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보금님 커미션(2)

2019.10.28

그리 멀지는 않았다. 몇 걸음 더 쫓아 걷자 나무 그림자가 확 걷히고 시야가 트였다. 그리고 가운데로 나 있는 오솔길이 보였고 그 주위로 제철의 풀꽃이 만발했다. 희고 노랗고 푸른, 또는 붉거나 보라 기운의, 분홍빛의. 점점이 찍혀있는, 선을 그리는, 다발로 묶인 형태들이 바람에 한들거렸고 홀로 톡 튀어나오거나 무리를 지어서 군락을 이룬 것들이 지금 그들이 선 이곳부터 저기 능선까지 펼쳐져 있었다. 레이피스는 잠깐 발을 멈췄다.

 

이런 것을 본 지 얼마나 되었더라?

 

“멋지지?”

 

레이피스를 안내하던 엔리카가 돌아보며 물었다.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레이피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엔리카는 그 모습을 보고 활짝 웃었고 몇 걸음 크게 앞서 걷다가 쪼그려 앉아 작은 풀꽃을 매만졌다. 레이피스는 천천히 뒤따라가며 간만에 주변에 피어나는 작은 것들에 대해 떠올렸다. 오랫동안 머물러서 보아야 보이는 세계, 머릿속에 새겨두기에는 세심한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들. 하는 것, 부표식물처럼 떠돌아다니느라 한동안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던 것들. 엔리카의 바로 뒤까지 가서 다다르고 매만지는 풀꽃을 보았다가 돌아보는 엔리카의 눈과 마주칠 때까지.

 

“목적지까지는 좀 더 남았어. 가볼까?”

 

엔리카가 싱그럽게 물었다.

 

“그래.”

 

레이피스는 감상에서 빠져 나와 부드럽게 답했다.

 

그리고 곧 오르게 된 능선은 가팔랐다. 무척이나. 들의 광경에 부드러워졌던 마음이 어째 배신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엔리카가 미리 말했던 대로 그렇게 길지는 않은 구간이었다. 그렇지만 직접 경사길을 걸으면서 과연 짧으니 별것 아니라고 여유롭게 생각하기는 힘든 법이다. 엔리카는 이따금 돌아보며 레이피스의 안색을 살피다가 난처하게 웃으며 달랬다.

 

“정말로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돼.”

 

후회가 약간 치솟았지만 돌아가기는 늦은 감이 있었다. 숨이 가빴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쯤 바람이 갑자기 거세게 바뀌기도 했다. 정말 정상에 다다랐다는 듯.

 

능선을 전부 오르고서 저마다 숨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엔리카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여기야.”

 

당장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엔리카가 손짓을 했다. 따라 걸으니 지형이 구처럼 둥글어서 몇 발자국을 내딛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확 달라졌다.

 

넓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세게 불어닥쳤다. 해가 비쳐서 자연히 눈을 가늘게 뜨게 되었다. 작게 뜬 눈 사이로 아래의 광경이 비쳐들었다.

 

훗날 돌이켜보건데 아름다웠는지 근사한지 멋있었는지 그런 감상은 느껴질 못했다. 숲과 산이 많은 동네였는데도 자연을 보러갔음에도 그런 것이 눈에 확 들어오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그때 든 생각은.

 

“이 마을에 이렇게 생겼는지는 처음 알았어.”

 

이사 오고 방학이 지났으니 대략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학교에 며칠 다닌 것과 집 주변의 편의점 등만 오갔던 것 같다. 딱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다. 언제부터 주변에 대한 호기심이 매몰되었을까?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던 이 동네가 축소된 채 흘러가고 있었다. 없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왠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었는데도, 자신이 살아가고 있어서. 레이피스는 건조하게 한 번 더 내뱉었다.

 

“..... 처음 보는 광경이야.”

“맞아, 여기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지?”

 

엔리카가 옆에서 박수를 딱 쳤다. 한 달이나 지났지만. 레이피스는 속으로는 그리 생각했으나 내뱉지는 않았다.

 

“약간 늦었지만,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해.”

 

엔리카는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다듬어서 귀에 걸며, 아래의 광경을 발치에 둔 장소에서 레이피스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이 장소에 대한 환영, 환대. 그 전에도 들었던가? 처음인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순간 엔리카의 말과 모습은 선명하게 앞에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레이피스가 이곳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을 알자 엔리카는 레이피스에게 이곳의 다양한 것들에 대해 안내해주었다. 아래의 광경이 지도를 대신했다.

 

“저기에는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어. 이 학교에서 가을마다 걷기 행사를 하거든. 그때 지나게 될 거야.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그때는 코스모스가 길 주위에 쭉 들어선 길을 걷게 돼. 하하, 걷는 애들은 힘들다고 안 좋아하지만.”

“저기 동떨어져 있는 건물은 카페인데, 분위기가 좋아. 주인분도 친절하게 잘 대해 주셔. 나는 그곳에서 파는 말차를 좋아해. 시험 기간에 독서실은 꽉 차고 시내의 카페도 자리가 없어지는데 그때 저곳으로 가면 자리를 잡을 수 있어.”

“저쪽은 온통 논밭이지? 차가 없고 평탄해서 자전거 타고 달리기 좋아. 이곳은 자전거도로 같은 것이 별로 놓여있지 않거든. 그래서 논길을 이용하게 될 때가 많아.”

 

레이피스는 말없이 들었다. 알 필요가 없을 줄 알았다. 친근하게 느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엔리카는 손을 뻗어 하나하나 짚었다. 엔리카는 이곳이 제 고향이라고 했고 자신이 살아온 곳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자신을 위한 열성적인 태도에 귀담아들으려고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어서,

 

“내가......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레이피스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때 엔리카는 팔을 거두고 레이피스를 오래 보았다. 그건 진지한 표정이었다. 곧이어 엔리카는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한번 가보자. 여기에서 소개했던 장소들 하나하나.”

“......가보자고?”

“네가 괜찮다면. 시간이 뺏길 것 같다거나 싫다면 별수 없고. 하지만 원한다면 같이 가보자. 이곳의 지리도 익힐 겸 말이야.”

레이피스는 고민해야 했다. 쉽게 승낙할 수가 없었다. 시간의 소모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이 낯선 장소를 정말 알아가고 싶은가? 익숙해져도 괜찮을까?

 

엔리카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말했다.

 

“놀 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을 거야. 어때?”

 

엔리카가 오면서 보여준 풀밭이 떠올랐다. 아까의 환대가 선명하게 느껴졌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래서인지 여기 있는 동안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고 마음의 저울이 툭 기울어졌다. 레이피스는 그와 함께 고개를 기울이며 끄덕였다.

 

“정말 고마워. 잘 부탁해.”

 

제안을 받은 것은 레이피스인데 엔리카는 자신이 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그제야 그 동네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레이피스는 숨을 크게 들이키고 좀 더 넓은 시야로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엔리카?”

“응?”

“저건 뭔지 알아?”

“어디를 말하는 거야?”

“저쪽 가장 끝, 지평선 가까이에 말이야. 흰빛이 일렁이는 것.”

 

엔리카는 손차양을 드리우고 레이피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아하, 그 방향이라면, 네가 본 것은 바다일 거야.”

“바다라고?”

 

레이피스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주위를 많이 쏘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다가 근처에 있음을 알려줄 표식 같은 것은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응, 그쪽에는 바다가 있어. 흰빛으로 보이는 것은 햇빛이 반사되어서 그럴 거야.”

“뭔가 신기하다. 이 근방에 바다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그렇지? 조금 멀기는 있기는 해. 그렇지만 가려면 갈 수 있어. 외곽으로 향하는 버스가 있거든? 그걸 타고 쭉 가다가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거든.”

 

둘은 희고 반짝이는 것을 같이 한참 지켜보았다. 흰 신기루 같기도 했다. 엔리카가 스치듯 말했다.

 

“언젠가 바다도 한번 같이 가보자.”

 

그리고 그들은 다시 먼 곳을,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해가 기울어지도록 장소를 고르며 마음속에 담았다.

 

그리고 학기가 천천히 흐르는 동안 엔리카는 레이피스를 데리고 제 고향에 대해 이리저리 안내해주었다. 날이 좋고 방과후가 없는 날이면 전에 말했던 산책로를 걸었다. 코스모스는 아직 피지 않은 대신 금계국이 좌우로 잔뜩 피어나 길가를 메우고 있었다. 과제가 생긴 날에는 전에 엔리카가 말한 카페에 가서 찬 음료를 시켜놓고 두어 모금 마시며 글자를 사각거리다가 얼마나 썼냐고 서로를 넘겨보았다. 무엇을 더 추가로 쓸지 같이 고민해보며 떠올려보자고 이야기를 텄다가 다른 길로 빠져 대화하기도 했다. 덕분에 얼음이 녹을 만큼 한참을 떠들다가 다시 집중해야 했다. 또 다른 날은 엔리카가 자전거를 끌고 왔다. 그 날은 함께 논길을 달리게 되었다. 자전거가 한 대뿐이었으므로 같이 탔다. 엔리카는 제 자전거에 두 명을 태워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면 약간 걱정했었다. 그러나 페달을 힘차게 밟자 자전거는 멋지게 굴러갔다. 체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고 텅 빈 논길을 거칠 것 없이 달렸다. 크고 네모난 한 바퀴를 멋지게 완주하고 둘은 하이파이브를 했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렀다. 레이피스는 이 동네에 대해서 꽤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자리는 다시 바뀌었고 두 번이나 짝이 되는 우연이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이피스와 엔리카는 많이 친해져 있었다. 짝이 아니더라도 서로 마주치면 인사를 건넸고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둘은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처음 같이 보았던 푸르던 잎들은 화려하게 물들어 있었다. 엔리카는 변함없이 그 광경에 눈길이 쏠리었다. 다만 이제는 혼자만의 감탄이 아니라 레이피스와 감상을 나눈다는 것이 달라져 있었다.

“아름답다.”

“그러게 말이야.”

“가을이 되면 이리 색이 변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아?”

 

엔리카가 창틀에 팔을 얹었고 레이피스가 느슨히 웃으며 답했다.

 

“원리는 알지만, 그래도 직접 보고 있자면 신비롭지.”

“엽록소 아래 저런 색이 있었다니. 뭔가 믿겨지지 않아.”

“아, 노란 계열 말하는 거지? 붉은 계열은 가을에 붉은 색소가 만들어지는 것이래.”

“맞아, 그랬지. 그 색소 이름이 뭐였더라.”

“너희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지나가다 잠깐 끼어들어 대화를 듣던 친구 하나는 질린 표정을 하였다.

 

“이 수업이 아닌 신성한 시간에 그런 이야기라니. 너희는 나란히 원예부로 내쫓아야 해.”

 

팔짱을 낀 채 늘어놓는 말이 다분히 과장된 어조인지라 둘은 웃었다. 지금은 동아리 활동 시간이었고 그러나 동아리에 든 사람이 소수였고 나머지는 교실에서 합법적으로 노닥거릴 수 있었다. 그리고 레이피스가 물었다.

 

“이 학교에 원예부가 있어? 꽃밭은 보았는데.”

“아니, 없어. 안타깝게도. 꽃밭은 관리인분께서 따로 관리하시더라.”

“그래 정말 안타깝다. 너희를 내쫓지 못한다니.”

 

그러는 한탄은 확실히 빈말이었다. 엔리카는 친구에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식물을 키우고 가꾸는 것은 다르지. 좋아한다고 다 같은 게 아니지. 식물을 키우는 것은 지속적인 관심과 손길, 그리고 책임이 필요하다고. 아무렇게나 한데 묶어서는 안 되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니까?”

 

엔리카는 원칙에 지나치게 메여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필요할 때 그것을 꺼내 들어 상대를 가볍게 골리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원리원칙의 ‘ㅇ’만 나와도 질색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효과가 있었다. 엔리카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하자 그 친구는 귀를 막았다.

 

“으아아악. 안 들어, 안 들어!”

 

레이피스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무언가 문득 툭 마음에 걸렸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 식물을 기르는 것. 좋아하는 것,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 보는 것, 하지만 그 이상은.

 

...... 레이피스는 집에 화분을 놓기가 어려웠다. 잦은 이사 때문이었다.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무언가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제 속은 비어 있어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아니, 옛날이 아니다. 지금도 그러하지 않은가? 이 장소가 빠르게 익숙해지는 바람에, 근래에 즐거운 일이 많았던 바람에 잠시 잊었나? 지금이라도 상기하면 된다. 그렇지만,

 

레이피스는 아연한 불안에 휩싸였다. 그런데 무엇에 관한 것인지 선명하게 잡아내기 어려웠다.

 

“너희는 진짜 다음 해부터는 나무 관찰부라도 만들어서 쫓아내야 해! 내가 건의라도 넣어줄게!”

 

친구는 여전히 귀를 막은 채 소리를 질렀고 엔리카는 웃었다. 그리고 레이피스를 돌아보았고 레이피스는,

불안을 누르고 같이 웃어버렸다. 굳이 지금 꺼내보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바람이 휙 날렸다. 낙엽 잎들이 우수수 날렸다. 느닷없이 떨어지는 잎과 함께 가을이 흘러갔다.

*** 

“겨울 바다가 아름답대.”

 

어느덧 추운 겨울이 되었다. 레이피스가 이곳에 온 후로 처음 맞는 겨울이기도 했다. 둘은 하얀 숨을 뱉으며 같이 걸어가는 중이었고 엔리카가 그런 말을 꺼냈다. 그리고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가보고 싶다.”

“나도.”

“춥기는 하겠지만.”

“바람이 세다고는 들었어.”

“단단히 입으면 괜찮지 않겠어?”

“학교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겠지?”

“그렇지.”

“맞네.”

“응.”

 

 

엔리카와 레이피스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시험기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말고사가 며칠 안 남아있었다. ‘야, 오늘부터 하루에 두 과목씩 잡으면 딱 떨어진다.’ ‘너 며칠 전에는 하루에 한 과목씩만 잡으면 완벽하다고 했으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뭐했냐?’ ‘이제 그거 하루에 세 과목씩 잡으면 된다로 바뀐다’ ‘이번 시험 조졌다. 내가 제대로 조져진다.’ ‘영어쌤 시험 범위 제정신이야? 이걸 어떻게 해?’ ‘나 그래서 영어 버리려고.’ ‘시험 범위가 교과서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수학보다는 낫지 않냐?’ ‘수학은 원래 버리고 가는 거고.’ ‘오늘부터 밤샌다. 카페인 제일 많이 들어간 음료가 어떤 거였지?’ ‘이번 시험 시간표 왜 이리 개판이지? 장난하나, 막날 과목들 버리라고?’ 따위의 말들이 다소 과격한 어휘와 함께 오갔다. 그들의 대화는 다소 정신이 나간 것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이는 시험으로 인한 압박감과 더불어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었다.

 

엔리카와 레이피스는 비교적 온건한 어휘를 사용하고 시험을 버린다고 말하지 않으며 성실하게 준비를 하는 부류였지만 그들이라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방금까지 방과 후 추가 자습시간에 매여 있다가 풀려났는데, 머리를 잔뜩 써서 공부했던 것의 여파로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아무 말이나 나누게 된 것이다. 하필 바다인 것에는 약간의 도피 심리도 한몫했다.

 

“가본 지 오래되었는데.”

“얼마나 되었어?”

“4년 전에, 가족들이랑 갔었어.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 오래되었네.”

“그곳은 어때?”

 

그래도 밖으로 나와서 마주하게 되는 찬 공기가 빠르게 머리를 식히고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레이피스는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약간 털어내고 물었다. 엔리카는 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상하는 기색이 눈에 어렸다. 한참 생각하는 듯 보이다가 입이 떨어졌다. 머금은 흰 숨이 다시 한번 퍼졌다.

 

“대개 하늘이 희거나 회색이고 바다는 어두운 푸른색인데 그 때문에 세상이 깔끔한 무채색으로 보였어. 눈이라도 내린 날에는 더욱 그렇게 보이고. 탁 트여있지만 동시에 텅 비어서 황량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 그렇지만 그것이 뭔가 마음에 들어.”

 

평소에 엔리카가 선호한다고 생각했던 광경과는 다른 분위기의 것이었다. 레이피스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차분하고, 고요하고. 찬 공기가 뭔가 사람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마음도 정리해주는 것 같고.”

 

부정적인 것을 늘어놓았다고 생각했는지 엔리카는 덧붙였고 머리를 긁적이며 슬며시 웃었다.

 

“말로만 전달하려니까 설명하기가 어렵네.”

“그럼, 엔리카 네가 괜찮다면 직접 안내해 줄 수 있어?”

 

레이피스가 물었다. 엔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엔리카 네가 가고 싶다고 했잖아. 그리고 저번에 언젠가 가보자는 말도 했었고.”

 

기억이 여름날의 뒷산의 정상에 올랐던 그날을 스쳤다. 엔리카는 눈을 깜박이다가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구나.”

“응. 그때 가보자고 했던 장소 중에 바다에만 못 가봤기도 하고.”

 

레이피스가 계면쩍게 웃었다. 그리고 정식으로 제안했다.

 

“같이 겨울 바다에 가보지 않을래?”

 

어디론가 가자고 레이피스가 제안을 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약간 긴장되었다. 엔리카는 스스럼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함께 가보자. 기대된다.”

 

레이피스가 환한 표정이 되었고 엔리카도 들뜬 듯 경쾌하게 걸었다. 그런데 몇 발자국 채 안 되어서 기운이 빠진 듯 다시 발걸음이 느려졌다.

 

“일단 시험은 끝내고서야 가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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