간이."

"아."

"그런 이유로, 다른 거. 후작."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죠."

에반은 자리를 떴다. 들키지 않았구나, 싶어서 빈틈없이 딱 붙은 팔찌를, 팔찌 아래를 매만졌다. 빨리 숨겨야 할 안도감을 잠시 내뱉었다.

무엇을 가지고 올지는 예상되었으나, 목숨을 거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에. 비었는지, 이름이 적혀 있을지 모를 손목은 숨겨놓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딱히 거짓말은 안 했나. 안도가 물러나자 실없는 웃음이 새 나왔다.

그저. 내 아우님께서.

"조금 골치 아파지시겠군."

그건 좀 미안한 일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뭐.

살려두겠다 하셨으니 어련히 살려두시겠지.

그렇지?

……칼리안.

*

칼리안.

네. 말씀하세요.

네임.

……거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심게 된 희망으로 이 동생은 근래에 아-주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있었는데요.

곧 보여줄 테니까.

예?

그때. 알려줄게.

……예??

*

바닷가에서 새 동생이 생긴 날. 하도 울어서 물고기가 친구 하자고 부를 것 같은 동생이 잡은 멱살을 떼어내고 어느 정도 과거 얘기를 듣고.

……그리고. 누군가의 마지막 이야기인 것을 알아냈던 그날.

플란츠는 조용히, 끝내 감겨들었던 눈을 힘겹게 떴다. 곁을 지키고 앉아있던 칼리안은 플란츠가 눈을 뜬 것을 보지도 않고 눈치채선 손을 내밀었다.

“이만 돌아갈까요.”

“칼리안.”

“네.”

“이것을.”

말하기 귀찮아하는 사람이니 무거운 얘기 마음속에 새겨넣느라 더 이상 말 안 할 줄 알았는데. 칼리안은 그런 마음을 담아 플란츠가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팔찌로 빈틈없이 가려져 있던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언제적 시스파니안을 봤을 때 느꼈던 것처럼, 작은 우주가 모여들어 눈부시게 빛나는 검은색으로. 그 빛으로 새겨지는 글자가 보였다.

그 이름은.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새겨지는 속도를 따라 띄엄띄엄 따라 읽었다. 누구의 이름인지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은 네임으로 새겨지지 않으니까.

살아있는, 살아갈 사람의 이름만이, 네임으로 타인에게 남으니까.

칼리안은 검은 이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막 새겨진 이름은 따스했다. 사람의 체온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검은색이군.”

떨떠름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안은 웃었다.

“원래는 흰색이었죠.”

“그랬지.”

“곧 보여준다는 것은 이걸 의미하셨던 겁니까. 새겨질 네임은 예측할 수 없을 텐데요.”

“마음을 먹은 것과 행동으로 옮긴 것은 결과가 다르니까.”

온화하게 웃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플란츠는 칼리안의 그 얼굴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을 때 드물게 나오는 표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플란츠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임이 생기는 원리.”

“아.”

“예외는 가끔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누구에게든 상대를 귀애하게 될 미래가 뚜렷한 선택지가 선택되었을 때 새겨지지.”

“아하…”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고민하긴 했지만.”

이번엔 길게 늘여서 말할 필요 없이 잘 알아들은 칼리안이 그저 꽃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플란츠는 칼리안의 이름이 다시 손목에 새겨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에는 없는 네임을 곧 보여주겠다고 예고까지 했다. 그리고 기억 가지고 책임 가질 거면 권리까지 가져도 된다고, 죽은 사람이 없는데도 가진 알량한 죄책감 때문에 말라가지 말고 넌 그냥 내 동생이니까 혼란해하지 말라고 말해줬다. '칼리안'의 이름이 다시 손목에 새겨지는 모습이 그런 말을 뒷받침해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이미 떠나간 아이의 마지막 말을 들은 것은, 예상외였지만. 그래서 잠시 기억 속을 잠깐 거닐었지만. 제 이름이 사라진 곳에 새로운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세상에 보여도 될지는 고민했지만.

그래도. 너는 칼리안이라고.

변하지 않는 진실을 말해줬다.

그 마음이 너무도 잘 느껴져서, 칼리안은 부드럽게 웃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인사를 가득 담아서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 진심을 느낀 플란츠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고는 이제 그만 보라는 듯이 칼리안의 손을 쳐내고 다시 팔찌를 손목에 둘렀다. 칼리안은 가려진 제 이름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나 더.”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전까진.

“예?”

“네 네임.”

그러고보니 알려준다고도 했지. 네임은 보여주는 거잖아. 뒤늦은 의문이 붉은 눈에 가득 차올랐다. 손목의 제 이름에 온통 쏠려있던 신경이 다시금 플란츠를 향했다.

플란츠는 제 목뒤를 가리켰다.

“하나 더 있어. 네 네임.”

“……예?”

“머리카락에 가려서 잘 안 보이지만.”

목 뒤. 또 다른 네임.

……설마.

칼리안은 숨을 멈췄다.

*

네임이 새겨지는 것은 열 살의 생일이었다. 어머님들이, 아리안느가, 체이스 형님이 가지는 잦은 관심은 꼬마였던 베른을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네임은 운명이야. 네 운명의 사람을 꼭 지켜주렴."

누구의 이름이 생길까. 무슨 색이 새겨질까. 체이스의 네임이 새겨진 날부터 열 살 생일이 오기까지의 매일매일을 그것을 궁금해하면서 보냈다. 체이스의 어깨에 새겨진 분홍빛 '아리안느 린'을, 어머니의 손등에 새겨진 녹빛 '베른 세크리티아'를 보며 늘 그렸다.

"베른, 네임 새겨졌어??"

샴페인색 눈을 반짝이며 다가온 아리안느에게 베른은 씩 웃으며 조금 길어서 한손에 잡을 수 있는 제 머리카락을 들어 보였다. 목 조금 위쪽, 길든 짧든 머리카락에 가려질 그 부분에서 검은 빛이 나고 있었다.

"이름 있다! 검은색이야!"

"검은색이야? 누구야?"

"뭐야, 아직 몰라?"

"난 못 보는 위치라서. 왠지 뜨겁길래 거기 있다는 것만 알았어."

검은색. 제일 좋아하는 색이었다. 흔히 빛나는 네 가지 색이 아니었다. 마치 정말 특별한 존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베른은 흥분으로 날뛸 것 같은 자신을 억누르고 아리안느가 제 이름을 읽어주기를 기다렸다.

"어디… 플란츠… 룬… 카이리스. 플란츠 룬 카이리스라고 쓰여 있어!"

"플란츠 룬 카이리스? 그 이름 분명…"

"카이리스 이왕자 이름 아니야?"

해맑게 말한 아리안느가 뚫어져라 바라보던 베른의 목에서 시선을 떼곤 베른의 앞으로 폴짝 뛰어왔다. 샴페인색 눈동자와 연한 자수정 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어린 얼굴이 장난기로 물들었다.

"베르은~ 너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하게 될 거라던가."

"……검은 색이라며."

"아 참. 분홍색이라고 할걸."

"아리안느!"

어릴적엔 그렇게, 그저 해맑게 말하며 웃었다.

자라면서 제 목뒤의 이름을 알아보았다. 한 살 아래의 동생이 어머니를 죽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자살… 아니, 이건 분명 살해된 거지. 먼 세크리티아까지도 흉흉한 실리케 브리센의 소문을 떠올린 베른은 헛웃음을 지었다. 부모가 좋은 모양새가 아니더라도 자식은 멀쩡한 경우가 아주 가까이에 있었으니 편견은 생기지 않았다.

괜찮을까. 내 운명은.

그저 그렇게 걱정하며. 나는 몰라도 내 운명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일왕자를 제치고 왕세자가 되는 것을. 왕이 죽어서 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태후에게 정치 전반을 맡기고 왕이 남긴 마법사단 발칸의 육성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소문을. 전부 다 들었다.

그래.

"약속할게요."

운명이 이 아름다운 세크리티아에 핏물을 흘리러 오기 전까진.

"검을 내린다면 살려주도록 하지."

처음으로 본 운명은 깨져서 부서진 유리구슬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운명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지고 있던 믿음이 산산이 조각난 지는 조금 되었지만 쳐들어온 사람의 눈이 깨져있는 것은 예상외였다.

……아니, 그럴 만도 한가. 혼자서 지대하게 가졌던 관심의 말로로 알고 있던 과거를 되뇌었다. 예상외인 것이 아니라, 한때 걱정했던 눈이 예상대로 깨져있었다. 그래. 그런 거였다.

베른은 짧디짧았던 그 편지를 떠올렸다. 답장에 감상을 곧이곧대로 써놓고 맨 마지막에만 혹시 몰라 걱정을 써서 보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제 운명이 쳐들어온 것은 그런 걸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차감해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역시 그러니까. 그래도.

증오하는 내 운명에게 느끼는 마지막 감정에.

'…이제 편해지려나.'

희미하지만, 미세하지만,

구원감이 섞인 것은.

……이상한 거겠지.

어떻게 생각해? 플란츠 룬 카이리스.

이제 한 번 마주 본, 한 번 목소리를 들어본 내 운명아.

*

“…형님이신가요.”

“응.”

“검은색이겠죠.”

“응.”

똑같이 나온 짧은 대답이 단호했다. 칼리안은 피식 웃었다.

목 뒤인데다가 검은 머리카락이니 더 안 보였겠지. 얀이나 메를린이 눈치채지 못한 이유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형님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칼에 찔렸을 때.”

“…?”

“히나 부르라고 뒤보고 소리쳤을 때. 그때.”

눈썰미가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칼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두콩이 제 뒤통수 밑, 목 위의 그 어설픈 지점을 볼 수 있었던 때는 확실히 그때가 유일했으니까.

……아, 그럼 턱 밑의 네임이 히나로 바뀐 것도 그때 알았으려나. 칼리안은 플란츠를 보았고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빠르니 굳이 묻지 않아도 되고 좋았다.

“…이 네임은… 이전의 네임입니다.”

칼리안은 목뒤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생긴 지 오래되어 더는 뜨겁지도 않은 네임이 어쩐지 뜨거운 것 같았다.

플란츠는 다 안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때 더 알았다고 얘기했던 게 이건가. 뒤늦은 깨달음에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아시는 이유로, 이전의 네임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웃음 가득한 웃지 않는 붉은 눈이 바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아있었네요.”

“……”

“둘 다 저라는 뜻이겠죠.”

한쪽 손이 턱 아래를 짚었다. 다른 한쪽 손으로는 모랫바닥을 툭툭 건드렸다.

……이것도 이래서 지금 알려주겠다고 한 거였구나. 사려 깊은 안배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때문에, 감사했다.

“뭐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 때문에요.”

새로운 동생 자리에, 지나온 옛 인생에, 전에 필요로 했던 확신에, 그 모든 것을 전해주려고 한 원인이었던 위로에. 그 마음에.

이 자리에서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웃음밖에 안 나왔다.

칼리안은 다시금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플란츠는 그 인사를 받았다.

“…별말씀을.”


끝!

원래는 칼리안 생일 기념은 아니었는데 쓰다보니 날짜가 마침 가까워져서 맞춰서 썼습니다. 운 좋게도 칼리안 중심의 글이었어요(*´ ˘ `*)

네임버스로 뭐 쓰고는 싶은데 로맨스는 쓰고싶지 않아서.. 설정을 조금 변경했습니다. 본문에 나와있는데로 노란색은 부모를 향한, 녹색은 자녀를 향한, 분홍색은 연인을 향한, 흰색은 형제(남매, 자매 전부)를 향한 귀애를 뜻합니다. 한 사람을 가장 아끼는 형태는 다양하니까 색도 많아요. 보라색은 주군, 파란색은 수하, 빨간색은 친구, 주황색은 스승, 남색은 제자.. 등의 많은 색이 있습니다.

검은색은 많은 감정이 이리저리 섞여서 귀애하는 이름을 뜻해요. 두세가지 정도가 섞였다면 색이 섞여서 나타나지만(ex: 칼리안→히나. 연녹색+알 수 없는 색 하나) 네가지 이상이 섞였다면 그냥 검은색으로 나옵니다. 온갖 감정이 다 섞였다는 거예요. 칼리안과 플란츠의 서로에 대한 마음도 그렇다고 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형제애든, 우애든, 사랑이든, 부성애든, 부모를 보는 마음이든, 제자를 보는 마음이든, 스승을 보는 마음이든.. 감정엔 답이랄 게 없으니까요.

..음, 이정도면 얼추 끝난 것 같으니까.

현연한 별의 수호자의 탄생을 축하하며.

HAPPY BIRTHDAY.

아 그리고 웹툰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덕분에 죄책감 한층 덜고 썼어요. 걱정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의 또 하나의 끝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둘째왕자님아기야그러다가감기걸려옷여며주세요제발..)..의 감정이 선공개컷 처음 본(지금도 느끼는) 감정이었던 건 안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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