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rets of the Amusement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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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A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끔벅였다. 옆좌석에 앉은 친구가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A, 이제 일어나. 나랑 놀자.”
A는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잦은 악몽은 A를 수면 부족으로 몰아갔고, 따라서 A는 대체로 피곤한 상태였다. 그러나 친구는 그런 사정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듯 A의 귓가에 대고 외쳤다.
“이 잠꾸러기야. 일어나라니까! 우리 거의 다 왔어.”
A는 미간을 찡그렸고 잠에 겨운 채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나 좀 내버려 둬. 어제도 못 잤단 말이야…….”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서는 치근덕댔다. A는 결국 눈을 뜨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어딜 다 왔는데?”
“까먹었어? 너 정말 정신없구나?”
상상 친구가 깔깔대며 웃어댔다. A는 쏘아붙이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차 안에 있었다. 5인승 승용차였다. 하지만 그들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A 자신, 이렇게 셋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운전석과 조수석은 주로 부모님이 앉고 뒷좌석에는 보통 A 혼자만이 앉는다. 그러므로 A의 귓가에 대고 속삭일 상대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다.
A는 앞좌석을 살폈다. 부모님은 분명히 귀를 세우고 있었다. A가 내뱉던 것은 몽롱하던 정신에서 헤어 나오는 도중의 중얼거림이었다. 잠꼬대 정도로 얼버무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A의 부모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을 테다.
어머니가 돌아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AD. 깨어났니?”
A는 일부로 여전히 잠에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기 어디야?”
“아직 도로 위야. 좀 더 자도 돼.”
“아니, 안 잘래…….”
그 말에 어머니가 안심하는 기색이 되었다. A는 민감하게도, 혹은 불우하게도 그 사소한 감정을 감지해냈다. A의 부모는 분명 너그러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아이가 14살이 되도록 상상 친구와 대화하는 상황은 분명히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A는 점점 상상 속의 인물들을 숨기는 중이었다. 부모님은 증세가 ‘완화’된다고 여기며 청신호로 보았다. 아버지가 다정하게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거의 다 왔어.”
아버지는 방향지시등을 켜며 차선을 바꿨다. 창밖으로 장식으로 꾸며진 이정표가 보였다. 거대한 놀이기구가 저 멀리에 보였다. A는 창에 붙어 배시시 웃었다. 오늘 A의 가족은 놀이공원으로 가기로 했다.
2.
파란색 박스가 엔진 소리를 내며 놀이공원의 한쪽에 나타났다. 그 경찰 박스의 정체를 잘 아는 이라면 그 장면을 보고 착륙했다, 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 이는 이곳에 없었지만 말이다. 도나는 박스의 문을 열고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더니 팔짱을 꼈다.
“여기가 100억 년 후의 지구라도 되나?”
닥터가 따라 나오면서 말했다.
“설마. 그즈음이면 행성으로서의 지구는 한참 전에 망했을 무렵이야. 사람이 보인다면 그건 지구에 있던 인류의 후손이겠지. 너도 봤다시피 인간은 그 후에도 오래 존재했거든. 온갖 기술을 발달시키고 적응해나가면서. 그러니까 여기는…….”
“놀이공원인데?”
도나는 닥터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곳에는 거대한 놀이기구들이 가득했고, 그사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흥겨운 음악 가락이 울렸다. 바닥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채워져 있었고 기구는 철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종이 티켓을 가지고 핸드폰이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녔다. 어떻게 봐도 현대의-이 현대는 도나 기준이다-놀이공원이었다. 더군다나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영국인 것 같았고. 도나는 닥터를 보았고 닥터는 시선을 피하며 타디스를 한번 돌아보았다. 그가 데려다주겠다고 장담했던 곳은 지금으로부터 먼 미래의 관광 행성이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닥터가 실수했다. 닥터는 말을 끌다가 인정했다.
“……그러게. 놀이공원이네.”
“수십억 년 후의 인류는 그 진보한 기술로 놀이공원을 만들면서 즐겁게 잘 사네.”
“그런 셈이지.”
도나가 웃으며 비꼬았고 닥터는 능청스럽게 넘겼다.
“세상에서 가장 큰 반중력이 있는 곳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
“뭐, 가끔 이렇게 불시착하는 날도 있어야 여행이 재미있는 법 아니겠어? 정해진 곳에만 도착하는 여행은 너무 단조롭잖아?”
닥터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달려서 지나갔고, 닥터는 그들과 부딪힐 뻔했으나 몸을 90도 틀어서며 피했다. 동시에 아이들이 놓쳐 하늘로 영영 올라갈 뻔한 헬륨 풍선의 끈을 잡아챘다. 풍선을 다시 아이들에게 쥐여준 닥터는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며 아이들을 보냈고 몸을 다시 90도 돌려서 도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도나. 안 올 거야? 얼른. 어서 와.”
“내가 이런 거 좋아하는 어린 꼬맹이인 줄 알아? 내 취향은 애들이랑 부대끼는 쪽이 아니라 샴페인 하나 들고 멋진 신사와 춤을 추는 거라고. 너무 느끼한 녀석은 빼고.”
“에이, 그러지 말고.”
닥터가 재차 권유했고, 도나는 피식 웃으며 몇 걸음 걸어 나오다가 놀이공원으로 뛰어들었다. 높은 환호성 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그들은 놀이공원을 즐기는 각양각색의 인파 속에 뒤섞였다. 그곳에서 남매가 솜사탕 장수 앞에서 기웃거렸고, 그들의 할머니는 어린 손자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기념일을 맞이한 어느 연인은 세상에서 단둘만 보이는 듯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거닐었고, 공상에 빠진 어느 아이는 미묘하게 엇나가는 시선을 하고 놀이공원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풍선을 들고 마냥 뛰어가던 아이들이 있었다. 이미 몇 사람과 부딪혔고, 닥터와도 부딪힐 뻔했던 그 아이는 결국 풀썩 넘어졌다. 아이의 몸에 눌린 풍선이 터지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아이는 놀라지 않았다. 상처에 울지도, 쪽팔려서 벌떡 일어나지도, 잃게 된 풍선에 속상해하지 않았다.
그저 끈이 풀린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아주 오래도록.
풍선의 찌꺼기가 바람에 굴러갔다.
3.
A는 벤치에 앉아서 발을 까닥거렸다. 사실 이 놀이공원은 그렇게까지 A의 취향은 아니었다. 이곳은 꿈과 환상으로 장사하지 않았다. 기구들은 모던디자인을 반영해서 날렵하고 매끄러운 디자인이었다. 또한 스포츠카같이 강렬한 원색으로 칠이 되어있었다. 옆 라인에 그려진 번개와 불꽃 문양을 보면서 누군가 말했다. “스릴과 아드레날린, 도파민을 파는 곳이네! 자극에 일찍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이 잘 먹힐지도 모르지.”
실제로 이곳에는 어린아이보다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유행에 민감한 청소년들은 제각기 개성 어린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그들은 낄낄거리며 결코 어른과 어울리는 일 없이 저들끼리 쏘다녔다.
A는 학교 동급생들 사이에서 형성된 무리를 떠올렸다. 청소년이 되어가고 있는 또래들은 저들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최신 가수의 노래를 공유하고 많은 것을 냉소적인 농담으로 삼으며 상상은 현실에 입각한 종류만을 허용했다. A는 점점 제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근래 몇 년 사이 A에게 쏟아지는 평이 적당히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 에서 나사 빠진 녀석으로 바뀌어 갔다. 그 평은 또래 사이에서 유독 심했다. 세상에는 어느 집단에나 어울리는 행동이 정해져 있고, A는 그 나이 집단에 걸맞지 않게 구는 사람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A를 받아들이지 않는 건 상관없었지만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건 문제가 다르다.
사실 A도 자신이 자라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현실의 이면이 보였다. 놀이공원 정문에서 풍선을 나눠주던 토끼는 그저 인형 탈을 쓴 아르바이트일 테고, 장기간 노동에 자세가 무너졌다. 그는 말없이 기계적으로 풍선을 내밀었다. 유리는 우산 대신 풍선을 잡고 날아가는 메리 포핀스의 꿈을 꾸는 대신 풍선을 사양했다. 힘에 겨워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업무를 대가로 장난감 하나를 받는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인형 탈에는 웃음이 그려져 있었지만, 안의 사람 또한 과연 웃었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이 풍선을 이끌고 지나가는 도중에 A는 홀로 앉아있었다. 부모님은 오늘 흔치 않게 잔뜩 들떠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지금은 잠시 핫도그를 사는 줄에 대신 서 있었다. 오래 걸어서 지친 A는 잠시 벤치에 앉아서 쉬도록 해주고 말이다. A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괴리를 느꼈다. 어떻게 사람들은 공상 없이 저렇게 현실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상상이 없으니 현실이 행복한 것일까? 물론 A가 오늘 즐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저들에 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렸다. 어떻게 저들은 기형적으로 마냥 웃으며 행복하게…….
그때 A 근처의 벤치에 어느 남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를 데리고 있지도, 서로 낭만에 빠져있지도 않았다. 그저 다리를 쭉 뻗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어땠어?”
“생각보다 즐거웠지. 그런데 도나. 경고했던 것보다는 승차감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데?”
“그거야 평소에 워낙 험하게 덜컹거리고 흔들리는 걸 타고 다녀서 그렇지. 타티스가 멋지다는 건 인정하는데 승차감만은 정말 최악이야.”
“그 타디스가 온 우주를 다니고, 모든 미래와 과거를 다니는데, 그 정도는 문제의 축에도 못 끼지 않아?”
A는 귀가 쫑긋 섰다. 온 우주? 모든 미래와 과거?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들의 말은 A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상상 친구가 속삭였다. 어쩌면 저들은 외계인일지도 몰라. 외계의 첨단 기술이 담긴 UFO를 타고 다니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한 여성과 남성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인간 행세하고 놀이공원을 둘러보는 거야. 이런 가정은 어때?
순식간에 A의 심장이 두근거렸고, 이 순간이 더없이 흥미진진해졌다. 그러나 A는 제 공상을 숨길만큼은 자랐으므로 그들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의 말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한데.”
“또 인간이 아닌 거 티 내고 있네. 이번에는 또 뭐가 이상하실까, 잘난 박사님(doctor)?”
“희미하지만 이상한 냄새 안 나?”
“이상한 냄새?”
그 말에 A도 코를 킁킁거렸다. 공기 중에 특별한 냄새는 없었다. 무엇이 이상하지? 남자 쪽이 벌떡 일어나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달짝지근하고 붉고, 오래된……. 흠. 어디선가 분명 맡아본 냄새인데, 어디였지?”
여자도 주위를 돌아보며 킁킁거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남자는 눈빛으로 냄새를 흡수하기라도 할 마냥 주변을 노려보다가 작은 원을 그리며 걸었다. 자신이 꽂힌 주제에서 쉽게 벗어나지 않고 강렬히 빠져드는 성미로 보였다.
“꿀치고는 가벼워. 작은데 꽃은 아니야. 정적인 녀석들이 아니라 활발하게 움직이지.”
시큰둥하게 있던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저기서 파는 사탕 냄새를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냐, 아니야. 설탕도 아니야. 그리고 또 이상한 게, 사람들이 과하게 행복해하지 않아?”
그 말에 A도 다시 사람들을 살폈다. 그리고 뭔가를 깨달았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동시에 저리 기형적으로 마냥 웃으며 행복해할 수 있을까?
“놀이공원에 놀러 온 사람들이 웃으러 왔지, 화내러 왔겠어?”
여자는 반박을 놓았지만, A는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견딜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A는 저도 모르게 부모님을 찾게 되었다. 발이 바닥을 헤매다가 사정없이 내딛어졌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방향에 아까 말을 엿들었던 남녀가 있다는 사실은 잠시 까맣게 잊었다. 그 때문에 A는 남자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이런, 조심해야지.”
남성은 A가 넘어지지 않게 받쳐주었다. A는 흠칫 놀라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긴 코트를 입었으며 갈색 머리와 갈색 눈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마냥 흔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남자는 A에게 선량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방금까지 A가 그의 말을 엿들었다는 것을 알까?
“애 붙잡고 뭐 하는 거야? 무슨 일이니? 부모님은?”
여자가 물었다. A는 그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겁에 질린 지금, 오로지 부모님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A는 본래 부모님에게 그리 의존하지 않는 아이였는데도 지금은 그랬다.
A는 남자를 뿌리치고 마저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가 가로막았다.
“잠깐만!”
그때 풍선들이 일제히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세 사람은 보았다. 하하 호호 웃던 놀이공원의 군중이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을.
4.
군중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해서 우르르 넘어졌다. 서로 밀쳤기 때문은 아니었다. 놀이공원이 그 정도로 사람이 가득 차 있지는 않았다. 그냥 풍선이 터지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넘어졌고, 쓰러졌다. 그 후에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 흐름은 마치 파도 같았다. 보이지 않는 파도가 사람들을 쓸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닥터와 도나, A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뛰어!”
닥터가 외쳤고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A도 함께했다. 정확히는 닥터가 A를 붙잡고 뛰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들이 쓰러지는 곳에 어린아이 한 명을 그냥 두고 갈 생각이 없었다. 도나가 빽 소리를 내며 외쳤다.
“닥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일단 뛰어!”
“어디로?”
“일단 타디스로!”
두 사람은 그렇게 외치더니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A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들은 바이킹 놀이기구를 빙 돌아서 지나서 파란색 문으로 달렸는데, A가 보기에 그것은 놀이공원에 걸맞게 꾸민 스태프용 통로였다. 파란 박스는 위장일 테고 근처에 작게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놀이공원의 직원이 아니었던 두 사람은 거침없이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A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로는 A가 규칙에 엄격하거나 모범적으로 굴려고 애쓰는 종류의 아이가 아니었고, 두 번째 이유로는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A의 눈이 휘둥그레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안에 이런 공간이 있을 수 있지?”
이 상황에서도 닥터가 웃으며 말했다.
“안이 밖보다 크지? 타디스에 온 걸 환영해, 어린 친구.”
A는 다시 나가서 밖과 안을 보며 크기를 비교해보고 싶었다. 방금 밖에 사람이 우르르 쓰러지는 괴현상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대신 A는 천천히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사실 저 깊숙한 곳은 섬세한 그림이 아닐까? 그러나 A의 발걸음은 가로막히지 않았다. 또한 멀리 울리는 발소리가 이 공간이 실존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A는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되물었다.
“타디스요?”
“내 우주선 이름이지. 그리고 나는 닥터, 이쪽은 도나, 도나 노블. 우리 친구의 이름은 뭘까?”
“우주선이요? 그럼 정말 온 우주를 다닐 수 있어요?”
“오, 어떻게 알았니?”
“하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어떻게 가는데요?”
“타디스는 타임머신이기도 하거든.”
닥터는 신나 하며 말했고 A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펼쳐진 일련의 상황이 A에게 준 것은 두통이나 혼란, 의심이 아니라 환희였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받아들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이?”
A는 조금 전에도 닥터가 이름을 물었음을 기억해내고 뒤늦게 답했다.
“내 이름은 AD이에요.”
“AD. 멋진 이름이야. 혹시 AD라고 불러도 되니?”
A는 작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되지만, 그보다는 A라고 불러주세요.”
“좋아, A.”
닥터는 선뜻 받아들였지만, 그는 ‘A’라고 소개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A’는 소수의 사람 사이에서 비밀처럼 오간 호칭이다. A가 제 상상을 공유할 만큼이나 친밀한 사람들.
그때 도나가 말했다.
“그래 반가워, A. 놀란 거 알고, 기쁜 것 알고,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닥터.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 아니겠어? 정신 좀 차려.”
“맞아. 그렇지. 어디 보자. 대체 뭐 때문일까?”
닥터는 우당탕 소리를 내더니 바닥의 어느 부분을 열고 희괴한 잡동사니들을 꺼냈다. 영 사용처를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A의 눈에는 그리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도나의 표정을 보니 도나의 눈에도 비슷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게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닥터는 까다롭게 골라대며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무렇게나 던졌다. A는 그 상황을 틈타서 도나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의사에요? 아니면 박사에요?”
“음, 그냥 닥터.”
“이름은요?”
“그것도 닥터라던데?”
도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A가 의아해하는 사이 닥터는 자신이 버려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잡동사니를 들고 와서 두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건 마스크와 유사했다. 그러나 고무호스가 어중간하게 매달려 늘어진 모습은 영 허접해 보였다. 도나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건 대체 뭐야?”
“일종의 방독면이라고 해야겠지? 공기 중에 떠도는 이상한 기체를 들이마시지 않게 해줘. 타디스가 기본적으로 우리를 보호할 테지만 왜, 가지고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안 그래? 여기 A에게는 더더욱 그렇고.”
박사는 A에게 마스크를 씌워주었다. 솔직히 성능이 의심 가는 디자인이었다. 입가를 충분히 제대로 가리지도 않는 디자인이어서 공기 중의 기체를 잘 막아줄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A는 불신을 표하는 일 없이 받아들였다. 닥터가 걸어주자 그 마스크가 이야기 속 현자가 주는 마법의 물건처럼 느껴졌다. 겉보기에는 볼품없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희귀한 보물.
닥터가 머리 위에서 돌아가는 안테나 같은 것까지 조정해서 모두에게 제대로 장착해주었다. 그렇게 닥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타디스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이젠 A도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중에서는 달짝지근한 향이 가득했다. 또한 옅은 분홍색이 이 놀이공원의 공기 중에 덧칠되어 있었다. A는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환상적으로 보였다. 기분이 들뜨고 막연하게 행복해졌다. 상상 친구들이 즐겁게 뛰놀며 A를 불렀다. “A! 이리 와!”
이 상황에 한가지 흠이 있다면 바닥에 사람들이 널려있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A의 심장에 두려움 대신 두근거림이 깃들었다. 그들은 불운에 마구잡이로 마냥 당할 희생자가 아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열쇠였다. 닥터가 이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이 굴었기 때문에 믿음이 차올랐다.
“일단 이 공기의 정체를 밝혀내야 해. 이게 뭐고, 어디서 왔는지. 분명 맡아본 향인데, 어디였지?”
닥터는 혀를 날름거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세워 공기 중에 대었다가 입술 끝에 가져가기도 했다. A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풍선이 어디로 갔지요?”
“풍선?”
도나가 되물었다. A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이 놀이공원의 사람들은 모두 풍선을 들거나 손목에 매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로 갔지? 도나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모든 사람이 풍선을 들고 있기는 했지. 어디서 풍선을 나눠주는 행사가 있었나?”
“놀이공원 입구에서요. 닥터와 도나는 못 봤어요?”
물론 도나와 닥터는 알 턱이 없었다. 그 둘은 입구에서 정식으로 표를 끊고 들어온 손님이 아니라 놀이공원의 무단 침입자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좀 바쁘게 들어오느라. 어디였는지 안내해주겠니?”
닥터가 태연하게 넘겼고 A는 놀이공원의 입구 쪽을 가리키며 앞장섰다. 두 어른은 A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저기예요.”
모두가 쓰러졌는데, 인형 탈을 쓴 아르바이트생은 멀쩡히 서 있었다. 자주색 풍선을 간이 수레에 가득 매달고선 말이다. 그는 여전히 인형 탈의 특유의 공허한 눈으로 사람을 응시하다가 풍선을 내밀었다. 놀이공원이 문을 닫을 지경임에도 자신은 그런 일은 상관없이 정해진 일을 한다는 듯이.
도나가 따지듯 말을 걸었다.
“이봐요, 당신. 지금 놀이공원이 카타콤이 되게 생겼는데 책임자는 어디 있지요?”
인형 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풍선을 내밀었다. 닥터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그거 멋진 분장이네요. 저는 닥터라고 합니다. 몇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잠시 대화에 응해주시겠어요?”
인형 탈은 변함없이 풍선을 내밀었다. A가 물었다.
“그 풍선을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인형 탈은 풍선을 내밀었다. A는 인형 탈과 오래 시선을 맞춰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A, 그러지 마.”
도나가 말했다. 그러나 A의 손에는 이미 풍선이 잡혔다. 풍선에 연결된 끈에서 미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A는 풍선을 끌어내려 손으로 움켜쥐었다. 풍선은 A에게서 벗어나려고 작게 요동치고 있었다. 단순한 헬륨의 부유감 이상의 의지가 느껴졌다.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A에게 벗어나서, 아주 먼 곳으로.
그리고 풍선이 터졌다. 그 충격에 A의 마스크가 조금 흐트러졌다. 분홍색 연기가 A를 덮쳤다. A는 저도 모르게 연기를 조금 삼켰다. 하지만 그 안에서 온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반짝이는 작은 가루를 볼 수 있었다. 그 가루는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저마다의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때 도나가 인형 탈에 달려들어 머리 부분을 벗겨냈다. 그 인형 탈 안쪽은 비어있었다. 대신 이쪽에서도 반짝이는 가루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닥터의 외침도 들렸다.
“맞아! 텔리코지였어! 텔리코지, 텔리코지, 텔리코지! 이런 멍청하게도 내가 이들을 까먹다니!”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A는 쓰러졌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기이한 환희가 마음속에 차올랐다.
아! 인형 탈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구나!
흔한 현실에 비추어 단정 지었던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았구나!
5.
상상 친구가 A를 불렀다.
“A, 저것 좀 봐.”
그들은 숲에서 이끼를 밟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몇천 년 묵은 숲은 나무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땅을 밟는 대신 나무와 나무로 이뤄진 거대한 구조물에 살았다. 아주 단단히 엉킨 그들의 터전은 결코 쉽게 무너지는 일이 없었다. 친구는 덩굴로 짜낸 줄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그는 맨발이었고 등에는 활을 매고 있었다.
A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친구가 이토록 선명했던가? A는 자기 상상력이 한 번도 모자란다고 느낀 적 없었다. 하지만 삐져나온 머리카락 한 올, 얼굴의 주근깨와 빛이 홍채에 어려 투명하게 보이는 형상까지 그려낸 건 조금 다른 일이다. 친구가 손을 붙잡고 이끌자 온기가 전해졌다. 너무나 생생했다. 이런 적은 없었다. 그의 상상 친구는 환상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항상 A와 반걸음 정도 거리를 두었다. A는 이 실체에 의문을 가지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네가 실존하냐는 물음은 상상의 세계를 파괴하는 결말을 가져온다.
“뭘 보라고 한 거야?”
친구는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 아래 어느 나무 둥치에서 흰 버섯들이 원을 그리고 자라나 있었다.
“너도 알지? 요정의 고리야. 이 근처에 요정이 있어. 픽시일까?”
친구는 흥분해서 말했고, A는 저도 모르게 답했다.
“픽시가 아니라 텔리코지야.”
“그래? 어쨌든 요정을 볼 기회는 흔치 않잖아. 한번 찾아보자. 얼마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으니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지도 몰라.”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공연히 근처의 나뭇잎을 뒤집어보았다. 친구는 이 숲에서 제일가는 사냥꾼이었지만 요정을 쫓는 일은 처음이었다. 숲에서 가장 오래 살아 현자라고 불리곤 하는 A가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텔리코지는 아주 작으니까 조심해서 찾아야 해. 얼핏 보면 빛나는 가루 정도로만 보일 거야. 그리고 그들은 분홍색 연기를 만들어. 그 연기를 마시면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되니까 조심해.”
그러나 A가 그 말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자 숲은 온데간데없었다. 검은 암흑뿐이었다. A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애매한 형상이 된 상상 친구가 씁쓸하게 웃으며 A에게 말했다.
“A.”
A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따라서 파리하게 질려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는 너의 환상을 찾아냈구나.”
“아직은 아니야.”
상상친구는 환하게 웃었다.
“축하해. 나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겠네.”
“아니야, 가지 마.”
그러나 상상 친구는 형상이 희미해졌다. A는 그에게 달려가며 다시 외쳤다.
“가지 마!”
그렇게 A는 아름답던 꿈에서 깨어났다. 벌떡 몸을 일으킨 A를 도나와 닥터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나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고 닥터가 말했다.
“A! 다행이야. 저들처럼 잠들어버릴 줄 알았어. 마스크가 그래도 많이 막아주었구나.”
“…… 얼마나 지났어요?”
A는 이유 모를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물었다.
“금방 일어났어. 1분도 안 되었을걸?”
“정말 다행이네요.”
A는 눈물을 훔치고 천천히 일어섰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 상황을 한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까딱해서 삼십 분 남짓 기절하는 바람에 저들이 자신을 두고 가기라도 했다면 평생을 후회에 잠겼을 것이다.
“그래서 텔리코지가 뭔가요?”
닥터가 손가락 위에 작은 반짝이를 올리며 말했다.
“외계인이야. 아-, 미리 말하자면, 원래 그렇게 위험한 녀석들은 아니야. 그들의 숨결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효능이 있어. 딱,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만. 그렇게 작은 행복을 나눠주는 선량한 녀석들이지. 하지만 과하면 꿈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게 되지. 놀이공원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 모양이고.”
닥터는 손가락에 올라앉은 녀석들을 하늘로 올려보내며 물었다.
“그러니 말해줘. 너희는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벌이게 되었지? 가끔 장난은 치지만 이런 일을 벌이지는 않잖아.”
그러자 빛나는 가루들이 허공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한데 모여서 허공에 글씨를 적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A도 그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를 붙잡아 가뒀어]
닥터가 탄식을 뱉었다.
“밀렵꾼들이군. 밀렵꾼들이 너희를 잡아서 이 놀이공원에 판 거야. 그래, 놀이공원에는 행복이 필요하니까. 놀랍군! 어떻게 이렇게 멍청한 생각을 할 수가 있지? 확실히 이곳에 오는 이들은 인위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겠지. 하지만 이런 식의 행복은 안 돼. 그래서 복수한 거야?”
요정들이 한 문장을 쓰는 동안 박사는 몇 문장이나 내뱉었다. 하지만 틀린 부분은 없는지 텔리코지들이 딱히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마지막 말에는 다시 문장을 만들었지만 말이다.
[단지 탈출이야]
[탈출하려고 그랬어]
“그래서 풍선에 숨어들었다가 놀이공원의 사람들을 공격했군. 놀이공원에서 너희를 통제하지 못하면 너희를 그만 쓸 테니까. 하지만 너희가 잠재운 상대들은 관계가 없어. 풀어주지 않겠어?”
그러자 빛나는 가루들이 진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텔리코지를 모르는 A도 짐작할 정도였다. 그들은 위협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닥터는 물러나지 않고 마저 말했다.
“진정해. 너희는 군체라서 이 개념이 잘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인간은 서로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가져. 모두가 너희를 가두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단 말이야.”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글씨가 허공에 그였다.
[상관없어!]
“그만, 그만! 너희가 원하는 것이 탈출이라면 그냥 날아가면 되잖아? 아니, 아니지. 애초에 날아갈 수 있는데 너희가 여기에 붙잡힐 이유가 없지. ……이것도 아니군! 탈출한다고 해서 어디를 가겠어? 너희의 고향 행성은 지구로부터 너무 멀어. 이대로면 아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 놀이공원 전체를 미끼로 밀렵꾼과 협상하려고 했군? 밀렵꾼이 너희를 데려왔다면, 되돌려 놓을 수단도 가지고 있을 테니까!”
그러자 허공에 무수한 글자가 생겼다. 커다란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작은 여러 단어였다.
[고향]
[그저 돌아가고 싶어]
[고향으로]
[갈래]
[돌아갈래]
[태어났던 곳으로]
[너무 지쳤어]
[그만 갈래]
온 주위를 수놓으며 반짝이는 수많은 열망과 절규는 A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A는 어쩐지 저 애절함을 알 것 같았다. 닥터는 외쳤다. 그들에게 선언했다.
“나는 닥터야. 그리고 너희들이 이 인간들을 꿈에서 풀어준다면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하지.”
분홍색 연기, 흔들리고 변하고 깜박이며 빛나는 글씨들, 흥분에 파르르 떠는 텔리코지. 그들이 일제히 날지 못하는 세 사람을 노려본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선언하는 닥터. 저울에 올려진 것은 밖에 쓰러진 몇백 명의 사람들. 환상과 위험, 행복과 저주가 뒤섞인 이 놀이공원에서 중대한 결정을 하려는 지금.
경기장에서, 공연에서, 관객석에서 군중들이 흥분에 빠질 때 A는 제 망상에나 빠져있다가 함성에 뒤늦게 빠져나와서 혼자 차분함 속에서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저들이 모두 하나에 묶여 있는데 A는 혼자 다른 곳에 있었다. A는 그 유리된 기분을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A의 손에 닿고 귀에 울리는 생생한 현실이다. 성난 텔리코지의 적의에 피부가 따가웠다. 도나는 자신을 뒤로 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박사는 결연하게 말한다.
심장에 폭풍이 어린 것 같았다. A의 제 심장 소리가 귀에도 울렸다. 북소리와도 같은 선언에 A는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기억에 각인될 것이다.
6.
보랏빛 하늘에 목성의 고리처럼 선이 그어져 있었다. 풀은 밝은 민트색, 노을은 청색. 거기에 온 세상의 금가루와 은가루를 모아서 뿌린 듯 눈이 닿는 곳마다 찬란한 광경이었다. 그곳으로 텔리코지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갔다. A도, 도나도, 닥터도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 동안 보던 닥터는 돌아서며 손가락을 튕겼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야. 자, 이제 돌아갈까?”
그리고 닥터는 그제야 A의 표정이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닥터는 시선을 내려 그런 A를 보았다.
“혹시 타디스를 타는 게 무서웠니?”
“……아니요.”
“그럼 왜 울고 있니?”
눈가를 만져본 A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목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A는 흐느낌을 억누르고, “너무 아름다워서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고 A는 거짓말에 능하지 않았다. 도나는 댁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어린아이를 태웠다고 닥터에게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맹세컨대, A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타디스로 텔레코지를 이송하는데 나도 따라가도 되냐고, 먼저 물은 것은 A였다.
텔레코지와의 협상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타디스에 탑승했는데, A는 그 광경에 함박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반짝이는 가루들이 넓은 타디스에 가득 차서 천장을 물들였다. 계기판과 부품은 복잡하게 움직이며 나름의 질서를 만들었고, 엔진소리가 그들 모두를 감싸 안았다. 다만 승차감만은 도나가 미리 경고했던 대로 매우 거칠었다. 그래도 그 모든 장면은 환상적이었다.
처음에는 환호했으나 끝까지 환호할 수가 없었다. 닥터가 몇억 광년 떨어진 곳인지 떠들었고 A는 곧 불안해졌다. 부모님을 두고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것에는 죄책감도 뒤섞여있었다. 부모님이 제대로 깨어났는지 확인도 못 했는데. 그 때문에 별세계에 왔음에도 마음껏 뛰어다니지 못했다. 박사와 타디스라는 얇은 끈이 없으면 A는 순식간에 우주 고아가 되어 버릴 테다. ‘우주 고아’는 비록 A가 방금 만들어낸 표현이었지만, A조차 표현의 무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아득한 단어였다.
A는 제 또래와 자신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우월감이나 자기 비하로 이어지지 않은 순전한 구분이었다. 망상에 젖어 사는 A와 다른 이들이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A의 모습은 평범한 다른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이게 뭘까? 뭐가 이렇게 겁나는 걸까?
그러며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작별. 인간이 텔리코지를 끝까지 간직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순간이 끝나간다.
A는 평생 과욕을 부려본 적 없었다. 현실에 그리 열망하는 것이 있었다면 환상에 빠져 지내지도 않았을 테다. 그러나 처음으로 마음에 들불처럼 욕망이 피어올랐다. A는 심장께에 손을 웅크렸다. 막 고향에 돌아온 무리와 다르게 한 번도 잡혀간 적 없이 이 행성에서만 살던 텔리코지들은 경계심이 없었다. 그들은 A의 손안에 자리 잡고 간지러운 감촉을 내었다.
그대로 이 손을 덮으면, 그리고 들키지 않는다면 A는 행복과 환상을 가져갈 수 있었다. 행복 어린 환각 속에서 상상 친구도 되돌아올지 모른다. 생생하고 아름다운 꿈을 꿀 테다. 말 그대로 행복을 유리병에 담아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A는 안다. 그럴 수 없다.
닥터가 A의 앞에서 몸을 낮추었다. 어린아이에게 맞춘 시선이 수평을 이루었다. 그가 차분하게 A를 불렀다.
“A.”
A를 두고 인간 분석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A가 느끼는 타인의 면모는 그저 오랜시간 지내왔기 때문에 자연히 알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A여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애초와 그 닥터와 함께 일을 겪었으면 그 누구라도 알 것이다. 닥터는 기본적으로는 선량한 사람이다. 필사적으로 텔리코지를 설득하던 선량한 자는 제 행동을 용납 못 할 게 분명하다. A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하게 아는 사실이 있다. A는 저 닥터와 함께 할 수 없다. 지구에서 겨우 한 발짝 떼어본 것이 두려웠고,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게다가 닥터에게는 이미 완벽한 파트너가 있어서 A가 필요하지 않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도나와 말을 주고 받는 모습은 더없이 조화로웠다.
그와 함께하며 타디스에 오를 수 없으면 대체재라도 손에 쥐고 싶다는 욕망이 그렇게 잘못되었을까?
“이런, A…….”
닥터가 A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A의 손을 잡았다. A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텔리코지들이 방금이 장난이 재미있었다는 듯 A의 주위를 한두 바퀴 돌고 날아갔다. 그렇게 A는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A는 눈앞의 상대를 속여넘기거나 제 뜻을 밀어붙일 배짱도 없었다.
대신 A는 닥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그 순간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주와 시간을 뒤얽어 가능성을 만들고 A의 운명을 결정할 문장이었다.
“닥터, 만약에 언젠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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