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기의 끝

평행세계를 보아도 외로운 건 어쩔 수 없어서 한번 더 친구가 되고 싶어.

“까놓고 말해서 잔저스 군, 너는 지금 무진장 손해 보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야.”

남자는 오래 사귄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말을 거는 사람은 보통 사이비 종교에 심취해 남까지 그 수렁으로 끌어들이려 온종일 길가에서 서성거리는 광신도이거나 혹은 착용하기만 해도 기력이 늘어나고 머리가 영민해진다는 수상쩍은 돌 팔찌를 강매하는 사기꾼이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나 이 쓰레기가 지금 와서 그런 먹잇감이 필요해 직접 영업을 다니지는 않을 텐데. 허물없는 태도에 잔저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저와 이 하얀 악마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지 않나 기억을 더듬어보기까지 했지만 짚이는 곳은 없었다. 이름과 얼굴이라면 익숙하다. 저 남자는 현재 잔저스 자신이 속한 봉골레 패밀리에게 있어 가장 위협이 되는 적대 패밀리의 수장이었으니. 밀피오레 패밀리의 보스, 뱌쿠란. 잔저스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며 인상을 찡그리고, 새삼스럽게 홀스터에 찬 권총의 무게를 의식했다. 분노염을 타고난 그의 사격은 속사이기보다는 파괴력을 더 중시하는 묵직한 기술이 주된 쪽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성의 문제였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최고의 총잡이라 해도 그를 사살할 수는 없었다. 그저 명함에 박아 넣기 위해 암살부대의 수장 자리를 맡은 건 아니었다. 기습이든 암살이든 그는 당하지 않았다. 적어도 잔저스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정면으로 상대를 마주 본 이 상황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본인도 안다고 말하는 듯이, 뱌쿠란은 빙긋 웃으며 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이야, 그렇게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지 마. 나는 너와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럼 무얼 하러 왔나, 이 쓰레기가.”

“글쎄, 티타임? 아하, 그건 10시간쯤 늦었을까. 미안, 미안. 우리 집 시계가 말이야, 좀 잘 맞지 않거든.”

보란 듯이 새벽 두 시를 가리키는 회중시계를 돌아보는 시늉을 하며, 그 남자는 능청스럽게도 지껄였다. 잔저스는 짜증스럽게 술을 들이켰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저 쓰레기에 정신이 팔려 마실 타이밍을 놓친 탓으로 얼음이 녹아 맛이 싱거워졌다. 나름대로 좋은 술이었건만. 그는 인상을 찡그린 채로 차가운 유리에서 입술을 떼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뱌쿠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음을 지었다. 카멜롯은 평안해? ……. 잔저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눈을 들어서 제 앞의 악마를 노려볼 뿐이었다.

“아, 물론 그녀야 잘 지내겠구나. 잘생긴데다 어리기까지 한 임금님도 있겠다, 매일 백화난만하듯 아름다운 날만 영원할 텐데, 평안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그럼 질문을 바꿔야겠네, 너는 잘 지내고 있어?”

“…….”

“대답은 좀 해주라. 우리 사이에 낯가리지 말고.”

“…….”

“응, 왜 그래? 아, 우리 이번 생에서는 이게 초면이던가? 미안, 자꾸 헷갈리네. 그러니까……, 지금 네 이름이 잔저스 군이었지?”

약이라도 했나. 잔저스는 방금 한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뱌쿠란을 노려보다 자신이 먼저 눈을 돌렸다. 정신도 멀쩡하지 않은 쓰레기를 상대해서 얻을 이득은 없다. 도발한답시고 여기까지 행차한 것 또한 불쾌하기는 매한가지지만, 파편이나마 정보를 흘릴까 해서 여태 상대해줬을 뿐이었다. 전쟁 중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적진의 심장부로 이어질지 모르는 것이니. 그러나 제가 무엇을 지껄이는지도 알지 못할 만큼 위태로워진 시한폭탄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다.

잔저스는 그가 불가해한 힘을 사용해 추종자를 모으고 있다는 정보부의 제보를 기억해냈다. 그 힘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밀피오레는 전통적인 마피아 패밀리들과는 조금 다르게 얼마쯤 종교 집단과 같은 형태를 모사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느 종교에서 파생된 어떤 교리를 체계로 삼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조직 내부에서는 분명히 보스인 뱌쿠란을 향한 ‘신앙심’이 감돈다고. 그것이 바리아가 밀피오레에 잠입시킨 프락치로부터 들은 마지막 보고였다. 그날 저녁 보고를 마치고, 여섯 시간이 지나기 전에 다시 통신망에 접속한 놈은 그대로 느리게 자살하는 영상을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연락이 끊겼다. 사실 연락을 끊은 쪽은 이쪽이었다. 상황이 판단되자마자 바리아는 아직 죽지 않아 움찔거리는 동료를 그대로 끊어내고, 바리아 내부에 남아 있던 그의 흔적을 전부 지웠다. 그가 바리아의 대원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도, 그와 연결된 통신망도, 모두. 아무튼 그 사건으로 밀피오레의 보스의 정체가 무엇이든 신으로 인식될 능력이나 면모를 갖췄음은 명백히 알았다. 그런 놈이 이곳에서 폭주라도 했다가는 곤란해질 게 한둘이 아니다. 잔저스는 제 아래의 떨거지들을 불러 놈을 끌어내라 명령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책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내부통신용 유선 전화기에 닿기 이전에, 뱌쿠란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뭐, 내가 헷갈리면 너도 모든 걸 기억해내면 되는 거지.”

편히 기댄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던 잔저스를 끌어내려 바닥에 넘어뜨린 뱌쿠란이 씩 입술이 길게 찢어지는 웃음을 지었다. 아뿔싸. 잔저스는 잠깐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가 분노염을 터트리려는 순간, 뱌쿠란이 그의 이마에 제 검지를 가져다 댔다.

“나는 너희들이 꽤 마음에 들었거든. 그러니까 이번에도 좋은 친구가 되자. 아서, 포이닉스, 체네렌톨라……, 으응, 이번에는 이 이름들이 아닌가? 뭐 아무려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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