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찾는 탐정

10화 - 남부

마치 환영하는 듯한 남부의 바람은 산뜻했다.

며칠 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필요한 대화 이외에는 잡다한 얘기를 나누는 일이 없었으며, 서로 눈을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이따금 단테가 분위기를 띄우려 농담을 할 때면 사무소의 온도가 더욱 낮아지는 듯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단테가 던진 농담에 답 대신 돌아온 것은 오르의 준비는 다 했냐는 질문이었다. 그의 물음에 트리니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단테는 잠시 가만히 있다 ‘헉’하는 숨소리를 내었다.

“중요한 일이 이제야 생각났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음, 됐다. 오늘 표는 내 것만 취소해 줘. 나는 따로 출발할게. 도착하면 어디에서 묵을지 좀 알려 줘. 마중 좀 나와 주면 더 좋고.”

단테는 급하게 자신의 서류 가방을 들고서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트리니티가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서 있자, 그는 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미소에 오르가 한쪽 눈썹을 잠시 찌푸렸다. 무슨 일이길래? 그의 물음에 단테의 얼굴은 곤란으로 가득해졌다. 개인적인 일이라. 나중에 설명해 줄게. 내가 정말 급해서…. 오늘까지 해야 하는 일이 있어. 일단 좀 다녀올게. 있다가 봐. 다른 이들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때문인지 현관에 걸려 있던 종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르와 트리니티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원래도 갑자기 합류해 아는 게 없던 이가 오늘따라 유독 이상하게 군 것이 기묘한 탓이었다. 한편으로는 아는 게 없으니 개인사를 말하기 꺼리는 것도 이해가 갔지만. 트리니티는 잠시 자신의 탓이 조금 있었을까 생각했으나, 이내 생각을 떨쳤다. 지금은 짐을 챙기고 출발하는 게 우선이었다.

“짐은 다 챙겼어요, 탐정님. …일단 저희도 출발할까요?”

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경을 한 번 닦고서 다시 쓴 후, 늘 그랬듯 앞장섰다. 트리니티는 그의 뒤를 따르며 사무소의 문을 마지막으로 나와 닫았다. 이제 자연광만이 내부를 비추는 사무소는 제법 어둑해 보였다. 트리니티는 그 광경을 잠시 가만히 보다가 문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팻말을 새로 걸었다.

‘당분간 영업 중지. 문의 사항은….’ 그 뒤로 트리니티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순간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비울 것을 팻말 하나로 알려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건 트리니티의 의사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어찌 되었든 간에 오르가 그렇게 시켰으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탐정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고 계시는 걸까. 트리니티는 잠시 그를 흘긋 바라보다, 먼저 거리로 향하는 오르를 따라 걸었다.

 

오랜만에 도착한 프로이센역은 시끌벅적했다. 봄기운에 취해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사람이 많은 듯해 보였다. 슬슬 햇살이 따스해지면서도 여전히 찬 바람이 간간이 부는 것이 적당히 선선했다. 트리니티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오르가 표 세 장을 팔랑거리며 보였다. 그런데도 트리니티가 멍하게 있자, 오르는 표로 트리니티의 이마를 몇 번 톡톡 쳤다.

“트리니티, 아까 확인해 보니 당일 취소 수수료가 상당하더군. …차라리 그냥 취소는 관두고 비워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절차도 까다롭고.”

트리니티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일부는 돌려받는 게 좋지 않나,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시선을 오르의 얼굴 쪽으로 옮겼다. 문득 그의 안경이 눈에 띄었다. 트리니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돈도 많은데 상관없으려나? 잠시 고개를 몇 번 옆으로 기울이기를 반복하던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트리니티는 흠칫 눈을 뜨며 뒤를 돌아봤다.

“그 표, 취소하려고?”

주사와 같은 붉은빛의 눈을 지닌 이였다. 왼쪽 눈 아래로 세로로 정렬된 두 개의 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순간 바람이 불며 황토처럼 고운 갈색 머리칼이 트리니티의 뺨을 간질였다. 눈을 깜빡인 사이, 그는 알고 있는 사이라도 되는 듯 트리니티의 앞에 바짝 붙어 제 머리칼을 정리했다. 두 탐정과 조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자, 낯선 이는 미소를 띠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단테와 비슷한 정도의 친밀감이 느껴졌다.

“내가 오늘 표를 예약하지 못했는데…. 그 표, 내가 사도 될까? 아, 걱정하지는 마. 내가 원래 값보다 조금 더 비싸게 사 줄 테니까. 어때?”

트리니티가 잠시 고개를 돌려 오르와 시선을 교환했다. 결국 오르가 한숨을 쉬며 트리니티에게 단테의 표를 건네자, 트리니티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그 표를 낯선 이에게 건넸다. …여기 있어요. 돈은 어떻게 주시려고 그래요? 트리니티의 질문에 그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자, 아가씨. 이거 받아. 그가 건넨 것은 붉은 마석으로 장식된 갈색 노리개였다. 그것을 보고 나서야 그의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꽉 묶은 허리띠에 간신히 의존하고 있을 정도로 대충 두른 두루마기, 검은 고무신.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나시와 짙은 쪽빛의 청반바지…. 오묘한 차림이었지만, 그가 동부의 사람임은 알 수 있었다.

트리니티는 기묘한 그를 보며 노리개를 잡아 가만히 살펴봤다. 척 봐도 무척이나 비싼 장신구임은 알 수 있었다. 오르 덕에 마석의 마력을 미묘하게나마 알아차릴 수 있는 트리니티가 느끼기에도 상당히 짙은 마력이 느껴졌다. 그는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트리니티의 어깨를 두드렸다. 엄청 비싼 거야. 잘 간직해 두라고? 뭐, 팔아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며 넘겼다.

‘잠시 후 남부 카르타고역으로 향하는 열차가 도착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탑승 준비를 마쳐 주시길 바랍니다.’

짧은 알림음 이후 몇 문장의 안내 방송이 울렸다. 그 목소리에 트리니티는 반응하려던 것을 멈추고서 찌푸리던 인상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문득 멀리서부터 얕은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가볍게 불던 바람이 멈추고, 곧이어…. 공기가 밀려 들어오며 열차가 역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에서부터 들어오던 빛은 열차에 의해 잠시 가려지는 것만 같았다. 트리니티의 치마가 한순간 펄럭였다. 머리카락 또한 시야를 가릴 것처럼 세게 흩날렸다 멎었다. 이윽고 강한 마찰음과 함께 열차가 눈앞에서 멈췄다.

“어머, 아가씨. 열차 왔네. 문 닫히기 전에 빨리 와.”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트리니티는 한번 한숨을 내쉬고서 오르를 쳐다봤다. 오르는 고개를 두어 번 젓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별수 있겠냐는 의미였다. 트리니티는 결국 오래간만에 먼저 발을 내디뎠다. 오르는 천천히 그 종종걸음을 따라갔다.

 

열차 내부는 깔끔했다. 방향제를 설치한 것인지 향기로운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트리니티는 바람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조심스럽게 다듬으며 좌석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확실히 비싼 돈 주고 구한 좌석이 좋기는 하네요, 탐정님. 트리니티가 발을 움직이며 오르를 흘긋 보자, 그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이럴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돈을 쓰겠나. 맞는 말이었다. 중요한 물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아껴 쓰는 것이 둘의 습관이었다. 오래 쓸 것이나 안전을 위한 것을 챙기는 경우 외에는 돈을 많이 들이는 일이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돈을 묵힐 뿐이었으니, 비싼 좌석을 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둘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좌석에는 표를 두 사람에게서 사 간 이가 앉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사람의 맞은편이었기에 몸을 붙일 일은 없었단 점이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얼굴을 계속 봐야만 했다. 트리니티는 뚱한 얼굴로 창가 쪽에 앉았다. 오르는 익숙하게 복도 쪽으로 앉아 턱을 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래. 이것도 인연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 두는 게 어때? 먼저 말하지 않고서 통성명을 요구하는 건 실례니까, 나 먼저 얘기할게. 난 허주야. 너희 둘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오르는 잠시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나는 오르다. 이쪽은 트리니티고. 더 궁금한 건 없겠지? 허주는 여전히 아쉬운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에 트리니티가 흥, 하는 숨 소리를 내었다.

“그럼, 이쪽에서도 질문해 볼까요. 당신은 왜 서부에 왔던 거예요? 아무리 봐도 동부 사람 같은데.”

허주는 쉬운 질문이었는지 웃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내가 행상인이거든. 내가 만든 마도구를 팔려고 좀 돌아다니고 있었어. 이번에 남부에 가는 것도 똑같은 이유고. 트리니티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이었다. 그에 허주가 잠시만 기다려 보라는 듯 검지를 한 번 까닥였다가 두루마기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윽고 그는 안에서 손거울을 하나 꺼냈다. 평범한 두루마기는 아닌 듯했다.

손거울을 놓으며 오르를 흘끔 보았다. 허주는 내가 정보상이기도 하거든, 하고 말하며 손거울을 트리니티의 앞으로 쓱 내밀었다. 오르, 당신이 마력을 그렇게나 ‘잘 보는’ 탐정인 건 알고 있어. 그 말에 오르는 순간 동부에서도 소문이 난 건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지 허주는 바로 웃음을 지었다.

“이 거울도 오르, 당신이 보는 것처럼 보일걸? 한번 봐 봐. 그럼 내 실력이 믿을 만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트리니티가 잠시 머뭇거리다 손거울을 들고서 제 모습을 쳐다봤다. 처음은 평범한 거울처럼 원래의 모습만을 비추더니, 이내 점차 어두워졌다. 새카만 거울의 형태 위로 윤곽들이 흰 선으로 나타났다. 트리니티의 모습을 한 윤곽은 검은빛과 노란빛이 섞인 불 같은 것을 뿜어내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등색의 불은 주변을 맴돌듯 일렁이고 있었다. 트리니티가 거울을 오르 쪽으로도 기울여 보려고 하자, 오르는 확 낚아채 거울을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트리니티는 잠시 몸을 멈칫했다. 허주는 살살 다루라면서도 거울을 집고서 다시 두루마기 안에 넣었다.

“이거 정말로 성능 좋은 거 맞아요? 아무리 봐도 제 마력 같다는 느낌은 안 드는데…. 따지자면 탐정님과 비슷한데요.”

그 물음에는 허주 대신 오르가 답했다. 오랫동안 같이 있다 보면 그런 일이 생기기도 해. 오르의 답변에, 앞에 앉은 허주가 거들었다. 맞아. 그래서 말인데…. 아가씨, 탐정님. 이제 좀 이상한 사람 취급은 그만해 줄래? 이 정도면 내가 단순한 표 없는 행상인인 걸 깨달았을 텐데. 너무 그러는 것도 직업병이다? 오르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차가 거친 길을 지나는지 몇 번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몸이 약하게 흔들린 후, 허주가 문득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나도 물어도 되느냐 물으며, 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탁자 위로 손가락을 몇 번 두드렸다. 말하세요. 그의 물음에 먼저 답한 것은 트리니티였다.

“역으로 묻고 싶은 게 좀 있어서. 둘은 남부에 왜 가는 거야? 묵을 곳은 있어?”

그렇게 질문을 해댔으니 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트리니티가 오르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자, 오르가 대신 답했다. 찾을 사람이 있어서. 묵을 곳은 되는 대로 찾을 예정이다. 허주는 흥미가 붙은 듯 오르의 얼굴을 한참 쳐다봤다. 목적지만 알려 주면 숙박을 해결해 줄 수도 있는데. 별로려나? 허주의 말에 오르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대가 없이? 예상한 반응이었는지, 허주는 풋 웃으며 손목을 한 번 위에서 아래로 휘저었다.

“남을 돕는 게 취미거든. 후훗, 믿지 못하겠다면 계약서라도 써도 돼. 거짓말일 경우 내 혀를 뽑는다는 내용을 넣는다든가?”

살벌한 농담에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오르가 어색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자, 허주는 농담이라며 몸을 뒤로 해 등받이에 기댔다. 무척이나 실없는 농담에 문득 단테가 떠올라, 트리니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오르와 달리 허주는 기뻐하는 얼굴로 재밌었냐며 이야기를 더욱 던졌다. 오르만 끼기 힘들 법한 대화 분위기는 금세 형성됐다. 의심하던 걸 잊기라도 한 듯, 트리니티는 허주와 대화를 즐겁게 나누었다. 이런 대화는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타인이었기에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던 것일지도 몰랐으나, 트리니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대화를 즐길 뿐이었다.

대화를 즐긴 지 얼마나 되었는지, 어느새 열차가 역에 도착했다. 안내 방송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허주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명함처럼 보이는 종이를 건넸다.

“먼저 갈게. 이건 연락처니까, 나중에 연락하고 싶으면 연락해? 도움을 주고 싶다는 거, 진심이긴 하니까. 도움을 청해도 되고.”

그는 또다시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밖으로 향했다. 트리니티가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허주는 사라졌다. 오르 또한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사람도 빠졌으니 우리도 나가 볼까. 그의 말에 트리니티가 옆에 두었던 가방을 챙기며 그를 따라 일어났다. 네, 탐정님. 그런데…. 명함은 어떻게 할까요? 버려요? 그 물음에 오르는 걸음을 떼며 답했다. 챙겨 둬라. 혹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트리니티는 앞서가는 오르의 뒷모습을 보고는 네, 하며 명함을 허겁지겁 챙겼다. 그러곤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며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둘이 내린 카르타고역은 프로이센역에 비해 따듯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햇살의 따스함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온기였다. 확실히 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는 바람이었다. 트리니티는 간만의 즐거운 대화에 기분이 풀린 듯 웃는 얼굴로 따스한 바람을 느꼈다. 오르는 그런 트리니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일단 아카데메이아로 가 볼까.”

트리니티는 오르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쫓으려다 관두었다. 네, 탐정님. 트리니티는 조심스레 오르의 옆에서 걸음을 맞추며 걸었다. 기분 좋은 봄바람이 둘과 함께 움직였다. 마치 환영하는 듯한 남부의 바람은 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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