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미숙
원래 옛이야기를 잘 안 하거든.
쿵.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소리가 울렸다. 아야야, 하는 소리와 함께 금발의 아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구불거리지 않는 머리를 지닌 아이, 트리니티는 잠시 그러다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의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트리니티는 어색하게 그 손을 잡으며 일어섰다. 눈에 띄게 곱슬한 머리를 지닌 그는, 밀밭과 같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무릎을 살짝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트리니티에게 괜찮냐며 짧게 묻는 그 목소리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트리니티는 우물쭈물 시선을 이리저리로 돌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제가 앞을 잘 봤어야 했던 건데.”
트리니티의 몸을 잠시 확인하던 밀발의 여성은 제 잘못이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말과 다르게 잘못은 트리니티에게 있었다. 지각을 목전에 뒀다는 이유로 뛰어가며 코너를 돌던 중 부딪힌 것이었으니까. 트리니티는 그의 형식적인 말에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른이 항상 더 조심해야 하는 게 맞죠. 잠시 무릎을 살짝 굽히고 있던 그가 무릎을 펴자,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오른쪽 귀에 걸린 붉은 날개 모양의 귀걸이. 날개의 한쪽 부분만 똑 떼어다 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트리니티가 저도 모르게 그것을 빤히 보자, 그는 귀걸이를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듯 다른 곳을 쳐다봤다.
“아, 혹시 이 귀걸이에 관심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게 뭔지 알려 줄 수 있는데….”
트리니티가 대답하려던 순간, 종이 울렸다. 눈앞의 이는 헉, 하는 소리를 내고는 수업에 늦었다는 말과 함께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트리니티도 마찬가지였다. 죄송해요, 늦어서… 저 먼저 가 볼게요…! 그런 말을 남기며 트리니티가 떠나려던 순간, 그가 트리니티를 불러 세웠다. 저기, 학생. 미안하지만…. 치료학 교실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그 물음에 트리니티가 멈춰 섰다. 치료학 교실이라면 분명 트리니티가 가야 하는 곳이었다. 누가 새로 오신다더니, 설마 새로 오신 분인가? 짧은 생각과 함께, 트리니티는 몸을 돌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가야 하는 길이었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트리니티는 그를 이끌고 조심스레 강의실 쪽으로 향했다.
뒤늦게 들어온 강사 덕분에 지각은 면할 수 있었다. 길 안내라는 이유로 지각을 면할 수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트리니티는 먼저 앉은 다른 학생들의 눈치를 흘긋 보며 제 자리에 앉았다. 길을 헤맸던 강사는 교탁 앞에 어색하게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이런 풍경이 낯선 모양이었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던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은 채 본인을 소개했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분을 가르치게 될 강사, 베아트리체라고 해요. 본래 직업은 의사고, 강의 경험도 꽤 있답니다. 이번에 치료학 실습 강의를 맡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이번 학기 동안이지만, 그동안 다들 잘 부탁드려요.”
상대적으로 별 돈도 안 되는 강사 일을 도맡는 의사라니. 의사가 어쩌다 이런 곳에 왔지? 평소 궁금한 것이라면 못 참고 알아내려던 성격의 아이가 이걸 가만히 넘길 리가 없었다. 트리니티는 손을 들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 실례지만…. 왜 의사이시면서 강의를 하러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베아트리체는 입을 가리며 소리 없는 웃음을 보이더니, 이내 좋은 질문이라는 말과 함께 서두를 떼었다. 그는 교실의 뒤편에 있는 원래 교사와 눈을 마주했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음… 어디서부터 얘기할까. 일단 저는 의사로서만 활동하진 않거든요. 붉은날개라는 봉사 연합에서도 활동하고 있어요. 주로 교육이나 의료 분야에 관해서 활동을 하고 있답니다.”
그는 말을 더 이어 나갔다. 서부 외곽 이베리아 지부 아카데메이아에서 일어났던 ‘봉쇄 사건’과 같은 위험이 재발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붉은날개에서 여러 학교를 대상으로 치료학 강의를 진행하게 되었다는 말. 어린아이에게는 복잡하면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트리니티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새겨들었다. 멋진 사람인 것 같아, 하는 생각과 함께.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긴장부터 풀려는 듯,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꺼내는 것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지만 스스로 치료할 줄 모르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아는 게 낫다는 말이나, 그래도 만일 위험이 생긴다면 어른들이 해결할 테니 적극적으로 선생님과 같은 어른들에게 기대 달라는 말 등. 꽤 진부한 말이었지만, 그의 말 하나하나가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꼭 목소리에 마법이 깃든 것처럼.
“치료는 원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이에요. 한마디로 본질로 되돌림을 의미하는 거죠.”
잡담이 끝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베아트리체는 교탁에 가려져 있는 아래에 손을 뻗더니, 이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시들어 가는 식물이 심어진 화분을 교탁 위에 올렸다. 그에 뒤편에 앉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베아트리체는 그런 아이들을 흘긋 바라보더니, 웃으며 칠판에 화면을 띄웠다. 화면에는 시든 잎을 매만지는 베아트리체의 손이 보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일제히 그 화면을 빤히 쳐다봤다.
손이 잎을 부드럽게 쓰다듬다, 손끝으로 따스한 빛을 피우며 식물의 곳곳에 스며들게 했다. 잎을 타고 따스함을 전달받은 식물은 어느새 언제 시들었냐는 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식물학자나 정원사도 아닌 의사가 식물을 되살리는 모습에, 아이들은 신기하다는 듯한 감탄 섞인 숨을 내뱉었다. 베아트리체는 잠시 한숨을 내뱉다, 화분을 내려놓고서 화면을 껐다. 이어서 그는 목을 몇 번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짐작되겠지만, 오늘은 간단하게 얘기하는 정도에 그칠 거예요. 첫 수업부터 바로 실습에 들어가기는 어려우니까요.”
본질은 어려운 게 아니에요. 생물이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원모습일 뿐이죠. 상태에 따라서 타인이 기억하고 있는 원모습이 본질이 될 수도 있고요. 무생물도 거의 비슷해요. 무생물은 당연하게도 후자의 경우가 되겠고요. 그래서 청소부들이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복구할 수 있는 거예요. 베아트리체의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어려웠다.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물론 자신은 이런 분야의 사람이 아니니 정확한 설명을 한 것은 아니라면서. 그는 그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반지였다. 베아트리체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두었다, 그 파편을 쥔 채 팔을 위로 뻗었다.
“어쨌거나 응용이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요. 설명보다는 직접 생각하는 게 더 좋을 거예요. 가장 기초부터 해 볼까요? …다들, 이 반지의 원래 상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처음에는 아이들이 머뭇거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몇십 초 뒤에 한 아이가 손을 들어 답했다. 부러지지 않은 반지요! 짧고 간결한 대답에, 한 아이 또한 손을 들었다. 원석 형태 아닐까요? 저마다 다른 답에, 베아트리체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는 점차 풀렸고, 의견을 내는 아이들은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
“그래서.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나.”
오르가 팔짱을 끼고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물었다. 트리니티는 눈을 감고 턱을 톡톡 두드렸다.
“여러분이 생각한 모든 게 정답이랍니다, 하셨던 것 같아요. 음… 어쨌거나. 그 의사 선생님 덕분에 많은 걸 배우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참여하는 수업은 저랑 맞지는 않았던 것 같네요.”
트리니티가 오르와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대답하는 사이,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하르피아였다. 그는 오래 둬서 미안하다는 듯 멋쩍은 표정으로 제 뺨을 몇 번 긁적이다,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진작에 하르피아를 바라보던 오르와 다르게 한참 종알거리려던 트리니티는 가다듬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뒤를 돌았다.
“마침 수업도 다 끝났는데. 같이 집에 가는 게 어때.”
그가 옆으로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트리니티는 머뭇거리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것도 같은 모습에 하르피아가 그 어깨를 잡으려 한 순간, 트리니티는 먼저 뒤로 돌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하르피아가 흠칫 놀라 손을 허공에 둔 채 멈추자, 트리니티는 그 손을 대신 내려 주었다.
“으흠, 흠. 그러면 먼저 가세요. 따라갈게요.”
말한 것과는 다르게 트리니티는 먼저 걸어 나갔다. 하르피아가 멀뚱히 서 있자, 오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트리니티의 등을 쳐다봤다. 그러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서 하르피아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부끄러운 모양이지, 하며 걸음을 옮겼다. 하르피아가 대체 왜 부끄럽냐 그를 따라가며 묻자, 오르는 고개를 잠시 기울였다. 원래 옛이야기를 잘 안 하거든. 아마도 많은 부분을 들은 줄 알았나 보지. 그는 가볍게 답하고서 걸음 속도를 재촉했다. 하르피아는 목덜미를 몇 번 쓸다, 둘보다 더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온 하르피아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오자마자 적당한 구석 자리에 짐을 풀었다. 하르피아는 그러는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예전처럼, 뭐. 집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있어.”
오르는 그의 말에 그래, 하며 짧게 대답하곤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곤 베란다로 향했다. 트리니티는 오르를 잠깐 쳐다보다, 하르피아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고맙다는 말을 뱉었다.
시간은 어느덧 저녁 시간대였다. 하르피아는 저녁 거리라도 차릴 테니 좀 기다리라며 주방으로 향했고, 오르는 베란다에서 등을 보인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트리니티는 간만의 안락함에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안락했다. 그동안 은은하게 차가운 분위기가 깔렸던 것이 먼 옛날의 일만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트리니티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물론 피로한 탓인지 좀처럼 생각이 나질 않았지만.
그러고 있으니 점차 고개가 무거워졌다.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릴 새도 없이 몸이 기울어졌다. 어느새 어깨에 소파의 푹신한 쿠션이 느껴졌다. 트리니티는 뜨려다 본능에 기대었다. 요즘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긴 하지, 라는 생각으로. 머리카락이 제 입술을 간질이는 줄도 모른 채, 그렇게 감각이 점차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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