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연성

보금님 커미션(1)

2019.09.26

그즈음은 학교에 있는 중 가장 자유로운 나날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은 아직 되지 않은 시점. 수업은 없고, 선생님들은 바빠서 교무실에 박혀 있다가 성적 확인하시러 잠깐 들리고 다시 가신다. 그러니 나머지는 해방의 시간이었다.

 

해방이라니, 이것들아. 자습이야, 자습!”

 

지나치게 신나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핀잔을 던졌다. 학생들이 그 말을 순순히 들을 턱이 있겠는가? 시험에 억눌려 있다가 이제야 해방이 되었는데? 아이들은 흘려들었고 선생님도 농담처럼 남긴 말이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학생들의 열정을 식혀주기라도 하듯이 비가 왔다. 긴 장마의 시작이었다. 나가서 뛰어놀지 못하는 학생들은 기분이 빠졌고 뛰어놀 생각이 없는 학생들도 비를 헤치고 등하교하는 것을 성가셔했다.

 

이럴 거면 방학을 일찍 해버리지 왜 잡아둔대?”

그러게 말이야.”

 

아이들의 쉼 없는 투덜거림에 엔리카는 조용히 웃었다. 학교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입장이었지만 괜히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아이들의 싫어하는 마음도 안다. 아이들은 궁시렁거렸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출석해서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거나 게임을 하거나 단체로 영화를 보았다. 엔리카는 때론 그 사이에 끼었고 가끔은 빠져나와 혼자 책을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어느 날이었다. 등교 시간은 지나고 수업은 없는 1교시에 담임선생님이 문을 열더니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얘들아, 잘 놀고 있냐?”

선생님이 왜 들어오세요?”

내가 너희 담임선생님이거든? 너희들 조례는 해야 하지 않겠냐?”

 

에에에, 아이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이번 주 내내 조례를 건너 뛴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익숙하게 받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담임선생님은 아이들과 친근하게 어울리는 분이셨다.

 

너희들이 그렇게 조례를 좋아하는 줄 몰랐네. 그럼 앞으로 자주 들어와야겠네?”

 

아니거든요! 아이들은 아우성으로 받아쳤다. 그러자 선생님은 뭘 숨기고 있기에 자기가 들어오는 걸 이렇게 싫어하냐고 의미심장한 척 말했다. 엔리카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가 우연히 복도로 난 창문으로 밖을 보게 되었다. 교실 밖 복도에 누군가가 있었다. 다른 교복을 입고 있는 처음 보는 이었다.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떠나지도 않으며 가만히 서 있는 그는 음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유쾌한 이야기가 오가는 교실 안과 대조적이었다. 그 동떨어진 모습이 여기에 속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실은 너희에게 알릴 중요한 소식이 있다.”

 

농담이 끝나자 선생님은 그제야 용건을 꺼냈다.

 

들어오렴.”

 

이어 그가 들어왔다. 쑥스러워하거나 겁을 먹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까와 같이 어두운 인상은 아니었다.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엔리카는 아까 보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크게 이름을 적었다. ‘레이피스 팬케일

 

전학생이다. 시기가 시기지만 이렇게 되었어. 앞으로 잘 지내보자, 레이피스. 자기 소개 해보렴.”

 

레이피스는 담담하게 교실에 시선을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 나이, 전에 다니던 학교, 이사를 하게 되어 전학을 오게 되었다는 사정. 소개가 익숙하기라도 한 듯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곧 다가올 방학에 떠날 준비를 하는 학생들, 활기가 가라앉고 어수선하게 웅성거리다가 잠시 그친 말소리, 흐린 하늘과 어두운 교내,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리는 비. 레이피스는 그 사이에서 자신의 외적인 정보들에 관해 말했고 모든 소개의 마지막이 그렇듯 잘 부탁한다고 덧붙이며 입을 닫았다. 레이피스의 전학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

 

그리고 곧장 방학이었다. 며칠 정도의 간격은 있었지만 레이피스가 아이들 사이에 섞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새학기가 시작되면 관심이 우르르 몰리는 전학생도 아니며 친근한 재학생도 아닌 어중간한 이가 될 것이다. 레이피스는 그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항상 전학을 이런 시기에 다닌 것은 아니었으나 비정기적인 간격으로 여러 번 전학을 다니다 보면 그런 시기도 꽤 걸렸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외출하였고 집에는 그 혼자였다. 레이피스는 낯선 제 집에서 틀어박혀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끝없이 내렸다. 아스팔트 바닥 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흡수되지 못하고, 모든 곳이 빈틈없이 매끄럽고 고른 곳이어서 고이지도 못한 채 헤매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곳에 떨어진 빗방울, 고이게만 하다가 곧 배수구로 꿀렁꿀렁 넘겨버릴 아스팔트 바닥. 레이피스는 그 광경에서 묘한 동질감과 쓸쓸함을 느꼈다.

 

-나는 속이 빈 채로 태어났다.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무엇도 머무르게 할 수 없는.

 

그가 그 자신을 정의 내린 문장이었다. 그것은 한순간의 충동이 아니었다. 오래 떠돌면서 차근차근 쌓고 적립시켜온 생각이었다. 머물지 못하는 자신이 무엇을 머무를 수 있게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칼같이 날을 세우며 상대의 접근을 막는 부류는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하고 온화한 이었다. 상대의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대신 친근하고 다정하게 행동하며 무난하게 섞이는 사람이었다. 따스하고 잔잔한 물결처럼.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나 마음의 깊은 곳에는 묵직하고 어두운 심해 같은 허무가 있었다. 그는, 영석했고 함부로 그 속내까지 알려주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사실 그런 자신을 털어놓을 만큼 오래 머물 일이 없기도 했다. 그렇기에 결과적으로 무언가가 깊숙하게 틀어박혀 머무르는 일은 없었다.

 

다정한 태도로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그러나 흘러 떠나고 아무것도 결과적으로 남지 않는다. 주변의 이가 어떤 친절한 이여도 자신이 곧 떠날 것을 항상 염두 했기에 그는 그 이상을 바라지 않은 채 체념했다.

 

그러니 레이피스는 제 속이 비어있는 채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억도 남지 않는 언젠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이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잦은 이사 끝에 멀어졌고 잊혔다. 추억을 아무리 쌓아도 낯선 환경이 그를 둘러싸고, 그는 적응해야 했고,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은 바스라졌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허한 빗소리가 울렸다. 레이피스는 창가에 기대어 그 광경을 한없이 지켜보았다. 낯선 동네에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광경을.

 

*

 

어떤 소년의 고뇌에도 긴 장마는 물러간다. 맑게 하늘이 개었다가 무더운 햇볕이 쏟아져 더위의 정점을 찍었고 한층 수그러들었을 때 개학이 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 아이들은 작은 새가 지저귀듯 활기차게 어울렸다. 엔리카도 교실로 들어가서 몇몇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엔리카는 개학을 조금은 반기는 학생이었다. 친구들을 만나는 것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방학 사이의 근황을 나누며 즐거워했다. 레이피스는 입장이 조금 애매했다. 전학생이지만 환영인사를 할 차례는 지났다. 그렇다고 친밀하게 접근하기에는 어색한 이었다. 벌써부터 누구였는지 가물가물해하는 기색의 아이들이 주위에 스쳤다. 레이피스는 낯선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 반의 담임선생님이 오래간만이라며 들어와 아이들과 떠들었다. 다들 방학 동안 잘 놀고 왔나 보네. 다들 얼굴이 밝아졌어. 이것들아, 왜 다시 안 좋아져. 개학이 싫은 건 알겠는데, 방학은 이미 지나갔다. , 방학 동안 뭐했어? 이야, 여행 다녀왔어? 그래, 피부가 많이 탔네. 엄청 돌아다녔나봐. 아니 너는 왜 하얘졌어? 방학 동안 방에 박혀서 게임만 했지?

 

선생님은 아이들과 활발히 교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주도하에 서로 왁자지껄 방학 이야기를 공유한다. 활기찬 그 분위기는 기존에 친근한 아이들을 더 화목하게 만들지만 겉도는 사람은 더 소외감이 느껴지곤 한다. 몇몇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리는 소리가 왠지 멀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그러다가 제대로 교탁에 서서 공지를 전달했다.

 

너희 2학기 시작되면 이사한다고 이야기했지?”

 

선생님은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교탁에 내려놓았다. 작게 종이쪽지들이 한가득 차 있었다. 호명받은 반장과 부반장이 재빠르게 튀어나와 칠판에 책상 배치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신나하거나 아쉬워하면서 짐을 꾸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 했다가 레이피스는 한박자 늦게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자리 바꾸기였다. 다만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쪽지를 뽑고 그것을 칠판 옆에 붙은 당번에게 보였다. 그러면 당번은 쪽지에 숫자를 칠판 위에 그려진 책상 배치도에 적어 놓은 숫자 중에서 찾았다. 그리고 일치하는 숫자에 그 학생의 이름을 적었다. 레이피스는 쪽지를 넘기고 물러나 칠판을 훑었다. 칠판은 다른 학생들의 이름으로 서서히 채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과 일치시키지 못 한 다른 이름들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기에 제 이름이 적힌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려고 할 즈음, 제 자리 옆에 이름을 적는 것을 보았다. 엔리카, 라고 옆자리에 적혔다. 레이피스는 시선을 조금 아래로 움직였다. 당번에게 쪽지를 다시 받는 사람이 보였다. 연갈색의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 저 학생이 엔리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엔리카는 쪽지를 다시 통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레이피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레이피스를 본 엔리카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인사였다. 레이피스가 뭐라 반응하기 전에 자리 배정이 끝난 학생들이 와르르 일어나며 서로가 가려졌다.

 

다시 만나는 시간이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학생들의 그 소동 사이에서 엔리카는 곧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레이피스가 앉은 자리 옆에 자신의 가방을 걸며 엔리카가 말했다.

안녕, 레이피스지? 나는 엔리카야. 한동안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네. 잘 부탁해.”

 

평범하다면 평범한 인사말였다. 하지만 의례처럼 뱉어버리고 마는 그런 종류는 아니었다. 말에는 생기가 담겨있었고 눈은 레이피스를 직시하고 있었다. 아까 손을 흔들고 지금이 될 때까지 속으로 품고 있기라도 한 듯 선선하고 따스하게 나오는 인사말이었다. 인사말이 주위에 울렸다. 레이피스는 그것을 들었다가 잠시 후에 화답했다. 대개 그렇듯 온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 잘 부탁해. 엔리카.”

 

엔리카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인사를 마치고 엔리카가 자리에 앉자, 주위를 둘러싼 막 같은 것이 탁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그제야 밀려왔다. 아이들이 떠들고 이동하고 정리하며 책상이나 의자를 끄는 소리들, 아까의 여운을 되새겨 볼 수밖에 없는 현실감.

 

옆자리의 엔리카는 수업에 성실한 학생이었다. 선생님의 수업을 집중해서 들었고, 내용들을 받아적고 밑줄을 그었다. 그러나 칼같이 모든 신경을 집중하지는 못 하는 학생이기도 했다. 가끔, 창밖에 시선을 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언가에 감탄한 듯, 탄성을 작게 흘리며. 그럴 때 시선을 쫓으면 과연 그럴만한 광경이 있었다. 이를테면 파란 하늘에 새하얀 적란운이 웅장하게 퍼져 있는 모습이라거나,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풍성한 이파리들 얹은 나뭇가지들이 몸을 뒤집는 순간. 또는 멋모르는 새가 창틀에 앉아 기웃거리며 교내를 보다가 포르르 날아가는 모습. 엔리카는 그런 것에 시선이 팔려 한동안 보다가 잠시 후에 아차 싶은 표정으로 따르게 수업을 뒤쫓으며 필기를 따라잡았다. 옆 분단에서 쿡쿡 찔러 속닥거리고 싶어 하는 학생에게는 난처한 낯을 보이며 조심스럽게 거절하고 칠판을 보는 모습이 수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람 소리 같은 것에 고개를 다시 드는 모습이 그런 것에 한해서는 어떨 수 없는 것 같았다.

 

저런 것을 좋아하는 걸까? 옆자리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엔리카도 시선을 눈치채고 레이피스와 눈이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엔리카는 그런 레이피스의 주시를, 수업에 집중하지 않아 주의를 주는 것으로 여기는지 목덜미를 긁적이며 계면쩍게 웃고 다시 칠판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방금도 그런 일이 있었고 가만히 엔리카는 교과서를 내려다보았다. , 그렇게 주의를 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레이피스는 펜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계속해서 좋아하는 것을 보는 일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의도한 바도 아니고. 사소하지만 반복되는 오해에 레이피스는 뭔가 미안해졌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괜찮다고 말해야겠다. 레이피스는 펜을 정갈하게 내려놓으며 결론을 내렸다.

 

교실은 가로세로 넓이가 10m가 채 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느 구석이든 가려고 한다면 못 갈 장소는 없지만, 바로 옆자리라는 것은 생각보다 대화를 자주 나누기가 용이했다. 쉬는 시간에 수업이 막 끝났을 때 레이피스는 말을 걸었다.

 

엔리카.”

무슨 일이야, 레이피스?”

 

엔리카는 맑은 눈으로 레이피스를 보았다. 따스한 햇살이 창을 투과하여 책상에 내려앉는 날이었다.

 

혹시 풍경을 좋아해?”

......”

 

엔리카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작게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게, 수업 중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시선을 뗄 수가 없어서 말이야.”

 

엔리카는 조금씩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레이피스는 매사에 성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레이피스는 엔리카가 그런 생각에 일부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아직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별수 없었다. 잦은 전학은 타인에게 자신을 충분히 이해시킬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레이피스는 손을 내저었다.

 

뭐라고 하는 것 아니야. 나도 바깥의 풍경 보는 것 좋아하거든.”

 

엔리카가 반색하는 것이 보였다. 레이피스는 그 표정을 보며 덧붙였다.

 

내 눈을 신경 쓰는 것 같아서,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어.”

 

엔리카는 안심한 듯 맑게 웃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것을 보며 레이피스는 저도 모르게 했던 긴장이 풀어졌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행동일 수도 있다. 별로 따로 불러 이야기할 필요 없는, 괜히 신경 쓰는 것일지도 모르는. 하지만 안심하는 표정을 보니 이야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엔리카가 레이피스를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하는 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몰랐으니까. 학교는 학생들을 성적이나 공부에 민감하게 만드는 장소였으니.

 

그런데 그다음 엔리카가 생기있는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너도 풍경을 좋아한다고? 정확히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 거야?”

 

뭔가 기대하는 듯, 혹은 신이 나는 듯 반짝이는 눈이었다.

 

*

 

경쾌한 걸음걸이에 풀잎이 사그락거리며 스쳤다. 여름에 나무가 잔뜩 드리워진 곳이 그렇듯 햇빛이 강렬하지 않았고 녹색 기운을 품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많은 학교가 그렇듯 그들의 학교도 산자락에 있었다. 그렇지만 학교 뒤에 펼쳐진 산은 학생들에게 별로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었다. 관심을 쏟을만한 것은 학교 앞의 시내에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엔리카는 배경처럼 존재하는 그 산의 샛길을 알았고, 서슴없이 들어갔다. 레이피스는 엔리카를 따라 걸었다. 새소리와 숲의 바람소리가 주변을 채웠다.

 

그가 이야기한 풍경이 정확하게 동식물 같은 자연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 엔리카는 눈에 띄게 기뻐했었다. 엔리카는 관련된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레이피스도 관심이 있는 것들이어서 즐겁게 답하게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잘 어우러졌다. 서로가 아는 것에는 맞장구를 치고 모르는 것들은 서로 알려주고 알아나갔다. 한바탕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쉬는 시간은 짧았다. 종이 울렸고 아쉬운 기색으로 엔리카는 대화를 끊어냈다. 그리고 선생님이 오시기 전, 하교 후에 같이 뒷산으로 산책을 가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레이피스가 슬쩍 본 바로는 본격 산행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동네 언덕 수준이라고 말할 정도도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닌 것은 알고 있는 모양인지 물음에 조금 조심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레이피스는 고민 끝에 승낙했고 그것이 지금 그들이 여기에 와 있는 이유였다.

 

엔리카는 천천히 걸으며 말을 텄다.

 

걷기 좋은 숲이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산길이 있어. 산은 조금 가파를 수는 있어. 하지만 구간이 짧아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가는 동안 볼 것이 많아. 오밀조밀 자라있는 것도 제법 있고.”

 

레이피스는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되물었다.

어떤 것이 있는데?”

이제 보게 될 거야.”

 

엔리카는 선물을 숨겨둔 사람처럼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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