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허심탄회?
때로는 털어놓는 게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고.
셋이 돌아와 있었을 때는 어느새 주변이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오르가 익숙하게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러 들어오자, 거실에서 왼쪽 손목을 쥐고 있는 하르피아가 보였다. 아무래도 금색 손목시계를 막 푼 참인 듯했다. 오르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뒤에서 두 사람이 밀려 들어왔다. 그에 그는 휘청이며 간신히 벽을 잡은 채 발을 내디뎠다.
“꽤 늦게 들어왔네. 뭐라도 하고 왔나?”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오르는 시선을 돌렸다. 그 대신 사이를 비집고 나온 단테가 두 손가락을 이마에 가까이 붙였다 떼며 인사를 건넸다. 영 어두워 보이는 두 사람과 다른 반응이었다. 하르피아는 어색하게 셋 앞으로 다가왔다.
“단테… 였던가? 만나서 보는 건 처음이네. 반가워.”
단테는 손을 내미는 하르피아의 손을 덥석 잡으며 악수했다. 두 사람이 짧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오르와 트리니티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트리니티의 표정은 침울한 것이 한눈에 보였다. 하르피아는 대화 중 그 얼굴을 자꾸 흘끔거리다, 단테에게 양해를 구하며 몸을 돌렸다.
트리니티는 하르피아가 코앞에 서고 나서야 반응했다. 그는 동그랗게 뜬 트리니티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평소 같았으면 시선을 피하지 않았을 트리니티였으나, 지금은 자꾸만 눈치를 보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하르피아가 조용히 무슨 일이 있었냐 묻자, 트리니티는 고개를 숙였다. 결국 질문 대상자였던 트리니티 대신 답한 것은 오르였다.
“내가… 잠시 납치당했었거든. 나 혼자만 그랬던 거라 더더욱 당황했을 거다. 지금은 잠깐 쉬게 둬.”
납치당한 사람치고는 덤덤한 투였다. 제법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왜…. 하르피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세 사람을 번갈아 봤다. 아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의 단테와 조금 지쳐 보일 뿐인 오르. 그리고 가장 침울한 얼굴의 트리니티…. 하르피아는 짧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셋이 돌아오면서 얼마나 불편한 기류가 흘렀을지 가늠조차 가지 않은 탓이었다.
잠시 고민했다. 평소 같았으면 괜찮은 척이라도 했을 트리니티가 그조차도 못하는 상황이라니. 그는 머뭇거리다 트리니티의 어깨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트리니티가 올려다보자, 그는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트리니티는 시선을 자꾸만 눈치 보듯 옮겨댔다.
“그럼, 잠깐 나랑 나갔다 올까? 기분 전환 겸.”
하르피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밖에서 힘들게 있다 왔는데. 트리니티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제 한쪽 팔을 꼭 붙잡은 트리니티는 조용히 말했다. 그냥 집에서 쉬는 게 낫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하는 트리니티의 모습에 하르피아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다른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그는 말을 이었다.
“멀리 가자는 건 아니고, 우울할 때 음료라도 마시면서 쉬자는 거지.”
그는 트리니티의 등을 밀면서 두 사람에게 찡긋 눈을 감았다 떠 보였다. 오르는 그게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달래는 건 자신이 할 테니 둘이 편하게 있으라는 얘기였을 터였다. 가끔 보면 나보다 애 취급을 더 한다니까. 오르가 하르피아에게 끄덕여 보이자, 하르피아는 트리니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결국 트리니티는 좋은 카페를 안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다시 밖으로 향했다.
“우리 둘만 남았네.”
단테가 오르를 흘긋 쳐다봤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담뱃갑이 쥐어져 있었다. 오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단테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같이 한 대나 피우자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오르는 잠시 눈을 가늘게 뜨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먼저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로 나오니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 드문드문 깜빡이는 거리의 불빛들은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형형색색의 빛들은 여기가 도심 한복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베란다에서는 산책을 이유로 걸어 다녔던 골목이 훤히 보였다. 그 경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순간 산뜻한 바람이 훅 불었다. 이마가 살짝 시려질 듯한 바람이었다.
오르가 난간에 기댄 채 가만히 바람을 맞고 있자, 뒤늦게 온 단테가 그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담뱃갑과 라이터였다. 단테는 이미 입에 불을 피운 담배를 문 채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었다. 오르는 괜히 어색하게 단테가 건넨 것을 받았다.
“잊고 있었는데. …고맙다. 너도 이제 날 챙기는 게 익숙해진 모양인가 보군.”
단테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오르는 괜히 말을 더 얹지는 않았다. 긍정인지 부정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자신을 챙겨 준 건 사실이었으니까.
연기가 입안에 머무르다 바깥으로 퍼지며 공기 중에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때때로 바람이 불 때면, 단테가 내뱉은 연기가 오르 쪽으로 흩어지기도 했다. 오르는 짧게 들이마신 그 연기에 인상을 찌푸리다 말았다. 예전에나 피우던 정도의 매캐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독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오르가 잠시 매캐한 연기에 숨을 가다듬는 사이, 연기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탓에 단테가 그를 흘긋 봤다. 그는 짧게 찡그린 표정을 보고서, 입에 문 것을 빼고는 가볍게 웃었다.
“뭐야, 표정이나 찡그리고. 전에는 어떻게 같이 있었대?”
“…시끄럽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놀랐을 뿐이니까.”
괜히 부끄러워 내뱉은 말 같지는 않았다. 단테는 오르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다 말을 덧붙였다.
“예전에는 독한 걸 많이 피웠나 봐? 이거, 꽤 매운 거거든.”
“끊었다. …트리니티 때문에.”
아하. 단테는 알겠다는 듯 수긍하는 말과 함께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 개비가 전부 타 버릴 때까지,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대신 들린 것은 이따금 부는 바람 소리와 밖에서 누군가 언성을 높이는 소리, 어딘가의 방송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마침내 여전히 타고 있는 담배를 재떨이 바닥에 눌러 끈 때였다. 단테가 긴 한숨을 내뱉더니, 갑작스레 오르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건들거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오르가 그 손을 떼려 하자, 단테는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왠지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좀처럼 볼 일 없는 그의 표정에 오르는 손을 멈추었다.
“허, 아직도 표정이 안 좋네. 역시 거기서 뭔가 특별히 들은 얘기라도 있는 거지?”
오르는 고개를 돌렸다. 평소 같았으면 딱 잘라 대답할 그였지만, 이런 물음에는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난간에 기대고 있는 팔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반듯하던 코트에 옷 주름이 더욱 지자, 단테는 손을 떼는 대신 팔짱을 꼈다.
“나한테 말해 보는 게 어때? 때로는 털어놓는 게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고. 하하, 참. 난 퍼뜨릴 친구도 없으니까 소문낼 걱정은 안 해도 돼.”
다소 어이없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그 말 덕분에 안심이 되는 듯했다. 오르는 ‘오히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럴 일이 많지 않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과연 맞는 말이라고 수긍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단테가 단테라는, 만난 지 얼마 안 된 인물이기에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트리니티에게는 하지 못할 말을 그에겐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보다 별건 아니다. 그냥… 옛날에 있었던 정보를 어떻게 캔 모양이더군. 그걸 가지고 날 회유하려 했다. 그것 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고. 다만 트리니티한테도 피해가 갈까 봐… 그게 걱정이다. 내 정보가 어디까지 노출되어 있는지 모르겠거든.”
별것 아니었다는 그의 말과 달리 표정은 어두웠다. 단테에게 있어서 그가 그렇게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는 걸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테는 잠시 침묵했다. 생각보다 거짓말을 못 하는 건지, 그만큼 조수를 걱정하는 건지. 찰나의 정적이 지나가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늘 보였던 가벼운 미소와 함께.
“별일 아니긴 하네. …그래, 정 그렇게 걱정된다면 말이지. 이렇게 깊게 엮여 버린 거, 신살회를 역으로 털어 버리는 건 어때? 정보를 마음대로 캔 데에 대한 복수도 할 겸.”
가벼운 미소와 함께 나온 말은 더 가벼워 보이는 말이었다.
“…미친 건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건지, 뭔지… 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어이없었다. 듣고 있을 때는 분명 진지하게 듣는 것 같았는데. 딴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나?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오르의 표정이 점차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실시간으로 그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게 눈에 확연히 보이자, 단테는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들고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 오르는 한마디를 더 얹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내가 친구는 없어도 지인은 많거든. 들은 정보가 많아서 그래.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니라고.”
친구가 없어도 지인은 많다니. 무슨 말장난인 건지. 오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상으로 무어라 말할 기운이 어느새 사라진 탓이었다.
“…말장난하지 말고, 그럼 어떻게 할 건지나 자세히 말해 봐라.”
단테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귀 열고 잘 들으라고. 내가 없는 동안 바쁘게 뭘 알아봤냐면….”
종알거리는 소리가 미소와 함께 이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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