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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공포 7298자 - 지인분 리퀘스트

비가 허공을 사선으로 가로지른다. 사나운 맹수가 발톱 휘두르는 것처럼, 맹렬하게 달려들어 땅에 내려꽂힌다. 그 비 아래서는 나타샤도 웃음을 잃었다. 구름 낀 날의 우울한 천성 때문은 아니었다.

“비가 많이 오네.”

나탈리야는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나탈리야의 언어와 몸짓에는 가벼운 장난기가 많은 순간에 어리곤 한다. 따라서 발로 진흙을 지분거리는 모습도 흙장난에 불과해 보였다. 하지만 대지는 소꿉장난에 어울려주는 대신 먹이를 무는 짐승의 아가리가 되어 발목까지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나탈리야는 완전히 빠지는 대신 신발을 진흙탕에서 끄집어내어 탁탁 털었다. 바닥이 수렁임을 확인하는데 굳이 온 몸을 던져서 뛰어들 필요까지는 없다.

“어쩔까, 대장?”

나탈리야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페네트라는 뒤집어쓴 방수천 아래에서 어두운 낯으로 나탈리야를 응시한다.

탈출극에서 나탈리야는 보통 두 가지 경우에 순간에 페네트라의 의견을 묻곤 한다. 나탈리야가 하려는 일이 있는데 페네트라가 표면적으로라도 동의해주길 바랄 때, 아니면 어려운 생각이나 무거운 결정을 페네트라에게 돌리고 싶을 때. 지금 상황은 후자에 가깝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탈리야로서도 딱히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건 페네트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비 아래서 타브니트를 따돌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페네트라는 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게 옳든 그르든. 집단은 목적이 있어야 유지되고 그것이 대장이 해야 할 일이다.

“일단 지하로 내려가자.”

페네트라는 단호하게 말한다.

“땅 밑에서 이동하자. 적어도 보이지 않는 곳이 낫지 않겠어.”

“흐응.”

나탈리야는 고민하는 듯 소리를 흘린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좋아.”

페네트라는 이 판단을 나탈리야가 실제로 옳다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지금 신경 쓸 여유는 없다.

그리고 땅이 둘을 부드럽게 받아들인다. 어쩌면 수렁에 빠지는 것과 같은 감각으로, 하지만 보다 매끄럽게 땅 아래로 내려간다. 빗물이 스며들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으로. 그곳에는 빛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페네트라에게도, 나탈리야에게도 그 감각은 처음이 아니었다.

“방향은 알지?”

“대충 알아. 따라와.”

나탈리야는 이 어둠 속에 환각을 덧칠한다. 숲속의 오솔길이 눈앞에 그려졌다. 따스한 햇볕이 고요하게 뿌려지고 소리 내지 않는 동물들이 쉬고 있다. 페네트라는 살짝 미소 짓는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다만 문제는 내가 준비한 탈출 수단이 헬기여서 말이야.”

나탈리야는 손차양을 드리운다. 저 멀리 있을 헬기를 보듯.

“그게 이 날씨에도 뜰 수 있을지 모르겠네.”

“없다고 보는 쪽이 낫겠어. 대신 날씨가 변할 때까지 근방에 좀 머무르자. 나타샤, 가능하겠어?”

“갑자기 이곳에서 몸을 숨길 곳을 구해달라니. 대장, 그거 엄청 어려운 건 요청인 건 알지?”

“알아. 미안해.”

“그렇지만 할 수 있지. 나만 믿어.”

“늘 고마워, 나타샤.”

“뭐얼.”

나타샤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오솔길을 걸어간다. 순전히 방향을 표시하기 위한 목적의 길은 구불거리지 않고 직선이다. 먼저 앞서며 작은 노래를 부르는 나탈리야는 유쾌함을 되찾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모든 이미지는 나탈리야가 만든 환각이다. 페네트라는 그것을 속으로 되새기며 나탈리야를 따라간다. 다만 배가 당겨지는 감각이 심상치 않다. 페네트라는 이것이 불안인지 실제 감각인지 고민한다. 한참을 걸어 나탈리야가 공터에 다다라서 하늘을 가리킨다.

“슬슬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주변의 광경이 바뀐다. 숲이 사라지고 높다란 비탈길이 나타난다. 말간 하늘 아래 놓인 설산의 산등성이이다. 페네트라는 말없이 비탈길에 걸맞게 통과할 수 있는 영역을 조절한다. 나탈리야는 이런 사소한 장단에 맞춰주는 것을 좋아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산길을 올라간다. 얕게 쌓인 눈은 버석거리기만 할 뿐 발이 빠지지 않는다. 딱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만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무엇 하나 빠짐없이 현실로 착각할 만큼 생생하지만, 현실에 깃드는 고난까지 재현하지는 않았다. 페네트라는 지쳤고 나탈리야는 질렸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페네트라는 환각이 지워버릴 뻔한 감각을 감지한다. 습기였다. 밖의 비가 대지를 잔뜩 적셔서 생길 축축함.

“지상이 멀지 않았어.”

“그래?”

나타샤는 또 광경을 바꾼다. 통나무집의 벽이 그들을 둘러싸고 다락방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앞에 보인다. 나탈리야는 계단 옆의 벽을 짚고 페네트라를 만류한다. 달리기 시합을 갑자기 제안해버릴 것 같은 형제의 짓궂은 눈빛이다.

“내가 먼저 올라가서 확인해볼게. 대장은 여기 있어.”

“무슨…….”

그리고 페네트라가 만류할 새도 없이 계단을 올라가서 다락방으로 사라진다. 페네트라 또한 계단에 달려들었다가 곧 멈춘다. 망 좀 보겠다는 말일 테다. 그것을 왜 저리 급박하게 말해서 불안하게 만들까?

그리고 페네트라는 깨닫는다. 실제로 불안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페네트라는 욕설을 내뱉으며 바로 올라갔다.

나탈리야는 타브니트에게 붙잡혀 있었다.

 

 

 

헬리콥터는 격납고 안에 있었다. 페네트라는 언제 도달할 수 있을지 몰랐고,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격납고란 대체로 크기가 상당해서 숨긴다고 숨겨지는 곳이 아니다. 타브니트가 어떻게든 발견했다면 페네트라가 이곳으로 오리라고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테다.

페네트라는 머리를 내밀었다가 재빨리 숙여서 바닥 아래로 숨겼고, 타브니트의 사각지대로 이동했다. 그리고 타브니트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타브니트는 격납고 바닥에 나탈리야를 밀어붙인 상태였다. 페네트라는 품을 뒤졌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총기는 붙잡히는 과정에서 전부 빼앗겼다. 이런, 탈출할 때 나타샤에게 하나 달라고 하는 건데.

타브니트가 씩 웃으며 물었다.

“너네 리더는 지금 어디 있어.”

나탈리야는 붙잡힌 손목에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가 이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묻는다.

“내가 여기 있는데 누굴 찾아?”

연인 간의 다툼에서 등장할 법한 대사를 질투가 얹힌 듯 뱉는다. 타브니트의 웃음이 짙어진다.

“네가 여기 있으니까 그 녀석을 찾는 거지. 왜, 혼자 왔다고 주장할 셈이야?”

“그으럼.”

씨알도 안 먹일 소리여도 일단 우기고 봐야 한다. 나탈리야는 뻔뻔하게 군다. 타브니트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기가 찬다는 기색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노련하게 군다.

“그럼,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야, 나타샤? 날 보러 왔나?”

상황극에 불과한 상황일지라도, 매달리는 역할이라니. 나탈리야의 자존심이 반감을 표한다.

“글쎄, 네가 나를 보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지.”

나타샤가 있는 곳에는 페네트라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추격자를 갈라놓기 위해 둘이 떨어졌을까? 타브니트의 시선이 주위를 날카롭게 훑는다. 타브니트는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페네트라를 붙잡는 것. 하지만 나타샤와의 조우와 페네트라의 포획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선행될 문제인가?

그리고 생각은 현장에서 길어져서는 안 된다. 타브니트가 잠시 한눈을 판 사이 나타샤는 무릎을 끌어올려 타브니트의 허리를 매섭게 쳤다. 통증에 타브니트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나탈리야는 팔에 강한 힘을 주어 팔목 하나를 자유롭게 풀어냈다. 자유로워진 손은 총을 쥐었고 그것이 타브니트의 이마를 가리키는 데 걸린 시간은 2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타브니트는 곧 표정을 풀며 웃었다. 나탈리야가 강박적으로 유지하는 가면이 있듯 타브니트 또한 상시 여유로운 모습을 두르고자 한다.

“쏘려고? 그때처럼?”

“나쁘지 않지.”

나탈리야가 주위를 또 덧칠한다. 격납고의 휑하고 삭막한 광경이 지워지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내부가 된다. 관광객이 주로 보는 모습은 아니다. 며칠 동안 거듭한 전투로 유리는 깨지고 시트는 터졌으며 의자는 괴기한 방향으로 꺾이거나 비틀려있었다.

과거 이곳에서 나타샤는 산탄총 다섯 발을 타브니트의 면전에 갈겼다. 그리고 지금은 권총이 나탈리야의 손에 들려있다. 나탈리야는 엄지로 잠금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느슨하게 당겼다.

 

 

페네트라는 눈이 내리는 환각에 떨어졌다. 나탈리야의 능력이 발동되었음을 깨달은 페네트라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의 두 사람은 기차의 형상에 둘러싸여 있었다.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이 변화는 나탈리야의 생존을 증명한다. 페네트라는 눈 속을 달려 나갔다. 헬기를 이륙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격납고 밖으로 헬기를 끌어당기나? 아니면 격납고 천장을 개방할 수 있나? 그 장치는 어디에 있지?

곧 페네트라는 이 모든 고민이 쓸데없다는 걸 깨달았다.

 

 

 

타브니트가 부드럽게 속삭인다. 잠든 아이에게 그러는 것처럼 사근사근한 어조이다.

“그러지 마.”

“이제야 좀 두려워졌어?”

“아니, 네가 후회할 짓은 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거야.”

“그래? 나는 여기서 널 죽이지 않으면 후회해 버릴 텐데.”

“섭섭하네. 우리 사이를 잊은 거야?”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타브니트는 눈을 접으며 나탈리야의 뺨을 어루만진다. 나탈리야의 표정에 비웃음이 떠오른다.

“날 먼저 떠나버린 건 너란다. 천신교의 멍멍아.”

타브니트는 대답 없이 나탈리야의 뺨을 쓸어내린다. 처음에는 접촉, 부드러운 뺨을 살짝 눌렀다가 눈물을 닦아주기라도 할 듯 눈 밑을 쓴다. 그리고 조금 내려와 뺨을 감쌌다가 조금 더 내려가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그 표정은 진지하나 제 얼굴 앞에 총이 드리워진 자가 취할 행동치고는 괴상하다. 나타샤는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하지 말라는 소리도 하지 않는다. 평온을 유지한다. 이 역시 총을 겨눈 상대가 대상임을 떠올리면 이상한 광경이다. 이는 누구 하나 의문을 표하지 않음으로써 맞물리는 고도의 연극이다.

타브니트의 손이 나탈리야의 머리 뒤로 넘어가 뒤통수를 받쳐 든다. 그리고 제 고개를 숙인다. 총구가 가까워져 이마에 부딪힌다. 총구는 화약 연기를 뿜어내는 대신 그대로 밀려난다. 코가 맞닿을 만큼 가까워진다. 그 거리에서 타브니트가 작게 속닥거린다.

“내가 너를 잊지 않았다면 용서해 줄 거야?”

나탈리야가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벌린 순간 타브니트는 나탈리야의 고개를 훅 끌어당겼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이로써 나탈리야가 하려던 말은 영영 침묵 속에 갇히게 되었다. 숨이 잠긴다. 비에 젖은 입술의 표면은 차디차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뜨거운 혈액이 감돈다. 이 시대에 본래 육신을 보유한 자의 특권이다. 타브니트는 속의 온기를 끌어낼 때까지 깊게 탐한다. 나탈리야는 그 정도로 몸에서 힘이 풀리거나 눈을 느슨하게 감지는 않았다. 총을 떨어뜨리고 땅에 나뒹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노련한 스파이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 다만 환상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그 둘은 엉망진창인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아닌 텅 빈 차가운 격납고 바닥에 뒤엉킨다.

키스라니. 열기가 둘을 뒤섞는 감각 사이에서 나탈리야는 간신히 생각한다. 첫 키스라니. 바닥은 딱딱하고 차가우며 온몸은 기분 나쁘게 젖어있다. 상황은 굳이 따지자면 최악이었다. 나타샤는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고 허락할 생각도 없었고 이런 곳에서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첫 키스에 환상을 품는 소녀는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기준은 있었다. 적어도 이건 아닌데.

좀 더 아름다운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탈리야는 총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오랜 시간 후에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나탈리야가 중얼거렸다.

“개자식.”

타브니트는 여전히 여유로운 눈깔로 나탈리야를 내려다보았다. 나탈리야는 다시 말했다.

“너는 진짜 개자식이야.”

두 번째는 없었다. 나탈리야는 개머리판으로 타브니트의 머리를 후려쳤다. 타브니트는 옆으로 휘청거렸고, 나탈리야는 타브니트 아래서 완전히 벗어났다. 즉각 주변의 광경이 어지럽게 변했다. 발 하나 잘못 디디면 수백 미터 밖으로 떨어질 벼랑, 타브니트가 다룰 수 없는 물이 가득한 호수, 둘이 누워있었던 그니즈도의 체육관, 도심의 한복판, 북유럽의 새카만 숲, 폭음이 지배하는 전쟁터의 광경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타브니트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디가 땅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탈리야의 환각은 그만큼 현란하게 뒤바뀌며 정신을 빼놓았다. 타브니트는 겨우 바닥을 찾아 짚고 일어나려고 했으나 나탈리야가 옆구리를 퍽 차서 한번 나뒹구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그때 환각으로도 감출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의 거대한 프로펠러 소리였다. 방향이 어느 쪽이지? 모든 방향에서 울려 퍼져서 알 수 없었다.

“나타샤!”

페네트라의 외침이 내리꽂혔다. 타브니트는 머리를 잡으며 간신히 생각했다. 역시 페네트라가 여기 있었군. 끌어내려고 했는데, 부하와의 키스 정도는 안 먹히나?

헬리콥터가 두 사람을 치기라도 할 듯 가까이 달려들었다. 타브니트는 물론 환각으로 단련되어 있었지만, 실전을 거친 반사신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반사적으로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나탈리야는 펄쩍 뛰어 헬리콥터에 매달렸다. 페네트라는 나탈리야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운전대를 잡지 않은 헬리콥터는 기이하게 기울었다. 하지만 충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바닥이든, 격납고의 벽이든, 천장이든. 타브니트는 멀어져가는 프로펠러의 소리를 들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페네트라의 능력은 ‘통과’이다. 물리적인 장애물은 그 앞에서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추락할 수는 있겠으나 충돌하지는 않을 테니 어떻게든 날아오르겠지.

타브니트는 아직 환각의 폭풍 속에 있었다. 그는 인정했다. 이번 추적은 실패이다. 밖에 내리는 비를 아무렇게나 휘저어볼 수는 있지만 별로 의미는 없을 테다.

그러나 아무 의미 없었던 시간은 아니다. 타브니트는 제 입가를 손끝으로 훑어내었다.

 

 

 

헬리콥터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고 나서 페네트라는 나탈리야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나타샤, 괜찮아?”

나탈리야는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페네트라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듯했다. 헤드셋을 착용한 이상 소음 때문에 못 들었을 리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페네트라는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그 자식이 네게 무슨 짓을 했어?”

두 번째 물음에는 반응이 있었다. 잉크가 물속에서 번지듯 나탈리야의 표정도 변화가 생겼다.

“으응 별거 아니야.”

얄팍한 거짓말이었다. 페네트라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운전대를 잡은 이상 앞을 볼 수밖에 없었다. 나탈리야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가 페네트라에게 물었다.

“근데 대장. 혹시 봤어?”

페네트라는 답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듣지 못한 것처럼. 운전에 정신이 팔린 것처럼. 나탈리야는 대화도 들었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고 앞을 보았다. 그렇게 그들은 침묵하며 비 내리는 땅에서 차차 멀어졌다.

그들이 침묵했기에, 페네트라 또한, 아무도 없는 빈 격납고는 작은 목소리도 울리는 구조였다고 말할 기회를 놓쳤다. 나타샤가 묻는 보았냐는 그 순간에 눈 앞을 가리던 환각이 깨졌음 또한 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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