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찾는 탐정

7화 - 반환 (2)

그렇게 따질 거라면 구두 계약은 하지 말았어야지.

“쉿.”

핏기가 덜 마른 듯 분홍빛을 띤 은은한 보라색 머리의 여성이 제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그가 생긋 웃자, 왼눈 아래의 점이 눈에 띄었다. 머리와 다르게 선명히 분홍색을 띤 눈은 다정하면서도 소름 끼쳤다. 오르가 뒤로 주춤 물러나자, 트리니티 또한 고개를 돌렸다.

“탐정님, 갑자기 왜 그러세….”

트리니티가 소리를 삼킨 비명을 질렀다. 여성은 눈썹을 찌푸리며 애써 웃는 표정으로 검지를 몇 번 뗐다 붙이길 반복했다. 저는 적이 아니에요. 그런 한마디에도 둘의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이윽고 낯선 목소리에 단테 또한 뒤를 돌자, 여성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손짓했다. 살고 싶으면 따라오세요. 믿을 수 없는 말이었음에도 오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직감이었다. 트리니티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오르는 잠깐 시선을 주고서 여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성은 다시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어디론가로 향했다.

길은 꽤 복잡했다. 막다른 길인 줄 알았던 것이 뚫려 있었고, 반대로 뚫려 있는 줄 알았던 것이 막혀 있었다. 여성은 몇 번이고 오갔던 듯 능숙하게 움직였다. 단테는 자신에게 아무런 사인도 주지 않은 둘에게 의문을 표하려 입을 열려다 관두었다. 대신 말없이 자신을 앞서는 이들을 따르며 주변을 자꾸만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잠깐 기다리세요. 대략 30초 뒤에 그들이 올 거예요. 그들이 지나가면, 바로 왼쪽으로 직진하세요. 그러면 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여성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삼면이 막힌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 셋은 구석에 찌그러져 짧은 시간 동안 입을 다물었다. …28, 29, 30. 오르가 속으로 숫자를 세자, 단정하지 못한 차림의 거구들이 몇 지나갔다. 여성은 그들이 지나가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이제 나와도 괜찮아요. 여성이 옆머리를 넘기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오르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보였다. 오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긴장이 풀리자, 숨이 막혔다. 아무리 보아도 눈앞의 여성 탓이 틀림없었다. 그는 목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글래시어의 협력자인가?”

“비슷한 셈이죠.”

여성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자, 얕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말을 덧붙였다. 못 믿으시는 모양이네요. 당연한 거겠지만. 그는 오르를 걱정하며 바라보던 트리니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다시 시선을 돌려 아래로 내려 묶은 머리를 어깨 앞으로 넘겼다.

“에스카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세인… 대신 말이죠.”

세인…? 이름을 들은 오르가 의문을 품기도 전, 세인은 셋의 등을 밀었다. 이만 가 보세요. 곧 있으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다정한 목소리가 옅게 들렸다. 오묘한 기분에 오르가 등을 돌리자, 세인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단 일부터 해결해 보는 수밖에 없나. 오르는 둘의 등을 툭툭 치고서 남은 길을 달려갔다.

 

길을 지나는 동안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여전히 주변은 적들로 가득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타고 왔던 차가 보였다. 오르는 주변을 몇 번 둘러보다 둘에게 손짓하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탁. 운전석에 올라탄 단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뒤로 잠시 짧은 적막이 이어졌다. 차 안을 메우는 것은 세 명분의 숨소리가 전부였다. 적막을 깬 것은 단테가 벨트를 매는 소리였다. 그는 시동을 켜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에 오르 또한 말없이 벨트를 매었다. 액셀을 밟는 순간에도 말이 오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 쫓아오는 이는 없었다. 한참 액셀을 밟으며 글래시어로 향했다. 트리니티는 신발을 벗고 좌석 위에 발을 올려 웅크리고 있었다. 백미러에 비치는 그 모습을 본 오르는 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흔들리는 차체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하아, 정말이지. 내려온 것까진 좋았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온몸에 긴장이 풀렸는지 트리니티가 고개를 축 내렸다. 무릎에 이마를 댄 채로 한없이 꿍얼거리는 목소리에, 단테가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살았으니 된 거 아냐? 너희는 이런 일을 자주 겪는 편 아니었어? 그 질문에 트리니티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답하는 것은 오르였다.

“탐정이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가끔 호신을 위해 싸우기는 한다만…. 보통은 이럴 일이 없는 편이지.”

단테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럼 죽어 본 적도 없겠네. 그 질문에 오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중상을 입어 본 게 다다. …그러는 너는 어떤데 그러지? 되묻는 말에 단테는 말을 잇지 않았다. 오르는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창밖을 바라봤다.

빠르게 움직이던 풍경이 점차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었다. 내려, 도착했으니까. 단테가 벨트를 풀며 입을 열었다. 운전석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 시간이 몇십 초 지나고 나서야 남은 둘도 움직였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익숙한 이가 서 있었다. 키가 작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에스카였다. 에스카는 옷의 끄트머리에 붙은 불을 털어 끄고는 세 명을 쳐다봤다. 오르는 차 안에서 단테에게 건네받았던 상자를 매만졌다.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상자가 정말로 그가 요구한 물건인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웠으나, 일단은 그에게 상자를 건네주었다. 에스카는 잠시 그것을 매만지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 맞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가볍게 손짓하며 안으로 따라오라는 듯 먼저 발을 옮겼다. 그에 오르 또한 움직이자, 단테는 괜스레 트리니티를 팔로 툭 치며 소곤거렸다.

“둘 다 말수 적은 거, 좀 짜증 나지 않아?”

그 말을 하며 짜증을 들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트리니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한숨을 내쉬며 오르의 뒤를 먼저 따라갔다. 단테는 불만족스러운 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무실로 먼저 들어간 에스카를 기다리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에 들었던 것보다 더 낮고 묵직한 음이었다. 오르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에스카가 소파에 앉은 채 다리를 꼬며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는 모습은 전에 사진으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 오르는 그의 맞은편에, 둘은 그 옆의 긴 소파에 앉아 에스카를 쳐다보았다. 에스카는 한 번 한숨을 내쉬고서 말을 이었다.

“일단 감사를 표하지. 전투력도 없을 탐정에게 이런 일을 맡겨서 미안하게 됐군. 그래도 약속된 보수는 분명히 주도록 하겠다.”

전투력도 없을 탐정이라니. 마이나스가 도대체 뭐라고 소개한 거지. 오르가 한숨을 쉬면서도 그의 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까는 비어 있던 오른손의 검지 부분에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상자 안의 내용물은 반지였나. 그는 잠시 눈을 감고서 흐음, 소리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오기 전에 누군가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었지…. 오르는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리다 입을 떼었다.

“그러고 보니 세인이라는 자가 안부를 대신 전해 달라고 하던데.”

순간 에스카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어떻게 그를 알고 있느냐 물었다. 낮게 위협하는 듯한 목소리에 옆에 있던 트리니티가 흠칫했다. 오르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팔짱을 꼈다.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를 구해 주었던 이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 말에 에스카가 순식간에 표정을 풀며 고개를 푹 떨궜다. 스승님이 완전히 죽어 버린 줄로만 알았다. 살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처음 듣는 어조의 목소리에 오르가 팔짱을 풀고서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에스카는 몇 번 더 중얼거리고 나서야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미안하지만, 거래는 조금 수정해야겠군. 그 말에 오르가 한 손으로 팔걸이를 꽉 붙잡으며 되물었다. 말과는 다르지 않나? 그런 반응에 에스카가 힘없이 픽 웃었다. 그렇게 따질 거라면 구두 계약은 하지 말았어야지. 둘의 말을 듣고 있던 단테가 제 뺨을 긁적였다. 뭐, 일단 들어는 보는 게 어때? 문득 오르가 둘을 쳐다보았다. 트리니티는 옆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오르는 둘의 반응에 다리의 힘을 풀었다. 에스카는 그제야 말을 다시 이었다.

“내 스승, 세인을 찾아 준다면…. 소프라는 자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봐 주도록 하지. …거래만 받아들인다면, 지금 당장부터 부하에게 시켜 두겠다. 이 정도면 너에게도 이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마냥 손해인 거래는 아니었다. 새로운 거래 조건에 오르가 다시 한번 물었다. 보다시피 우리는 마땅한 무력이 있지는 않다. 다시 그곳에 가서 네 스승을 찾으려면 위험해질 텐데, 도와줄 건가? 에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직접 가서 봐야 하기도 하고. 그 정도는 당연히 해 줄 수 있다. 오르는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긴 침묵 끝에서야 입을 열었다.

“…좋아. 받아들이도록 하지.”

트리니티가 의문스럽다는 듯 오르를 쳐다보았으나, 오르는 짧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그러면 잠시만 기다려라. 금방 준비를 끝내고 오도록 하지. 에스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밖으로 나섰다. 그가 나간 사무실에는 잠깐의 정적이 맴돌았다.

탐정님, 뒤늦게 말하는 것 같지만…. 어째서 그 사람을 그렇게 찾으려고 하시는 거예요? 트리니티가 조심스럽게 무릎에 손을 모은 채 묻자, 오르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옛 친구’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거든. 때가 되면… 그때 제대로 된 이유를 알게 될 거다. 옆에서 듣던 단테가 트리니티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트리니티는 단테의 모습을 흘긋 쳐다보다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알겠어요. 대화가 끝나자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왜인지 모르게 답답한 공기는 에스카가 다시 돌아오고 나서야 환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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