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왕사

✶3 HAPPY STARTING (23.11.12 재업)

행복을 위해, 살(리)고 싶어서|플란츠 룬 카이리스

ESAVIR by Ri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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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f로 얀이 플란츠와 대화를 했었다면, 시간의 축과 제온이 없었다면, 등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입니다.

* 2왕자님 내새끼 플란츠 생일 축하해!!

* 과거 날조 有… 多

* 스포 有

* 플란츠 중심

* 원작의 주요 관계성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꺼리시는 요소라면 비추천합니다.

* 공포 약 5만 자입니다.


시로이안 지그프리드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저러지.’

플란츠 룬 카이리스에 대해서.

*

시로이안 지그프리드는 자신이 다소 눈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 한정으로는 더 물러지고 그냥 그렇구나~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알지만 뭔 상관이겠냐 싶어서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지그프리드니까. 그깟 눈치 좀 없어도 문제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시로이안도 지그프리드라서. 귀족이라서.

“너.”

지금 이 상황이 제가 알던 것과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잠깐 와봐.”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얀'을 불러냈다.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툭, 하고 벽에 기대 흩어졌다.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시종 하나 없이 이 이른 아침에 혼자-정황상 몰래- 찾아온 2왕자의 모습에 얀은 당황해서 떨어뜨릴 뻔한 찻잔을 다잡았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 괴롭히는 못된 왕자가 왜 여기에 온 거야. 당황과 의아함이 한데 섞여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네?”

아니, 정정하자. 대답이 아니었다. 시종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반문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이의 빛이 들지 않는 연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기울었다. 이쪽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얀이 어깨를 굳히고 몸을 바로 했다. 저 성격 괴팍한 왕자가 언제 또 노성을 내지를지 몰랐다.

“어서.”

“제가 왜-”

거절하려는 뜻이 다분한 첫 마디가 나오자 나른하게, 느리게 깜박이던 눈꼬리가 매섭게 날카로워졌다. 아, 또 소리 지르려나. 아니 몰래 왔으니까 들킬 짓은 안 하겠지. 그렇게까지 멍청할 리가. ……없겠지?

얀은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타인의 전속 상급 시종에게 다짜고짜 따라오라고 하는 것은 엄연한 월권이며 무례였다. 하물며 눈앞의 이는 왕족. 나라를 대표하는 왕가의 일원인 왕족은 하급 귀족에게만 적용되는 예의까지도 더욱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법이니 저 명령을 따를 수는 없었다. …물론 플란츠 룬 카이리스는 왕족에게만 적용되는 예의범절까지도 무시하는 망나니였지만, 어쨌든.

“저희 왕자님께서 일어나시면 먼저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시종이 왕자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엄격한 어조에 플란츠는 물끄러미 얀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고개를 기울이다가, 무슨 결론을 내렸는지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고요하게 눈을 감고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얀의 대처가 그 행동의 옳음과는 별개로 왕자에게 너 그냥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도.

그 모습은, 모두가 아는- 얀은 특히 더 잘 아는 망나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

“싫으시며…언… 아, 아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종의 대답으로는 늦은 감사였지만 플란츠는 별다른 반응 없이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서 창틀에 발을 디뎠다. 아, 창문을 통해서 온 거였나. 얀이 잊고 있던 의문의 정답을 깨닫는 찰나에 건조한 연녹색 눈이 3층을 훑었다. 유난히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무슨 감정인지 알 수 없는 기색이 고아한 무표정을 한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금방이라도 내려갈 것 같은 자세로 침묵을 지키던 플란츠가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얀이 들고 있는 찻잔을 가리켰다.

“그 차 가져와. 숨겨서.”

“…예?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혹시 몰라서. 다른 거 줘.”

말의 앞뒤를 가차 없이 잘라먹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얀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다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동생 차도 뺏어 먹고 싶은 건가. 우리 왕자님이 뭐 뺏기는 건 별로지만 다른 차를 주라고 했으니 차 한 잔 쯤이야 줘도 상관없으려나, 생각하면서.

물론 저 망나니 왕자의 얌전한 모습이 너무도 어색해서 불경한 생각을 물리려고 일부러 한 생각이었던 것이 맞다. 그조차도 불경하다는 건 까맣게 잊어버린 생각이었지만.

*

새파란 하늘이 짙었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발밑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다람쥐나 토끼가 샤샤샥 빠르게 나다니는 푸른 숲을 바라보는 붉은 눈이 생경함에 반짝였다. 연녹색의 생기 없는 눈이 그 모든 광경을 기억 속에 담아냈다.

둘이서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얼마 없는 시간 중 가장 적당한 시간은, 야외에서 진행되는 수업이 끝난 직후.

교사가 수업을 끝내고 먼저 빠져나가자 물러나라고 난리를 쳤다. 아마도 검을 들고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리 하는 것으로 겨우 눈을 없앴다. 그렇게 만들어낸 짧은 순간에 한 살 어린 동생을 몰래 챙겨온 로브로 감싸고 예쁜 눈을 꼭 감겨서 품에 안아든 다음 검은 갈기를 가진 말에게 진심을 담아 부탁해서 멀리까지 달려왔다. 신비롭게도 아무도 보지 못한 성공적인 일탈이었다.

플란츠는 자신도 어디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숲속에 들어서서야 동생을 조심스럽게 말에서 내렸다. 말을 무서워하는 녀석인 만큼 눈을 뜨지 말라고 엄격하게 당부하곤 안고 있던 자세 그대로 안아 들어서 내려왔다. 직접 안아보자 동생이 너무나도 말라붙고 가볍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과했다. 축복이 있는 왕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겉만 봐도 동생의 건강 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들어보고 실감하니, 어지러울 정도로 심란해져서. 입안을 짓씹으며 마음을 억누른 플란츠가 진심을 가득 담아서 부탁하면 어느 정도는 말을 들어주는 검은 말의 고삐를 적당한 곳에 대충 감아두곤 처음 보는 풍경에 감탄하던 동생의 헐렁한 소매를 붙들었다.

“칼리안.”

“? 형님…?”

“이제 말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네? 아니, 아뇨. 별일 없었어요. 왜 그러세요…?”

본론을 시작하기 전 의례적으로 하는 잡담 따윈 집어치우고 목적부터 꺼내버린 직설적인 물음에 검은 머리카락 아래 감춰진 붉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까지도 확실하게 담아둔 플란츠가 눈썹을 모아 험한 인상을 만들어냈다.

눈, 입술, 피부, 손톱, 호흡, 체중. 더 크게는 체구까지. 보이는 것만 해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모를 수가 없는데.

“별일 없다는 녀석이, 얼굴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창백하고. 입술은 말라 있고. 눈은 가장자리가 까맣고. 손톱 밑은 보라색인데다가. 숨은 몰아쉬고 뼈가 만져질 정도로 말라 있는데.”

“…그건,”

“비틀거리기도 했지. 쉽게 어지러워하잖아.”

“……”

“칼리안, 제발.”

칼리안은 침묵했다. 플란츠가 얼마나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지 충분히 눈치챘을 텐데도. 진심이 아니리라 믿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릴 순 없던 그 모든 말과 태도가 바라고 기도하던 대로 자신을 위한 거짓이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을 텐데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떨리는 눈동자로 이리 저리를 보다가 이내 플란츠의 곧은 시선을 피했다. 플란츠는 칼리안이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칼리안이 말하지 못할 만한 사람. 이 왕궁 내에서 왕자의 몸상태가 이렇게나 악화되도록 수를 쓸 수 있는 사람. 이 어린 아이를 그렇게나 싫어하고 증오할 사람.

왕비, 실리케 브리센.

……어머니.

이미 예측했던 사실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분석해서 결론을 도출해내는 데에는 눈 한번 깜박이는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용의자를 추려낸 플란츠가 아득해지는 시야를 저도 모르게 가려냈다. 세상을 보는 것이 힘겨웠다. 이 죄 많은 자가 보여지리라는 것이 너무도 버거웠다. 아무리 강한 독을 썼더래도 축복을 가진 왕족의 몸상태가 이만큼이나 안 좋아지려면 오랫동안 수를 썼다는 소리일 텐데, 그도 모르고 순진하게 약속만 믿고 동생을 여태 압박한 저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지만 불길하게 눈을 가리고 있던 플란츠가 다시 손을 떼어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겁고, 버겁고, 힘겨웠지만. 분명히 그랬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분명히, 약속을 했는데. 기어코. 군데군데 금이 가 있는 연녹색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분노 때문인지 윈망 때문인지, 이미 확신을 얻은 낮은 목소리가 그런 눈과는 대조적으로 속절 없이 떨리며 물었다.

“어머니가, 네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뭘 하셨어.”

“…그런 거 아니에요…”

“독인가. 아니, 독 말고 더 있을 리가 없지. 뭐 먹고 있어. 꾸준히 먹고 있는 게 있을 텐데.”

“트, 특별히 먹는 거 없어요.”

처음 보는 풍경에 감탄하고 화색이 돌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잿빛이었다. 칼리안은 열심히 부정했지만 플란츠는 이미 자신의 예측을 확신해서 모든 가능성을 추려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연녹색 눈을 본 칼리안의 작고 따스한 어여쁜 손이 플란츠의 마르고 뼈가 두드러진 손을 간절하게 붙들어 잡았다. 그 따스한 체온이 생경해서, 파랗게 질린 얼굴이 눈에 들어와서, 플란츠는 억세게 주먹 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어냈다.

“…진짜예요, 형님. 믿어주세요…”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깨질 듯이 흔들려서.

길게 기른 머리카락 뒤로 가려진 붉은 눈이 안쓰럽게도, 울 것 같아서.

“……그래.”

그순간 눈을 감았다.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만화경 속 보석들이 껍질을 깨고 흘러나왔다.

*

“플란츠 왕자님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얀은 체르밀 4층의 시종에게 정중히 말했다. 그 2왕자가 불렀다는 말을 믿지 못하는 기색이 한번, 3왕자의 시종이 무엇을 꾸미는지 의심하는 기색이 한번, 최종적으로는 언제나와 같은 서늘한 얼굴이 된 무례한 시종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조심스레 왕자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고 해. 낮은 목소리가 시종이 용건을 꺼내기도 전에 들려왔다. 얀은 시종의 불편한 얼굴을 모른 척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4층의 방은 어두웠다. 전체적인 배색이 그렇기도 했지만 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밝기를 뜻함이었다. 어두운 푸른색과 검은색이 주를 이루는 방에 헤이시아 궁이 저 멀리에 보이는 창을 제외하면 두꺼운 커튼을 쳐놔서 빛이 들지 않았다. 어두워. 한낮인데. 불을 켜지 않았나. 술 냄새. 얀은 정신없이 감각에 들어오는 사소한 정보들을 새겼다.

“……왔나.”

“네.”

왕궁에 들어온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처음으로 발을 딛는 2왕자의 방을 신기한 눈으로 훑어보던 얀이 낮은 목소리에 얼른 대답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청회색 눈을 느린 속도로 한번 바라본 연두색 시선이 그 뒤 자신의 시종에게로 옮겨졌다. 부름이 없었는데도 허락 없이 들어와서 뻔뻔하게 고개 숙이고 있는 시종을 보는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부른 적 없는데. 넌.”

“3왕자님의 시종이지 않습니까.”

“내가 불렀다고… 알아듣지 못한 건가.”

“혹시 모릅니다. 자리를 지키게 허락해주십시오.”

“…하…”

플란츠는 노기를 숨기지 않고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모습에도 꿋꿋이 두꺼운 낯으로 자리하는 시종의 모습에 시로이안의 얼굴이 미미한 불쾌함으로 굳었다. 이건 의심하는 걸 숨기지도 않는 꼴이 아닌가. 왕자가 직접 불렀다는데도, 왕자가 거슬린 심경을 숨기지 않는데도.

별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오히려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지만, 제 나라의 왕자의 권위가 무시되는 꼴을 볼 수는 없던 얀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서 나가라는 뜻을 보이고 계시는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대는 3왕자님의 시종이지 않습니까. 나서지 마십시오. 4층의 일입니다.”

“지금 전 시종이 아니라 2왕자님의 손님으로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니더라도 왕자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은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좌시할 수 없습니다. 주제 모르고 설치지 말고 물러나시죠.”

하나하나 옳은 말에 할 말을 잃은 시종의 구겨진 낯짝이 보였다. 브론즈 색의 머리카락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단단한 청회색 눈을 본 연녹색 눈이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플란츠는 왕비님께서, 라는 듣기 싫은 지겨운 말로 시작되려는 귀만 아플 말을 끊어냈다.

“말 잘하네.”

“…플란츠 왕자님!”

“내 할 말을 네가 아니라 이쪽이 다 대신해주는 것을… 내가 뭐라고 해석하면 좋을까.”

“그게 아니라…!”

“이 정도면 적당히 이해하고 말 좀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아, 그럴 지능을 기대하면 안 되려나. 낮은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게 날카로운 말을 꺼내 들었다. 검을 다루는 자의 매서운 기세가 식사용 나이프 말고는 들어본 적 없을 시종에게 내리꽂혔다. 겁은 많지만 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비열한 시종이 사정없이 몸을 떨다가 발을 물렀다.

“…와, 왕비님께서 이 사실을 들으실 겁니다!”

어머니가 들으시면 어쩔 건데. 내게 독이라도 보내실까. 또 찾아와서 지독한 향기나 흩뿌리고 가시는 것 외에 또 무엇을 하실 수 있겠나.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죽일 수도 없으실 텐데. 한껏 비꼬는 마음을 품어낸 플란츠가 이내 비뚜름하게 웃었다.

“……요새 좀 조용히 지냈지… 내가.”

손이 닿는 책상 위에 놓인 유리잔이 뼈가 두드러진 마른 손에 잡혔다. 쨍그랑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서 비산하는 유리 조각을 수도 없이 본 시종이 창백한 낯이 되어 등을 보이고 도망쳤다.

그 모습까지 확인한 플란츠는 피로한 기색을 내보이며 들었던 잔을 조용히 제자리에 내렸다. 긴장해서 몸을 굳힌 동생의 시종을 힐끔 보고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풀어, 긴장. …귀는 쫓아냈으니.”

“아, 네. …그러셔도 되는 건가요?”

“어머니의 눈이자 귀니까.”

지친 눈으로 입을 다물려던 플란츠는 멀뚱히 뜨인 청회색 눈을 보았다. …못 알아들은 얼굴이군. 누구보다도 눈치 빠른 이의 연녹색 눈이 다시 한번 감겨들었다. 인내심을 조금 더 늘리고 말해야겠다 다짐하며 사일런트 마법이 내장된 마법 도구를 가볍게 쓸어서 발동시킨 플란츠가 시종이 도망친 문밖을 잠시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 사람이 아니야. 대화를 듣게 두면 안돼.”

“…아…”

“사일런트는 구해 왔지만, 혹시 모르니까.”

“네. 이해했습니다.”

얀은 플란츠가 평소 말하는 것의 몇 배는 길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이 사람이 생각보단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때 눈치채고 제가 알던 모습을 의심했을 것이다.

“아까 그 차.”

“여기 갖고 왔습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얀은 조심스레 챙겨온 찻잔을 꺼냈다. 내용물이 따라질 때 그대로 담긴 잔은 지나가듯 보면 너무나도 평범해 보여, 플란츠는 느리게 찻물을 살폈다.

이게 정말 맞을까. 제 추리에 담은 약간의 의심이 잠시 머뭇거리게 만들었지만 이내 각오를 다진 그가 한입에 식은 차를 털어 넣었다. 두근,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네.”

“이 차, 네가 직접 칼리안에게 갖다주는 건가.”

“다른 시녀가 타서 제가 전달해드리고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멀뚱히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청회색 눈을 본 연녹색 눈이 감겨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없으면 허전하겠지만 느껴져서 좋을 건 없는- 시스파니안의 축복이 작동하는 감각이다.

이 명백한 감각을 그 아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이 마냥 어리게만 보고 있다 해서 실제로도 어리고 눈치 없는 아이인 것은 아니니.

플란츠는 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독을 먹으면서 괜찮은 척하던 동생에게,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너 역시 괜찮은 거 아니었지 않냐고 추궁하고 지금까지 몰라서 미안하다 사과하며 안아주고 싶었다. 불가능한 바람이지만.

심상치 않은 한숨에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지자 플란츠는 시선을 돌렸다. 어색하고 무슨 이름을 붙여야 마땅할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동생을 보던 청회색 눈을 떠올렸다. 부슬비로부터 가리려고 들고 작은 벌레에도 호들갑을 떨던 그 모습에서 보았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떠올렸다.

…역시, 모르는 편이 낫겠지. 플란츠는 마음을 정했다.

“지그프리드.”

“…!”

“너희는… 아니, 너는. 그 아이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지.”

'얀'이 아닌 이에 대한 부름에 청회색 눈이 시리게 굳었다. 플란츠는 간간이 귀족 회의에 들어오는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의 청회색 눈이 이따금 그와 비슷하게 빛나던 것을 떠올렸다. 안 닮은 줄 알았더니 모양새만큼은 닮은 점이 있다고, 플란츠는 속으로 생각을 이었다.

“……저희 왕자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별로 기대를 담지 않았던 질문에 돌아온 것은 제법 마음에 드는 단단한 답변이었다. 플란츠는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자 다시 눈을 감았다. 맘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에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된 적이 없었어서 들뜨려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버거웠다.

시로이안은 제 눈을 의심했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다정한 웃음이 그 성격 괴팍하던 2왕자의 입가에 잠시 머무른 것을 보았다. 믿기지가 않았다. 저게 정녕 그 2왕자가 맞단 말인가. 다른 무도한 놈이 왕족을 사칭하고 있는 게 아니고?

얀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금세 평소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온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이 차, 앞으론 칼리안에게 주지 말고 내게 가져와. 모닝티가 꼭 필요하다면 차라리 네가 직접 타서 주는 편이 안전할 거다. 다른 시종들에게 맡기지 마.”

“…차에 뭐가 있는 겁니까?”

“지그프리드의 이름이 필요할 것 같으면 그때 말하도록 하지. ……우선은, 그것만 해줘. 더 알려 하지 말고.”

최대한의 인내와 드문 배려를 담아 길게 이어지던 낮은 목소리가 잔잔히 사그라들었다. 눈치가 없기는 하지만 공작의 자제로서, 왕궁의 시종으로서 상황 파악만은 잘 하도록 익혀온 청회색 눈에 어린 염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였다.

…저게 이쪽을 향한 건지, 칼리안을 향한 건지. 칼리안이 없는 곳에서 저 낯선 감정을 볼 줄은 몰랐고 저 시종과 눈을 직접 마주하며 볼 줄은 더욱 몰랐던 플란츠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칼리안을 향한 거라면 고개가 돌아갈 것 같은데, 반응 없이 바라보고만 있으니 판가름하기가 어려웠다.

“플란츠 왕자님.”

단단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정도의 긴장과 그보단 덜한 의심, 그리고 미세한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앞에 두 개 말고는 어색한 목소리를 귀담아들은 플란츠는 소리 없이 그 얼굴을 응시하는 것으로 시종의 모습을 벗어던진 코끼리가 말을 잇는 것을 허락했다.

“저희 왕자님께 늘 폭언을 퍼부으시고 짜증만 내시던 왕자님께서 굳이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칼리안 왕자님께 이 차를 올리지 말라 하심은 이 차가 위험하다는 뜻 아닙니까. 이걸 왕자님께 올리라 하시는 진의 역시 모르겠습니다. 왕자님께도 위험할 텐데요.”

시종이 아니라 손님으로서 찾아왔다는 게 진심이었던 것처럼, 솔직하고 뚜렷한 의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믿지 못하겠지만 알 수 없어서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이 짙었다. 설마 하는 걱정이 목소리에 은은하게 묻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서툴지만 잘 알아듣는 상대에게 전달되었다.

플란츠는 말하는 법을 몰랐다. 말해봤자 그 뜻이 이뤄진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의도와 마음을 말해서 돌아오는 것은, 약점을 잡은 상대의 협박. 혹은 역겹도록 속을 막아오는 르니에리 향. 오직 그뿐.

그래서 이번 역시, 침묵을 지키려고.

“말해주십시오. 이유.”

했는데.

"플란츠 왕자님. 사람은 보통 말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

"멍청해서 알아듣지 않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있지요. 세상엔 정말 쉽게 말해도 못 알아듣는 천치 같은 놈들이 많으니까요. 그걸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려는 사특한 잡것들도 많, 아 실례. 뭐 그런 나쁜 놈들도 많고요. ……그래도, 말하면 대부분 알아듣는답니다. 들어도 알아처먹지 못하는 놈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그러니, 왕자님."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왕자님의 마음을.

저 물음과 유사한 말을 처음으로 들었던 순간의 기억이 눈앞에 일렁였다. 손을 잡아 오는 그 체온이 너무나 따스하여 속이 울렁거렸던, 그 뒤 만난 처음 보는 시종의 가증에 허탈해져서 그대로 기억 너머로 접어뒀던, 그 다정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왜 그 기억이 지금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그 대마법사가 제게 그런 말을 한 이유를 모르지만. 그래도.

기왕 그 조언이 떠올랐으니. 눈앞의 이는 그 조언 속 천치 같은 놈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해볼까, 말.

색이 다 바래서 오래된 유리구슬처럼 군데군데 금이 간 연녹색 눈이 곧게 선 단단한 방패의 청회색 눈을 바라보았다. 기억 속 대마법사의 은회색 눈과 그 눈을 대보던 플란츠는, 속절없이 무너지려는 다리를 잡아 있는 둥 없는 둥 잡는 용도로만 사용하던 의자에 앉았다. 굳이 아득해지려는 시야를 붙잡으려고 애쓰지 않고 또 한 번 눈을 감았다. 마른침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결심은 짧았지만 각오는 그만큼 짧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처음 시도하는 순간에 긴장하기 마련이지만 그런 흔한 상식조차도 잘 모르는 이가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자신'을 말하려 하는 것은, 처음이라.

절벽 밑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너도 앉아.”

뼈마디가 두드러진 마른 손이 앞쪽의 의자를 가리켰다. 검을 쥐는데도 기사와는 달리 굳은 살 하나 없는 귀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로이안이 조심스레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감은 눈을 뜨지 않았는데도 그 모습을 본 것처럼, 바스러진 달 가루를 삼켜낸 듯한 낮은 목소리가 그제야 나직하게 내리깔렸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듯하니.”

*

시로이안 지그프리드는 몇 년 동안 쌓아왔던 '플란츠 룬 카이리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대폭 수정했다. 대화 한 번으로 여태 적대해왔던 인물을 바로 믿을 정도로 순진한 사람도 아니고 의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울지도 못하고 턱 끝까지 차오른 속내를 힘겹게 토해내며 곧 흩어져 사라질 것처럼 웃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는 비정함은 없었기 때문에.

시로이안은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아이도 당연히 아는 것을 알지 못해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냐고 조심스레 묻고는 부서질 것처럼 웃으면서 알려준 그대로 인사하는 사람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게 연기라면 그건 믿은 얀이 잘못한 게 아니라 플란츠에게 주어진 진로의 선택지가 하나뿐인 게 잘못된 것일 터이다. 그정도로 플란츠의 말은 진심으로 가득하여 절실했다.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게 순하시다고나 할까. 왕자님께 사용하기엔 무엄한 표현이지만. ……그러고 보니 플란츠 왕자님, 우리 왕자님보다 고작 한 살 많으셨지.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면서 새삼스럽게 사실을 적시한 얀은 무슨 연유로 결심을 내렸는지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결정을 생에 처음으로 말하는 것처럼 어설프게 주섬주섬 꺼내고 기워내던 플란츠를 떠올렸다. 한 사람의 오빠로서 동생을 아끼고 사랑한다 고백하던 마음을 이해했고, 두 사람의 아들로서 전하께 배웠고 어머니를 끝까지 불신할 수 없었다 말하는 것에 공감했고, 오롯한 한 사람으로서 담담한 얼굴로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것을 연민했다.

“왕자님, 내일 옷은 저 검은 재킷이랑 사파이어 커프스 어떠세요? 오늘 보셨던 블루 다이아몬드 브로치는 빼고요. 싫으시다고 하셨으니까.”

“응… 괜찮은 것 같아.”

“왕자님. 저, 왕자님께 말씀드릴 게 있… 아.”

“뭔데?”

그렇기 때문에 칼리안에게 플란츠 왕자님에 대해, 라고 말하려던 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화들짝 놀라서 다물었다. 섣부른 충동 하나 때문에 이미 많은 상처를 입은 제 왕자님께 더 큰 상처를 줄 뻔했다. 또.

얀은 플란츠 룬 카이리스가 가여웠다. 주변에 누구 하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15년을 산 지금에서야 거의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는 아이 같은 사람을 동정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플란츠가 했던 그 모든 말에 절절히 묻어나던 애정을 당사자에게 말해주려고 했다. 그 사랑의 무게를 알게 되면 믿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당신의 형이 사실은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더라고. 당신은 당신의 형에게 구원이자 별빛 같은 보물이었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위로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플란츠의 사정일 뿐이 아니던가.

칼리안은 여태 고통받아왔다. 원인은 플란츠의 괴롭힘이었다.

아무리 본심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바늘을 제 입에 머금고 한 행위였다 한들, 당해왔던 칼리안의 입장에선 그 모든 것은 어찌됐든 폭력이고 괴롭힘이었다. 그것을 어찌 부정할까. 그가 칼리안에게 가장 큰 대못을 박았다는 사실을 어찌 지울까. 얀은 칼리안이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이해해서 동정하고 공감하여 연민하는 것과는 별개로 플란츠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지독한 슬픔과 괴로움을 이제서야, 뒤늦게 떠올렸다.

“…아, 아니에요. 그보다 전하의 탄신일이…”

그러니 어떻게 칼리안에게 말하겠는가. 플란츠가 대신 독을 먹겠다 한 것을. 플란츠가 칼리안을 지키기 위해 실리케와 거래했다는 것을. 그 거래 때문에 그리도 괴롭혔다는 것을. 그렇게 상처 주고 힘들게 했다는 것을.

어떻게.

“……얀.”

…어떻게. '얀'이.

“플란츠 형님에 대한 거야?”

……아.

“괜찮아. 형님이 그러시던 게 날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건 알고 있어. 나 괜찮으니까 말해도 돼.”

이 세상의 모든 붉음을 모아 찬란히 빛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태양을 닮은 눈이 길게 기른 검은 머리카락 뒤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플란츠의 이름을 말하며 이전과 다르게 떨리지 않는 눈이 선명하게 생명력을 발했다. 이제껏 고통과 불안함에 시달리던, 거의 다 시들어있는 눈이 아니었다.

…그렇지. 우리 왕자님, 똑똑하시지.

언제까지나, 무슨 일에서나, 감싸 안고 보호하고 상처받지 않게 지켜드리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강한 분이지.

제법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모습에 왈칵 차오른 눈물을 억지로 참아낸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꽃 같은 왕자님은 꽃 같으면서도 강인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힘들어하던 모습에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얀은 입을 열었다.

*

“칼리안 왕자님, 이곳은 4층입니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정식으로 요청을 넣고…!”

“감히 저 미천한,”

체르밀 궁 4층의 문이 억지로 열렸다. 분노한 얼굴로, 혹은 희게 질린 얼굴로 제멋대로 지엄한 4층의 문을 밀고 들어온 인사에게 고함을 내지르려던 무도한 시종들이 한순간 퍼지는 지독한 술 냄새에 숨을 죽이고 소리를 삼켰다. 쿵, 소리와 함께 거칠게 열린 문이 떨렸다.

죽은 듯이 흐릿하면서도 날카로운 연녹색 눈의 4층의 주인이, 잔뜩 젖은 셔츠를 대강 걸쳐 입은 채로 소란스러운 복도에 나섰다.

“무슨 무례냐.”

“……형님.”

“내가, 분명히, 주제 모르고 설치지 말라… 했던 것 같은데.”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플란츠가 느리게 주변을 노려보았다. 감히 저 미천한 혈통의 왕자가 4층에 발을 디뎠다고 생각하는 것이 훤한 험상궂은 낯들이 보였다. 성질 괴팍한 4층의 주인이 또 술병을 내던질까 봐 겁내는 희게 질린 낯이, 갑자기 위층에 들이닥친 제 꽃 같은 왕자님이 무도한 놈들에게 상처받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코끼리의 낯이, 그리고- 단단하게 반짝이는 태양 같은 붉은 눈이 보였다.

……제길. 속으로 험한 말을 중얼거린 플란츠는 급한 대로 머리부터 옷까지 다 젖도록 쏟아부은 독한 술 냄새에 멀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어머니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면, 우선.

“아니… 그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천한 피가 섞인 놈을 싫어하는 건 이해하지만 형으로서 전하의 피가 섞인 아이에게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질리게도 소란들이니, 한 번쯤은 들어주마.”

“……”

“경박하게 밀고 들어온 놈이 이 자비를 알 수 있을지는 의문이나… 몰라도 어쩔 수 없지. 들어와라. 출신대로 되지도 않는 호소를 하려는지 주제도 모르는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구나.”

나른한 기색을 띄고 허공을 보다가 비웃듯 내리깔린 흐릿한 눈이 말을 끝맺고 나서야 칼자루가 향한 이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그 기색을 확인한 얀이 청회색 눈을 미세하게 찡그렸다. 전혀 변하지 않은 얼굴로 네,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칼리안은 날을 잡고 휘둘러진 비수에 찔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덤덤한 모습까지 눈에 담은 이가 하, 하고 뒤늦게 숨 섞인 소리를 냈다. 눈매와 미간을 와그락 찌푸리며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린 플란츠가 제가 나온 문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날카로운 죽은 눈이 쥔 사람을 상처입힌 비수 든 말에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무도한 것들을 노려보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마라. 닥치고 쥐 죽은 듯이 있어.”

주먹엔 큰 변화가 없는데도 문이 크게 흔들렸다. 검을 다루는 자의 매서운 기세가 이 공간의 둘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분간 없이 쏟아졌다. 형형하게 살기를 띄운 날카로운 연두색 눈을 본 4층의 사용인들이 꼴사납게 모습을 감췄다.

그 엉망진창을 끝까지 확인한 플란츠가 느리게, 그러면서도 과격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방 어딘가에 숨겨둔 마도구를 발동시킨 그가 따라 들어온 동생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단단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러면서도 생소하다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동생을 살폈다.

“……미안. 눈이 있어서. …몸은.”

“……”

“내가 나오기 전에… 저놈들이, 이상한 말은 안 했나.”

애처롭게 떨리던 흰 손은 끝내 마른 몸을 만지지 못했다. 검은 머리카락 뒤의 붉은 눈을 또렷하게 바라보는 걱정이 가득 담긴 연두색 눈의 주인은 그 눈을 온전히 채운 감정의 대상을 더듬어서 살피지도 못하고 허공만을 어루만졌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잘 안 나오는 듯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던 그가 종내 살이 패이도록 주먹을 꽉 쥐고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형님.”

그 모습을 본 고운 미간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떨리는 손, 떨리는 목소리, 잘 관리된 손톱이 파고들어서 나기 시작한 미세한 혈향을 민감하게 감지해낸 눈치 빠른 아이가 아픔과 걱정과 분노가 한데 섞인 눈으로 제 형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들어오는 형의 어두운 방에 굳어있던 몸이 움직였다. 뼈가 두드러진 마르고 흰 손이 곱고 부드러운 손에 무력하게 잡혔다.

“차를 대신 마시셨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생경하게 타오르는 붉은 눈에 빛 조각이 얼기설기 뿌려진 연두색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것은,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다.

제대로 마주 본 적 없는 감정이다.

…두 가지 낯선 것들이 섞인 안생.

참으로 어색하고 또 어색한 얼굴.

플란츠는 멍하니 그 익숙하지 않은 조합을 바라보았다. 동생의 얼굴은 언제나 깊이 살폈으며 분노의 감정은 언제나 가장하듯 터뜨려냈다. 둘 다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항상 살피고 있던 두 요소였다.

그런데.

섞이니 잘 모르겠다.

플란츠는 입을 열지 못했다. 제가 터져가는 속을 굳이 다스리지 않고 억지로 터뜨린 적도 물론 많았지만, 타인이 화내는 상황이라면 그 지독한 르니에리가 자욱한 그 사람을 통해 많이 겪어봤을진대. 지금까지는 그저 무시하거나 되레 화내거나 비꼬는 걸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사랑만을 주어도 부족할 동생에게 눈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럴 수는 없으니 무슨 말을,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슬퍼하고 있는 동생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인이 말문을 잃은 상황에서도 누가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똑똑하고 제멋대로 돌아가는 머리는 제 할 일을 해냈다. 연두색 눈이 삐걱거리며 뒤쪽에 쓰디쓴 커피를 마신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는 청회색 눈의 시종을 바라보았다. 해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어이없을 정도로 뻔한 정답이지만,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얀이 움찔했다.

“……너.”

“입 안 막으셨잖아요……”

이미 한바탕 울었는지 새끼 코끼리의 눈가는 붉게 부어 있었다. 입술을 비죽이며 말대꾸하는 꼴을 보니 이 정도로 벌을 내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라, 플란츠는 버거운 붉은 눈을 피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그가 저보다 어리다는 인식이 생겨서 저도 모르게 동생 대하듯 대꾸한 것뿐이지만 그는 몰랐다. 그러므로 플란츠는 지끈거리는 듯한 머리를 누르며 사방으로 튀어나가려는 사고를 억눌렀다.

걱정할 게 뻔하지 않나. 굳이 말 안 해도 칼리안에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쯤은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제가 제 생각을 전부 말해본다는 생전 처음 해보는 짓을 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할지라도. 아니, 남을 탓해선 안 되지. 조금 진정을-

“형님, 제발요…”

다른 데 보지 말고 저를 보라는 듯 애처로운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단하고 미약한 분노를 담고 있던 목소리의 끝에서 가루가 부서져 떨어졌다. 미약하지만 분명한 빛을 내는 연두색 눈이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고 급하게 들렸다.

“칼리안.”

“차 위험한 거였잖아요. 그래서 저만 먹고 있던 건데. 안 알렸던 건데. 그걸 왜 형님이…”

고집스럽게도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말이며 눈에 한가득 차올라 있으면서도 진짜 눈물은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플란츠는 생각을 멈추고 다급하게 동생을 끌어안았다. 하루 안 먹었다고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은 걸 보면 어지간히도 독한 걸 썼나 보지, 싶었지만. 그런 생각도 다 뒤로 미뤘다. 지금 중요한 건 생각하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울지 마.”

“안 울어요. 안 우는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그리도 어렵던 사과가 쉽게도 나왔다. 귀여운 소동물들이 나다니고 생기 넘치는 잎사귀가 피어나 있으며 새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던 그 숲에선 아무리 입을 벌리고 벙긋이고 목에 힘을 주어도 만족스럽게 말하지 못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어찌 보면 같은 얼굴을 한 아이를 끌어안고 동그란 뒤통수를 도닥이며 달래려니 함부로 밟아선 안될 세렌티의 꼬릿깃같던 그 사과는 너무나도 쉽게 나왔다. 그때의 어려움이 꿈 속의 비바람이었던 것처럼.

그땐 진심이라 오히려 못 했나. 지금은 진심이 아니라서 나오는 건가. 아니면, 그때가.

상념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물리치며, 플란츠는 동생을 더욱 더 힘줘서 꼭 끌어안았다. 그제야 옷이 뜨겁게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 없이 떨리는 동생의 등을 떨리는 손으로 다독였다.

아이의 감정이 앞선 타박에 반박할 수 있는 거리가 수 가지는 있지만, 모두 삼켜내고 뒤로 돌리면서.

눈물 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본 적도, 소리 없이 우는 아이를 달래본 적도 없어서. 서툴고 떨리는 손짓으로 그저 온기만을 전해주면서.

아이가 진정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저, 형님 미워한 적 없으니까요. 가끔은 너무 아파서 이게 다 진심이시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긴 했지만, 그날 걱정해주시는 거 듣고 다 아니란 거 알아서 괜찮아졌으니까. 사과해주시는 거 듣고 조금 서러웠던 것도 다 풀었으니까. 형님이 저 아끼시는 거 아니까…”

“……”

“…그러니까, 저희만 있을 때는 저 마음껏 걱정해주세요. 방금 전처럼 끌어안고 토닥여주면서 위로해주세요. 그럼 진짜 너무 기쁠 거예요.”

“…그래.”

울음을 그치고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던 플란츠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짧은 대답에도 기뻐하는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답이 뻔한 저울질을 한 번 해보고는 조금 더 덧붙였다.

“그렇게 할게.”

오래 전부터 제 형에게 관심이 많았던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칼리안은 플란츠가 말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짧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가 편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일 정도로 쓸데없는 말을 싫어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런데, 오직 제가 기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같은 의미의 말을 늘려서 한 번 더 해주시다니!

모시는 왕자님의 기분이 상기된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시종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왕자님, 많이 기뻐 보이세요.”

“응, 형님이 말 길게 해주셨으니까!”

이것만 말하면 듣는 사람은 영문을 모르겠지만, 감격해서 루비 같은 눈을 한껏 반짝이는 칼리안에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플란츠는 생각보다 더 기뻐하는 칼리안을 보며 관자놀이를 짚기는 했으나 작게 미소 지었다. 얀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포기한 듯 울상을 지었다.

“…긴 건가요…….”

“플란츠 형님은 말 하는 거 싫어하시거든. 얀도 잘 알아둬!”

“네에…. …? 아까 낮엔 많이 말씀하셨는데.”

의아하게 갸웃거리던 고개가 느려지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자 완전히 멈췄다.

플란츠가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칼리안은 얀보다, 나아가 그 누구보다도 플란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틀림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니 그 사실을 숙지하고 낮의 일을 다시 되돌아보면, 일곱 글자의 대답도 많이 말한 편인 사람이 한 시간 가량을 말하고 질문에도 성의있게 대답해주었다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배려라는 사실을 못 알아차리기엔, 얀은 제법 오랫동안 시종 일을 해온 사람이었다…….

“…감사합니다, 플란츠 왕자님…”

플란츠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는 것으로 대답했다. 별말 하지 않는 순한 반응에 새끼 코끼리의 눈이 눈물 어려서 반짝이는 것을 본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지금까지는 얀이 형님을 미워해도 뭐라고 하지 못했는데, 감정을 다 푼 것을 보니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이 순간이 그야말로 마법 같았다.

…그건 그렇고.

영리하고 명석한 붉은 눈이 다시금 반짝였다. 제 형님에게 안겨서 한참 울고 단순한 호의 하나에 그렇게 기뻐한 사람이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예리하고 총명한 눈이었다. 아무리 감정적인 홍수가 일어난 뒤라고 해도,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는 이 밤중에 4층까지 올라온 이유를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는 창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어색하게 불어 드는 바람에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헤이시아 궁이 보이는 창문은 왼쪽에 열려 있었으며 바람은 뒤쪽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인위적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드러냄에 연두색 눈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해맑게 웃는 예쁜 얼굴을 확인한 그가 눈을 감았다.

“……칼리안.”

“네, 형님.”

“알겠으니까… 바람.”

“옷 말리셔야죠. 다 젖었잖아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만 부루퉁해진 어여쁜 얼굴로 방금의 바람이 동생의 마법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플란츠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건 아니지만 고집부리는 건 또 어디서 배워왔는지. 아니 그것보다, 분명 독학으로 배운 걸 텐데 숨겨야 하는 것 아닌지.

주제 돌릴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이 꺼내든 명분이 저를 걱정하는 것이었기에 그 걱정이 기꺼워서. 플란츠는 헛된 시도를 빠르게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동생이 숨기던 마법까지 써가며 제게 말할 것을 종용할만한 것은 지금 상황에서 하나밖에 없었다.

“마법사에게 갈 거야.”

“…네?”

“곧 있을 전하의 탄신 연회 때, 궁을 빠져나가서 마법사 협회로 갈 생각이었어.”

얀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의아한 낯을 띄었다가 경악으로 바뀌었다. 갑작스러운 정보에 멍하니 깜박이던 붉은 눈이 한순간에 커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차를 왜 먹었냐고 따지러 온 녀석이 다음으로 물을 거야 뻔하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말이 나왔으니, 차는 내가 계속 먹도록 하지. 칼리안 넌 그 몸상태 유지하는 데에만 집중해.”

“…네?!”

안 돼요! 그거 엄청 센데. 형님 몸 망치면 안 돼요. 검 배우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적당한 차가 없어서 물만 따라 마시며 칼리안의 만류를 흘려듣던 플란츠가 잔을 내려놓았다. 탁, 소리에 붉은 눈의 시선이 일순 탁자로 향했다.

“난 괜찮을 거야. 건강하니까. 하지만 넌 다르지.”

“…그치만,”

“네 주변의 누가 어머니의 사람일지 모르니, 안 마시든 마시는 척 하든 어머니의 귀에 들어갈 거다. 네가 더 독을 마시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은 도박을 할 바엔 내가 마시는 게 옳아.”

“형님이 아픈 건 싫어요…”

“난 네가 아픈 게 싫어.”

울먹이는 애원에 돌아온 단호한 거절에 칼리안은 붉은 입술을 벙긋이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고 가감 없는 진심이 무겁고도 기꺼웠다. 언제나 은은하게만 받던 애정을 이렇게나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 이 상황이 낯설고 아프면서도 좋아서 괴로웠다.

플란츠가 지금껏 이 애정을 숨기던 이유를 알아서. 이제는 숨기지 않고 드러내서 내주는 그 이유를 알아서.

“……알겠어요…”

칼리안은 착하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면도 없지 않지만 눈치 빠르고 선량하다. 제 행복과 주변 사람의 행복이 무엇인지 안다.

그런 칼리안은,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를 위험을 더 이상 무릅쓸 수 없었다.

플란츠가 사랑을 두 번 포기하게 할 수 없었으므로.

“그럼, 앞으로는-”

*

플란츠 룬 카이리스는 연회장의 샹들리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테라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인내심을 가지고 자리를 지키는 것도 이정도가 한계다. 십 몇 분 정도면 어머니의 바람이나 전하의 위신은 충분히 지켰으리라.

이 이상은 아무도 자신이 자리를 지켜주길 기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플란츠는 당당히 지긋지긋한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어서 빨리 궁 밖으로 나가서 마법사 협회를 찾아가야 하는 것도 있긴 하지만 소란스럽고 번잡한 연회는 애초부터 성질에 안 맞았다. 성질 괴팍한 2왕자가 또 벌써부터 회장을 나가버리나 살피는 시선이 등 뒤로 와닿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정도쯤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테라스 밖으로 나온 플란츠는 칼리안과 얀이 빠져나올 곳을 미리 보고 높이를 가늠했다. 난간 아래로 펼쳐진 높이는 제법 아득했다. 마른 침을 삼킨 그는 이내 난간을 잡고 뛰어내렸다. 며칠 독을 먹었다고 착지가 불안정하긴 했지만, 크게 이상이 생기진 않았으니 이 역시 큰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생겼어도 축복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었을 것이다.

플란츠는 위에서 보았던 방향으로 큰 보폭으로 걸어갔다. 평온한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무사히 잘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플란츠가 곁에 가까워지며 근래엔 보기 힘들었던 말끔하고 단정한 수려한 용모가 불쑥 나타나자 먼저부터 있던 두 사람이 숨을 삼켰다. 키 때문에 헷갈리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꾸미니 똑닮은 얼굴을 한 여인이 떠올라서 새삼스럽게 놀랐다.

“나야.”

“프, 플란츠 왕자님.”

“형님… 멋져요! 제대로 꾸미신 거 오랜만에 봬요.”

“…고마워. 갈까.”

“아, 말 여기 있어요.”

얀이 온갖 힘을 다해서 데려온 이 밤중에 눈에 띄지 않는 검은 말이 푸르륵 푸르륵 신경질적인 숨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진심을 다해서 부탁하지 않으면 말을 듣기는커녕 온갖 성질을 다 부리는 바로 그 말이다. 이 녀석을 데려오긴 힘들었을 텐데, 플란츠는 잠시 얀에게 수고했다는 눈빛을 보냈다.

칼리안이 얀에게서 검은 로브를 받아 쓸 때까지 기다린 플란츠가 같은 색의 로브를 받아들고 천천히 검은 말에게 다가갔다.

“……부탁할게.”

푸릉, 푸르릉……

“우리가 살 수 있게, 도와줘.”

……

낮은 목소리가 깊게 울렸다. 제 목에 닿아온 뼈마디가 불거진 마른 손을 통해 전해져오는 진동을 느낀 검은 말이 이내 난동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플란츠는 뭐야 어떻게 하신 거예요, 라고 말하듯 입이 떡 벌어진 얀에게 나중에라는 제스쳐를 보내곤 언제 적과 똑같이 동생을 안아 들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때와 달라진 점은 힘이 확실히 약해진 게 느껴진다는 것과 과하게 가볍던 것이 제법 무게가 늘었다는 것, 그리고 시간대 뿐이었다.

허리를 꽉 잡아 오는 힘을 느낀 플란츠가 검은 말의 고삐를 잡았다.

“가자.”

검은 말은 굉장히 똑똑했다. 이따금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발을 내딛긴 했지만 경비병들과 만나면 곤란해진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제 검은 털을 십분 활용해서 그늘을 통해 왕궁 정문에 이르렀다. 플란츠는 눈을 꼭 감고 저를 끌어안은 칼리안의 등을 토닥이고 칭찬해주듯 말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히힝, 말이 마치 잘난체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울었다.

“잠시 말에서 내려주시겠습니까.”

문에서 벌어지는 실랑이를 들은 것은 우연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카이리스 국왕 전하의 탄신일 축제라 하여 왔네만.”

익숙한 목소리 몇 개가 섞였다.

그중 하나는, 언젠가 먼 날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나는 앨런 마나실이라 하네. 마법사일세.”

앨런 마나실.

눈을 꼭 감고 있던 칼리안이 그 낯설고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에 눈을 뜨는 것이 느껴졌다. 플란츠는 대신 눈을 감았다. 계획이 더 나아질 수 있는지 없는지 잠시 판가름하고 다시 눈을 떴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어쩌나. 초대장을 잃어버린 것 같네.”

“죄송합니다.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내 이름도 말하였고. 한번 다른 곳에 확인이라도 해주면 안 되겠나? 아주 멀리서 왔다네.”

이건 일부러 잡는 트집이다. 칼리안이 올려다보며 제 생각이 맞냐고 물어오는 것에 그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옳다고 대답해준 플란츠가 한숨을 삼켰다.

이런 태도인데 바꾼 계획이 통할 수 있을까. ……어릴 적 그 따스한 체온을 믿을까.

“초대장을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외양으로 격을 가르는구나.”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플란츠는 마음을 정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바꾼 계획을 시도도 못해보고 폐기하게 될 터였다. 동생을 고이 안아 들고 빠르게 내려온 그는 동생을 잠시 다독이고 검은 로브를 벗어서 맡기고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래. 내, 돌아-”

“무슨 소란이냐.”

갑자기 끼어든 잔월 같은 낮은 목소리에 수비대원들의 눈과 은회색 눈이 동시에 돌아갔다. 프, 플란츠 왕자님!! 경악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수비대원들과는 달리 상대를 알아본 은회색 눈이 크기를 키웠다. 그쪽에 사람이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사람일 줄은 몰랐다는 눈이었다.

팔짱을 끼고 실랑이의 주역들을 힐끔 보던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더 내리깔았다.

“설마 카이리스의 병사들이 외양을 보고 태도를 달리했다는 것은 아닐 테고…”

“아, 아닙니다, 왕자님.”

“…허락 안 했는데. 말.”

비뚜러진 눈매가 매섭게 날카로워졌다. 죄송하다는 말조차도 허락받지 못한 이들이 절도있게 무릎 꿇고 왕자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 자세를 바꾸는 것도 허락하지 않은 채, 연녹색의 눈이 또 다른 주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화는 다 들었는데… 말을 높여야 합니까, 대마법사.”

“!!”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왕자님.”

“그럼 편하게 하지. 당신에게 대화를 요청하고 싶은데.”

“이곳에서 말씀이십니까?”

“아니. 당신이 편한 곳으로 좋아. 이곳은 우리도 별로라서.”

우리.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의 눈이 다른 기척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말과, 작은 체구의 사람.

시종일까, 아니면-.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연녹색 눈을 본 마법사는 턱을 쓸다가 고개를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일행 분과 함께 이쪽으로.”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하곤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수비대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함부로 궁 안에 사람을 들이는 것은 징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동이며 상대 측도 일부러 트집을 잡고자 한 것이었지만, 외양만 보고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사람을 평가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잠시 감겼다가 다시 열린 연녹색 눈이 차가운 빛을 품었다.

“오늘의 소란은 불문에 부치지.”

“…!”

“단, 이 일이 어머니 귀에 들어가면… 혹시 모르니, 알아서 잘하도록.”

“……예!”

“이리 와, 가자.”

이번의 무언은 용서라는 것을 잘 알아들은 수비대원들이 절도있게 경례했다. 그 모습을 홀린 듯이 보던 칼리안이 퍼뜩 정신 차리고 떨리는 손으로 검은 말을 이끌어 플란츠에게 다가왔다. 몰래 그 등을 토닥여 준 플란츠가 자신들의 모습을 올곧게 바라보던 대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안내.”

“…하하… 네, 이쪽으로.”

앨런은 작게 웃고 말에 올라탔다. 칼리안을 안아서 같이 말에 올라탄 플란츠가 다시 한번 검은 말을 토닥이며 부탁을 전하고는 앞서가는 앨런의 뒤를 따랐다.

앨런이 이끌고 온 곳은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였다. 딱!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튕겨서 사일런트 막을 만들어 낸 앨런이 말에서 내려오는 플란츠와 칼리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용무이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왕자님들.”

칼리안이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적안에서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린 앨런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은회색 눈을 온전히 응시하던 칼리안은 플란츠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플란츠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서.”

“왕자님들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용은 무엇입니까?”

플란츠는 제 손을 잡은 작은 손을 꼭 쥐었다. 아프지 않게 단단히 잡은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받쳐주었다.

“칼리안을… 아니, 우리를.”

단단한 목소리에 놀란 붉은 눈이 크게 뜨였다.

“살려줘. ……살고 싶어.”

연두색 눈이 갓 피어난 생명처럼 빛났다. 기억 속에 있던 유리구슬처럼 깨질 듯 아슬아슬한 눈과는 다른, 연약하고 작지만 눈부신 빛을 본 대마법사의 은회색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왕자들이 두 손을 꼭 잡고 나온 이유가.

상대나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말한 마음이.

말하지 못하던 이가 입을 열게 된 각오가.

서로를 보며 따스한 빛을 보이는 두 눈이.

너무나 선명해서. 너무나 익숙한 감정이라서.

앨런 마나실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두 분 다, 심장에 이상이 있으십니다. 아무래도 독을 먹으신 게지요. 무슨 독인지 짐작가는 것이 있습니다만- 굉장히 독한 것입니다. 자신의 상태는 알고 계시겠지요.”

“!”

“…맞아.”

“어딘가에 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궁 밖으로 나오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딘가에 알리지 않은 이유는.

연두색 눈과 붉은 눈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애초에 독을 먹은 이유부터가 상대를 위해서였던 연두색 눈과, 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묵묵히 마시던 붉은 눈.

“……칼리안이 위험해질까 봐. 그래서 먹었고, 그래서 알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위험해질까 봐…요.”

다르게 생긴 두 형제가 같은 말을 입에 담는다. 둘 다 아직 앳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어른스러운 낯을 덮어 쓰고 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던 연두색 눈을 조금 더 길게 본 은회색 눈이 온기를 담아 호선을 그렸다.

“살려드리겠습니다.”

“…!”

“!”

“제가, 왕자님들을.”

남을 위해 자신이 다치는 아이들을.

독한 세상에 발을 내디딘 아직 어린 아이들을.

이번에야말로. 독으로부터.

“그러니, 왕자님들께서 하고 계신 생각을 이 늙은이에게도 말해주십시오.”

*

밤 늦게 들어온 두 왕자는 다음 날 아침부터 왕에게 불려 나갔다. 재스민 향기가 나는 차를 한 입만 마시고 내려둔 플란츠와 따스한 차를 가만 쥐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칼리안을 보지도 않고 창밖만 바라 보던 카이리스의 왕, 르메인이 나직이 말했다.

“어쩌자고 궁 밖에 무단으로 나갔다 온 것이냐.”

“……”

“……”

“플란츠. 성년을 넘은 너도 허락 없이 나가서는 안 되거늘, 어찌 성년도 되지 못한 동생을 데리고-”

“어린 왕자님들은 이만 돌려보내고 대화는 저랑 하시죠.”

이 자리에 없는 첫째와 똑 닮은 푸른 눈이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홱 돌아갔다.

그곳에 있는 사람은, 분명한 7서클 마법사의 로브와 아래로 갈수록 붉은색을 띄는 특징적인 머리카락의 남자-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

간밤에 두 아들을 데리고 궁 밖으로 나갔던 그 엄청난 사람의 등장에 르메인은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만 돌아가거라, 작은 명에 플란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약식의 예를 취하곤 방을 나섰고 칼리안은 쭈뼛대다가 플란츠를 따라 하며 자리를 떴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본 앨런의 날카로운 눈이 더 날카로워지며 웃음 같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전하는, 어머니 같은 분이 아니야. 아니긴 하지만…"

"…관심은 없으실 거예요."

"그렇지. …우릴 아끼시는 것과는 별개로."

"아껴주시는 건가요?"

"……응. 아마."

소같은 아비를 질책할 때였다.

*

"왕자님께선 왕비님을 죽이고 싶으신 겁니까?"

"……"

"…알겠습니다. 하나, 왕자님."

"알아. …조금만, 더 알아보고."

"……예. 한 말씀 드려도 됩니까, 플란츠 왕자님."

"뭔데."

"자식이 어버이를 놓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

"그러니,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그 선을 넘어가는 데엔 정말 힘든 결단이 필요하니까요."

"…응. 노력할게."

"그거면 됩니다."

"…? …형님!"

"플란츠 형님…!!"

"플란츠!! 무엇 하느냐, 치유사를 불러! 어서!!"

"………………플란츠."


"밧줄을 칼로 자른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고의."

"네. 왕자님께서 란델 왕자님 대신 맞지 않았다면 란델 왕자님께서 크게 다치셨겠지요. 어머님께서 노발대발하고 계십니다."

"……"

"어찌 처리할까요. 전하께서 왕자님의 의견을 들어오라고 하셨는데."

"쓸만해. 살리자."

"살리자는 건… 폴룬이군요. 그가 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야. 그리고… 필요하니까. 대신할 이."

"레넌 브리센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그럼 오히려 폴룬이 빠르게 대처하였다는 쪽으로 꾸미지요."

"……고마워."

"대부이지 않습니까. 당연한 일에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네. 그럼 기꺼이 받겠습니다."

"……몸은…… 좀 어떠니."

"…괜찮습니다."

"칼리안이 먹었던 독도 먹었다 들었다만…"

"마나실 백작이 준 해독제를 먹었습니다."

"…그래. 요새 즐기는 것이 있더냐? 전엔 검을 즐긴다고 들었는데."

"……네. 꾸준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렌 경에게서 검을 사사하는 것은 어떠냐?”

"포기하시라니까…"

"포기…? 내가, 포기할 것 같니? 이 내가? 플란츠, 그만 고집부리렴. 아무리 앨런 마나실과 손을 잡았다 한들… 네겐 이 어미의 도움이 꼭 필요할 텐데."

"도움이 아니라… 방해일 텐데."

"…뭐?"

"이것, 마법사들이 알아내 줬습니다만- 제가 익히 알고 있던 것보다도 많더군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니."

"이런 피 묻은 자리 따윈, ……필요 없습니다."

"……아직 어리구나. 많이 어려… 다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거겠죠. 어머니의 손에 제 목이 들리는 일은 없어졌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어머. 그게, 무슨,"

"뭐… 자세한 길은 알아서 정하겠지만."

"칼리안, 대부님."

"형님, 이것 보세요! 저 이런 것도 할 수 있게 됐어요!"

"시스파니안의 피를 이은 분다우십니다. 제 능력을 익혀가시는 속도가 매우 빠르세요."

"장하네."

"대부 스승님 덕분이에요!"

"플란츠 왕자님께서도 배우면 잘 하실 텐데…"

"…아직. 조금 이따가."

"예. 나중에 부탁드립니다."

"우리 오찬 먹으러 가요!"

"응."

"그럽시다. 자, 가시죠."

"하시죠. 대화."

"…하자는 대화의 이름이 협상이냐, 협박이냐."

"들어주시면 협상이 될 테고, 물리시면 협박이 될 겁니다."

"……그래. 들어오거라."

"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왕좌, 원하십니까?"

"원하지 않으면 아침 해를 볼 수 없게 되지 않겠느냐."

"…그럼, 아침 해를 볼 수 있으면."

"……"

"아끼시는 장미와, 자유로운 삶과, 평온한 숨을 보장드리면."

"……"

"손을 잡아주시겠습니까."

"…너의 무엇을 믿고."

"살려드렸는데도 그러십니까."

"그로도 못 믿을 만큼 오래되었으니."

"하… 예. 무너트리고, 지울 겁니다."

"……"

"……"

"…내가 네게 존대를 안 써도 되게 해준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왕자님께서 지그프리드의 검을 배우고 싶으시다고요?"

"……안 되나."

"아닙니다. 저희 아들도 신세 지고 있고… 코끼리를 검으로 사용하시려는 것만 아니라면, 됩니다. 지그프리드의 검은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자라면 누구든 배울 수 있지요."

"고맙군. …그대 아들에게 배웠어. 이 말은."

"……그렇습니까. 그 녀석 다 컸군요. 플란츠 왕자님, 지키고 싶은 게 있으십니까?"

"그래."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냐면―――"

"훌륭합니다. 소공작을 종종 데리고 갈 테니, 열심히 따라오셔야 합니다."

"응. ……잘 부탁하지, 스승님."

“예.”

"대장 코끼리가 먼저인 겁니까? 서운한데요."

“대부님.”

“말년에 받은 대자가 이리 서운하게 하니, 원…”

"…대부님."

"예. 압니다. 모시겠습니다. 모자가 벗겨지지 않게 주의하십시오."

"응. 대부님도."

"마음 같아선 혼자 정리하고 오고 싶긴 합니다만…"

"안돼. …봐야지."

"그래서 모셔가는 겁니다."

"고마워."

"…예."


"……"

"……"

"…? …!"

"……"

"…이곳을, 무너트릴 건데."

"!"

"같이 갈래?"

"……"

"알겠어. 대부님."

"예. 왜 그러십니까?"

"둘, 같이. …데려가자."

"알겠습니다. 둘은 데려가고, 잡혀 온 이들은 풀어주고, 나머지는 없애는 것. 맞지요."

"응."

“물러나 계십시오. 스승이 다 처리하겠습니다.”

*

실리케 브리센은 아름답게 웃었다. 방금 전까진 그렇게 그 고운 얼굴을 함부로 쓰더니, 한순간에 꽃이 만발한 것처럼 화사해진 아름다움에 몇몇 이들이 상황도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보이는 그 웃음이 닿은 곳은,

그와 너무도 닮은 신록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곳으로.

“! …….”

마법 군단, 발칸의 창단식.

브리센의 세가 꺾이기 시작한 신호이자- 플란츠가 브리센을 완전히 끊어냈다는 증거.

그래.

이 모든 것의 배후는.

세 명의 얼굴을 길게 휘어진 독 같은 연녹색 눈이 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중 한 사람을 향해 청포도색 드레스가 사락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왕비의 발걸음을 눈으로 좇은 이는 없었다. 전례 없는 마법 군단의 부군단장이 왕으로부터 서임 받고 있었으므로.

시선을 느낀 은회색 눈과 루비색 눈이 주위를 보았다.

시선을 느낀 생명을 품은 연두색 눈은 들리지 않았다.

“다음, 발칸의 군단장은-”

설마, 제 새끼를 죽이려 들 정도로 인간이 아닌 자겠는가. 그리 생각한 은회색 눈이 뒤늦게 보았다.

형님을 죽이려고 하신 적은 없으니까. 과거를 떠올린 루비색 눈이 무언가를 깨닫고 뒤늦게 커졌다.

실리케의 손에는, 은색으로 희게 빛나는 비수가 들려있었다.

푹.

옷을 찢고 심장 근처를 파고든 비수로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비수를 든 이는 웃었다. 상대가 저가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제 피를 내어줬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수에 찔린 이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제 것과 같은 휘어진 녹색 눈을 올려다 보았다.

“플란츠, 내 아가… 같이 가자꾸나.”

유일하게 제 손으로 취할 생각이었던 피를 이르게 보며, 모친이 말했다.

제 심장에 가까스로 박힌 은장도를 건조한 눈으로 보며, 아들이 답했다.

“…늦었습니다.”

지금까지 반항적으로 방해하던 태도와는 다른, 완곡한 거절이었다.

열 달을 품어 세상 밖에 내어줬던 은인에게 하는, 마지막 거부였다.

연두색 눈이 가물가물 흐릿하게 호선을 그리곤 힘없이 감겨 들어갔다. 고운 이마가 찌푸려지고 뼈마디가 두드러진 손은 손톱이 파고들어갈 정도로 주먹 쥐어서 새하얗게 질렸는데도, 눈과 입은 미소를 띄었다. 그 눈과 꼭 닮은 연녹색 눈이 크게 떠지려는 찰나, 새하얀 빛과 함께 청포도색 드레스를 입은 몸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급하게 달려온 칼리안이 창백하게 질려도 아름다운 얼굴로 울먹이며 플란츠를 불렀다. 위에서 군단장의 이름을 호명하려던 르메인은 정신을 놓은 듯이 휘청휘청 아들에게 다가왔다. 실리케를 날려버린 앨런이 굳어서 플란츠의 이름만 부르는 플란츠의 시종, 레릭을 깨우고 치유사 히나를 데려오라 명했다.

이 모든 소란을 보고 있던 노란 머리카락이 조용히 움직였다. 한쪽 손엔 못보던 장신구를 든 채로, 다른 이들보다 조금 늦게 몸을 일으킨 이가 큰 보폭으로 또다시 쓰러진 동생의 곁에 다가왔다.

“……기마 공연에서의 보답이다.”

큰 형님의 목소리를 들은 칼리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보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쓰러진 이에게 무슨 수로 보답을 건네겠는가? 치료 능력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유의미한 말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기마 공연에서의 보답이라면. 혹시. 칼리안은 급하게 외쳤다.

“라, 란델 형님. 형님은, 형님은 마법을.”

“알고 있다.”

“!”

란델은 플란츠의 가슴 한가운데에 박힌 비수를 뽑아내고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붉은 빛이 나기 시작했다. 불길하고 어두운 붉은 빛에서, 울컥 차오르는 핏덩어리 속에서, 아주 느리지만 분명히 새살이 돋아놨다.

얼굴이 창백해진 레릭의 인도 하에 이곳까지 달려온 은발의 소녀- 히나가 급하게 란델의 맞은편에 앉았다. 붉은 빛과는 대조되는 흰 빛이 히나의 손끝에서 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빛이 함께하자 구멍이 막히던 매우 느린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플란츠의 새하얘진 안색이 차츰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르메인이 힘을 놓고 주저앉았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살았구나. 이성이 돌아오자 그제야 주변이 보였다. 르메인의 푸른 눈이 분노로 날카로워졌다.

“카에라! 왕비를 구속해라!!”

“아직 죽이진 마시죠.”

용암처럼 뚝뚝 끓어 떨어지는 낮은 목소리에 플란츠만을 보고 있던 셋을 뺀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7서클 대마법사의 손끝에서 검붉은 불이 피어오르고 튀는 광경에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 모든 것을 무시한, 공격당하는 대자를 무력하게 보고만 있던 대부가 차가운 불처럼 타오르는 은회색 눈으로 의식을 잃은 여인을 노려보았다.

“이 일은, 플란츠 왕자님께서 끝을 맺으셔야 할 테니… 왕자님께서 깨어나시기 전엔 죽이면 안 됩니다.”

“…그리 하지.”

카에라가 다시 실리케를 체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을 본 앨런은 다시 플란츠의 곁에 앉았다. 플란츠의 차가운 손을 꼭 쥔 칼리안이 앨런에게 기댔다. 칼리안의 동그란 머리를 끌어 안아 보듬어준 앨런이 대자의 창백하면서도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것이 고집스럽게도 다시 돌아왔다.

고통도, 분노도, 슬픔도 보이지 않는 얼굴.

그 얼굴에 실낱같이 드리운 감정은, 오히려.

“…기어이 제 피를 보여주고서야 만족하셨습니까.”

대답할 이 없는 질문이 뜨거운 걱정에 녹아내렸다.

*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는 연두색 눈이 느리게 깜박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침구. 낯선 듯 익숙한 무게.

4층의 침실.

“눈을 뜨셨습니까.”

“…대부님.”

“네. 대자님 대부입니다.”

붉은색으로 바뀌어 내려가는 머리카락을 눈에 담은 이의 옅은 비취빛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며칠을 의식 없이 쓰러져 있다가 이제야 일어난 이가 몸을 일으킬 심산인 것을 알아차린 상대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어나려는 것을 저지했다. 따스하고 묵직한 낯선 체온에 붕대를 칭칭 감은 몸이 일순 굳었다. 그를 본 이가 잡는 것에서 토닥이는 것으로 목적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상처만 나았을 뿐이지 피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아문 것도 아니고 다시 터질 수 있으니, 그냥 누워 계십시오.”

“…얼굴.”

“얼굴… 아, 얼굴을 보고 대화하고 싶으십니까. 그럼 제가 다가가면 되지요.”

“……응…”

“만족하셨습니까?”

꺼질듯 위태로운 생명의 빛을 품은 연두색 눈이 감겼다.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질문에 모두 같은 대답을 돌려준 무언에 못마땅한 듯 한숨을 내쉰 앨런이 두꺼운 이불을 정리하고 아직 덜 아문 가슴을 깃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섬세하고 약하게 토닥여주었다.

“란델 왕자님과 히나가 살려드렸습니다.”

“…형님이…”

“치유력을 갖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드러내실 줄은… 몰랐는데.”

“기마 공연의 보답이라 하시더군요.”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한 대답 뒤엔 고요한 시선이 침대맡에 몸을 기댄 동그란 머리통에 닿았다.

몸을 옹송그리고 이불에 파묻힌 검은 머리카락을 이어서 쓰다듬어준 앨런이 설명했다.

“계속 여기서 기다리셨습니다.”

“……”

“그쪽 역시 기다리고 있고요.”

“…응.”

“가보시겠습니까?”

선명한 빛을 품은 연두색 눈이 비장하게 반짝였다. 그 확고한 의사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앨런이 플란츠의 팔을 들어 칼리안을 깨우지 않고 잘 일어날 수 있도록 부축했다. 다시 눕혀드린 것이 허사가 되었군요, 하고 농을 치면서.

구부정하게 엎드린 칼리안의 등에 의자에 걸려 있던 제 카디건을 가져다 덮어준 플란츠가 다시 앨런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인도에 어지러운 몸을 기대며, 도착한 곳은-

차디찬 감옥.

“척추뼈가 부러진 것을 최소한의 조치만 취해 놨습니다.”

“…대부님이?”

“예. 제 아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가만있어야 합니까?”

“……아냐.”

“그렇지요. 그래서 날려버렸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일어나진 못할 겁니다.”

“…응.”

앨런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 대답에 모른 척 대꾸했다. 고의라는 걸 알아차린 플란츠는 한숨만 내쉬곤 죄인이 있는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앨런은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어둡고 추운 감옥에 숨에서 시린 김이 나왔다. 이 추위 속의 유일한 생명은 얼마 가지 않아 제 것과 같은 색을 지닌 이를 발견했다.

“…어머니.”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렸다. 철컥,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 쇠로 된 창살을 힘없이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어울리지 않는 무채색 조잡한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있는 여인이 있었다.

플란츠는 그 앞에 섰다. 곱게 감긴 눈 주변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불규칙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은 호흡이 인위적이라는 증거였다. 오래 누워 있었어서 더욱 가라앉고 쉰 낮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공간을 울렸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

“…깨셨으면 눈은 떠주시죠.”

자신을 보는 눈과 꼭 닮은 눈이 느리게 모습을 드러냈다.

*

따스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챙, 끼익! 검이 맞부딪히고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픈지 얼마 안 된 것치고는, 실력이 제법인데…!”

“……”

“그래도 확실히-”

쨍그랑! 무거운 검이 떨어졌다. 텅 비어버린 쓰라린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 연두색 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연보랏빛 눈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거친 숨을 몰아 쉬자 상대가 날카로운 눈으로 길게 웃었다.

“힘이 부족해. 그 검은 힘이 더 필요한 검인데 말이야.”

“……”

“말 좀 해봐. 내가 아무리 네 말을 잘 알아듣는다지만, 나도 네 목소리 좀 듣고 싶다고.”

“응.”

“그게 다냐……”

긴 은색 머리카락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허탈한 얼굴을 하고서도 능숙하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은 상대가 플란츠에게도 손수건을 건넸다. 얌전히 땀을 닦은 플란츠가 느리게 멈춰있다가 상대의 연보랏빛 눈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베른.”

“왜?”

“답답해 보여.”

“……아?”

“나갈까.”

바다에 떠오른 달그림자 같은 낮은 목소리가 고래를 뒤흔들었다.

*

왕자님. 절대, 절대, 절대! 안정입니다. 세크리티아에선 그냥 푹 쉬고 오세요. 검도 쓰지 마시고요. 큰 코끼리도 당분간은 푹 쉬라고만 했습니다. 하여간에 카이리시스는 쓸데없이 추운 곳에 있어선… 근데 정말 리베른이 아니라 세크리티아로 괜찮으십니까?……

-로 시작하는 앨런의 긴 잔소리를 끝으로 꿈에서 깨어난 플란츠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세크리티아의 2왕자, 베른이 그 시선에 싱긋 웃었다.

“왜?”

다소 공격적인 반말에 비취색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가 가라앉았다. 만나자마자 사소한 말다툼으로 서로 존대는 버리자고 했던 것이 조금 늦게 떠올랐기 때문에, 다시 평온해진 그가 나른한 눈을 깜박이며 대꾸했다.

“…왜.”

“죽은 것처럼 자길래, 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데- 하고 봤어.”

“……”

“진짜 아직 아프구나. 겉으론 멀쩡해 보여서 안 믿었는데.”

“야.”

“미안. 지금 우리 되게 불안정하거든. 어쩔 수 없으니까 이 시기에 온 네가 감수해.”

무해한 것처럼 웃는 눈에서 날카로운 경계를 읽은 플란츠는 한숨을 삼켰다. 이럴 거면 왜 방문을 허가했느냐는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눈앞의 상대에겐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곤 가라앉는다.

플란츠는 베른이 이곳이 불안정하다고 하는 이유를 알았다. 온몸에서 피 냄새를 풍기고 있는 왕비 소생의 2왕자와 왕세자로서 대외 업무를 보는 후궁 소생의 1왕자, 그리고 기분 나쁘게 웃는 왕을 보고 아무것도 모르면 바보니까. 플란츠는 바보라는 말과 가장 거리가 먼 생명체였으므로. 아직 가시지 않은 잠에 취해 희미한 빛이 든 연두색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귀찮아서, 혹은 저와 상관이 없을 것 같아서 미뤄뒀던 생각을 이을 때가 된 것 같았다.

1왕자에게 기사의 맹세를 한 2왕자는 그를 지키려고 피를 묻히고 다니는 것이고, 왕은 1왕자를 인질로 2왕자를 경계하는 중이겠지. 왕의 몸 상태가 안 좋으니 조금씩 귀족들을 구슬리며 기다리기만 하면 이기는 게임에서 외세의 개입만큼 불확실한 요소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카이리스의 왕자인 자신을 잘 대해주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일 테지.

작은 정보 몇 가지를 기반으로 한순간에 진실을 꿰뚫은 머리가 숨 쉬듯 상황을 파악했다. 세크리티아의 정세를 고이 정리해서 머리에 넣은 플란츠가 문득 저를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깃든 감정은.

“…해, 질문.”

“엇, 괜찮겠어? 예민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더 예민한 거 말할 거잖아.”

“……너 진짜 똑똑하네. 그러니까 돌아가면 세자가 되는 거구나.”

플란츠의 왕세자 임명. 르메인이 공표하지만 않았을 뿐, 카이리시스의 귀족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그 사실을 세크리티아의 왕자가 알고 있다는 건 말이 조금 달랐다. 눈앞의 왕자가 생각보다 더 정보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정보로 추가한 플란츠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곧 건네져 올 질문이 뭔지 알 것 같았기에 몰래 주먹을 쥐었다.

베른은 알았다는 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전 왕비를 죽도록 일부러 인도했다며.”

“……그래.”

“어땠어? 만족했어? 통쾌했어? 아니면…”

“……”

“…너 절망했구나.”

“!”

연두색 눈이 커졌다. 항상 담백하고 건조한 반응만 보여주던 옆나라 2왕자의 유의미한 반응에서 긍정의 답을 이끌어낸 베른이 쓰게 웃었다.

“미안. 네가 네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건 미처 몰랐어. 영락없이 나 같은 경우인 줄 알았네.”

“…아냐.”

“난 우리 아버지를 죽이고 싶거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이렇게 상기시키지 않으면 실수로 죽여버릴 거 같아서 부르는 거야.”

“……”

“그래서 이렇게 죽은 눈을 하고 있었구나. 피어나는 생명 같은 눈인데 왜 죽어있나 했네.”

죽은 눈. 그랬던가.

칼리안을 지키고, 대부님을 만나고, 스승님과 말하고, 전하와 시선을 나누고, 형님과 서로를 보면서… 이대로면 다행히 왕궁 안에서도 작게나마 숨 쉴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 같은데.

난, 아직도 그랬던가.

그래서 걱정하던 건가.

“아, 맨날 그렇다는 건 아니야. 카이리스 쪽이랑 연락하거나 다른 사람이랑 편하게 대화하면 좀 살아나긴 해. 내가 너 맨날 건드린 건 그거 때문이야. 새순 같은 눈이 파릇해지는 거 보는 재미가 있거든.”

하지만,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 남자도.

“……너도 그런데.”

“뭐?”

“죽은 눈.”

“……”

“…햇빛 같은 눈인데도.”

연보랏빛 눈이 크기를 키웠다. 햇빛 같은 눈,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자수정 같은 눈이라면 몰라도.

플란츠는 생각을 이었다. 햇빛 같은 눈. 해드는 날에 몇 겹의 유리로 된 창문을 통해 내리는 그 햇빛의 그림자와 닮은 색의 눈. 연두색 눈을 새순 같다며 생명 같은 눈이라 한 녀석에게 돌려주기 딱 좋은 비유이지 않은가. 더없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점에서. 죽은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런 말 처음 들어봤어.”

“……”

“죽은 눈이라는 말은 기사들이나 아리안느 녀석에게 몇 번 들어보긴 했는데, 햇빛 같은 눈이라… 맘에 드네. 너 재밌는 친구구나?”

“별로.”

“검 쓴다고 했지? 나랑 대련하자. 나 실력 꽤 괜찮다고?”

“아직.”

“그럼 좀 나으면.”

“……그래.”

플란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이 말이 많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차츰 귀 밖으로 새 나가기 시작한다. 어라, 자? 자는 거야? 희뿌연 목소리가 희미해진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위는 하얗고 아래는 까만 것이 하얀 것을 좌우로 갸웃하다가 좌석 옆에 안치된 부드러운 무언가를 플란츠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그래, 더 자.”

다정한 인사를 어설프게 따라 하듯이 낮은 목소리가 따스하게 속삭이는 것을 얼핏 들은 듯한 기억을 마지막으로, 플란츠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카이리스 2왕자의 나가자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베른 세크리티아는 다음 날 그것을 깨닫고는 벙벙해진 어안을 제 볼을 몇 번 치는 것으로 가까스로 되찾았다.

“가자.”

“…어디로?”

“밖으로.”

“……허가 받은 거야?”

갓 피어난 생명과 꼭 닮은 찬란한 빛을 품은 연두색 눈이 가운데에 박힌 예쁘장한 얼굴이 갸웃 흔들렸다.

“받았어.”

“아니… 어떻게?”

“내 대부님께서 워낙 대단하신 분이라.”

협박했다는 소리다.

베른은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자신이 플란츠의 말을 잘 알아듣는 편이긴 하지만 이렇게 잘 이해한 적은 없었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러니까, 딱히 줄이지도 않았고 함축시키지도 않아서 말의 머리와 몸통이 존재하는 비교적 온전한 말에선 도출해낼 수 있는 게 명백한 진실 하나뿐이므로 애써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는 뜻이다.

“…세크리티아 없애버리겠다고?”

“부르면 오시니까 나갔다 오겠다고.”

거기까진 생각 안 했나보다.

아직 플란츠의 두뇌의 한계를 잘 모르는 베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칼리안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다 생각하고 하신 거겠지만 형님 그러셔도 되는 거냐고 하며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겠지만 베른은 이제 이 저돌적인 완두콩과 만난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베른의 안도는 본인이 한 다음 질문 하나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럼… 아버지가 그냥 지레 겁먹고 허락했다는 거야?”

“…내가 발칸의 군단장이라고도 하긴 했지.”

“……아?”

“지그프리드 공의 제자고.”

“……”

“왕세자로 내정돼있고…”

“……”

“제일 잘 먹힌 건 대부님 이름이었던 거 같지만.”

아니었다.

건드리면 각 잡고 망하게 해줄 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부탁 들어주라고 협박할 수 있는 거리는 죄다 들어보고 왔다.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빠르게 깨달은 베른은 아파오는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이 완두콩의 행동력에 경악해서인지 데블란이 앞으로 뭔 짓을 할지 알 수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대체 이 왕자는 어떻게 자랐길래 행동력이 이 모양이지? 평소엔 얌전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면서. 고기도 안 먹고 동족상잔의 비극이나 일으키면서.

“…싫은 건가?”

완두콩 같은 게 삶아진 것처럼 흐릿해진 것을 본 베른은 인상 쓰는 것을 그만두었다. 제법 봐서 알게 된 건데, 저 풀잎 같은 녀석은 시들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까지 상당히 무기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서 되도록이면 시들지 않게 하는 편이 좋았다.

…뭐, 그 데블란이 엿먹었다는 것 자체는 속 시원하기도 했고.

“아니야. 그 양반이 뭐 할 수도 없는 어린 애에게 기세에서 밀려서 열받는 거 상상하니까 기분 좋네. 상상일 뿐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을 테니까 더 만족스럽고.”

“다행이군.”

“근데 궁금한 거.”

플란츠 왈 햇빛을 닮은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세크리티아에 온 초반에 드러내던 짙은 경계심을 담은 날카로움이 아니라, 순수한 의구심과 의심을 담은 날카로움이 그 눈을 벼렸다. 따져보면 한참 늦은 의문이 베른의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나를 위해.”

……그러게. 왤까.

플란츠는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질문이었다. 베른이 묻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수없이 묻고 답을 추론했던 의문이었다.

왜 그를 돕고 싶은지.

왜 그에게 신경을 쓰는지.

불필요하게.

답을 낸 것은 전날 대련이 끝나고 저도 모르게 나가겠냐고 물었을 때였다. 뜻밖의 선택지를 본 사람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빛을 쫓아 손을 뻗는 사람처럼, 생경하게 빛나는 햇빛 같은 눈이 너무도 익숙해서 답을 알아냈다. 깨달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햇빛같은 눈을 가지고선 죽어가는 그 모습에서 동생을 떠올렸다.

형제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모습에서 자신을 떠올렸다.

피냄새를 달고서는 외면하듯 웃는 그 모습에서 형님을 떠올렸다.

그는 질식을, 노력을, 외면을 닮았다. 그중에서도 노력은, 더욱 닮은 구석이 많았다. 며칠 지켜보고 대화를 섞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능력이 있는 플란츠는 쉽게 그와 자신 간의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어찌 돕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그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동생이, 그런 눈을 하고 있었는데.”

“……”

“밖으로 나오니까… 반짝이는 눈을 해서.”

“…!”

“……숨을 쉴 수 있게 되어서.”

누구보다도 숨에 가까운 색채를 가진 이가 숨을 입에 담는다. 정작 자신은 숨 쉬지 못하는 것처럼 단추며 소매를 죄다 풀어헤치고 있으면서. 타인의 숨에 안도하듯 고요하게 미소 지으며.

“그래서, 보고 싶었어.”

“…내 눈이 반짝이는 것을?”

“숨 쉬는 것을.”

급하게 들이마신 숨이 느리게 풀려 나온다. 크게 뜨인 연보랏빛 눈이 천천히 깜박이며 방금 들은 말을 되짚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라는 조언을 들어서.”

숨 쉴 수 있게 되는 것. 달콤하고 찬란한 생명의 자비와 같은 제안. 데블란이 죽고, 형님이 왕위에 오르고, 모든 것이 잘 풀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 이후에 되기를 바라던 것. 간절히, 또한 여상히 바라고 소원하던 평온.

……하지만.

“……난 못해.”

“왜?”

“알고 있잖아, 플란츠. 난.”

베른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최근엔 카이리스 2왕자의 상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았지만, 그가 가지치기를 하며 손에 묻혀온 피 냄새는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짙었다. 베른은 플란츠가 제 손에서 배어나오는 피 냄새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때때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네 자비를 받기엔 내 손은 이미 더러워져 있다고.

나는 숨 쉴 수 있게 되면 안될 사람이라고.

플란츠는 그 말이 익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굳이 되짚어보지 않아도 왜 익숙한지 모를 수 없었다. 제 머릿속 한 구석을 차지하고 앉은 지워낼 수 없는 오랜 자학과 같은 말이었으니까. 한참 전에 깨달은 바와 같이, 저와 공통점이 많은 그가 또다시 제가 생각했던 것들을 입에 담은 것이니까.

그래서,

손을 잡았다.

“괜찮아.”

“…아니야.”

“잊을 수 없다면, 날 도와주는 걸로 해.”

깨져들어가기 시작한 유리구슬 같은 눈이 심해에 처박힌 연보랏빛 눈을 바라보았다. 이쪽 역시 아직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니까. 가족들 앞에선 조금 괜찮지만, 마지막으로 들었던 증오와 무심이 너무나 깊숙이 남아 있으니까. 굳이 입밖으로 내보내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을 제법 된 아물지 않은 상흔을 내보였다. 가족들이 저를 이 멀리까지 보내 준 이유를 꺼냈다.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돌로 된 사방에서 한기가 피어올랐다. 플란츠는 겨울에도 춥다기보단 시원한 편인 세크리티아가 아니라 가혹히도 추운 카이리스의 감옥에 있었다. 11월 중순의 겨울이 가까워진 카이리스에서도 유독 서늘한 공기에 유일하게 따스해 보이는 새하얀 김이 입 밖으로 새 나오는 숨에 앉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돌과 겨울의 냄새가 났다. 뚝, 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조용한 옥을 울렸다.

어울리지 않는 삭막하고 조잡한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있는 것은,

옅은 비취색 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아름다운 여인.

"…이럴 줄 알았다면, 사랑을 흉내 내볼 것을 그랬구나. 거의 다 왔었는데."

"……끝까지 변하질 않는군요."

"내가 왜 변하니? 아직 어리구나, 내 아가."

이 어미를 죽이면서도 그 모양인 것은……

“…란츠, 플란츠! 정신 차려!”

…아. ……지금은, 그 감옥 안이 아니지.

플란츠는 다급한 손길에 퍼뜩 정신 차리곤 급하게 숨을 가다듬었다. 한순간 불안정해진 호흡이 서서히 돌아왔다. 염려로 가득 찬 상대의 눈은 상흔을 보았음에도 이유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티가 났다. 왜 상태가 갑자기 이렇게 됐는지 걱정하는 게 명백한 연보랏빛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 그가 쓰게 웃었다.

“너 괜찮아?! 갑자기 왜…!!”

“……아직, 나도 이러니까.”

“!”

“함께 숨 쉬어 줘. 내 곁에선.”

베른의 얼굴이 감출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미묘하게 굳었다. 숨 쉬는 걸 보고 싶다는 걸로는 납득하기 어렵겠지, 플란츠는 어렵지 않게 생각을 이었다. 타인이 숨 쉬는 걸 보고 싶다고 제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는 놈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못할 테니까.

예상 그대로의 질문이 베른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어째서?”

“내버려 둘 수 없어서.”

“고작 그걸로?”

“너와 내가 닮았으니까.”

“……”

“아니면, 표현을 다르게 해볼까.”

갓 피어난 생명을 담은 듯 싱그러운 파문이 이는 연두색 눈이 지그시 연보라색 눈을 바라보았다. 바로 방금 전에 뭔지 모를 트리거를 밟아서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렸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부드러운 기색을 띤 채로. 이유 모를 굳은 결심을 드러내며.

“날 살려줘.”

“…!”

“네가 숨 쉬는 걸 본다면, 나도 살아날 것 같아.”

정말이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베른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을 두어 번 억지로 깜박이며 생각을 이었다. 카이리스 2왕자가 세크리티아 2왕자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 카이리스의 차기 왕세자가 세크리티아 왕세자의 기사에게 이토록 자비를 베풀고자 하는 이유.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베른은 이미 플란츠가 이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함께 있는 내내 비슷한 것을 느껴오고 있었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너무나도 닮았다는 사실을.

외모나 성격 면에서는 거의 정반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다른데, 쓸데 없는 면에서 둘은 닮아 있었다. 가족의 탈을 쓴 이로부터 가족을 지키고자 노력해온 것. 가족을 위해 원치도 않는 짓을 하고 가면을 뒤집어썼다는 것. 그 과정에서 메말라서, 옥죄여서 멀쩡한 숨이 막혀오고 있다는 것 등의- 타인에게서 발견할 때는 하등 불쾌하고 안쓰러운 부분에서.

플란츠는 사랑하면서도 증오했던 이 때문에 거의 다 성공했는데도 숨 쉬지 못하고, 베른은 손에 묻힌 피 때문에 숨 쉬지 못하면서도 거의 성공하기 직전이라는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원인은 거의 같았고 그 결과는 쓰라릴 정도로 유사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상대에게 자신을 이입하는 것이다.

플란츠는 과거의 자신을 베른에게, 베른은 미래의 자신을 플란츠에게.

다 알면서도 계속해서 의심하고 이유를 묻는 이유는.

이렇게도 달콤하디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자비를 믿기 어려워서.

“…살린다면, 목숨을 구해야지. 기사가 타인을 살리는 방법은 그거야. 적으로부터, 위험으로부터 신체를 지키고 안심을 주는 것.”

“그럼 내 목숨도 살려주면 되는 것 아닌가.”

“…!”

“나가면- 많을 것 같은데.”

새하얀 손이 내밀어져 왔다. 검을 많이 잡았는데도 검을 잡은 사람 특유의 굳은 살이 배기지 않은 고운 손, 뼈마디가 두드러진 마르고 예쁜 손이 다시 한번 베른에게 내밀어졌다.

그 손의 주인은, 여전히,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호의로 가득 찬 빛나는 눈을 한 채로.

세크리티아는 너무도 아름다운 나라지만 그림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베른은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을 삼킨 것처럼 낮은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나가면, 많은 이들이 있겠지. 왕세자의 직위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이들이, 외세의 개입을 우려한 멍청한 이들이, 그 외의 온갖 멍청한 이들의 손이 닿은 것들이.

“나가자.”

하지만 달빛을 닮은 낮은 목소리는 그런 건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흔들림 없이 곧게 내려앉았다.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고개를 들어 새로이 피어난 새싹과 같은 갓 시작된 생명의 태동이 발밑을 흔들어서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고래를 떠밀어 올렸다. 오직 바닷속에 잠겨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던 고래가 생명의 바람에 뛰어들었다.

계속해서 들어왔지만 한 번도 들어줄 수 없던 바람을 들어서.

수단만으로 말하듯 건조한 목소리에서 찬란한 빛을 머금은 눈을 보아서.

“…그래.”

고래는 아프게 웃었다.

“내가 당신 꼭 살려줄게.”

생은 그윽하게 웃었다.

*

"절대 안정이라고, 세크리티아에선 푹 쉬고 오시라고… 이 노구가 분명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아니야."

"그, 플란츠 말은 마나실 후작의 말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노구라 표현하신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만, 맞지 당신?"

“응.”

"맞습니다. 어찌 그리 잘 알아들으시는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베른 왕자님께선 잠시 조용히 해주시죠. 저희 대자님께서 또 일을 벌이셨는데 대부로서 말 좀 해야겠으니까요. 제게 이 정도 자격은 있지요, 왕자님?"

"……넘치게. 근데,"

"네. 무슨 의도셨습니까."

"……비슷해서."

"……"

"나랑 닮아서 숨 쉬길 바랐고. …칼리안은, 나오니까 숨 쉴 수 있었어서."

"……"

"미안, 대부님. 말 안 들어서."

"……아닙니다. 이전에 부탁드린 것은 지켜주셨으니, 제가 괜찮다 말씀드리는 편이 옳겠군요. 솔직히 말해주셔서, 감정을 인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

"아, 후작과의 약속이었습니까. 저렇게 솔직한 것이."

"원래도 가감 없으시긴 했습니다만, 예. 저와 솔직하게 말하기로 약속한 이후 더 직설적이게 되셨죠. 그보다 왕자님들, 이젠 어쩌실 겁니까? 바라신 대로 궁 밖으로 나오셨는데."

“……궁금한 거, 있었는데.”

“호오, 무엇입니까?”

“세크리티아에서? 진작 말하지. 도와줬을 텐데.”

“말고. …일단, 비밀로.”

"당신 진짜 위험한 짓 서슴없이 하네. 마나실 경이나 그 애지중지하는 동생이 자주 기겁하지 않았어?"

"짖지."

"미안한데 지금 거의 확신하고 있거든. 분명히 당신 못 말려서 뒷목 잡은 적 많을 거야."

"……"

"……당신도 느꼈지?"

"어."

"강도려나."

"적지 않나."

"그렇지. 하여간 멍청한 것들 많아. 스물이니까 내가 열다섯."

"열."

"오, 대견하지만 당신 아직 빈혈 있으니까 열셋."

"아홉."

"열셋."

"…여덟."

"좋아. 가자."


"플란츠, 이쪽 끝났- 잠깐, 플란츠!!"

"……!"

"당신 내 생일이라고 시나스타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일부러 경로 이렇게 정한 거 맞지? 사실 미래 보는 거 아니야?"

"짖지."

"멍. 아니면 어떻게 가는 곳마다 이렇게 사람 구할 일이 생기냐고."

"좋은 거 아닌가."

"나 숨 쉴 수 있는 곳 늘어나면 다야? 당신은 진짜 당신 안전 챙기는 법을 좀 배워야 해. 플란츠 당신 살려준다고 내가 그러긴 했는데 당신 일부러 위험한 데 머리 들이밀잖아. 그럼 나도 한계가 있다고. 물론 내 전력을 다해서 당신만은 지켜줄 거긴 하지만. 진짜 나 당신 앞에선 숲에 들어선 것처럼 숨 아아아주 잘 쉬게 생겼어. 아니면 당신도 오러 깨우치고 싶은 거야? 나랑 거의 하루종일 같이 있으면서 맨날맨날 같이 대련하면서 더 필요한 거야? 나 당신 구하다가 오러 쓸 수 있게 된 거 보고도 똑똑한 당신이 몰라? 진짜 그런 경험 두 번 하기 싫거든? 아니 애초에 당신은 마법도 쓰잖아. 마나실 후작 수업도 얼마 안 들었으면서 벌써 4서클이면 그냥 당신 조금 더 안전한 마법사 해. 마법은 다칠 위험도 비교적 적잖"

"그만, 좀."

"우리 고작 네 달 만에 곧 헤어지는데 봐주지."

"……쉿."

"…?"

"…!"

"어, 잠깐. 플란……!"

"플란츠 형님!"

"칼리안."

"다녀오셨어요? 왕궁 밖으로 나가셨던 건 어땠나요? 루시랑 안네가 형님 많이 기다렸어요."

"하나씩. 응. 재밌었어. …나도."

"네 달이 너무 길었어요. 대부님 덕분에 연락은 계속했지만, 부족했어요. 이제 어디 길게 안 가시는 거죠?"

"그렇지. …다녀왔습니다. 전하, 형님."

"다녀왔니… 플란츠."

"…나올 필요는 없었던 듯하구나."

"예. 걱정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하는 것이냐?"

"…그래야겠지요."

"그래… 일단 쉬거라. 먼저 올라가마."

"플란츠. 어서 오거라. ……보고 싶었단다."

"……네."

"전하께서 많이 변하셨어요, 형님."

"흠, 흠…"

"…그러게."


"오셨습니까, 왕자님."

"오랜만입니다, 왕자님."

-오랜만, 이에요. 잘, 다녀, 오셨어요?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왔어. 오랜만이네, 스승님. 소공작 역시."

"…오… 오러가 생기셨군요. 최연소 아닙니까?"

"…아는군. 글쎄, 옆나라 2왕자도."

"세크리티아의 2왕자라면 왕자님과 생일이 아홉 달 정도 차이 나시는 것으로 압니다만. 두 분 다 열여섯에 경지에 오르신 것이군요."

"역시 우리 소공작! 비슷한 연배의 둘이 올랐는데, 보고만 있을 게냐? 키리에 너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저 역시."

"기대하지."

-축하드려요, 좋은, 왕자님. 소공작님도, 오빠도, 응원, 할게요.

"감사합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

"후작이나 되서는, 역모라… 멍청하기 짝이 없어."

"…플란츠 왕자님, 가족을-!!"

"가족이라… 자넨 나를 가족이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텐데, 무슨 염치로 그 단어를 입에 올리나."

"……실리케를 죽였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감히…!!"

"……어머니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닐 테고. 감히라는 단어는 내가 그대에게 써야 할 말인 것 같은데. 감히, 인간답지 않은 짓들을 이리 해놓고 살아가기를 바랐나."

"…!"

"브리센 저택을 샅샅이 뒤지고, 모든 것을 빼내라. 사람은 제압하고 남은 것들은 태워버리도록."

"예, 군단장님!"


"군단장님, 저택 안에 이 아이가 있었습니다만…"

"……넌, 누구지?"

"…리리에… 리리에 브리센이에요."

"…부모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나."

"아버지는, 레넌 브리센이고… 엄마는 여기 없어요."

"……아이는 빼내고 해야 했지 않나, 부군단장."

"…죄송합니다, 군단장이신 곧 왕세자가 되실 예정이신 플란츠 왕자님. 워낙 깊숙이 숨겨져 있었어서 아이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

"……파란 머리 마법사."

"시정하겠습니다. 이만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하… 그래. ……리리에."

"네, 네… 왕자님."

"…우선… 나랑, 같이 가겠나."

"!"

"…이후엔, 네가 바라는 대로 해도 좋으니. 일단은…"

"……"

"…내가 새로운 동생을, 편한 모습으로 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는데."

"……!!"

"……왕궁엔, 고양이도 있어."

*

맑은 날이 밝았다. 겨울의 초입, 곧 눈이 내릴 법한 추운 공기에 숨 한 번 한 번에 새하얀 김이 서렸다. 더운 숨을 불어넣으며 빠르게 손을 놀리는 시종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빛나는 연두색 눈이 나른하게 깜박였다.

이내 그 눈의 시선이 향한 곳은,

마법이 걸려서 더욱 실제처럼 보이는 정교한 종이 라프라니아 꽃 열일곱 송이로.

11월 12일.

고귀한 달의 인도자의 탄생일.

카이리스의 차기 국왕이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

레릭을 필두로 한 시종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던 플란츠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기척에 눈동자만 도륵 돌렸다. 조금 길러서 검은 머리카락을 제 시종처럼 꽁지머리로 묶고 왕자의 정복을 차려입은 동생이 시종을 시키지도 않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해사하게 들뜬 어여쁜 얼굴 뒤로 눈에 띄는 머리카락의 대부가 여유롭게 따라 들어왔다.

“형님, 좋은 아침이에요! 생일 축하드려요! 책봉식도!”

“축하드립니다, 저하. 자, 이쪽은 라프라니아 꽃 대신으로.”

“…고마워.”

앨런은 부드럽게 웃으며 붉은 꽃 열일곱 송이의 꽃다발을 내밀었다. 플란츠는 이제 이 향이 아니라 단내가 나는 꽃의 이름을 알았다.

카바니아.

그 무엇보다도 귀한 동생의 눈을 닮은 붉은 꽃.

얇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고정시키느라 정교하고 섬세하게 손을 놀리는 시종들에게 몸이 고정된 플란츠가 살풋 미소 지으며 꽃을 받고자 손을 내밀었다. 정복에 꽃가루 묻으면 안된다고 금방 제지당해서 시무룩한 얼굴로 레릭에게 대신 꽃을 받으라고 명했지만. 어쨌든 금방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돌아온 플란츠가 다시 눈만 도르륵 굴려 칼리안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밝게 웃는 것을 보아하니 이 아이가 또 무언가를 준비해줬구나 싶어, 플란츠는 평소보다 조금 높아진 목소리로 동생을 불렀다.

“칼리안.”

“형님, 전 조금 이따가요! 선물은 대부님부터!”

“라십니다. 자, 저하. 제 생일 선물은 이겁니다.”

능청스럽게 저를 앞으로 미는 칼리안에게 싱긋 웃어 보인 앨런이 마법사 주머니에서 웬 상자를 꺼내 플란츠에게 건넸다. 고급스러운 양각이 새겨진 나무 상자를 받아서 든 플란츠가 의아한 눈으로 상자의 잠금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자 나온 것은,

눈을 가리는 형태의 작은 끈.

잠시 갸웃거리다가 금세 기능을 눈치챈 플란츠가 끈을 어설프게 든 채로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앨런의 얼굴을 보았다. 만족스러운 듯 깊은 미소를 지은 그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불편하심을 압니다. 아니라고 하시는 것은 익숙해져서 그 부하를 알아차리지 못하시는 것에 가깝다는 것도요.”

“……”

“스승이자 대부로서, 저하의 피로를 덜어드리고자 제법 노력했습니다. 몸 어디에 묶어도 머릿속이 고요해지실 겁니다.”

제 자식 보듯 따스한 눈으로 플란츠를 내려다본 앨런이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플란츠를 안아 등을 토닥였다. 어색하게 앨런의 등을 마주 안은 플란츠가 느리게 입을 열어 힘겨운 노력 끝에 달빛을 삼킨 듯 낮은 그 목소리를 꺼냈다.

“……고마워.”

“탄신일 경하드립니다, 저하.”

“감사합니다… 대부님.”

“……저 역시도.”

앨런은 온갖 경애하는 마음을 다 담아 대자를 폭 안아주고는 떨어졌다. 시종들의 노고가 물이 되지 않도록 떨어지자마자 마법을 써주었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

공들여 꾸미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아직도 이따금 숨이 막혀오면 발작적으로 단추를 몇 개 푸르는 버릇이 있는 대자의 한껏 꾸며진 얼굴을 가만 응시한 앨런이 다시 한번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걱정은 되지만, 어쩌겠는가. 아들이 그를 받아들였는데.

머리를 올려 고정하고, 눈가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바르고, 루시의 발바닥 색과 꼭 닮은 연분홍빛 입술 위에 색이 있는 것을 칠하고, 그 싫어하는 얼굴 위에 덧바르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데- 이 대부가 어찌 염려를 이 이상 드러낼까. 주제도 모르고 내 새끼 폄하하려는 놈들이나 없애야지.

“저하. 이 대부가 딱 하나만,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몇이라도.”

“앞으론 저하께서 저 넓은 카이리스의 수많은 이들을 직접 상대하고 다스려야겠지만- 이것만큼은 잊지 말아 주세요.”

“……무엇을?”

“저하께선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

“이 대부도, 여기 칼리안 왕자님도, 세크리티아에서 새로 사귀신 친구도. 다 언제든 저하 편이며 저하께서 힘에 부치신다면 도와드릴 용의가 충분하니… 혼자 속으로 곪아가지 마시고, 말해주십시오. 전에도 말씀드렸지요?”

전.

칼리안과 말하고, 얀에게 털어놓는 계기가 되었던, 그 조언.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왕자님의 마음을."

과하게 똑똑한 머리는 어김없이 그때를 떠올려냈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실리케가 자리를 비웠던 연회. 그 자리에서 음료를 흘려놓고는 아무도 부르지 못하고 홀로 주변을 돌아보던 자신. 그 곁에 나타난 특이한 머리카락의 마법사. 눈을 홀리는 색색의 드레스와 연미복. 피아노 소리와 바이올린 소리가 조화롭게 울려 퍼지는 와중에 주변과 어우러지지 못하던 제 옷을 잡고 마법을 걸어 젖은 옷을 말려주고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조언을 해주었던- 대부.

"약속해주십시오. 제게 대부를 해달라고 하신 이상, 왕자님들께선 제 아들이 되신 것과 다름 없습니다. 전 제 아들들이 아비에게 무엇도 말 못하고 곪아가고 있는데도 모르는 어리석은 아비가 되고 싶지 않으니- 그때그때 드는 감정을, 마음을, 생각을 다 말해주십시오. 약속인 겁니다."

종종 짖기는 하지만 잘 맞는 친구 왈, 과하게 솔직하고 놀라울 정도로 직선적인 성향을 갖게 된 계기였던 약속.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이가 작게 소리내 웃었다. 모든 이의 중심에 서 있는 이가 소리 내 웃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하던 것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게.”

“! …네, 부탁드립니다. 그나저나 손님이 오셨군요.”

만족스럽게 웃은 앨런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척을 알고 있던 플란츠 역시 그 은회색 눈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방 안의 대화가 멎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끼익 소리와 함께 무거운 문이 열렸다. 거의 어깨선까지 닿는 구불구불 휜 금색 머리카락과, 높게 묶었는데도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긴 청은색 머리카락이 시종들을 제치고 눈에 들어왔다.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정복을 갖춰 입은 란델이 앞에서, 세크리티아의 정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베른이 뒤에서 어색하다는 듯 웃으며 들어왔다-물론 베른만 웃고 있었다-. 칼리안이 둘의 앞 방향에서 제 곁으로 다가온 것까지 확인한 플란츠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형님, 베른.”

“생일을- 축하한다. …선물은, 이것으로 하지.”

“……이건.”

란델은 덴에게서 무엇을 받아 직접 플란츠에게 건넸다. 눈 내리는 풍경을 담은, 그 안에 뛰노는 듯 서 있는 세 명의 꼬마 인형과 옆에서 지켜보듯 웃고 있는 긴 머리의 인형이 있는 유리구슬이 포근해 보이는 흰 눈을 흩뿌리며 플란츠의 손안에 자리 잡았다.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린 플란츠가 눈송이에 붙박인 듯 고정되어있던 눈을 힘겹게 들어 란델의 심연과 같은 깊은 벽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기 어려운 아버지를 닮은 푸른 눈이 가만히 감겨 들어갔다.

“…만든 이가 정성을 다해 만든 물건이니, 탄생을 축하하는 선물로써 부족함이 없겠지.”

“…!”

“그 외엔 어떠한 뜻도 없는 단순한 선물이다. 이날에 과거의 가능성을 더했을 뿐이니, 무용한 해석은 붙이지 말거라.”

아니, 뜻이 있다.

장인의 정성을 보여주는 선물에 감탄하고 있던 아이에게 선물을 보낸 이의 서릿발같은 의도를 깨닫게 했던 과거를 의식한 선물이다.

그런 선물에,

정말 의도가 없을까.

플란츠는 란델의 생각을 이해했다. 방관하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이고 그에 따라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된 사람이, 과거의 악의를 떠올리고 그를 위로하고 사과할 선물을 준비했다. 그러면서도 별다른 뜻은 없다고 한다. 플란츠의 머리가 얼마나 똑똑한지 몰라서, 과거를 절대 잊지 않는 존재가 자신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17년간 멀어져 있던 어색한 형제가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사과였다.

따라서 플란츠는 그저 웃었다. 제 형에게는 거의 보인 적 없던 진심을 담아, 그대의 말을 이해했으나 그대의 의사에 따라 파고들지는 않겠다는 마음을 담아.

“예. 감사합니다.”

“……그래. 먼저 가 있으마.”

“뒤따라가겠습니다.”

뒤돌아 나서는 란델의 뒤통수에 대고 얘기하자 란델이 아닌 덴의 인사가 돌아온다. 그 정도로도 감지덕지라 피식 웃은 플란츠가 그 뒤로 조용히 서 있던 친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베른.”

“안녕, 플란츠. …음, 당신 형님께도 꽤 애틋한 것처럼 보여서 친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색한 사이였나봐. 같이 들어오지 말 걸 그랬나.”

“아니.”

“그럼 됐고. 생일 축하해. 왕세자 책봉도.”

“고마워.”

나가는 란델을 따라나가서 짧게 인사를 나누고 다시 들어온 칼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른을 바라보았다. 거의 1년 만의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서도 칼리안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플란츠가 한쪽 눈썹을 미세하게 들며 고민했다. …둘이 인사한 적, 없지 않았던가.

잠시 생각에 빠져 둘이 인사하게 유도해야 하나 고민한 플란츠에겐 안타깝고도 기껍게도, 칼리안은 이내 방긋 웃으며 베른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크리티아의 2왕자 베른 님이시죠. 형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플란츠 형님의 동생인 카이리스의 3왕자,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입니다.”

“아, 그…. 저도 플란츠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베른 세크리티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칼리안은 활짝 웃으며 악수를 받아준 베른의 손을 크게 두 번 정도 흔들고 다시 플란츠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짜 잘생겼네, 베른이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을 본 플란츠가 작게 미소 지었다.

베른은 이내 잘생기게 웃으며 시종을 시켜 고이 포장된 상자를 가져왔다. 길이만 보면, 저건-. 플란츠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확인한 베른이 자신만만하게 상자를 직접 플란츠에게 건넸다.

“봄에 내가 쓰려고 재료를 구했던 건데, 하나 더 만들 수 있대서 당신 것으로 만들었어. 이제야 주게 되네.”

플란츠는 박스를 열었다.

긴 상자에서 나온 것은, 선물을 건넨 이의 취향이 고스란히 박힌 검은 검집에 보관된 무거운 검.

“운철로 만든 검이야. 당신은 무거운 검을 쓰는 검술을 쓰니까, 무겁게 만들었어.”

검집에서 검을 꺼내자 흑빛에 가까운 재색의 날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칼리안은 뭐라고 말을 붙이려다가 플란츠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베른은 플란츠의 반응에 만족스럽게 웃었고, 앨런은 놀란 듯 눈을 조금 키웠다.

그정도로, 플란츠는 드물게도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 진짜 천생 검사라니까. 마나실 후작, 플란츠 검사 길로 가게 하면 안 됩니까?”

“제 대자를 훔쳐 가실 셈이십니까? 안됩니다. 저하께선 벌써 5서클이신걸요. 마법의 천재십니다.”

“…오… 아쉬워라. 오러랑 마법 둘 다 다루는 건 사기잖아. 근데 둘 다 마나 쓰는 거 아냐? 어떻게 병용해?”

“당신은.”

“난 마법은 못 써서. 당신보다 센 소드마스터나 하는 수밖에 없겠네, 지켜주려면.”

“믿어.”

짧지만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베른은 잠시 눈을 키웠다가 다시 한번 웃었다.

맞아, 이런 사람이었지. 9개월 안 만났다고 잊을 뻔했어.

베른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 제2 왕자님,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제3 왕자님, 앨런 마나실 발칸 원로님. 채비하실 시간입니다.”

“아.”

“…가지.”

플란츠가 시종의 부름에 대답했다. 플란츠의 한 걸음 뒤에 칼리안이, 칼리안의 두 걸음 뒤에 앨런이 서고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2열로 나란히 서서 셋을 보좌하듯 섰다. 평소보다 귀한 제복을 입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그 중앙에 검은 색과 푸른색의 왕세자 정복을 입고 선 플란츠의 모습은.

베른은 소리 없이 휘파람을 불었다. 베른이 선물한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곧장 허리에 찬 플란츠에게 바로 한 시종이 다가와 주름을 피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플란츠.”

베른의 부름에 플란츠가 고개만 돌려 그의 연보랏빛 눈을 바라보았다. 눈에 띄게 눈꼬리를 휜 베른이 말했다.

“또 나가자. 이번엔 카이리스에서.”

“……”

“먼저 가서 기다릴게. 긴장하지 말고.”

“그래.”

베른은 플란츠의 대답을 듣고 먼저 빠져나갔다. 체르밀 4층에서 나가 마차를 타기까지의 시간을 눈감고 기다린 플란츠가 이윽고 눈을 떴다.

“가자.”

*

카이리시스의 초겨울은 거의 한겨울과 다름이 없다. 플란츠는 제 생일날 피어있는 제 눈과 같은 색의 식물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함께 마차를 타고 온 칼리안이 빙긋 웃고는 먼저 와있던 르메인의 뒤, 란델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앨런 역시 마나실 후작을 위해 미리 준비되어 있던 자리로 이동했다.

플란츠는 심호흡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괜찮다. 왕궁은 숨이 막히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니.

이제 받게 될 자리는, 어머니가 바랐던 그림이 아니라- 가족들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 쟁취해낸 자리이니.

“플란츠 룬 카이리스, 제2 왕자는 마차에서 나와 왕국민들 앞에 서도록!”

떨림이 고스란히 보이는 하얀 손이 마차의 문을 직접 열었다. 형형색색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들이 온 카이리시스를 꾸미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쏘아 올리는 화려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마차의 문에서부터 르메인이 서 있는 곳까지 펼쳐진 레드카펫이 강렬한 빛을 뽐냈다. 금줄로 만들어진 경계 바깥에 왕국민들이 서 있었다. 금줄 안쪽의 테이블과 함께 마련된 자리에 귀족들이 몰려 있었다. 맨 앞의 자리에 지그프리드 일가와 리리에, 히나와 키리에, 그리고 베른이 앉아서 플란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 전하의 앞으로!”

검을 계속 다뤄와서 아름다운 몸이 곧게 섰다. 한 걸음 발을 내딛는 다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고상하게, 우아하게, 귀족스럽게.

고귀한 인도자의 이름에 걸맞게.

푸른 망토가 지나가는 뒤를 따라 붉은 꽃잎이 흩날렸다. 푸르게 잎을 틔워낸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가 마법처럼 왕자의 주변을 간지럽히며 떨어졌다.

누구도 그 모습에서 전 왕비를 떠올리지 못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 얼굴은 전 왕비를 꼭 빼닮아 있었으나, 그 얼굴의 중심에 박힌 연두색 눈은 생명의 찬란한 빛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의 푸른 옷이 너무도 오랜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허리에 찬 검은 검이 소유자의 단단함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앞에 다다른 2왕자가 절도 있게 무릎 꿇고 몸을 숙였다. 푸른 망토가 붉은 원단 위에 흐드러지듯 가라앉았다. 흐뭇한 듯 미소 지은 왕이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엄숙한 목소리를 내었다.

“플란츠 룬 카이리스, 그대는 장차 카이리스의 번영을 위해 힘쓰고 백성들을 위해 행동할 것을 맹세하겠는가.”

“맹세합니다.”

“옳은 일을 선행하여 백성들의 모범이 되고, 귀족을 이끌어 좁은 골목까지 그대의 빛을 비추며, 백성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을 맹세할 수 있는가.”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대의 능력으론 부족한 일이 생긴다면, 어찌 일을 해결하겠는가.”

연두색 반짝이는 눈이 잠시 커졌다. 이를 위한 약속이었던가, 눈을 살짝 굴려서 은회색 눈을 바라보니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이 보였다.

플란츠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짙게 웃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홀로 해결하지 않으려 하겠습니다.”

“!”

“제 일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면 여럿이 능력을 모으게 하겠습니다.”

주변의 소란이 점차 커졌다.

플란츠는 마무리 짓듯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많은 이의 웃음이 보이는 웃음이었다.

“왕국을 이끌어나가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백성의 도움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완두콩 다 컸네, 베른이 중얼거렸다. 제자님께서 정말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날카롭게 그 작은 소리를 주워듣고는 흐뭇한 얼굴로 덧붙였다.

란델은 놀란 듯 잠시 눈을 키웠다가 조용히 감고는 미소 지었다. 칼리안은 반짝이던 눈을 더 반짝이며 플란츠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앨런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르메인은,

많은 감정이 섞인 얼굴로 뭐라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벙긋이다가-

결국은, 벅찬 얼굴로 깊게 웃었다.

플란츠와 닮은 얼굴이었다.

“…그 다짐을 잊지 않기를 바라마.”

“예.”

르메인은 고개를 들었다. 이 자리에 몰린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여겨보고는,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다음 봄을 이끌 용의 피는, 제2 왕자 플란츠 룬 카이리스다! 박수와 함성으로 다음 봄에게 인사하라!”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플란츠는 가까이 다가온 르메인이 제 머리에 작은 왕관을 씌우고 등 뒤에 새로운 망토를 달아 일으키는 것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수많은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이어서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제3 왕자가 축사를 읽도록 하겠다. 칼리안.”

르메인의 부름에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초대 황비의 색을 고스란히 담아낸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차 조용해졌다.

사위가 고요해진 것을 확인한 아이가 고운 미성을 냈다.

“제가 어릴 적에 보았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플란츠 형님, 당신이었습니다. 전 당신의 눈에 어린 다정함을 알았고, 따스함에 기댔고, 사랑에 사랑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위해 하셨던 모든 일을 이제는 압니다. 형님이 저를 살리기 위해 또 다른 사랑을 포기하셨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형님께 가지고 있던 제 부채감 중 하나였어요.”

전 왕비를 떠올린 이들이 목소리를 줄여 대화했다. 전 왕비는 2왕자의 살인 미수로 죽지 않았나. 아들이 어미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 칼리안 왕자를 위해 어미를 배신했었다는 소리인가…

플란츠는 눈을 크게 뜨곤 칼리안의 말에 집중했다. 왜 동생이 그것에 부채감을 가졌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가 무슨 의도로 이렇게 말을 꺼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동생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총명한 아이이니 다 생각이 있겠지 싶어서.

“이제는 형님께서 온전한 차기 봄이 되셨으니, 제 작은 부채감을 갚기 위해. 저는 맹세하겠습니다.”

맹세.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은 그 단어를 듣고서부터였다. 아니, 사실은 아이가 앞에 나섰을 때부터 느끼던 것을 그전까진 애써 모르는 척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플란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가, 세렌티의 이름을 빌려, 나의 유일한 주인이 되실 플란츠 룬 카이리스 왕세자 저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세렌티의 가호를 받는 기사의 맹세가 시작되었다.

아이는 마법사일 텐데, 플란츠는 입을 열지 못했다. 베른은 익숙한 문장에 눈을 크게 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모든 이가 놀라서 두 형제를 바라보았다.

“나의 마법은 주군을 위해 쓰일 것이고, 나의 마력은 주군의 앞길을 열 것이고, 나의 미래는 주군의 손에 쥐여있을 터이니.”

누구도 3왕자의 말을 막지 못했다. 마법사답게 조금 고친 맹세에 아무도 끼어들 수 없었기에.

칼리안은 웃었다. 플란츠의 놀란 얼굴을 보면서.

“탄신일 경하드립니다, 형님. 마법사의 명예를 지니고, 주군의 곁을 평생 지킬 영광을 허락해주십시오.”

아.

플란츠는 동생의 의도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베른이 했던 죽음을 각오한 맹세가 아니었다.

그가 평생을 바랬듯, 행복을 위한 맹세였다.

그래서.

“…허락한다.”

맹세를 받아들였다.

생명의 찬란한 빛을 가득 머금은 연둣빛 눈을 본 칼리안이 맑게 웃으며 플란츠가 건넨 손을 잡고 일어섰다. 함께 손을 잡은 두 형제가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너른 카이리시스를, 광활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거라, 르메인이 복잡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플란츠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가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저 플란츠 룬 카이리스는, 차기 봄으로서- 모두가 행복한 카이리스를 위해 살 것을, 시스파니안과 세렌티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용의 눈과 닮은 붉은 빛이 일어났다. 빛의 주인이 차기 봄의 곁에서 아이처럼 웃었다.

“그리하여, 가장 가까이의 내 형제부터 가장 멀리의 백성까지… 왕궁의 가호 아래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카이리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을.”

생명의 태동이 뛴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생명이 쿵, 쿵, 웅장한 소리와 함께 뛰기 시작했다.

“카이리스의 국민들 앞에, 약속드리겠습니다.”

펑!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발칸의 마법사 하나가 들뜬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피워 올린 축포가 하늘 위로 터져나갔다.

그 폭음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함성이, 박수가, 플란츠 룬 카이리스의 이름이, 카이리시스를 뒤덮었다.

칼리안의 손을, 동생의 고운 손을 꼭 잡고-

플란츠는 웃었다.

행복한 시작이었다.


다 썼다!!

플란츠 아기야 생일 축하해! 사랑해!! 카페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너무 아쉽지만 어쨌든 태어나줘서 고마워!!

운명 다 쓰고 시작했던 건데 생각보다 많이 길어져서 오래 걸렸네요. 해피엔딩을 주제로 잡고 쓴 글이라 베른까지, 모두가 행복하게!!…를 최대한 목표로 했습니다. 회귀 전 에일라 죽는 시점보다 전이라서 언급은 없지만 에일라도 살 거예요. 란델이 도와줄 거니까!

쓰면서 제일 고민이었던 것은 옛칼에 대한 묘사였어요. 키리에는 히나가 플란츠 곁에 남아서 발칸 치유사가 될 테니 카이리스에 있을 테고, 지그프리드에 보내자! 베른은 키리에가 없으니까 말이 엄청 험하지는 않다! 란델은 플란츠가 구해준 걸 계기로 사이 좀 좋아진다! 라는 나름의 설정을 덧붙인 캐해가 다른 캐릭터들은 있었지만, 옛칼은… 많이 어려운 캐였어요. 그래도 똑똑하고 형님들 좋아하고,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고 착해서 가지는 걱정같은 것을 묘사하고 싶었습니다. 베른과의 공통점이 있다는 부분도요. 고집으로 형제에게 맹세하는 장면을 통해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플란츠가 많이 솔직해지고 직선적이게 됐는데.. 날조로 들어간 과거를 떠올리고 의식적으로 그러는 거라 무의식적으로는 계속 자기 감정 숨기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앨런이 약속이라고 해가며 말하게 했고요. 플란츠의 캐릭터성이 어지간하면 존대를 쓰지 않는 거라 앨런에게도 호칭을 빼면 가끔만 존대하고 슬레이만에게도 ~하지, ~한데. 등의 약간 명령조 반말?? 을 쓰도록 했습니다. 왕자에게 말투는 상관 없지 않나 싶네요.

음, 하고 싶은 말 다 붙이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고.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아기야!!

#겨울에_움튼_새싹

#1112_플란츠_생일_축하해 

#고귀한_달이_눈을_뜬_날

#HAPPYBIRTHDAY_PL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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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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