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스터디

8. 친구

한순간에 무너져버린 세상 속에서도 아침은 찾아왔다. 갑작스레 닥친 재앙을 피하고자 사람들은 그 어떤 건물보다 높은 성벽을 쌓아 올렸고 그 안에서 사회를 이뤄내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식량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을 했고 누군가는 아픈 사람을 도우며 하루를 버텨가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초능력자의 등장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시기가 온 적이 있었다. 흔히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던 그 모습 그대로, 손에서 불을 만들어내고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에 등장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나오게 된 원인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듯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탄압하고 그들만의 무리를 만들어 전쟁과 테러를 반복해 왔다. 많은 국가에서 이들을 탄압하고 제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뚜렷한 정책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 혼란이 가시기도 전에 재앙은 갑작스레 한 번 더 찾아왔다. 일부 생명체들 사이에서 발견된 이상 현상이 시작점이었다. 죽은 생명체가 변이를 일으키며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움직임도 처음엔 작은 소동물이나 식물에서만 발견된 현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것이 화근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돌연변이 세포가 사람에게 전이가 되기 시작하며 죽은 사람들도 살아 움직이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인간과 다를 것이 없지만 이미 부패가 진행된 신체, 그리고 부패하여 사라진 뇌 덕분에 이성은 물론 자아가 존재하지 않은 괴생명체가 탄생했다. 사람들은 이 괴생명체를 좀비라고 불렀으며 많은 이들이 좀비들의 존재를 피해 살아가고 있었다. 초능력자도, 비능력자도 모두 살아남기 위해 터전을 지은 곳이 바로 이 성벽 안의 세상이었다.

‘벌써 아침이구나.’

성벽 안에서의 아침은 전쟁도,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도 없었다. 아멜리아는 성벽 바깥세상의 좀비들과 자신을 위협하는 일부 초능력자들을 피해 이곳으로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과 살갑게 어울리며 다니진 않았다. 관심을 주는 것이 부담스러워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며 지냈다. 혹여나 이곳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두는 것이 전부였다.

아멜리아는 언제나 혼자서 지내왔고 그런 생활 패턴이 익숙해져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처음으로 기억이 시작된 곳은 미국 내 시골 마을에 위치한 보육원에서의 기억이었다. 보육원을 떠나 홀로서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으나 태생부터 초능력을 갖고 있던 아멜리아를 이용하려던 사람들만 가득했고 사람들에게 데이며 살아온 탓에 좀처럼 사람을 믿지 못했다. 좀비라는 존재를 마주하게 된 건 약 삼 년 정도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아멜리아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가방에 간단하게 짐을 정리해 두고는 숙소 한쪽에 밀어두었다. 멍하니 그 짐을 바라보다 숙소 밖으로 나와 햇볕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하늘은 투명하고 눈부신 곧 여름이 다가올 것을 알려주듯 햇살이 따뜻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멜리아는 많은 생각에 잠겨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찬란하고 눈부신 여름이라는 수식어도 이제 옛말에 가까웠다. 당장 닥쳐진 재앙을 앞으로 어떻게 헤쳐 나갈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갈 미래를 떠올리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나왔네….’

머리를 식힐 겸 나왔는데 도리어 생각이 많아져 한숨만 늘어갔다. 차라리 낮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앗! 안돼!”

 빠른 속도로 날아온 공을 피한 뒤 소녀는 자신을 부르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꼬마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 공놀이를 하다 공을 잘못 날린 듯했다.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을 주워 다시 자기네들끼리 놀이에 집중하듯 바쁘게 떠났다.

놀람도 잠시, 다시 공허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이 떠난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그때 자신의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분홍빛의 양 갈래에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소녀가 좀 전에 공을 주워가던 아이들을 데리고 아멜리아 앞에 나타났다. 아멜리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분홍 머리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꼬마들을 향해 잔소리하듯 말했다.

“얘들아, 노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했으면 사과하는 게 맞겠지?”

“네…. 미안해요.”

“그래. 이제 가서 놀아도 돼. 조심하고!”

아멜리아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공이 날아온 상황을 목격하고 급하게 달려온 것으로 생각했다. 분홍빛의 소녀는 아멜리아를 발견하고는 친근하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 미안해. 많이 놀랐지?”

소녀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듯 말했다. 소녀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같이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좀비 사태나 초능력자 범죄조직에 휘말려 부모를 잃고 길거리에 앉게 된 고아였다. 아멜리아는 사연을 듣고는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이 시점에 다른 아이들을 돕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거다.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네. 내 이름은 루 라고해! 너는?”

“아멜리아….”

“오, 잘 부탁해. 편하게 멜이라던지 리아라고 불러도 돼?”

“상관없어. 편하게 불러.”

루의 다정한 반응과 비교될 만큼 아멜리아의 반응은 무반응에 가까웠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여태껏 자신에게 친구라고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이용하기에 바빴던 사람들뿐이었다.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며 상처를 입을 바에는 차라리 저들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었다. 아멜리아의 눈에도 루는 경계해야 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루는 그런 자세한 속사정까지 알 리가 없었지만.

선을 긋는 아멜리아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던 루는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고 적당하게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계속 아멜리아의 곁에서 머물렀다. 아멜리아 역시 자신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루를 굳이 밀어서 내치진 않았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계속 대화를 나눴다. 물론 일방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쪽은 루에게 있었고 아멜리아는 대체로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혹은 몇 가지 질문에 대답만 하곤 했다. 

“멜! 그럼, 여태 혼자서 지내고 있었던 거야?”

“응….”

루의 말에 아멜리아는 대꾸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부터 혼자서 지내는 것이 익숙했던 터라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어색했다. 아멜리아는 이 상황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쯤이면 사람들이 피곤해하며 떠나가기에 바빴는데 어째서인지 루는 먼저 대화를 꺼내고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찮으면 우리 같이 함께할래?”

“같이….”

“물론 너만 괜찮다면!”

루는 가볍게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좀 전에 뛰어놀던 아이들을 보러 가야 한다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해맑은 표정으로 아멜리아에게 인사하고는 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멜리아는 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동안 자리에 앉아 가만히 있었다.

그가 말한 친구라는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누군가를 믿어본 적도, 누군가에게 의지해본 적도 없었다. 만난 사람마다 자신을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버리기에 바빴다. 그런 삶을 살아온 자신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 있다면 정말 든든할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믿어도 될까….’

여전히 사람이라는 존재는 늘 어려웠다.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과 사람이 만들어낸 깊은 불신과 그로 인한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이 그리웠다. 함께하지는 못해도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멜리아는 긴 한숨을 허공에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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