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회유 (2)
제법 무식한 방법이군.
“어이, 탐정님! 무사한 거지?”
짙푸른 머리를 한 이가 손을 흔들었다. 오르가 인상을 찌푸린 채 그 너머를 보려 애쓰고 있자, 그를 제치고 누군가 튀어나왔다. 레몬과 같은 머리 색…. 트리니티였다. 울먹이는 얼굴로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트리니티의 모습에, 오르는 저도 모르게 멈췄다. 그런 그와 다르게 옆의 이브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트리니티가 팔을 뻗으려 한 순간 이브와 시선이 맞닿았고, 일순 묘한 기류가 흘렀다.
“또… 당신들입니까?”
이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에 트리니티 또한 눈썹을 찡그리며 경계했다. 오르를 사이에 둔 채 미묘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분위기 탓에 꼼짝도 못 하던 오르를 흘끔 쳐다보던 이브는 양손을 잠시 들었다 내렸다. 이윽고 오르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만 가 볼 테니 아무튼 잘 생각해 보라며.
그 말을 남긴 이브는 옆의 문을 열고서 움직였다. 그의 모습은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묘한 기류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짧은 사이, 정적을 깬 것은 트리니티였다.
“탐정님, 괜찮으신 거 맞아요? 저 사람이 뭔 말을 한 거예요?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죠, 네?”
트리니티의 연이은 질문에 오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머리가 울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 표정을 보던 트리니티는 놀란 듯 뒤로 주춤 물러났다. 트리니티의 행동에, 오르는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괜찮다…. 그냥 헛소리를 좀 했을 뿐이야. 다른 건 없었어.”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선 진위를 갖고 따질 수는 없었다. 트리니티는 반박하는 대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는 순간 오르의 눈에 제 손목에 채워진 족쇄가 보였다. 그가 제 얼굴만을 바라보는 트리니티에게 족쇄를 보여 주려는 사이, 허주가 대뜸 끼어들었다.
“저기, 미안한데. 감동적인 재회는 나중에 마저 하면 안 될까? 지금 뒤에서 쫓고 있거든?”
뒤를 가리키는 허주의 손짓에 두 사람이 뒤를 쳐다봤다. 그의 말대로 뚫린 벽의 반대편에서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방은 아무래도 벽이 열렸다 닫힐 수 있는 구조인 듯했다. 모든 면이 순식간에 개방되었다. 거기에 그들의 앞으로 먼지가 일어나는 탓에, 그 수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이만 가 보겠다는 건 그 녀석 하나뿐이야? 신살회는 왜 이리 협력이 안 돼? 자기들끼리 계획 통일도 안 하고 사는 거냐고!”
당연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단테가 불평을 내놓았다. 물론 그런 불평에도 변하는 것은 없었지만.
트리니티는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너머는 칙칙한 회색빛뿐이었다. 누군가가 마법을 쓴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시스템으로 차단된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벽이 막혔다는 것이었다. 뚫린 곳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니 순간 현기증이 몰려왔다. 오르를 잡은 손에 힘이 풀리자, 그 사이에 누군가 트리니티의 손을 꽉 쥐었다. 허주였다.
“정신 차려, 트리니티. 아직 나갈 방법은 있어. …일단 저쪽으로 뛰어. 설명은 가면서 할 테니까.”
갑작스레 단호해진 허주의 말에 트리니티가 손을 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야 혼미한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듯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주의 눈을 바라보자, 허주는 남은 둘의 상태를 흘긋 살피고는 모두를 이끌었다.
쭉 달린 후, 벽을 눈앞에 두고 다시 좌회전. 그러다 다시 벽을 마주치면 우회전…. 도무지 바뀌지 않는 풍경은 달리는 것이 시간 소모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중간중간 허주가 부채 따위를 휘두르며 따라오는 무리를 넘어뜨려 보아도 잠깐의 시간 끌기만 될 뿐이었다. 자꾸만 방황하는 속, 허주는 인상을 쓰며 눈에 보이는 문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려 애썼다. 그렇게 확인해 보아도 당연히 열리는 것은 없었지만.
“젠장, 열리는 문만 있다면 어떻게든 밖으로 향할 수 있을 텐데.”
그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자, 슬슬 달리는 데 지치기 시작한 오르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란 게…. 이건가? 열리는 문을 찾는 거?”
오르는 전에 단테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허주는 문을 ‘열어’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했었다. 제법 무식한 방법이군. 그는 투덜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일행 중에서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허주뿐이기도 하고. 단테가 사용하는 마법은 무언가 만드는 데 그쳤고, 트리니티는 이미 오는 데에 마력을 다 써 더 이상 벽을 부수긴 어려워 보였으니.
…잠시만. 무언가 만든다? 오르는 단테를 흘긋 쳐다봤다. 그의 표정 또한 지친 기색이 점차 드러나는 듯했다. 오르는 그의 팔을 툭 친 후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에 단테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깐… 그게 되나? 어이, 허주. 내가 ‘만든’ 문도 상관없지?”
허주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단테는 트리니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트리니티, 1분 동안만 벽을 칠 수 있겠어? 딱 1분이면 돼.”
그의 말에 트리니티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가능하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이윽고 단테가 셋을 셌고, 마지막으로 하나를 외친 순간 네 사람과 뒤쫓아오는 무리를 가르는 벽이 올라왔다. 너머로 벽을 허물려는 듯한 소음이 이어졌다. 쿵, 쿵.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트리니티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단테가 만년필로 메모장에 무언가를 휘갈겼다.
20초. 트리니티가 속으로 센 숫자였다. 손끝이 점차 마비되는 감각이 들 즈음, 단테의 다 됐다는 외침이 들렸다. 그에 고개를 흘끔 돌려 보니 그가 만든 듯한 문이 세워져 있었다. 허주가 잠시 머뭇거린 손을 손잡이에 두고 잠시 눈을 감는 모습에, 트리니티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린 탓에 몸이 한 번 크게 비틀거렸다. 그에 오르가 옆에서 트리니티의 복부를 한 팔로 감았다.
“준비해.”
트리니티는 그 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10초. 그 말을 들은 것이 10초까지 셌을 때였다. 트리니티는 힘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고, 이에 바로 벽이 허물어져 갔다.
9초. 허주가 문을 열었다. 8초. 그것을 보자마자 오르가 팔에 힘을 주어 트리니티를 끌어당겼다. 7초. 자신을 허리 옆으로 바짝 붙여 끌어안은 오르의 팔 힘이 느껴지자, 트리니티가 긴장을 풀었다. 6초. 그러는 사이 문 너머에서 허주가 어서 들어오라는 말을 외쳤다. 5초. 오르의 발걸음에 맞춰 단테 또한 뛰었다. 4초. 벽이 완전히 허물어졌고, 3초. 두 사람이 문을 향해 달렸다. 2초. 마침내 문턱을 넘었고, 1초. 무리가 일제히 문을 향해 달려오며 손을 뻗는 순간.
탁. 허주가 힘껏 문고리를 잡아당겨 문을 닫았다.
“하, 하아…. 하하…. 하, 그래도 어떻게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네.”
허주는 빛무리로 퍼지듯 사라지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 옆에서 오르는 벽에 기댄 채 숨을 내쉬었다. 단테와 트리니티가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르는 동안, 그는 허주를 흘끔 바라보았다. 아까는 물어볼 경황이 없어 묻지 못했던 것을 조심스럽게 꺼내면서.
“그러고 보니…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도와주는 걸로 득 볼 건 없을 텐데.”
그의 말에 허주가 오르의 족쇄를 흘긋 쳐다봤다. 그는 소매에서 끝 모양이 불분명한 열쇠를 꺼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물건 좀 팔려고? 음… 단돈 백만 원은 어때?”
갑작스럽게 가격을 부르자, 오르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에 허주가 풋,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르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바라봤다. 허주는 생긋 웃는 얼굴로 오르의 양손을 낚아채 열쇠로 풀어 주었다. 족쇄가 복잡한 구조가 아닌 건지, 아니면 열쇠의 성능이 뛰어난 것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찰칵 소리와 함께 족쇄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농담이야. 이건 서비스. 대신, 다음에는 정말로 사 주기다?”
그 목소리에 오르가 곤란한 듯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허주는 그의 반응을 잠시 살피곤 제 열쇠를 몇 번 쳐다봤다. 꽤 복잡한 구조인가, 열쇠에 채워 둔 마력이 다 떨어졌네…. 나중에 채워 둬야지. 그런 짧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허주는 이윽고 열쇠를 다시 소매 안에 넣었다. 그는 몸을 한번 털고서 조금 물러났다.
“어떻게 봐도 수상해 보이겠지만, 돕고 싶다고 전에 말했던 건… 진심이야. 오늘 일로 그게 증명됐으면 좋겠네.”
오르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허주는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 보겠다며 손을 흔들곤 뒤돌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니 허주는 금세 사라졌다. 드디어 지친 몸을 진정시킨 단테와 트리니티 또한 일어나서 허주가 사라진 장소를 몇 번 흘끔거렸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셋 사이에서 단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음. 어쨌든 말이지. 슬슬 피곤하니까 이만 묵고 있다는 데나 가 보는 건 어때?”
인제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해로부터 나오는 붉은빛이 하늘의 중심을 향해 퍼지는 모습. 그제야 오르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실감했다. 잠시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오르는 어느새 제 옆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트리니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본 단테가 슬쩍 옆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오르가 팔을 내리곤 트리니티의 손을 잡으며 앞장섰다. 트리니티는 왠지 오랜만에 쥐는 듯한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와 더해 오르에게 한마디를 하려고 했지만, 제 생각보다 몸이 많이 지친 듯 입술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걷는 그와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잠깐, 또 나 빼놓고 오붓하게 가지는 말라니까!”
물론 먼저 걸어가는 둘의 모습을 보고서 불평하며 따라가는 단테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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