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휴식
음. 커피라도 한 잔 타 주겠나.
“사적인 이유로 아카데메이아에 가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어릴 때 졸업하고 나서는 의뢰 때문에만 갔던가?”
트리니티가 혼잣말하듯 말을 걸자, 오르는 잠시 그를 흘긋거리곤 답했다. 그렇지. 그가 짤막하게 답을 내놓자, 트리니티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오르를 쳐다보다가 말았다. 그 뒤로 둘은 말없이 거리를 걸었다. 몇 번 와 본 적 없는 거리는 제법 낯설게 느껴졌다. …적어도 트리니티는 그랬다.
따듯한 봄바람이 부는 거리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오후 1시쯤인 탓인지 커피 따위를 들고 주변을 걷는 이들도 많았다. 트리니티는 그 모습들을 보며 오르의 뒤를 따랐다. 드문드문 둘 이상씩 모여 걸어 다니는 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트리니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오르는 그런 트리니티를 때때로 흘끔 쳐다볼 뿐, 구태여 말을 걸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니티가 제 가방의 한쪽 부분에 받았던 노리개를 달았다. 갈색의 트렁크 가방은 붉은빛의 노리개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오르는 잠시 고민하더니, 그제야 트리니티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노리개는 왜?”
못 꾸민 지 좀 돼서요. 트리니티는 그를 쳐다보지 않은 채 답했다. 오르는 순간 요즘 내가 이런 걸 별로 안 챙겼나, 라는 생각을 했으나, 구태여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위험한 것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며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몇십 분을 걷고 있으니 거대한 규모의 건물들이 보였다. 커다란 담벼락에 둘러싸인 땅의 규모는 어림잡아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트리니티는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동안은 의뢰 때문에 거의 바닥만 보고 걸어 다녔던 것 같은데. 오래간만에 느끼는 여유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바람을 느끼고 있자….
“윽!”
트리니티가 잠시 비틀거렸다. 무언가에 부딪힌 듯해 아래를 바라보자,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넘어진 채 아야야,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트리니티는 아이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아이는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고는 일어섰다. 트리니티가 괜찮냐 묻자, 아이는 어색하게 뺨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꾸벅하고는 가던 길을 달려갔다. 트리니티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 보군, 저 아이.”
오르가 조용히 말을 붙였다. 트리니티는 그러게요, 하고 짧게 답하며 다시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런 후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자, 경비원으로 보이는 이가 다가왔다. 무슨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오르가 익숙하게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속 신분증을 보여 주자, 경비원은 목례하며 조용히 물러났다.
트리니티 또한 그 모습이 익숙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오르를 바라보며 제 두 팔로 팔짱 꼈다. 이제 어디로 향하시려고요, 하고 트리니티가 질문을 던지자, 오르는 잠시 눈을 감고서 나지막이 소리를 내었다.
“너도 아는 사람이 있는 쪽으로 향할 거다. 그냥 따라오면 돼.”
그의 말에 트리니티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발걸음이 끝난 곳 앞에는 문이 있었다. 고등부 교무실. 늘 그랬듯 트리니티에게 노크하라는 듯 오르가 시선을 주었지만, 아카데미아의 규모에 걸맞은 크기의 교무실은 노크하기 망설이게 했다. 의뢰 때문에 왔을 때는 안 떨렸었는데. 트리니티가 머뭇거리고 있자, 오르가 흘긋 쳐다봤다.
“옛날 생각이라도 나나?”
그의 물음을 듣고 나서야 트리니티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런 것 같네요. 그 짧은 말을 던진 후에도 둘은 가만히 있었다. 결국 오르가 먼저 노크하며 문을 열었다.
오르가 문 안으로 발을 살짝 들이자, 몇몇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그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그 얼굴을 한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더니, 오르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일단 휴게실에 가서 얘기 좀 나눌까.”
두 사람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다, 고개를 끄덕였다. 낯익은 얼굴을 한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복도로 나와 앞장섰다. 세 사람은 아직 쉬는 시간인 탓에 떠들썩한 복도를 걸었다. 때때로 몇 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트리니티뿐이었다.
휴게실에 도착하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트리니티가 문을 닫자마자 투덜거렸다. 왜 미리 연락을 안 하고 오나 싶었는데…. 하르피아 씨를 만나러 올 줄은 몰랐네요. 그 말에 하르피아가 자리에 앉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습관인 거 알잖니. 그나저나… 둘 다 오랜만이네. 보통 같았으면 연락이 안 돼도 바로 찾아오지는 않을 텐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가 조용히 묻자, 오르는 그 맞은편에 앉아 그를 응시했다. 트리니티 또한 자연스레 오르의 옆에 앉아 그를 흘긋흘긋 쳐다봤다. 둘의 시선이 하르피아에게 집중되는 동안 정적이 흘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오르는 생각을 마쳤다는 듯이 입을 천천히 떼었다.
소프와 만나고 싶은데.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내가 들은 바로는 널 보러 왔던 것 같던데. 이왕이면 만난 이유도 좀 알려 줬으면 좋겠군. 그가 본론부터 내뱉자, 하르피아는 잠시 제 이마를 문지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트리니티는 그 사이에서 어떠한 말도 내뱉기 어렵다는 듯 입을 우물거렸다. 하르피아가 검지로 책상을 몇 번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 뒤에서야 말소리가 이어졌다.
“역시 무언가 있긴 한가 보네. 좋아, 오랜 친구니 별 이유는 묻지 않을게.”
짧은 한숨을 쉰 하르피아는 제 두 팔로 팔짱을 꼈다. 너도 알겠지만, 소프는 현직 조정자니까. 전직 조정자인 내가 연락하려면 오래 걸린다는 점은 명심해 둬. 하르피아는 그 말을 하면서도 뒷말을 이을 생각을 하는지 낮은 침음을 내었다. 트리니티는 둘 사이의 분위기에 안절부절못하는 듯 제 두 손을 만지작거렸다. 한참 그런 분위기가 이어지다, 하르피아가 다시 말을 함과 동시에 무거운 공기가 흩어졌다.
“아인…. 아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었어, 분명. 나는 잘 모르지만, 너는 잘 알 그 사람을.”
그는 괜스레 제 오른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는 뺨을 긁적였다.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는 왼눈과 달리, 심연처럼 탁하기만 한 오른눈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타원형의 안경은 잠시 눈을 가리는 듯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트리니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지금껏 나왔던 대화들을 속으로 정리하려 애썼으나, 유의미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좀처럼 대화를 파악하지 못하는 트리니티와 달리, 오르는 잠시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정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게 점점 확실해지고 있군…. 오르는 턱을 몇 번 문지르더니, 트리니티와 눈을 잠깐 마주치고는 시선을 다시 하르피아에게 돌렸다.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하나만 더 하려고 하는데. 혹시 숙박 문제도 도와줄 수 있겠나. 급하게 오다 보니 준비한 게 없어서 말이지. 그의 말에 하르피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몇 번 돌듯이 움직였다. 꽤 급하기는 했나 보네, 라는 말을 하며 한참 생각하던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제 허리춤에 오른손을 올렸다.
“어쩔 수 없네, 나도 갑작스러워서. 대신 내 집에서 며칠 묵는 게 어때? 어차피 오래 머무를 것도 아닐 테니까.”
그의 말에 오르와 트리니티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트리니티가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오르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오래 본 사이라지만 미안한데, 그런 건. 오르가 거기에 덧붙여 굳이 들어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 하자, 하르피아가 말을 끊었다. 괜찮아,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왼손에 찬 금색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짧게 중얼거리던 하르피아는 머뭇거리다 제 목덜미를 쓸며 둘에게 말을 걸었다. 곧 있으면 수업 시간이라서. 잠깐만 기다려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피아는 둘의 의사를 확인하자마자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문을 열었다. 급하게 행동하는 탓에 끝이 거뭇한 그의 백색 머리가 흩날렸다. 그는 아래로 내려 묶은 머리를 다시 정리하고서 문을 닫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르피아의 발소리도 멎어 들었다.
하르피아가 나가고 나서야 트리니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르는 그런 트리니티의 모습을 흘끔 바라보다, 고개를 까딱였다. 트리니티는 그 신호가 무슨 뜻인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오르의 말을 기다렸다.
“트리니티, 이렇게 된 거…. 음. 커피라도 한 잔 타 주겠나.”
트리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실 구석에 보이는 커피 머신 앞으로 가, 커피 두 잔을 내렸다. 이윽고 김이 피어오르는 두 개의 잔을 탁자 위에 두었다. 트리니티는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오르를 가만히 쳐다봤다. 오르는 그 시선에도 아무런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더니, 제 두 손을 깍지 끼고서 엄지끼리 문질렀다. 트리니티는 그런 그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봤다. 오르는 한참 뒤에서야 입을 열었다.
전부터 제대로 말한 게 없었지. …미안하다. 대신… 으음. 옛날 얘기라도 좀 할까. 지금 얘기는 때가 되면 너도 다 이해하게 될 테니까. 트리니티는 그의 말에 전처럼 화를 낼까 고민했으나, 오랜만에 보는 오르의 표정에 입을 닫았다. 그래, 분명 이유가 있으셔서 그랬겠지. 순간 자신이 화냈던 때가 떠올랐다. 난 아직도 철이 없는 걸까. 순간 떠오른 자책에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혀를 찌르는 듯했다.
“앗, 뜨거워라….”
트리니티가 얼굴을 찡그리며 가만히 있는 모습에 오르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찡그렸던 눈썹을 풀고서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트리니티는 몇 번 발을 동동거리다, 열기가 가라앉은 후에서야 표정을 풀었다.
“그래요, 음. 그때는… 죄송했어요, 탐정님. 제가 아직도 어리광만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오르가 고개를 저었다.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트리니티는 흘끔 그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탐정님 말대로 옛날 얘기나 하면서… 좀 쉬는 게 낫겠어요. 요즘 서로 대화도 잘 안 나눴으니까요.”
뭐부터 얘기하는 게 좋으려나, 하며 트리니티가 눈을 감은 채 제 턱을 몇 번 두드렸다. 대여섯 번을 그러던 트리니티는 무언가 떠오른 듯 아하,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아까 아이랑 부딪히면서 떠오른 게 있는데…. 이건 탐정님한테도 얘기 드린 적 없는 것 같네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그냥, 음…. 네.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겪었던 일을 말하는 걸 듣는 것처럼요. 그렇게 말하는 트리니티의 얼굴은 평소보다 앳돼 보였다. 순간 오르의 머릿속에 트리니티의 어렸을 적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니티는 평소처럼 그의 웃음에 무어라 하지 않은 채, 제 손에 들린 커피를 식히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때가 아마 1005년쯤이었나. 네, 제가 11살이었을 때 일이니까요. 그때 저도 어떤 분이랑 부딪힌 적이 있었는데….”
오르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 트리니티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천천히 시작되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