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SIUM

관계로그 1

834194 by 경위

  케일럽은 아주 늦게서야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이번 ‘심부름’ 의 위험성이 여태껏 해오던 것보다 몇 배는 높다고 들었을 때도 아니었고(여태 그가 했던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빼돌린 물자가 눈에 띄지 않게 옮겨 싣는 일이었다), 폐차장에서 전달받은 자동차 키를 손에 쥐었을 때도 아니었고, 그 상태로 평화유지군 한 명을 만났을 때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케일럽은 차를 수색당할 때조차 억울한 시민 역할을 곧잘 해냈다. 어쩌면 다시 재회한 군인이 메모리칩을 압수하는 순간까지도.

 

  그러나 그 문제의 인물이 능숙한 손길로 메모리칩을 ‘더 나은 곳’ 에 숨겨줄 때부터 케일럽의 평정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검문에서 빠져나온 케일럽은 지시받은 곳에 차와 메모리칩을 남겨 두었다. 이후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 8구역으로 돌아왔다. 케일럽이 정신을 차린 것은 졸고 있는 라리에나의 찻잔에 약용으로 처박아둔 독주를 탔을 때였다. 왜 자신이 그를 깨워 임무 내용을 보고하지 않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깨닫는다. 자신은 태연했던 것이 아니라 평정을 가장했던 것이며, 어긋나버린 일을 보고하는 상황을 겁내고 있다는 것을. 케일럽은, 호들갑스러운 캐피톨의 언어로,  ‘완전히 망했다’ 고 느꼈다.

 

  우승자 마을을 나선 그가 향한 곳은 7구역과 8구역의 경계 언저리의 숲 어귀, 으스스한 오두막 같은 주점은 흔한 불법 주류 판매점이자 제조소였다. 동시에 많은 이들의 접선지이기도 했고, 짧은 회의가 열리는 안전 가옥의 역할도 했다. 문을 열어젖히자 깨진 유리 조각을 노끈으로 매달아 놓은 것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사람들은 이른 저녁부터 싸구려 증류주와 발효주를 들이켜고 있었고, 이미 새로운 손님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취했다. 그리하여 성마른 인상의 청년을 알아본 것은 카운터에 서 있는 가게 주인뿐이었다. 그는 예상치 못했던 손님을 본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점원을 테이블로 떠밀고 케일럽을 혼자 맞이한다.

 

   “샌드네 꼬마가 여기까지 혼자 웬일이니? 그 여자가 용케도 외출을 허락했네.”

   “허락 안 받았어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그러자 깔깔 웃으며 탁자를 두드린다. 멋 모르는 점원도 함께 웃는다. 짓궂은 주인에게 빙빙 말을 돌려 봐야 지금 상황에서 크게 나아질 점은 없을 것 같았다.

 

   “붉은 오크통에 담긴 에일이 필요합니다.”

 

  붉은 오크통. 위급 상황을 은유하는 그 단어에 낯이 일변한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에서 노여움이 일었다가, 이제는 어이없음에 가까워진다. 그는 다시 직원에게 손짓해 카운터를 맡기고 고갯짓한다. 창고로 가자는 뜻이었다.

 

  앞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주인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철컥, 소름이 끼치는 금속음이 관자놀이 곁에서 울린다. 빼돌린 총열에 녹슨 파이프를 대고 휘어진 못을 박은 사제 총이리라. 멀찍이서 다가오는 평화유지군을 정확히 사살할 수는 없겠지만 지근거리의 발포로 머리 하나를 터뜨리기에는 충분하다.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서서히 들어 허공에 든다. 신뢰를 사지 못한 청년은 누구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침울한 목소리를 낸다.

 

   “약 4시간 전 6구역에서 수령해 5구역 방향으로 보낸 메모리칩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2번 폐차장의 회색 승용차, 수령자는 민디 홀. …바꿔치기, 혹은 도청과 해킹의 염려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되뇐 내용이지만 뒤로 이어질수록 아찔한 기분이 들어 눈을 꾹 감았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자 주변이 웅성거린다. 최소 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사람까지 포함하면 아마도 넷. 혁명군은 언제든 애매한 위치에서 발을 걸친 변절자를 경계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언제고 핵심 인원을 훔쳐 발을 뺄 때를 재는 어린 우승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상상했던 모든 일은 이런 방식의 고해로 시작되진 않았기에 심각한 와중에도 어딘지 모르게 어리둥절한 공기가 있었다. 조용하던 사람 중 하나가 일어나며 황당하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누가 설명해줄 사람?” 케일럽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도주할 기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도중에 총기가 치워졌다. 내용 전달이 끝날쯤에는 메모리칩의 최종 수령지인 5구역의 은신처에 짧은 연락이 닿은 후였다. 교신기를 내려놓는 짧은 금속음과 함께 또 다른 누군가가 보고한다. “칩에 아무런 이상 없다는데. 훼손도, 바꿔치기도, 도청도 없어.” 그러자 이 창고는 어떤 ‘망한’ 토크쇼의 비하인드 현장 같은 분위기가 된다.

 

  “금발의 평화유지군이라. 판엠에 블론드가 어디 한둘이어야지.” 술집 주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키는 5.6피트가량. 목소리로 보면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았고, 헬멧 밑으로 옅은 흉터가 보였다, 라. 누군가가 떠오르는데. 왜, 거. 몇 년 전에 유명했잖아.” 사제 권총을 도로 허리춤에 꽂은 사람이 중얼거렸다. 입으로 권총 격발 소리를 흉내 냈으나 케일럽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자 교신을 마치고 주저앉은 사람이 유쾌한 투로 말한다. “진짜 그 작자라면 이 얼빵한 소년을 한 번 봐줬을 뿐이거나 머리가 회까닥했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괜한 추측들은 말지 그래.”

 

  “그 근방의 핵심 일원이어도 마찬가지야. 이 시기에 서로서로 많이 알아서 좋을 것 없어.” 누군가가 반박하려는 듯 말문을 여는 소리를 빠르게 막은 누군가가 단호하게 외쳤다.

 

  이 모든 상황에서 케일럽 윈터만이 정말로 얼빠진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데요?”

  그리고 답변은 어둠 속이 아닌 화려한 조명과 음악에서 나왔다.

 

 


 

 

   “이쪽은 빛나는 금발의 우승자 오세트 파텔. 지금은 6구역에서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있지.”

 

  최신 헝거게임 축하 파티의 주최자를 맡은 지미 툴리우스가 노래하듯 상대를 소개한다. 묶거나 땋은 자국 하나 남아있지 않은, 마치 물기를 갓 털어낸 것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금발을 자랑하는 여자였다. 익숙하지 않은 스턱 타이를 매만지고 있던 케일럽은 그가 다가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아차리고 한껏 당황했다. 지미가 마침 총애하는 우승자와 간만에 나누는 대화에 정신이 팔려 케일럽의 반응을 보지 못해 망정이었다. 헝거게임에 열광하는 스폰서 중 하나인 그와 침착한 안부 인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새파란 눈빛이 케일럽을 짧게 흘긴다. 두 번째로 보는 것이라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았다. 입 다물고 표정 관리해라. 입 안 살을 말아 물다가, 더 늦기 전에 악수를 위한 손을 내민다. 

 

   “…8구역의 케일럽 윈터입니다.”

   “윈터 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지미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저번이나 지금이나 어떻게 이렇게 태연자약한지. 고저 없는 차분함에서는 묘한 능숙함마저 느껴졌다. 케일럽은 휘말리듯 침착해진다.

 

   “입대를 선택하시다니, 대단하네요. 게다가 6구역의 고충은 저도 간혹 듣곤 합니다.”

   “아닙니다. 타 구역민은 모르겠지만 나름의 질서가 있는 동네라서요.”

   “모두 밤낮으로 근무하시는 파텔 씨 같은 분들의 덕분이리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저희에게 번거로운 일이 있어 봐야, 간혹 발견되는 도난 차량 검문 정도에서 그칩니다.”

 

  공을 번갈아 튀기듯, 빠르게 나눠지는 대화 속에서 의미심장한 눈 두 쌍이 마주친다. 해맑은 웃음을 짓는 지미는 그저 자신이 ‘선호하는’ 우승자들의 만남이 즐거운지 신나서 손뼉을 칠 뿐이다. “이런. 둘이 마음껏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주어야겠군! 이따 보세나.” 그리고 그는 파티 한복판의, 갓 태어난 우승자에게 다가간다. 덜덜 떨고 있는 어린 우승자는 이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한껏 두려워하고 있었다. 공작새 같은 주최자가 다가가자 파티장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묶인다. 누구나 한번은 거쳐 가야 할 관문이었다. 한물간 우승자들의 대화에 신경쓸 사람이 남지 않았을 때, 무뚝뚝한 목소리가 넌지시 들려왔다.

 

   “안전 운행은 잘 하셨나 봅니다.”

   “…….”

 

  케일럽은 다시금 억울해진다. 그래서 지금의 자신이 입을 연다면 꽤, 무척, 아주, 꼴사나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성마른 소년처럼 퉁명스럽게 내뱉고야 말았다.

 

  “왜 언질해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리하여 6구역의 파텔 부사관, 오세트 파텔의 어이없는 표정마저 끌어낸 것이다. “그걸 그 타이밍에 말입니까?” 황당함에 못 이겨 자신이 내뱉은 대답을 곧장 인지한 오세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혀를 한 번 찼다. 둘은 꼭 신호라도 맞춘 것처럼 눈짓 두어 번으로 조용히 좌중을 떠났다. 아직 나눌 이야기가 많았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