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란쇼] 브루클린의 음악가

*시공간적 배경은 적당히 201n년 무렵 미국, 뉴욕입니다.‪

*쇼이치가 뮤지션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두 번째 타임 트레블은 일어나지 않았던 시간선을 다루고 있습니다.

* 부제는 ‘이리에 쇼이치 외전’이지만, 본편이 존재하는 글은 아닙니다. (굳이 말하면 원작이 본편이다.)

*삽입된 이미지는, 적당히 구글에서 긁어온 것들입니다….

기반이 되는 원문트윗은 여기.


브루클린의 음악가

— 이리에 쇼이치 외전

백란X이리에 쇼이치

디서피어. 씀.


뉴욕시의 지도. 한가운데 샛노란 구역이 맨해튼 그 아래의 녹색 구역이 브루클린이다. 두 지역을 잇는 맨해튼교와 브루클린교는 인상적인 포토스팟으로 유명하다.

예부터 미국에서 예술가의 거리라고 하면 소호와 첼시를 꼽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명성이 불러들인 자본은 저렴했던 거리의 집값을 맨해튼 중심가의 마천루까지 끌어 올렸고, ‘소호-첼시’의 치솟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한 가난한 예술가들은 언젠가부터 맨해튼을 떠나 강 건너 브루클린에 새로 터를 잡기 시작했다.

미술 분야는 아니었지만, 이리에 쇼이치의 사정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음악으로 성공하겠다며 미국으로 넘어온 그는, 맨해튼 중심가와 인접하나 상대적으로 집값이 저렴하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인맥을 쌓기 좋다는 유학생 커뮤니티의 설명을 보고 소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젠 그 또한 젠트리피케이션의 수많은 희생자 중 하나가 됐다.

그나마 석달 쯤 전부터 지역 예술과들과 협업해 거리 예술 프로젝트 중 하나에 이름을 올리나 싶었는데, 눈물을 머금고 그 거리를 떠나야 하는 신세다.

하지만 가진 거라곤 등에 멘 기타 하나 뿐인 쇼이치에게 그 외 다른 수는 없다.

안 그래도 가난한 유학인 형편에, 이 이상 성미가 고약한 집주인에게 감당 못할 월세를 뜯기는 일은 사양이다. 그렇다고 소호의 길거리로 나앉자니, 평범한 일본의 가정집에서 아늑하게 자라온 그에겐 그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쇼이치는 등붙이고 누울 곳이 있어야 음악을 하든 말든 한다고 생각하는 성미의 사람이었다. 결국 소호가 아닌 더 저렴한 지역으로 잠잘 곳을 옮기는 수 밖에.

마침, 그런 그의 사정을 알고, 먼저 소호를 떠났던 지인이 방이 하나 비었다며 저렴한 가격에 룸쉐어를 제안했다. 쇼이치로서는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소호에도 겨우 적응한 쇼이치는 갑자기 맨해튼이 아닌 브루클린으로 주거지를 옮겨간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 막심했다.

이래저래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쇼이치는 지인에게 요즘 브루클린의 치안은 좀 어떻냐는 질문부터 했다.

“아직은, 괜찮아”

“…… 그거 멋지네.”

말끝은 간신히 웃음기를 머금었으나, 길게 이어진 침묵 속에 한숨이 섞여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걸 눈치 챈 지인은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브루클린도 다 사람 사는 곳이라 이야기 했지만, 쇼이치에게 그다지 위안이 되지는 못했다.


그렇게 대세를 따라 물흐르듯 활동지를 옮겨간 쇼이치가, 근 몇 달 동안 일하게 된 곳이 브루클린 보럼힐 지역의 골목 어귀에 있는 조그마한 술집 ‘엉클 척(Uncle Chuck)’이다.

그는 ‘엉클 척’ 구석에 마련된 조그마한 무대에서 주 3일(월, 수, 금), 늦은 오후부터 저녁까지, 오래된 재즈 기타를 홀로 연주했다. 이따금 노래도 불렀다.

트랜디한 바(Bar)라기 보다는 올드스쿨에 가까운—그 전형적이고 클래식한 인테리어를 보고있노라면, 뉴욕에서 찾을 수 있는 베이비 부머들의 몇 남지 않은 정신적 고향에 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술집이었던 탓에 연주되는 노래는 대체로 느긋한 보사노바 리듬의 곡이나 재즈 정도였지만.

’엉클 척(Uncle Chuck)’ 소유의 재즈기타. 쇼이치는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는 가게의 기타를 나름 좋아했다.

수준급 실력을 가졌다고 자칭할 만큼은 못되었으나, 그렇다고 쇼이치 스스로 생각하기에 영 못들어줄 수준의 연주 실력도 아니었다.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무난한, 그가 일하는 그냥저냥한 동네 술집에서 듣기엔 적당하다 싶을 정도. 특출나지도 않았고 형편없는 것도 아닌, 브루클린의, 뉴욕의 술집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 정도의 실력이다.

이따금 쇼이치는, 제 몫의, 벽돌이 드러난 작은 방 안의 삐걱이는 철제 침대에 누워, 제 특출나지 못한 음악 실력에 대해 생각했다.

‘이것마저 출신지의 신조를 따라가는 것일지도 모르지.’

라고.

나미모리 주민이라면 누구든 그 작은 동네를 떠날 때까지 듣게 된다는 나미모리 중학교의 교가. 심지어 쇼이치처럼 나미중 출신이 아닐지라도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길거리와 술집 라이브긴 했지만, 연주 경험도 적당히 쌓았겠다, 얼마 전부턴 커버곡이 아닌 자작곡을 써서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려보기도 했지만 아직 큰 반향은 없다. 어쩌면 영원히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렴, 모두가 너바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또 이따금, 미국으로 건너온 지 벌써 3년째인 쇼이치는, 브루클린-고철-대교 위에서 드넓은 강을 바라보며 지금이라도 그럴듯한 음대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하는 건 아닌지 하는 고민에 빠지곤 했다.

다리 너머의 화려하기 짝이없는 맨해튼—그 장소는 그야말로 현대 자본주의 예술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다.—의 풍경을 볼때면 그런 감상은 더 깊어졌다.

아직 젊은 그의 나이를 생각해 봤을 때, 그건 때늦은 방황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쇼이치가 정말 미국의 음대에 간다면 당분간 음악은 관두고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에 전념해야 한다. 그의 집이 그럭저럭 먹고 살 수준은 된다 하더라도, 이제 와서 본가에 학비를 대달라 하는 것은 그도 염치 없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음대를 나온다 해서 음악적으로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가 하고자하는 음악도 아주 클래시컬한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대 들어가자고 음악을 관두고 다른 아르바이트라니. 그야말로 주객전도지.‘

그러다 보니 결국 현상 유지일 수 밖에.


쇼이치는 해가 서쪽으로 살짝 기울기 시작할 때 쯤, 2차 세계대전 무렵 지었을 것만 같은 구식 타운하우스에서 어슬렁 걸어 나왔다.

그는 이따금 공동현관 아래의 금이 간 회색 계단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앉아 있는 아랫집 아이—멕시코에서 온 아이였는데 따라서 쇼이치가 아이와 나눌 수 있는 대화라고 해봐야 짧은 인사가 전부였다—와 인사를 했고, 1년이 다 되어 가도록 보수되지 않는다는 다 부서진 회색 인도를 따라 술집 ‘엉클 척’으로 향했다.

어깨엔 그가 미국땅을 밟은 이후 단 한 순간도 떼어 놓은 적 없는 기타가 함께다. 비록 '엉클 척'에서 그의 기타를 꺼낼 일은 거의 없었지만, 

바로 그 기타,

쇼이치의 어깨에 걸린 그 새하얀 바디의 기타야 말로 다른 사람들의 눈엔 영락없는 이방인인 쇼이치를 뮤지션으로 비치게 해주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척, 저 왔어요.”

“어, 쇼이치 왔는가.”

사장인 ‘척’—중국계 남성으로, 본명은 아니었으나 모든 손님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이 반갑게 그를 맞았고, 쇼이치는 습관처럼 라거 한 잔을 주문한 뒤 가게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자신만의 무대로 올라*갔다.

(*겨우 가게 바닥에 비해 한 단 높은 것이 다인 좁은 무대였으나, 쇼이치는 마호가니 목재로 만들어진 가게 바닥에서 십 몇센치 가량 높은 그 무대를 언제나 ‘오른다’고 표현했다.)

조도 낮은 노랗고 주황빛의 조명이 술집 답게 어두컴컴한 가게 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저녁인가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가게 밖은 늦은 오후의 태양이 여전히 서쪽 하늘에서 거리의 한가한 이들을 위해 따뜻한 빛줄기를 비추고 있다.

그러니, 쇼이치가 있는 가게 안은 밖과는 단절된 마치 다른 세상만 같다.

오후 4시부터 술집 테이블에 앉아 벌써부터 취해있는 두어명의 예술가 양반—모두가 실제로 예술가인 것은 아니나 사장인 ‘척’은 이들 모두가 각자 자기 삶의 예술가라고 표현했다. 쇼이치도 어쩐지 그 표현이 마음에 들어 이 술집의 손님들을 전부 예술가라 칭하는 중이었다.—들을 위햐 쇼이치는 예정된 음악을 연주했다.

주인장의 필수 선곡들 몇 개를 마무리하면, 쇼이치는 이 술집의 유일한 피아니스트와 잠시 교대해 휴식을 취한 뒤 이어서 자작곡을 선보이기도 하고, 지신이 그날 기분에 따라 선택한 곡들을 이어 연주하기도 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주 기분이 좋은 날에는 손님의 요청곡을 연주하는 날도 있었다.

작은 브루클린의 술집 엉클 척 안에서 오늘도 어김 없이 익숙한 레퍼토리로 시작하는 재즈 음악이 울린다.


쇼이치가 근무하는 술집의 주소비자층은 그와 마찬가지로 인근의 ‘아직’ 출세하지 못한 예술가들이다. 그들 중 몇몇은 쇼이치에게도 익숙한 이들이었고—소호에서부터 알던 이들도 있었고, 이곳에서 일을 하며 알게 된 단골들도 있었다.—나머지 몇몇은 아주 처음보는 얼굴들이었다.

대체로 후자의 사람들은 얼마 가지 않아 가게 뿐 아니라 동네에서도 자취를 감추곤 했기 때문에, 쇼이치는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늘 가게가 오픈하자마자 바 테이블 쪽에 앉아서, 고주망태가 된 상태로 사장 ‘척’과 이야기 중인, 턱수염을 인상적으로 기른 남자도 이 가게의 오랜 단골이다.

그는 어제 새벽 길가리에서 ‘자본의 결탁으로 인한 순수예술의 종말’ 같은 소리를 고성방가로 떠들어대다, 결국 이웃집의 신고를 받고 온 뉴욕경찰에게 경고를 받은 대단하신 양반이었다.

‘다행히 저 양반 불법체류 신세는 아니었나 보더라고.’ 그 손님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척’이 허허 웃으며 쇼이치에게 한 말이다.

아무튼 그런저런 처지의 단골들이 주류인 술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엉클 척’에 며칠 전부터 매일같이 출석 도장을 찍는 YB*가 있다.

(*사장 ‘척’이 그 새 손님을 부르는 별칭이다. Young Boss의 두문자를 딴 것으로, 보나마나 할 것 없이 백란을 가리킨다. 이 곳에서의 백란은 젯소나 밀피오레의 보스는 아니지만, 노련한 사업가들은 이따금 손님의 진면모를 알아보기도 하는 법이다.)

아니 정확히 이야길 하자면, 그 손님은 적어도 쇼이치가 가게에 출근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낯선 손님에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쇼이치였으나, 그 손님은 그런 무심한 쇼이치의 시선을 잡아 끌 정도로 눈에 띄는 겉모습을 가졌다.

YB라 불린 손님은 이 근방 예술가들—그러니까, 이리에 쇼이치를 표함해서—의 후줄근한 차림과는 거리가 멀었고, 술이나 약 혹은 우울에 빠져 구부정한 자세의 신인류가 된 그들과는 달리, 낯선 손님는 이런 종류의 술집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곧은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술집 조명 아래서 주황빛으로 물드는 순백색 머리칼도 충분히 눈에 띈다고 해야하겠으나….

아무튼 그 남자에 대한 쇼이치의 인상은 ‘이질감’이라는 단어 하나로 축약되겠다.

아무리 봐도 이런 술집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남자는 아니었다.

그 손님은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 6시가 다 되어 갈 때 쯤 가게에 도착했다.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던 쇼이치가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 기타를 연주하려던 순간이다.

​쇼이치로서는 그 얼굴을 오늘로 이주째 보고 있기도 했고, 오늘따라 가게에 평소보다 손님이 적었던 탓에, 이번엔 그 ‘YB’와와 적당히 인사를 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얼굴을 보게 되는데 이런 조그마한 술집에서 언제까지고 서로를 아주 모른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또 새로운 엉클 척 단골의 탄생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쇼이치는 ‘엉클 척’의 문을 망설임 없이 열고, 안 어울리는 구둣발로 가게에 들어서는 남자를 향해 어색하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나, 분명 눈이 마주쳤다 싶었는데, 그는 쇼이치의 머뭇거림 가득한 인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물론 이국 땅에서 당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닌 쇼이치는 남자가 자신을 일부러 무시했을 가능성도 제외하지는 않았다.—바로 고개를 돌리곤 대신 주인장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뭐 이것도 항상 겪는 일상적인 일인가.’

이런 술집의 ​무명 뮤지션에게 관심을 두는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다. 처음에야 보란 듯이 성공해서 다들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높은 포부를 가지도 했지만, 뉴욕 생활 3년차인 쇼이치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는 알고 있다. 때문에 쇼이치는 자신이 건넨 인사에 대한 화답이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자리에 앉아 기타를 무릎 위에 올린 뒤 다시 자신만의 무대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른 세계의 내가 가진 지식과 기억, 그리고 감정이 쉼없이 공유된다.

나의 몸은 독립된 각각의 세계에 수만으로 나뉘어 있으되, 나의 정신은 각각 분절되지 못한 채 오로지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나의 사고가 내가 실제적으로 겪지 못한 수많은 실존적 경험의 총체임과 같다.

그러므로, 네가 마주 보는 것은 ‘나’이되 내가 아니며, 지금 네게 말을 거는 ‘나’는 언제나 나로 오롯할 것이다.


백란은 이미 수많은, '최초의 어떤 사건'에서 끝없이 파생되어나간, 거의 모든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 넣었다.

​지금 딛고 선, 이 평범하고 한심한 세계 또한 그는 손에 넣을 방법을 쥐고 있는 상태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를 위한 마지막 작동 버튼에 손을 올리는 일만이 남았다.

이 세계는 다른 세계와 비교하여 특출난 것은 없는 곳이다. 그에게 신선한 재미를 선사해줄 사람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백란은 자신이 바라는 결말에 있어 마지막 변수가 되어줄 세계를 이 곳이 아닌, 조금 전 ‘그 남자’가 온화한 얼굴의 사와다 츠나요시를 망설임 없이 차가운 시신으로 만들어 버린 세계일 거라 짐작하고 있다. 그 세계의 ‘쇼쨩’은 분명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으니까.

​그 곳의 이리에 쇼이치가 세운 계획이 무엇일지는 그도 어느 정도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그 계획이 불러들일 후폭풍이 조금 쯤 기대도 됐다. 하지만 이 세계의 백란까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들이닥칠 미래에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다.

아무튼 이미 대부분의 페러렐 월드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진 상황에서, ‘쇼쨩’의 기발한 계획으로 인해, 백란은 ‘그 세계’를 가장 마지막으로 손에 넣을 세계로 정했다.

따라서 지금의 백란이 딛고 선, 이 ‘거대한 위협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는 아늑하기만한 땅’은 그가 최종장*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 세이브를 마친 뒤, 남아있는 사이드 스토리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들린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백란에게 있어서, 마지막 남은 세계, 즉 10년 전 츠나요시 일행이 ‘본고레링’을 가지고 도착하는 세계는, 단순히 세계를 모두 멸망시키는 것을 넘어 그가 최종적으로 목표했던 것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 있는 세계이기도 했다.)

이름하여, ‘이리에 쇼이치 외전’이다.

백란은 언젠가 이 세계를 찾아내, 몹시 즐거워하며 그런 이름을 정해 두었다. 잊어버리지 않게끔, 잃어버리지 않게끔, 그만 알아볼 수 있는 태그도 함께 붙여 놨다.

그렇게 백란은, 최종장의 엔딩을 보기 전 모든 스토리를 수집한다는 명목 하에, 이주째, 도무지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엉클 척’에 방문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창가 쪽의 3인 테이블을 홀로 차지하고 앉았고, 또 언제나 상당히 유쾌한 태도로 버드와이저와 적당한 사이드 디쉬를 주문했다. 이따금 주인장 ‘척’과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그는 대체로 아무 말 없이 딱딱하고 조금은 삐걱이는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제 몫의 술을 마시며 시간을 죽였다.

그렇게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엉클 척’의 유일한 기타리스트가, 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전부 끝이 나,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하면, 백란도 어김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가게를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백란의 목적은 애초부터 술이나 음식, 혹은 하찮은 예술가들과의 설움 나누기 따위가 아니라, 이 술집의 무명 기타리스트 이리에 쇼이치였으므로.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앉은 백란은, 똑같은 버드와이저를 마시며, 나무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삐딱하게 턱을 괴고, 어쩐지 조금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의 음악에 심취한 쇼이치를 바라보았다.

눈 앞의 남자는, 그 초라한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자신’이 시도한 ‘두 번째의 시간 여행’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를 모르는 태평한 남자였고, 따라서 죄없는 청년*이었다.

(*두 번째 시간 여행 후 자신이 백란을 각성시켰다는 걸 알게 된 쇼이치는, 멸망에 이른 세계에 대해 속절없이 최잭감을 느끼곤 했다. 한편 그런 그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꿰뚫고 있던 백란은, 쇼이치의 미련하기 짝이 없는 양심을 바라보며 이따금 홀로 조소했다.

지금 백란이 아무 것도 모르는 눈 앞의 그를 두고 ‘죄없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 또한 그런 조롱에서 기인한다.)

​백란은 쇼이치와 만나지 않았더라도, 이 세계의 사고를 자칭하는 자들은 자신을 찾아냈을 것이고, 그가 짓밟은 수많은 세계가 맞이한 결말 또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다.

여겼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 그때, 브루클린의 작은 술집 ‘엉클 척’에서 이리에 쇼이치가 ‘얼터너티프 록에 가까운 장르의 그의 자작곡’을 조심스럽게 부르기 시작했다. 낯설었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은 곡이었다. 쇼이치의 무릎 위에는 그가 뉴욕에 온 이후로 한 번도 떼어 놓은 적 없다던 새하얀 바디의 기타가 올라온 채였다.

백란은 쇼이치에게 나름의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나서 자신이 존재를 작각한 이래로, 내내 세상에서 한 겹 유리된 심정으로 살아가며, 그 누구와도 진실된 관계를 형셩하지 못하고, 나아가야 할 길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까닭에, 홀로 부유하듯 그저 살아가고만 있던 그다.

비록 의도치 않았다 할지라도, 그런 그의 손을 맞잡아,

스스로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게끔, 각성이라는 이름의 방아쇠 위에 올려놓아 주었던 사람이 다름아닌 쇼이치였던 까닭에,

백란은 무지한 중학생의 이리에 쇼이치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감사함은 너무나 얄팍한 감정이어서, 모든 세계를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 넣는다는 백란의 비이성적 계획에 차질을 줄 정도는 되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그것은 지금껏 백란이라는 존재가 살아오며 가져 본 몇 없는 진심어린 감정 중 하나였다.

따라서 백란은 그 감사함을 담아, 이 세계를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두고 있었다. ‘나를 탄생시킨 내 작은 은인이, 바라왔던 꿈을 이룬 세계’를 최종장으로 가기 직전 들릴 마지막 환승역으로 삼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그만 알아볼 수 있는 태그를 달아 책상 한 구석에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있었다.


아직은, 눈을 감았다 뜨는 것만으로 충분히 다른 세계의 자신과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던 백란은,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귓가에 낯선 기억 속의 젊은 뮤지션이 조심스럽게 부르는 노래가 맴돌고 있는 것을 느꼈다.

조용해서 아무 것도 없는 방에서 홀로 느긋하게 그 음을 흥얼거리던 그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뮤지션에게 보낼 새하얀 꽃을 주문할 계획을 세운다.

남아있던 사이드 스토리는 전부 읽었다. 더는 지체하지 않아도 좋다. 이만큼 여유를 부렸으면 이제는 충분할 것이다.

백란은 낯선 기억 속 술집을 떠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외전을 지나 마지막 남은 최종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지난 밤 내게 멋진 음악을 들려준 것에 대한 보답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새하얀 꽃다발이면 충분하겠지, 쇼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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