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회유 (1)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할까요.
머리가 지끈거린다. 몸과 정신이 하나가 아닌, 둘로 나뉘어 따로 노는 듯한 기분…. 통증이 밀려온다. 공허로 잠긴 바닷속에서 끌어올려지는 듯한 감각이 자꾸만 깊이 잠드는 것을 방해했다. 꼭 죽음과 가까워진 듯한, 아니. 죽은 건가. 머리가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어디에 세게 맞기라도 한 듯한 욱신거림과 함께.
지금… 잠깐. 여기가 어디지?
오르가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골목의 풍경이 아닌 다른 풍경이 보였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군데군데 묻어나는 공간. 창문 하나 없는 데다 시계조차 없어 몇 시인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눈앞에는 사용감이 짙은 책상이 보였고, 몸은 의자에 앉아 있는 듯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몸이 느리게나마 움직였다. 여전히 머리가 울리는 것으로 보아 어디에 맞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오르가 손을 들어 제 양손을 살피자, 손목에 채워진 족쇄가 보였다. 이번에도인가. 그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지만.
이런 일은 저번에도 겪었다. 침착해.
그는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는 쨍한 빛을 비추는 등이 보였다. 그 옆으로 시선을 옮기자, 먼지만 가득한 거미줄이 구석에 자리한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아 생각했다. 이번에도 신살자의 건물에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족쇄가 그래도 마력을 보는 것까진 방해하지 못해서 다행인가. 오르가 다시 눈을 뜨고서 손을 몇 번 움직였다. 족쇄는 보기와 다르게 무겁지는 않았다. 아마도 신형인 듯했다. 그걸 바라보는 중 문득 든 생각은 그나마 양쪽이 사슬로 연결된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한참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말을 걸었다. 오르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그러나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그를 반겼다. 몇 번이고 마주쳤던, 흑단 같은 머리와 칠흑빛의 눈…. 그 신살자였다.
“…대체 내게 이러는 목적이 뭐지? 날 쫓는다고 해도 이득은 없을 텐데. 저번부터 대체 왜….”
뭐라 말하든 죽일 의도는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르가 질문을 꺼내자, 그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소개라도 하려는 듯한 말을 뱉었다.
“여기는 신살회 지부 중 하나입니다. 아, 이 정도는 아시겠군요.”
비아냥이 섞인 듯한 말투에 오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두 사람이 반대되는 인상을 한 채 서로를 쳐다봤다. 오르의 표정에도 미동이 없던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였다. 그렇게 잠시간 침묵이 돌았다. 공기가 점차 묵직해져 종극에는 숨이 막히려던 차에 그가 입을 다시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할까요. 오르 탐정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신살회에 협조하시죠.”
예전으로 돌아간다니. 오르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는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그러자 눈앞의 이가 흐음, 하는 소리를 짧게 내며 그에게 어서 대답해 보라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르는 책상만을 쳐다보다, 무거운 고개를 다시 한번 들어 올리며 그와 눈을 마주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협력한다 쳐. 그런다 해도 내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는 잠시 제 턱을 문질렀다. 당신에 대해서 꾸준히 조사했다는 말과 함께,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득에 관해서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그 짧은 한마디를 내던지고는 등을 보였다. 오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이, 그는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
“마도구를 써 봐도 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잖아요. 이제 어떡할 거예요? 탐정님이, 탐정님이 절 기다리고 계실 텐데….”
트리니티는 주먹을 꽉 쥔 채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제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채로 식은땀을 흘리던 트리니티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눈을 흘긋 뜨며 허주를 쳐다봤다. 허주는 그사이에도 아무런 말 없이 트리니티가 다시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트리니티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다시 말했다.
“죄송해요…. 기껏 도와주시기로 했는데. …하,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정말이지….”
허주가 손을 대려는 순간, 트리니티가 확 가라앉았다. 시선을 아래로 해 보니 쭈그려 앉은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허주는 허공에 손을 둔 채 할 말을 골랐다. 잠시 침음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진정해.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다른 방법도 있을 거야.”
그런 말을 하면서도, 끝 문장을 좋게 끝내지는 못했다. 이 정도의 실력자일 줄은 몰랐는걸. 허주는 제 목덜미를 쓸며 중얼거렸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사람들이 때로 그들을 흘긋 쳐다봤으나, 둘 중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지나갔다. 그 느낌에 문득 귀가 간질거렸다. 트리니티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익숙한 낯과 눈이 마주쳤다. 봄보다는 가을이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릴 법한 복장. …단테였다. 그를 본 순간 트리니티는 발을 세게 구르며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단테가 가만히 선 채로 그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 트리니티는 검지로 그의 가슴팍을 누르려다 말고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입을 한참 열었다 닫던 그는 결국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연락했으면 제때 오란 말이에요…!”
제 가슴팍에 이마를 댄 채 기댄 트리니티의 모습에, 단테는 입을 닫고서 등을 몇 번 토닥였다.
“대체 무슨 일인데 급하게 오라고 말한 거야? 물건 사려고 한 것도 그냥 제치고 왔다고.”
행동과 달리 별로 진중하지 못한 물음이었다. 트리니티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뒤로 확 물러나고서 투덜거렸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기라도 한 듯 눈가를 손가락으로 슥 닦아 내더니, 팔짱을 낀 채로 발을 탁탁 굴렀다. 드디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셨구만. 단테는 트리니티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서 카디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뒤로 몇 분가량 트리니티의 설명이 이어졌다. 단테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듣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탁 튕겼다. 그에 트리니티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단테를 바라봤다. 단테는 왼눈을 찡긋 감았다 뜨며, 조금은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그러면 근처의 신살회 지부 건물로 들어가 보면 되는 거 아냐? 바깥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댔잖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안에 있다는 거 아니겠어? 그걸 중점으로 추적해 보자고.”
잠시 두 사람의 말이 없어졌다. 트리니티가 눈썹을 찡그린 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자, 대신 옆의 허주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들키기 쉬워질지도 모르는데…. 아니다. 너무 간단한 답이라 생각하지도 못했네. 일단 근처에 건물이 있는지부터 찾아보는 게 낫겠어.”
허주가 트리니티의 얼굴을 흘끔 쳐다봤다. 멍을 때리는 듯한 얼굴이던 트리니티는 일순 정신을 차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머뭇거리던 허주는 끄덕임에 다시 제 두루마기의 안쪽을 뒤적였다.
***
달칵. 할 말을 정리해 왔다는 말과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무거운 발소리가 바닥을 촉매로 퍼졌다. 오르가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는 오르의 앞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입을 열기 전, 짧게 한숨을 내쉬던 그가 천천히 서두를 떼었다.
“우선 뒤늦게나마 제 소개를 해 보죠. 저는 이브, 이 신살회의 신살자이자… 흠. 쉽게 표현하자면 간부 중 하나겠군요. 저희끼리는 그렇게 부르진 않습니다만, 아무튼.”
오르는 말 없이 이브의 소개를 들었다. 그의 무반응에도 이브는 말을 이었다.
“이유를 말하기에 앞서, 이전의 일들에 대해선 사과드리죠. 그리고, 당신에게 득이 된다는 부분은… 사실 별거 없습니다.”
그가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는 말을 덧붙였다. 오르는 저도 모르게 깍지 낀 양손에 힘을 주었다. 책상 아래로 불안을 흘리려 애쓰던 찰나, 이브가 일어서며 한 손으로 책상을 가볍게 쳤다. 반복되는 삶이 지겹지 않습니까. 저희가 끊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 말을 남기면서.
“잠깐, 일단 생각할 시간을 좀….”
오르가 이마를 짚으며 책상에 기댔다. 이브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의자를 조용히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리죠. 짧게 말을 남긴 그는 생각 정리가 끝나면 부르라며 다시 문밖으로 사라졌다.
사실이라면 기회일지도 몰라. 하지만… 거짓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기겠지. 오르의 생각이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떠나는 것에 트리니티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분명 큰 실망을 하겠지. 제 조수를 떠올리니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그 덕분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나는 대체 무얼 위해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이 그의 머리를 맑게 했다.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내 사정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문제들이 저들의 도움 하나로 쉽게 해결될 리 없다.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오르가 생각을 마치고 일어서 문을 노크하려던 그때 문이 열렸다. 이브와 오르의 시선이 교차했다. 오르가 뒤로 살짝 물러나자, 이브는 조용히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 정리는 끝나셨습니까.”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사방에서 진동이 느껴지더니, 어디선가 큰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진동에 오르가 비틀거렸다. 이브가 의아한 표정으로 진동의 근원을 향해 발을 옮기려던 차에….
눈앞에서 벽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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