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SIUM

관계로그 2

834194 by 경위

광장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모인 사람의 수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랬다. 판엠의 사람들에게 침묵은 삶의 또 다른 주인이기도 한 탓이었다. 흰 제복의 군인들은 단단하게 꼬아낸 황색 밧줄을 쇠못에 걸고 아이들을 나이에 맞게 정렬시킨다. 8구역의 담당 수행원이 산딸기 색의 드레스 자락을 모아들며 단상으로 올라간다. 가장 앞에 선 아이들이 가장 좋은 미색 셔츠를 입은 채로 벌벌 떠는 한편, 마지막에 정렬된 청년들은 뒤에서 지켜보는 가족보다도 차분했다. 그들은 열아홉 번째의 생일을 앞두었다. 행운으로 쌓여온 삶이 자그마치 6년이다. 몇백분의 일의 확률보다 닥친 일이 중요하게 된 그들은 일꾼들이 자주 입는 잿빛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흰색, 주황색, 분홍색, 미색, 회색. 이번 회차의 추첨식을 위해 언젠가 광장의 모든 이들이 자아냈을 천의 색깔들이다. 무거운 침묵과 함께하는 이 행사는 어떤 이들에게 있어서 생애 처음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마지막이었다. 우승자가 아니었더라면 이것은 케일럽 윈터와 델피니움 힉스의 마지막 추첨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 구역민이 정렬을 마치면 시장이 상투적인 인사말을 읊으며 역대 우승자들을 소개한다. 라리에나 샌드, 소냐 이바노바, 케일럽 윈터, 그리고 델피니움 힉스. 단상으로 오르는 순간부터 흐느끼기 시작한 라리에나 샌드는 수행원에 의해 일으켜 앉혀진다. 질책하는 시선 속에 환히 내던져진 소냐 이바노바는 초조한 기색으로 히죽이다 이내 모자를 뒤집어쓴다. 어두운 치부를 가진, 우승자로서의 케일럽 윈터 역시도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윽고 델피니움 힉스. 제재받지 않을 정도의 낮은 탄식과 한숨과 함께 그는 의자에 앉는다. 아주 번거로운 것, 곤란한 것을 보듯 몇은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꿈꾸는 소녀’ 로서의 그는 영웅이자 몽상가였고 부유하는 소녀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 케일럽 윈터는 델피니움 힉스를 예상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확률이 당신에게 호의적이길 바라며, 해피 헝거 게임!”

일련의 외침과 함께 수행원이 쪽지가 든 공을 중앙으로 밀어 가져올 때, 제비꽃색 눈동자는 어딘가를 강렬하게 응시한다. 무심코 케일럽은 망설임 없는 그 옆모습을 바라본다. 증오, 노여움, 회한, 슬픔, 그리움, 경멸. 복잡한 시선 가운데, 케일럽은 델피니움 힉스의 어떤 간절함을 느낀다. 광장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의 시선 끝에 있을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온다. 열아홉 번째 생일을 앞둔 이들 사이의 빅터 라일리. 그 또한 마지막 추첨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친숙한 꽃을 말하라면 목화꽃이고, 가장 먼저 익히는 놀이를 들어 보라면 무명실을 둥글려 마는 일이다. 수확한 목화를 조면기에 털어 넣고 씨를 뺀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솜은 햇빛에 말려두고 씨앗은 다음 해를 위해 남겨 둬야 해요. 무명실은 어떻게 만들지? 길게 늘인 솜을 물레에 돌리면 돼요. 이런 일련의 과정은 물론 초등교육 과정에도 수록되어 있었다. 조면기를 돌리거나 무명실을 기계에 끼워 넣을 때 손을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도 그랬다. 8구역의 아이들은 배우지 않는다고 일하는 방법을 모르지 않았으며 배운다 한들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도 없었다.

학습되지 못하는 지식이란 가령 이런 것들이었다. 천을 염색하거나 수를 놓는 일, 염색을 하거나 무늬를 그려 넣는 일. 한 손이 잘리고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위한, 평균에 이르지 못하는 키를 가졌거나 서서 걷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납품 규격에 맞지 않는 옷을 만드는 일. 그런 것들은 규격화된 의복과 평화유지군의 군복을 만들 시간에 손해를 내는 일들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아주 단순해졌고 많은 아이들이 같은 방식으로 자라났다. 케일럽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엷은 황혼이 내려앉던 어느 오후, 텅 빈 교실의 미닫이문을 열었을 때 델피니움 힉스와 마주친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델피니움은 손안의 것을 다급히 구겨 책상 속에 쑤셔 넣었으나 케일럽은 이미 여러 차례 선생이 놓던 엄포를 떠올린 후였다. 벌써부터 물자를 빼돌리는 학생이 있는 것 같다. 평화유지군을 부르기 전에 그만하는 편이 좋다. 기실 초등교육 과정에서 재료로 쓰이는 물자라고 해봐야 가장 하등품이었고 어느 정도의 손실을 감안할 수 있는 것들이었음에도 회초리를 든 선생은 단단히 일러 말했다. 그것까지가 교육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신경질을 머금은 청보라색 시선은 케일럽을 흘겼다. 마치 무슨 문제라도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리어 할 말이 없어진 케일럽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하필 뒷문으로 들어온 탓에 케일럽은 델피니움의 책상 옆을 지나쳐 가야 했다. 델피니움의 손 아래, 삐쭉 튀어나온 무명천의 끄트머리에는 어떤 식물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유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그러면 안 돼.”

덜컥 앞뒤를 자르고 내뱉은 다음에야 조금 더 명확히 말할 필요가 있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재료를 빼돌린 것과 수를 놓은 것, 둘 중 어느 것을 먼저 지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델피니움 힉스는 물론 전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혹은 괜한 참견이라는 듯 짧게 웃었다.

“왜 안 되는데? 이건 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야. 아니, 사실 그보다도 훨씬 부족하지.”

“그렇지만, 너도 들었잖아. 들키면 매를 맞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케일럽의 소극적인 항변에도 델피니움은 태연했다.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이미 들킨 마당에 숨길 필요는 없다고까지 판단했는지 그것을 꺼내 가방에 쑤셔 넣기까지 했다. 그것은 언뜻 작은 인형 옷처럼 보였다. 무어라 대답하려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잘라내는 모습에 당황한 케일럽이 떠나려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황당하다는 표정이 이내 짜증을 담았고, 손이 내쳐진다.

“정말이야. 제인 선생님이 평화유지군을 부른다고 했어.”

“나는 귀가 없어? 나도 알아.”

“…그러면 왜 그러는 거야? 이해가 안 돼.”

“왜 위험을 무릅쓰고 도둑질을 하느냐고? 케일럽 윈터, 너 정말 멍청하구나!”

그 목소리는 일견 윽박지르듯이 들렸다. 그리고 한참 어린 아이를 가르치듯 하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이런 일이 아니어도 어차피 우리는 ‘대단히’ 안전하지 못해. 아, 너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 케일럽으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자신감과 당당함이 그를 이끌어 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으나 케일럽 윈터는 그를 붙잡거나 그만두게 할 수는 없겠다고 느꼈다. 이것이 델피니움 힉스와의 첫 번째 대화였다.

그 이후로 케일럽은 종종 델피니움의 곁에 앉았다. 그는 이유를 묻듯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케일럽을 바라보곤 했으나, 델피니움의 작은 절도가 벌어지는 현장마다 케일럽이 제 가방을 세워 가려놓곤 하는 일을 몇 번 겪고 나서는 이유를 묻는 시선도 없어졌다. 물론 나중에 한 번 묻기야 했다. 대체 웬 참견이야? 케일럽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네가 만드는 거 아기 옷이잖아. 언덕 아래 아니카의 집에 줄 거지? 거긴 어른 입을 옷도 모자라서, 밀가루 포대로 아이를 감싸 두니까……. 나중에 일러바칠 게 아니라면 됐어. 델피니움이 깔끔하게 말을 자르고 나서부터 한동안 그렇게 함께 앉았다. 케일럽은 어리고 몽매한 와중에도 델피니움을 돕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평균 이상으로 안전하지 못한 상황에 부닥치지 않기를 바랐다. 캐피톨이 조직한 부당함 속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눌려 죽게 두지 말 것. 그것이 라리에나가 그를 가르친 바이기도 했고, 단순히 델피니움이 만드는 옷과 자수와 레이스가 죄목이 되기에는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승자의 비호 아래에 있는 케일럽과 달리 델피니움은 아주 일찍부터 목화밭으로 떠났다. 점차 대면하는 일도 적어졌지만, 기실 어떤 의리나 유대가 있을 만한 관계는 아니었기에 케일럽은 이 시간과 변화를 받아들였다. 간혹 눈에 드는 광경이나 귀에 들려오는 말로만 그를 접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델피니움은 학교에 없었으며 여의찮을 경우 오전 수업만을 듣는다고 했다. 케일럽이 호밀빵과 양젖으로 만든 버터를 먹을 점심시간, 델피니움은 어느 소년과 함께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나갔다. 그의 이름이 빅터 라일리이며 힉스 가족과 친밀한 사이의 이웃이라는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야기들도 과거에 그가 느꼈던 기시감을 설명하진 못했고, 이내 케일럽은 그 묘한 의문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델피니움 힉스와 알로카시아 힉스가 연달아 호명되던 날에도 라리에나는 서럽게 울었다. 남매를 안으로 데려가려는 평화유지군의 팔을 붙잡으려고까지 했다. 분위기는 상당히 과격해졌고, 케일럽은 델피니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연신 라리에나와 군인 사이를 가로막던 케일럽이 따귀를 맞고 난 다음에야 사위는 조용해졌다. 새로운 우승자에게 손을 올린 말단 군인에게 닥칠 가벼운 풍파가 무색하게도, 케일럽은 단지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넋이 나간 얼굴의 라리에나는 케일럽의 부축도 마다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허겁지겁 문을 열어젖힌 그는 벽장을 뒤지고 옷장을 모조리 엎어트렸으며 모든 서랍을 다 빼내 내동댕이쳤다. 기어코 그가 찾아낸 것은 다 헤진 얇은 천이었다. 식탁보 같기도 했고 작은 커튼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는 언젠가 텅 빈 교실에서 보았던 수가 놓여 있었다. 가지와 풀잎이 뻗어나가는 모양새의 차이는 있었으나 기억 속과 무척 닮아 있었다. 라리에나는 그걸 끌어안고 목 놓아 울었다. 오, 안스리움. 불쌍한 안스리움. 그 아이들을 어떡하면 좋아요. 미안해요. 나는 어쩔 수가… 알 수 없는 이름에게 라리에나는 계속해서 사죄했다.

그가 탈진해 쓰러지기 직전 겨우 눈물을 멈추게 했다. 억지로 침대에 눕히고 커튼을 치고 이불을 덮어 주는 내내 라리에나는 손에서 천을 놓지 않았다. 케일럽이 물었다. 이건 무슨 식물이야? 라리에나가 답했다. 겨우살이 풀. 순수한 건강과 축복을 빌어줄 수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보내는, 안시의 축복. 부디 큰 나무에 붙어서서라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서 이 겨울을 이겨내라고……. 중얼거리는 말들에서 케일럽은 어렴풋한 짐작을 한다. 델피니움 역시 같은 이에게 같은 축복을 받아 자라나 그 옷을 만들었겠다고.

라리에나는 그 회차의 헝거게임을 시청하지 않았다. 케일럽도 그들이 죽는 광경만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라리에나의 집에서는 한동안 실을 잣고 꼬는 소리만이 울렸다. 커다란 직조틀 위에서 만들어지는 광경은 양지바른 들판이었다. 청보랏빛 꽃과 심장 모양의 푸르고 붉은 풀잎들이 어우러져 햇빛을 받고 있었다.


이윽고 수행원이 두 개의 이름표를 뽑는다. 한 명은 족제비를 닮은 열다섯 살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일터에서 종종 마주치는 큰 체구의 열일곱 살이었다. 빅터 라일리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이제 성인이 될 일만이 남은 맨 뒷자리의 아이들은 후련해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고, 못내 기쁜데 참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빅터 라일리도 개중 하나였다. 그는 호명을 마친 단상 쪽을 바라보자마자 몸을 굳혔다. 제비꽃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으리라. 그렇게 잠시 겁을 먹었다가도 이내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태연함을 가장하며 옆의 친우들과 속삭이기 시작했다. 케일럽은 델피니움 힉스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속삭여 부른다. 힉스. 델피니움 힉스. 괜찮아? 괜찮지 않을 일이 어디 있겠어. 갈라진 목소리로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너는 지금 아쉬워 보여……. 그 말에 델피니움은 입을 앙다물고 케일럽을 노려본 뒤, 더는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