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어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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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내기를 해봐요, 무명.”
파이는 리볼버에 탄창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실린더가 돌아가며 달칵거리는 소리를 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지 궁금하지 않아요?”
리볼버가 탁자에 놓였다. 파이와 무명의 한가운데였다. 기회와 거리는 동등했다. 먼저 움직이는 자만이 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파이는 느긋하게 등을 기울여 의자에 기대었고 무명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일은 양쪽 다 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동시에 리볼버를 의식하고 있었다. 안온한 노란 조명이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과 그 안의 장식을 비추었고, 총에서 머무르며 날카로운 반사광을 남겼다. 그와 대조적으로 밖은 검었다. 불 하나 없는 밤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고, 시린 눈발이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
파이는 천사 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무명에게 악마의 제안을 건넸다.
“기차는 영원히 달릴 수 없어요. 총을 들고 선택해요, 무명.”
기차가 덜그럭거렸다. 이는 아직도 기차가 살아있다는, 달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 영영 그칠지 알 수 없다. 그 기차의 맥박 속에서 파이와 무명은 서로를 보았다. 리볼버를 가운데 두고.
파이는 특급 열차에 있었다.
특실의 바닥에는 양탄자가 깔려있었고, 창에는 흰 커튼이 달려있었다. 부드러운 붉은 커버가 씌워진 소파가 준비되어 있었다. 소파의 간격은 그리 넓지는 않았는데 열차라는 제한된 공간의 특징이었다. 그래도 3등급 칸에 아주 넓은 편일 테다. 테이블에는 빈 잔과 고급 주류, 간단한 과일과 스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일부로 깎아 넣은 나무, 난색의 조명, 온화한 붉은색과 흰색의 어우러짐. 인테리어는 전반적으로 고풍스러웠다. 파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촌스럽네, 취향하고는. 하지만 그 시대의 지구의 것이란 대체로 그랬다. 모든 것이 공평하게 망해가므로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즐길 여유가 없었다. 현시대에 즐길 수 있는 사치스러운 것은 모두 과거에 만들어졌고, 온전히 보존된 것을 누린다는 것은 부의 상징이었다. 빈티지는 부자들의 유행이 되었다. 과시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막대한 부를 가졌던 파이는 굳이 쫓지 않았지만.
특실에는 파이 외에도 몇 손님이 있었다. 파이는 그들에게 시간을 허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창밖에서는 옅은 눈발이 흩날렸다. 파이는 여유롭게 기다렸다. 한가한 시간을 마음껏 쉬면서 보내는 것은 파이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 후, 앞쪽의 문이 열렸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여러분. 열차에 오르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이 열차의 기장인 무명이라고 합니다. 손님분들의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손님들께서도 원활한 여행을 위해 승무원에게 협조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명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서비스직의 정해진 멘트에서 진심을 바라는 이가 바보였으므로,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이는 꽤 기분 좋게 웃었다. 진심이 아니더라도, 저렇게 친절한 말투를 내뱉는 무명의 모습은 파이를 즐겁게 만들었다.
무명은 몇 가지 안내 및 사항을 더 말하고 몇몇 검표원과 함께 사람들의 표를 확인했다. 파이는 제 차례가 오자 턱을 괴고 무명에게 말을 걸었다.
“너, 그 제복 제법 잘 어울리네요. 정말 기관사이긴 했나 보죠.”
“감사합니다, 손님. 잠시 표 좀 검사하겠습니다.”
무명은 파이의 질문을 대충 넘겼고 파이는 기차표를 건넸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서 내민 기차표에는 멋들어진 필기체로 그리스 문자 파이(π)가 적혀있었다. 무명은 기차표를 받아서 들어 살펴보았고 구멍을 뚫고 돌려주었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눈을 찡그리지도, 손을 떨지도 않았다. 깔끔하게 처리한 무명은 이윽고 다른 승객의 표를 마저 살폈다. 파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파이는 이 순간 본래 유쾌함을 느껴야 했다. 그런데 이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장 노릇에 푹 빠졌군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짤깍, 하고 다른 사람의 표에 구멍을 내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열차는 사건 사고 없이 백색의 지대를 지나갔다. 철도 사고가 나거나 폭설로 차가 멈추는 일도 없었다. 파이는 바구니에 놓인 초콜릿을 까먹거나, 사교적으로 굴며 다른 승객에게 말을 건네보기도 했으나 곧 흥미를 잃었다. 이곳의 구현은 정교했으나 사실 같은 정교함에서 감탄을 느낄 나이는 지났다. 대신 파이는 기장을 호출했다. 이 거짓 사이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부르셨습니까?”
무명이 나타났고 문가에 정중하게 섰다. 파이는 무명을 천천히 훑어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선명한 노란 눈, 엄숙한 표정, 모자에 붙은 종이, 단정한 검은 제복. 이곳에서도 메모는 죽은 모양이지요? 파이는 그렇게 빈정거리는 대신 온화하게 말했다.
“그래요, 명. 잠시 이야기나 해볼까요?”
파이의 어투는 상냥했으나 용건은 성가셨다. 이는 무명에게 단순히 귀찮거나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승객이고 상대가 승무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의 시간을 뺏어도 된다고 여기는 이들은 진상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용건입니까?”
무명은 객석에 가까이 발을 들이지 않으며 물었다. 대화를 수락한다는 뜻으로 비칠 행동은 전부 삼갔다.
“아주 중요한 용건이지요. 앉아요.”
“제겐 이 열차를 모두 총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손님께만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습니다.”
“글쎄요. 당신은 내게 집중해야 할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왜냐고요?”
파이는 짐짓 생각하는 척하다가 낭랑하게 말했다. 상대가 제 말을 들을 것을 확신하는 자 특유의 자신감과 감돌았다.
“왜냐하면, 곧 세상이 멸망하거든요.”
무명은 눈썹을 찡그렸다. 겉보기에는 아주 미미한 변화였지만 사실 이는 무명이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멸이었다. 특히 그가 기장으로 배지를 달고 있는 이상 더욱 그랬다. 무명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하실 말은 그게 다입니까?”
“그럴 리가요. 이제 시작이지요.”
파이는 다시 제 기차표를 빼 들어서 무명에게 건넸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무명은 표를 건네받았다. 표는 두 번째 받아 드는 것이고 처음 꺼냈을 때와 달라진 점이라고는 구멍이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그 구멍은 무명이 직접 냈다. 무명은 파이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그들의 기차표에는 탑승자의 이름을 적지 않는다. 좌석과 기차의 종류만이 적혀있다.
“모릅니다.”
파이는 눈썹을 세웠고 손가락으로 그리스 문자를 툭툭 두들겼다.
“이거 안 보여요?”
“보입니다만, 기차표에 손님이 낙서하신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보다 함부로 낙서하지 마십시오. 표픞 확인할 때 손님에게 불이익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
파이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파이를 놀려 먹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말을 섞어보니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짜증이 피어올랐다. 파이는 아직 미소를 유지하며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나는 파이에요. 그 표에 적어둔 대로.”
“그렇습니까.”
무명에게는 어떠한 깨달음도 놀람도 보이지 않았다. 굳이 따진다면 그 괴상한 필기체가 그리스 문자 파이(π)였군. 근데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지? 정도의 감상을 느낀 듯했다. 파이는 좌석의 팔걸이를 꽉 잡았다. 역시 파이는 이런 무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렇게 지내는 무명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세계 따위, 멸망해야 옳았다.
“나를 잘 기억하는 게 좋을걸요? 나는 이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진짜’이거든요.”
무명은 이제 경멸을 느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상한 손님이 하는 쓸데없는 말에 감정을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여행 되시지요.”
무명은 적당히 인사하고 나가려고 했다. 그때 파이가 무명을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요? 당신, 내 말을 하나도 안 듣고 있지요?”
무명은 잡힌 옷깃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파이는 대단한 비밀을 말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럼 말해봐요. 이 기차의 종착지는 어디이지요?”
“그야…….”
간단하게 답하려던 무명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이 기차는 어디에서 멈추지? 기장이기까지 한 자신이 어째서 그것을 모르지? 무명은 서둘러 아까 파이에게 건네받은 기차표를 보았다. 기차표에는 기차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어떻게 이 중대한 누락을 어떻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어째서 이 많은 손님 중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항의하지 않았지?
파이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두 번째 질문. 당신의 머리에 이 종이는 왜 매달고 있는 것이지요?”
파이의 손끝이 종이를 툭 쳤다. 무명은 기분이 확 불쾌해졌다. 파이의 손을 뿌리치고 종이를 보호하듯 감싸 쥐었다. 하지만 무명은 왜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 종이를 매달고 있는 것이지? 왜 이 종이가 소중하지?
파이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다. 광소에 가까웠다.
“맙소사! 이럴 줄은 몰랐는데. 너, 설마 메모도 기억 못 하는 건가요?”
무명은 침묵했다. 자신이 뭔가 반응을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명은 도무지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메모라니? 그것이 뭐지? 저자는 왜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굴지?
“그게 뭡니까?”
웃어대던 파이는 웃음을 딱 멈췄다. 파이가 더는 즐거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분노하고 있었다.
“네가 그걸 모른다는 게, 이 세상이 허술하게 지어진 가짜라는 증거에요. 그러니 이 세상은 조만간 멸망할 겁니다. 가짜 세계가 오래 유지될 필요가 이유가 없죠, 안 그래요? 무엇보다 내가 이 세계를 용납할 수 없네요. 이렇게 멍청하게 속해있는 당신 또한 못 봐주겠고요.”
무명은 차갑게 입을 다물었다. 파이의 말은 분명 무명을 잠시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더 황당한 주장이 따라와서 방금의 동요를 의미 없게 만들었다. 그는 기장으로서 해야 할 태도를 되찾았다.
“쓸데없는 말로 승객들을 선동하지 마십시오. 저희 열차는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 열차가 운행되는 동안 승무원의 지시를 준수하지 않는 자를 타 승객과 격리하는 조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파이는 비아냥거렸다. 헛소리를 줄줄 내뱉던 태도와는 사뭇 다르게 포기가 빨랐다. 아니, 다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무명의 말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명은 눈을 부라렸으나 그저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승객을 어떻게 해서는 안 되었다. 파이는 제 기차표를 다시 가져갔다. 무명은 인사 없이 돌아섰다. 뒤에서 파이가 말했다.
“나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명.”
무명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사라지고 파이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지어 보이다가, 캐리어를 뒤적였다. 그리고 파이는 은색의 반짝이는 물체를 손끝으로 건져 올렸다. 노랗고 온화한 빛 아래에 놓았는데도 서늘한 반사광이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열차는 이변 없이 철로를 따라 달렸다. 무명은 대부분 기관실에 있었고 운전에 집중했다. 한참 보던 부기관사가 긴장 좀 풀라고 했으나 무명은 거절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있느니 일에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선실에는 기장인 무명 대신 다른 승무원들이 드나들었다.
그때 무명은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탁. 탕, 탕, 탁.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아니었다. 즉, 기차의 엔진이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나, 철로에 바퀴가 부딪치는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무명은 부기관사를 보며 물었다. 부기관사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무명의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심상치 않게 느껴져서 승무원을 호출해 봤는데 오지 않았다. 무명은 부기관사에게 운행을 잠시 맡기고 자신이 선실로 나가보았다.
선실은 고요했다. 어느 소리도 없이.
어느 소리도 없이.
무명이 선실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도중, 발에 뭔가가 걸렸다. 발을 들어보니 그곳에는 누군가의 손이 나뒹굴고 있었다. 시선을 좀 더 올려보니 시체가 있었다. 무명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선실이 고요한 이유는 이곳의 사람이 전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무명은 서둘러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다음 칸에도 살아있는 승객은 없었다. 그다음 칸도 같았다. 무명의 걸음이 빨라졌다. 무명이 식당칸의 문을 열어젖히는데,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승무원을 발견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이…….”
그러나 무명의 물음은 승무원의 비명에 가로막혔다. 또한, 비명은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쳤다. 무명이 아까 계속 들었던 소리였다. 승무원이 쓰러졌고, 그 너머에는 파이가 은색 리볼버를 들고 있었다. 그 쇳소리는 총성이었다. 파이가 은은하게 웃었다.
“나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죠?”
무명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쓰러진 승무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였다.
“어떻게…… 이런 짓을…….”
“놀랐어요? 놀랐다면 성공했네요.”
무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살인마.”
“이런, 그 호칭은 정정할 필요가 있겠는데.”
파이가 리볼버 끝을 훅 불며 무명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무명. 이 세계는 다 가짜예요. 여기 사람들도 허상이고요. 가짜를 파괴했다고 살인마라고 부를 수 있나요? 물론 내가 사람 같은 거에 총 쏜 일이 생전 처음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무명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파이는 무명을 끌어당겨서 테이블에 앉히며 물었다.
“승객에게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요? 이제 승객은 나뿐이에요. 이제 내게 온 관심을 쏟아야 하지 않겠어요? 자, 나랑 대화할 마음이 나요?”
그럴 마음 따위가 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무명은 굳었고, 파이는 떠들 시간을 얻었다.
“이 가상현실 좀 악질이네요. 역할에 갇히면 역할 이외의 것은 잊어버리게 구성하다니. 그 때문에 당신이 가상현실에 빠져서 영 깨어나질 못하니, 내가 직접 데리러 들어왔어요. 나가면 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받아내야겠어요.”
“웃……기지……마십시오. 당신이 망상증에 걸리신 게 아닙니까?”
무명은 간신히 짓씹듯이 말했고, 파이는 어깨에 리볼버를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 피곤하게 구네요. 전부 진실이에요. 나를 모르고 메모를 모른다고요? 그런 당신은 존재할 수가 없지. 무엇보다 당신은 나에게 이런 식으로 굴지 않아요? 이렇게나 잘못되어있는데, 내가 어떻게 망상증에 걸렸다고 단언하나요?”
“……그런 식이면 제가 오늘 처음 보는 살인마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이유라, 글쎄. 이러면 이유가 될까요?”
파이는 총구를 무명에게 겨누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무명은 맹렬하게 파이를 노려보았다. 파이는 피식 웃었다. 바짝 긴장하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모습이 봐줄 만했다. 파이는 리볼버를 거두면서 말했다.
“이 가상 세계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죽는 것이에요. 죽으면 현실 세계에서 깨어나지요. 하아, 이런 기본적인 부분도 알려줘야 한다니……. 어쨌거나, 당신이 죽으면 당신은 이 세계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 좀 서둘러줄래요?”
“당신이 죽으면 제 앞의 살인마가 사라지겠군요.”
무명은 증오를 담고 읊조렸고 파이는 그런 무명의 모습에 웃어댔다.
“아하, 그렇게도 되겠네요. 당신 말마따나 내가 죽으면 시끄러운 망상증 환자가 사라지고, 당신은 이 거짓 세계에서 살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건 권장 안 해요. 내가 들어온 것이 들켜서 이 세계의 관리자들이 가상 세계를 통째로 무너뜨리고 있거든요. 그러면 의식을 이 서버에 저당 잡힌 채로 정지당해서, 영영 갇힐걸요?”
그때 기차의 방송이 울렸다. 부기관사였다. 부기관사는 방송의 형식도 지키지 않고 잔뜩 당황해서는 목소리를 내보냈다.
-죄송합니다, 기장님! 얼른 와주십시오! 가시거리가 급격히 짧아집니다! 세상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전면 등도 효과가 전혀 없습니다! 이, 이런 상황은 처음이어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무명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봤다. 희멀겋지만 그래도 낮이어서 빛이 있었던 밖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발은 여전히 날렸으나 기차 옆으로 스쳐야 하는 상록수 군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명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갈 셈이지요? 그대로 앉아요.”
일순간 서늘하게 경고하던 파이는 이어서 태평한 어투로 말했다.
“세계 멸망의 카운트 다운 시간이군요. 빨리 고르는 게 좋을 거예요.”
파이는 리볼버에 탄창을 채워 넣으며 말했다. 실린더가 돌아가며 달칵거리는 소리를 냈다.
“저희 내기를 해봐요, 무명. 과연 어느 쪽이 진실일지 궁금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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