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가 오는 날
공미포 4,267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르던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먹구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듯 하늘에서는 비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길거리의 많은 사람이 비를 피하기 위해 자기 집으로,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온종일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베니는 방에서 은은한 등불에 의지해 책을 읽어가고 있었다. 평소에 책을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눈앞에 보이는 책을 대충 하나 꺼내 읽는 시늉이라도 해볼 모양이었다. 책을 읽던 도중 머리가 거슬리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책을 잠시 내려놓고는 날개뼈를 덮을 만큼 긴 분홍빛의 장발을 깔끔하고 편하게 묶어 위로 말아 올렸다. 머리는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지만 이상하리만큼 마음 한쪽은 영 그러질 못했다.
‘난 비 오는 날이 진짜 싫어.’
결국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오는 날을 싫어하는 이유는 답답하게 내려앉은 공기의 무게도 있었지만 베니의 친부모가 세상을 떠나던 날, 모든 것이 떠내려갈 듯 비가 내리던 기억이 있었던 탓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잠깐 눈을 붙이자는 생각에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을 청했다.
화창하고 맑은 어느 날, 엘레노어의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베니라고 지어 애지중지 키웠다. 베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고 대범했으며 저 나름대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골목대장을 자처하기도 했다. 처음 보는 아이들과도 잘 어울렸고 특히 또래 여자아이를 괴롭히는 남자아이를 그렇게 지독하게 괴롭혔던 아이가 베니였다.
“너희 둘 또 싸웠니?”
“얘가 먼저 잘못했어요! 친구를 괴롭히길래 등짝을 좀 때려준 것뿐이라고요!”
베니의 싸움에는 언제나 이유가 그러했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항상 발길질을 서슴없이 날리던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또래에서는 누군가는 베니를 지독하게 싫어했을지언정 대부분은 베니를 좋아했을 만큼 인기가 상당했다. 네다섯 살쯤 되는 아이가 그러하다면 누가 믿겠냐만 적어도 그는 예나 지금이나 강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강한 성격은 타고났었다.
꿈에서 장면이 한차례 바뀌었다. 비가 지독하게 내리던 날, 일곱 살이 되던 시기였을 거다. 정체 모를 사람들이 자기 집에 들어오고 그날 부모님이 살해당했다. 침대 밑 밖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을 수납공간 안에 베니는 들키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사람들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베니는 그 안에서 곤히 잠들었다.
그날 밤 간신히 살아남았던 베니는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참사를 보며 목놓아 울었다. 부모님은 비가 오는 날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갈 곳이 없던 베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끌려 성당에 위치한 보육원에 입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입소한 지 고작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한참을 달렸다. 칠흑같이 내린 어둠을 뚫고 베니는 아무 생각 없이 내달렸다. 고아원의 모습을 쳐다보기 싫어 미친 듯이 달렸지만, 목적지가 없었던 탓에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흐린 날씨에 달도 보이지 않아 숲은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또 비가 오네….’
베니는 우연히 발견한 동굴에서 겨우 비를 피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도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선천적으로 마력이 어느 정도 타고난 덕에 자그마한 불씨 하나를 만드는 건 가능했었다. 주변에 나뭇가지들과 태울 것들을 모아 불을 붙이고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한기가 가득했던 몸에 온기가 맴돌자 그제야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켜주던 가족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전투력을 가진 것도, 마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과 암흑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공포심이 자신을 옥죄어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누르며 눈물을 참으려 애를 썼다.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시간이 흘러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거기 누구십니까?”
한참 눈물을 닦으며 울음을 억누르던 그때 동굴 밖에서 잔잔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행여나 자신에게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은 아닐까 베니는 급하게 마법으로 불을 끄고는 숨을 죽였다. 자신의 행적이 들키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떨며 이를 악물었다.
“어?”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죽였지만 목소리의 주인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 순간 베니는 극도로 치달은 공포심에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자신보다 큰 키에 어둠에서 유독 더 밝게 빛나는 초록색의 눈빛은 먹잇감을 찾은 맹수처럼 보이는 듯했다.
“혹시 길을 잃으셨습니까?”
이후에 들리는 자상한 어투의 질문에 베니는 그제야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떨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짊어지고 있는 가방에서 간단하게 먹을 것과 물을 건네주었다. 긴장을 너무했던 탓이였는지 베니는 추위를 느끼며 떨기 시작했다.
남자는 허공에 손짓하더니 익숙하게 마법으로 불을 지피고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베니에게 덮어주었다. 온기가 밀려들자 그제야 편안해진 듯 멍하니 자신에게 도움을 준 남자를 바라보았다. 갈색빛이 도는 꽁지머리에 왼쪽으로 조금 더 가르마를 한 단정한 머리에 검은색과 초록색의 오드아이를 한 남자였다. 미묘하게 아름답지만 날카롭고 차갑게 생긴 모습과는 달리 다정한 태도가 의외로 다가왔다. 남자는 불을 지피고 주변을 정리를 마친 후 그제야 말을 걸었다.
“길을 잃으셨다고 했죠. 어디로 가던 중이었습니까?”
“갈 곳은 없어요. 도망친 거에요.”
“도망이라고요?”
“저기 보육원에서 나왔어요. 적응하기 힘들어서..”
베니는 손가락으로 자신이 도망쳐온 보육원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어차피 외지인이라면 이곳의 지리를 잘 모를 것이기 때문에 대충 알아들으라는 뜻이기도 했다. 사내는 무표정으로 베니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는 ‘베니 엘레노어’에요. 베니라고 불러주세요.”
“남부에서 온 ‘레카 스피릿’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름 알려줘서 고마워요, 베니양.”
“그냥 편하게 불러요. 누가 봐도 그쪽이 한참 어른처럼 보이는데요.”
긴장이 풀리고 서서히 체력을 되찾은 베니는 평소에 그러했듯 당돌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여전히 많이 지친 상태라 힘든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별수 없었다. 레카는 작게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시야와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베니는 레카의 행동을 빤히 지켜보았다. 조금 전에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분명 마법을 쓰던 것 같았다. 베니는 그에게 마법사냐고 물었고 레카는 가만히 고민하는 듯하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마법사예요?”
“결론만 말하면 그래. 반은 맞고, 반은 틀리고.”
“뭐야, 무슨 말이에요.”
“자세하게 말하는 건 좀 그래.”
두루뭉술하게 들려오는 답변에 소녀는 반쯤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의문이 풀리지 않은 채 궁금한 것은 딱 질색인 모양이었다. 레카는 미소를 지으며 베니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대답을 해줄 생각은 없었으나 워낙 베니가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 탓에 레카는 포기한 듯 두 손을 들며 알았다며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기로 했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난 인간이 아니야.”
“누가 봐도 인간처럼 보이는데요?”
“그럴 수밖에. 모습을 바꿨으니까.”
본래 레카는 자신의 본모습을 남에게, 특히 인간에게 드러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워낙 집요하게 물어봤기에 어쩔 수 없이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손목에 차고 있던 금색 팔찌를 벗고는 자신의 마력을 해방해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뱀의 눈을 닮은 동공과 머리에는 칠흑같이 어둡고 날카로운 두 개의 뿔이 자라났다. 그의 몸체만큼 큰 박쥐 모양의 날개와 뱀을 연상케 하는 긴 꼬리를 보여주며 자신의 정체를 보여주었다.
“이게 진짜 내 모습이야.”
다정하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베니를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의 진짜 모습을 보면 겁을 먹거나 죽이려고 달려들곤 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자기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어린아이라 자기 모습을 보고 지레 겁을 먹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베니는 신기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와! 신기해!”
“안 무서워?”
“뭐가 무서워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멋지다!”
되려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며 신기한 듯 자기 모습을 빤히 쳐다보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며 안도감이 드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레카는 고개를 돌려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수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먹으면 차원 이동으로 가면 된다지만 베니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럴 수 없었다.
“베니, 갈 곳이 없다고 그랬지?”
“네…. 그렇다고 다시 보육원으로 가긴 싫어요.”
“그럼 당분간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건 어때?”
“음, 좋아요!”
졸음이 몰려오는 탓에 베니는 한쪽에 누워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모닥불에서 나오는 온기를 삼아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뜬 베니는 자신이 보았던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꿈이구나….’
잠깐 엎드려서 잔 것 같은데 꽤 시간이 흘러간 듯했다. 어깨에 묘한 포근함이 함께 느껴져 어깨를 만져보았다. 잠들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담요가 덮여있음을 느낀 베니는 하품을 크게 몇 번 하더니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창밖에는 비가 그치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내려앉았다.
문을 열고 방을 나온 베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레카를 발견했다.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낀 듯 책을 읽던 레카는 고개를 돌려 베니를 바라보았다.
“곤히 잠들어서 깨우진 못했는데 잘 잤어?”
“응. 자고 일어나니까 개운하네.”
자신에게 담요를 걸쳐주고 간 사람은 레카였는 듯했다. 베니는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레카는 베니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잭 찾는 거야?”
“어. 안보이길래….”
“지금 자고 있어. 시간도 자정을 넘겼으니까.”
베니는 그의 말에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오빠는 안자고?”
“아, 이거 조금만 읽고 잘 생각이야.”
레카는 손에 든 책을 보여주며 대답했다. 베니는 문득 꿈에서 본 장면이 생각났다. 꿈에서 본 것처럼 그를 따라 이곳에 정착한 지도 어느덧 십 년 하고도 일 년이 더 지났다. 편히 지내다가 언제든지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고 했던 그의 말과 더불어 괜찮다면 가족처럼 생각해도 된다는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갈 곳이 없었던 그에게, 가족을 잃고 방황하던 시기에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어 준 것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마워….”
“응? 뭐가?”
“어? 아냐. 아무것도….”
베니는 괜히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빠른 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걸어가 물을 마시고는 다시 뒤를 돌았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 아직 잠들지 않은 레카에게 괜히 장난을 치고 싶지만 꿈에서 본 기억 때문에 차마 그러진 못했다. 대신 일찍 자라는 잔소리와 함께 방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비가 오던 그날 맺어진 인연으로 지금까지 함께해온 레카에게도, 그리고 잭에게도 베니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결론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비가 오는 날이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는 걸로 결론을 내리며 베니는 침대에 몸을 뉘고 잠을 청했다.
‘그래, 우리는 가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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