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시인(詩人)
말 그대로 하찮은 시인이긴 하지만,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자부해 두지.
틱, 틱…. 몇 번의 마찰음 끝에 불이 피어올랐다. 오르는 고개를 숙여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홧홧한 연기가 입안을 맴돌았다. 이윽고 연기를 내뱉자, 트리니티가 연기 아래로 다가왔다. 그리 다가오며 지은 표정은 의문에 찬 표정이었다.
“탐정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해서요. 그래서 말인데, 여기 주변이라도 둘러볼까 봐요. 그러면 기억이 좀 떠오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오르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그가 한참 뒤에서야 고개를 끄덕이자, 트리니티는 금방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오르가 다시 한번 연기를 뱉어내고, 그 재를 바닥에 떨구는 사이 누군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 사이로 쥔 담배를 내보였다. 아래로 땋아 묶은 쪽빛 머리를 한 그의 표정은 어쩐지 친근했다.
라이터 기름이 떨어져서 말이야. 불 좀 빌릴 수 있을까? 그런 물음에, 저도 모르게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각진 안경 뒤의 보랏빛 눈이 싱긋 접혔다. 그는 오르의 옆에 서서 연기를 후, 내뱉었다. 오르는 순간 저도 모르는 오랜 친구가 있었나 고민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지만.
“카발라 사무소의 오르. 맞지?”
그는 오르의 답을 듣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 신전에서 모신다는 신, 니세우스를 찾고 있는 모양인 것 같던데. 오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관계자인 건가? 그렇게 생각해 보기도 했으나, 그에게서는 종교인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르는 괜스레 고개를 끄덕였나, 같은 생각을 했다.
“잘됐네. 그렇다면 나와 임시로 협력하는 건 어때?”
오르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 이유 없이 돕겠다 하는 이들은 필히 위험한 인물인 법. 심지어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기에, 더더욱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오르의 표정을 읽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덧붙였다. 나도 나름 사정이 있거든.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웃음기를 거두고서 말을 이은 걸 보자니 거짓은 아닌 듯해 보였다. 그는 담배를 바닥에 떨구곤 발로 짓누르며, 제 붉은 목도리를 정돈했다. 그러고는 양손을 탁탁 털고서 한 손을 내밀었다. 당당하게 뻗은 손을 보자 저도 모르게 악수할 뻔했다.
“나만 너를 알고 있으니 불공평한 것 같아서. 시인, 단테야. 말 그대로 하찮은 시인이긴 하지만,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자부해 두지.”
단테가 어서 악수하라는 듯 손을 더욱 펼쳐 보였다. 오르는 결국 제 담배를 바닥에 던져 짓밟아 끄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자마자 단테가 반갑게 흔들었다. 어쩐지 오르의 머리가 울리는 듯했다. 탐정인 내가 고작 시인 한 명에게 휘말리다니. 조금은 수치심이 몰려오는 것도 같았다. 단테는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걸로 협력 관계 성립이네. 잘 부탁한다고, 카발라 사무소의 탐정님. 그런 말을 내뱉자, 오르는 큰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속으로 피해를 볼 게 무엇이 있겠냐며 중얼거리곤, 그 한마디로 답했다.
“탐정님, 저 왔어요. 여기 근처를 다 둘러보고 왔는데도 기억이 잘 안 나서 포기했…. …옆의 그쪽은 누구…?”
뒤늦게 합류한 트리니티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보아도 능글맞기만 한 단테의 인상이 영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단테는 그 반응에도 마냥 웃으며 ‘여어.’ 같은 말을 내던지며 손을 흔들었다. 트리니티는 그의 손짓을 보자마자 팔짱을 꼈다. 기가 찬다는 듯 ‘하아?’ 하며 숨을 세게 내뱉었다. 반쯤 째려보는 눈으로 시선을 오르에게 향하자, 오르는 시선을 피했다. 그가 시선을 다시 마주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시인, 단테라고 하더군. …일단 우리와 임시로 협력하기로 했다. 인사해라, 트리니티.”
트리니티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단테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탐정님을 돕겠다고요? 날카로운 말투로 물었다. 높은음의 콧소리를 내는 것이 인정 못 한다는 뜻으로 보였다. 단테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트리니티는 제 눈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허튼짓 못 하게 지켜볼 거예요. 단테는 그저 장난스럽게만 웃어 보였다.
오르는 둘이 투덕거리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 문득 신전 쪽을 바라보았다. 예배 시간, 슬슬 끝났으려나. 그가 확인차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자, 마이나스와 마주쳤다. 마이나스는 놀란 탓에 발을 헛디딘 듯 뒤로 미끄러졌다. 오르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간신히 일으켰다. 괜찮나? 그런 질문에 마이나스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웃어 보였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감사한 사람치고는 제법 사무적인 말투였다. 그는 잠시 옷매무새를 다듬듯 툭툭 털더니,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종이는 반듯하게 2번 접혀 있었다. 마이나스가 받으라는 듯 종이를 흔들자, 오르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지끈. 종이를 받았을 때 문득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르가 의문감에 마이나스를 쳐다보자, 마냥 싱긋 웃는 얼굴과 마주했다. 이제부터 그 종이는 당신만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나의 신을 찾아 줄 탐정님. 저는 신도들을 관리해야 해서.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죠. 마이나스는 인사를 끝으로 바로 들어가려 했으나, 단테와 눈이 마주쳤다. 단테는 천연덕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 저 탐정님의 다른 동료 분이신가. 마이나스는 그리 생각하며 마저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에서야 오르는 이마를 짚었다. 지끈거림이 잠시 이어지다가, 한참 뒤에서야 물러갔다. 트리니티가 걱정하는 얼굴로 그의 곁에 다가갔으나, 오르는 괜찮다는 듯 손짓했다. 트리니티는 끄응,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종이를 펼쳤다. 그가 말했던 대로 일종의 지도로 보였다. 그리 많은 정보가 담긴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정도면 현장으로 갈 수 있을 듯했다. 단테는 옆에서 종이를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에서는 아무리 보아도 지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휘갈겨 쓴 낙서라고 부르는 편이 맞는 듯해 보였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아무래도 마이나스라는 교주 덕분인 것 같네. 이야, 대단한 능력자시구만. 어이, 탐정님. 뇌 조심하라고. 그 교주가 무슨 짓을 했을지 어떻게 알겠어? 이걸 볼 수 있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도 건드렸을지.”
단테가 옆에서 떠들어대자, 오르는 애써 무시하며 잠시 종이를 지켜보았다. 잠시 뒤, 그는 라이터를 들어 종이를 태웠다. 종이의 전부가 완전한 재가 되고 나서야,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만 출발하지. 트리니티는 그 목소리에 익숙하게 뒤를 따랐다. 잠깐, 나 두고 가지 말라고! 단테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따라갔다.
지도에 적힌 장소에 도착한 것은 걸어서 30분 뒤쯤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장소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금빛으로 물든 공원으로 보였다. …잠깐. 황금빛? 오르가 급하게 달려가 바닥의 잔디를 매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자 잔디를 감싸던 황금이 바스러지며, 금가루를 공기 중으로 흩뿌렸다. 그 속에서 푸른빛의 잔디가 그제야 드러났다. 오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눈부신 황금이 사방으로 깔려 있었다. 전부 하나같이 황금으로 뒤덮여 있던 것이었다.
조만간 켜져야 할 가로등, 나무를 오르던 다람쥐, 공원을 산책하던 사람. 모든 게 전부 황금으로 뒤덮여 있었다. 생명체들이 죽은 상태라기에는 그들의 마력이 잔존한 상태가 아니었다. 온전히 담겨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산 채로 냉동 보존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오르가 제 입을 틀어막자, 트리니티는 그에게 달려가 등을 두드렸다.
탐정님, 괜찮으세요? …잠깐 눈 좀 감고 계세요. 안경 잘 쓰고 계시고요…. 트리니티가 그를 간신히 의자에 앉혔다. 오르는 앉자마자 큰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위로 했다. 단테는 팔짱을 낀 채 오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평소에도 자주 이러는 모양인가 봐? 탐정 나으리는.”
트리니티는 눈썹을 찡그렸다. 꼭 고양이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소리 같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래요, 우리 탐정님이 허약해서 참 미안하게 됐네요! 이해 좀 하라고요, 탐정님은 늘 마력을 감지하면서 사시느라 항상 이러신단 말이에요. 보는 것뿐만 아니라, 느끼기도 한다고요. 뭐, 당신은 그 느낌을 모르겠지만.”
단테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런 거라면야. 그는 그 뒤로 별말을 얹지 않았다. 단지 오르의 근처를 맴돌며, 자신의 메모장에 무언가를 만년필로 적고 있을 뿐이었다. 트리니티가 중간중간 무엇을 적는지 보려 했으나, 시적인 문구 몇 자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오르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눈을 떴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땅을 박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도록 하지. 나 때문에 지체되게 할 수는 없다. 그는 잠시 비틀거리는 걸음을 보이다, 점점 똑바로 걷기 시작했다. 트리니티는 단테를 째려보다 말고 오르에게 달려갔다. 정말이지, 탐정님! 무리하지 마시라니까요! 걱정 어린 잔소리가 이어지자, 오르는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단테는 둘을 쳐다보며 느긋하게 뒤를 밟았다.
걸음을 내디뎌 안으로 향할수록 와인 향이 짙어졌고, 모든 것을 둘러싼 황금은 더욱이 빛났다. 이곳에는 신이 있었다. 그런 생각이 반드시 들게 만들 정도였다. 오르는 점점 짙어지는 와인 향을 따라, 그리고 점점 밝아지는 황금빛을 따라 움직였다. 깊이 들어갈수록 느껴지는 불안감을 무시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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