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찾는 탐정

13화 - 미시감(未視感)

본 적 있는 듯하면서도 처음 보는 느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불길이 치솟는 새빨간 폐허. 그 속에서 드문드문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지는 것이 소름 끼쳤다. 트리니티는 눈앞의 광경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본 적 있는 듯하면서도 처음 보는 느낌. 미묘한 기분에 속이 울렁거렸다. 뭘 하고 있었길래 내가 이런 곳에…. 그 전의 기억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떠올려 보려 해도 머리가 새하얗기만 했다.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자, 어린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작고 가녀린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무너져 내린 곳을 바라보며 울고만 있었다. 자신 또한 피투성이임에도 아픈 것조차 모르는 듯이. 그런 먹먹한 울음소리에 왠지 자신 또한 가슴이 아려 왔다.

“이 장면은 분명….”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부모님이 눈앞에서 잔해에…. 트리니티는 제 양팔을 꽉 끌어안은 채 뒤로 몇 발짝 움직였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광경을 잘 새겨 두라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자, 익숙한 인영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어둠이 가라앉은 숲의 나무와 같은 검은 머리, 밤중에 빛을 내어 길을 밝히는 듯한 금색의 눈. …오르였다. 그는 트리니티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은 채 작은 아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는 모습에 트리니티는 입을 우물거렸다. 목까지 올라온 탐정님, 이라는 단어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린아이는 그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는 듯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가 몇 발짝 더 움직이고, 바로 뒤에 서서야 아이는 뒤를 돌아봤다. 오르는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리니티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오르가 시선을 주었다. 트리니티가 놀란 얼굴로 오르를 바라보았다. 몇 초 동안 둘의 시선이 맞닿아 있다, 오르가 조용히 트리니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트리니티는 저도 모르게 경직되어 주먹을 세게 쥐었다. 그러고 있으니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피가 나올 것처럼.

“넌 이걸 봐서는 안 돼. 아직 때가 아니다.”

툭, 하고. 손이 닿을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손이 가슴팍을 밀치는 듯한 느낌이 이어졌다.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이 몸을 뒤로 미는 듯했다. 기묘한 중압감과 함께, 몸이 기울어졌다. 이윽고 뒤통수가 바닥에 세게 부딪치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점차 어두워졌다.

…여전히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시야에서는 하늘이 아닌 천장이 트리니티를 반기고 있었다. 포근한 감각 대신 딱딱함이 등에 닿고 있었다. 흐릿한 시야가 눈 앞을 가리자, 트리니티는 눈을 쓸고서 몇 번 깜빡였다. 나… 답지 않게 굴러떨어진 건가? 트리니티는 황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침실이었다. 1인용치고는 큰 침대가 옆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는 동안 옮겨진 모양이었다. 그럼 두 분은 어디서 주무신 거지…. 혼자서 중얼거리던 트리니티는 똑바로 일어섰다.

일단 어지른 것이나 치우자며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불부터 정리했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굴러떨어진 적 없는 듯 주변이 깔끔해졌다. 그렇게 깔끔해진 방을 바라보고 있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르가 그 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소란스러운 게 신경 쓰였는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자, 트리니티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악몽 좀 꿨어요.”

트리니티는 짧게 대답하며 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오르가 자리를 비켜 주자, 트리니티는 뒤늦은 하품을 하며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시간은 벌써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확실히 늦잠을 자긴 한 모양이었다. 트리니티가 벽시계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오르가 흘긋 쳐다봤다. 잠시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내던 오르는 제 턱을 엄지로 몇 번 쓸었다. 단테의 연락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짧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트리니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르가 손을 떼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하르피아가 하나 말해 주고 가더군. 소프가 외곽 지역 쪽에 있을 거라, 만나는 데에 시간이 좀 더 걸릴지도 모른다고. 아마 여기에 머무르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지도 몰라.”

소프. 그자의 이름이 또 나왔다. 오래간만에 단둘이 있는 상황 속, 트리니티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오르가 그 얼굴을 보고서 잠시 기다렸다. 그의 반응에 트리니티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탐정님. 이렇게 저한테도 조금씩 얘기해 주실 거라면, 이제라도 제대로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소프라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오르가 멈칫했다. 여태껏 무언가를 말한 적 없던 와중에 자연스레 꺼내 버렸다니. 그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윽고 트리니티를 흘긋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 자매 같은 이라고 해야 하나. 자세한 건 직접 만나 보면 알게 될 거다. …어차피 조만간 만날 거기도 하고.”

트리니티는 아랫입술을 짧게 깨물었다. 그를 왜 꼭 찾아야 하느냐고, 아인이라는 또 어떤 사람이냐고. 그런 질문이 목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오르가 그답지 않은 얼굴로 곤란한 듯이 트리니티를 바라보자, 트리니티는 앞으로 향하던 몸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르는 그제야 이어서 답했다. 아인도 비슷한 위치의 사람이라며, 반드시 셋이 대면해 의논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트리니티는 그 답을 듣고는 잠시 며칠 전의 오르를 떠올렸다. 아무리 의문을 품어도 사소한 답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트리니티는 무언가의 말을 더하는 대신, 알려 줘서 고맙다는 말로 대화를 끝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간 교차했다. 오르가 흘긋 트리니티의 눈을 바라보다, 제 턱을 매만지며 낮은 목소리를 내었다. 어색해하며 내뱉은 말은 간만에 산책이라도 가 보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그의 한마디에 트리니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책이요?”

자신이 들은 게 정녕 맞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르는 의문이 담긴 그 표정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트리니티의 눈이 가볍게 감겼다. 생각해 보니 요즘 들어 산책 따위의 여유를 즐긴 적이 없었다. 어쩌면 걷는 게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트리니티는 눈을 몇 번 굴리다 그의 앞에서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간만의 산책은 낯익으면서도 낯선 거리를 배경으로 삼았다. 상쾌한 공기가 피부를 스쳐 지나가며 머리카락을 흩날리게 했다. 뺨이 간질여지는 느낌에 트리니티의 눈이 절로 감겼다. 하아, 하고 짧게 숨을 고른 트리니티는 오르보다 앞서 걸었다. 오르는 자신보다 짧은 트리니티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맑은 공기가 정말 효과가 있던 것인지, 묘하게 찝찝하던 기분은 어느새 사라졌다. 트리니티는 종달새처럼 재잘재잘 떠들며 경쾌한 걸음으로 움직였다.

“너무 오랜만이라 뭐가 바뀌고 안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낯익기는 해서 좋긴 하지만.”

어렴풋한 기억은 대략 10년 전쯤에 머물러 있었다. 성인이 되기 전쯤까지는 그래도 제법 들르던 곳이었는데. 트리니티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과 비슷하다면 이 거리는 여러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습 그대로일 터였다. 마도구 골목, 미식 골목…. 그 두 골목이 가장 유명했는데. 여전히 그대로일까, 하며 트리니티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지나가는 두 분, 물건 좀 보고 가세요~.”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에도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는 분명, 하며 등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많이 돌아다닌 듯 은은하게 탄 피부와 그에 어울리는 황톳빛 머리칼. 긴 생머리를 장식하는 듯한 땋은 반묶음 머리가 이번 따라 유독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 허주는 살가운 얼굴로 손을 한번 흔들어 보였다. 트리니티는 그의 손짓에 어색하게 웃으며 다가갔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

트리니티의 말에 허주가 그러게,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도 허주는 자연스럽게 둘을 자신의 물건들 앞으로 이끌었다. 산책 나온 것 같아 보이는데, 뭐 좀 사 가지 않을래? 그런 질문에 오르가 필요 없다고 답했으나, 허주는 포기하기는커녕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둘은 물건에 조금 관심 있어 보이는 트리니티의 얼굴을 읽지 못한 듯한 눈치였다.

“그럼, 정보를 사는 건 어때? 물론 처음은 무료로 해 줄게.”

허주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오르는 짧게 인상을 쓰며 생각했다. 손해 볼 것도 없겠지. 결국 그가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이자, 허주는 갑작스레 정색하며 오르를 바라봤다. 그에 오르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허주는 오르의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를 가리켰다.

“누군가 널 쫓고 있어. 우리가 대화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사람이 잠시간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오르는 트리니티와 눈을 한번 마주한 후, 다시 허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냥 던져 본 말은 아니냐는 듯한 투로 되묻자, 허주는 꿍한 표정을 슬쩍 내비쳤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볼까? 오르, 당신. 신살자들한테 쫓기고 있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길래 그런 정체도 잘 모르겠는 무리한테 쫓기는 거야. 허주가 말을 덧붙였다. 그에 오르가 눈을 감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트리니티는 그의 표정을 흘끔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넌 대체… 뭘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것까지 알고 있지?”

“그저 행상인일 뿐이야.”

오르의 질문에 대한 허주의 답이었다. 그 답에도 오르가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자, 허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희한테 관심이 있거든. 너희에게 아주, 아주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말하자면 팬이랄까. 그런 말을 덧붙이던 허주는 갑작스레 중지와 엄지를 탁 튕겼다. 경쾌한 소리가 울리자, 허주가 펼쳐 놓았던 보자기와 그 위의 짐이 일순간 사라졌다. 오르는 허주가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쓴 적도 없는 듯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트리니티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봤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뭐, 장사는 이쯤 해 둘까.”

허주는 손을 흔들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다음에 또 보자는 말과 함께. 그제야 트리니티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두어 번 눈을 깜빡인 사이 허주는 사라졌었다. 오르는 허주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표정을 풀었다. 왜인지 찝찝한 기분이 남은 사이, 바람이 불었다. 산뜻하면서도 서늘한 바람은 두 사람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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