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SIUM

리퀘로그 2

834194 by 경위

“난 그 사람이 싫어.”

언젠가 라리에나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드물게 찾아오는 명징한 정신이었다. 발음이 똑바르고 초점이 정확했다. 그런 모습은 오랜만에 보았다. 아마도 아이를 잃고 나서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케일럽은 창문가로 다가가 커튼의 틈새를 들췄다. 그의 시선 끝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되지 않았다. 우승자 마을의 생김새는 천편일률적이었고 대체로 조용했다. 새로운 입주자가 생겨나지 않는 이상 방문자도 드물었다. 그래, 새로운 입주자가 생겨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아름다운 색의 고운 흙과 벽돌로 다져진 마을의 이른 아침. 도로의 초입에는 늙은 남자가 서 있었다. 먼 거리에서도 수척함이 보였다. 눈구멍이 움푹 들어가고 광대는 치솟았으며, 짧은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엉켜 마치 넋을 놓은 사람 같았다. 그는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리에나의 집과 거리가 있는 곳, 십수 년 전 새로운 우승자로서 입주자를 맞이한 구석의 토지였다. 집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촘촘한 블라인드가 현관과 창문을 모두 가린 채였다. 누구야, 라리에나. 아는 사람이야? 개인적으로는 몰라. 케일럽은 그다음의 부연을 캐묻고 싶었으나 라리에나가 다시 횡설수설하기 시작해 그만두었다.

이윽고 남자와 비슷한 체구의 사람이 몇인가 들어와 그를 데리고 나갔다. 바람 소리 사이 어렴풋이 말소리가 들렸다. 아직 캐피톨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는 한 문장만이 온전하게 전달됐다. 여전히 남자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케일럽은 눈가를 얕게 찌푸렸다. 그리고 발돋움해 다시 커튼을 쳤다.


그건 조명, 카메라, 인터뷰어들이 진정한 귀환의 소감을 묻기 위해 한바탕 몰려들었다가 돌아간 밤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주인을 갖지 못했던 주택은 번지르르한 겉과 달리 손볼 곳이 많았다. 케일럽은 이 마을의 입주자 중 시끄러운 것을 좋아할 만한 사람이 없음을 일찍이 알았기에 모든 도움의 손을 만류했다. 이 밤에 울타리 앞에 홀로 앉아 잘라둔 판자의 길이를 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입에 문 손전등이 비추는 곳은 오래전 삭아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손으로 거미줄을 걷어내고 망치를 들어 가볍게 내리쳤다. 낙엽 더미를 밟을 때와 단단한 탁자가 부서질 때, 그 사이 어딘가의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진 순간이었다.

인도 건너편에서 쨍강,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병 따위가 발로 차이거나 손에서 떨어졌으리라. 케일럽은 숨을 들이켜며 그 즉시 손전등을 다른 손으로 받아 소리가 들려온 곳을 비췄다. 굽은 어깨와 등이 놀라 움찔거렸다. 그의 안색은 파리했고, 겁을 먹어 위축된 사람의 전형처럼 보였다. 케일럽은 그의 이름을 알았다. 소냐 이바노바. 과거의 우승자. 그러나 그 누구도 기꺼워하지 않는 자. 그리고 소냐 이바노바 또한 케일럽의 이름을 알았다. 그의 발치로 조명을 내리자 검은 봉투가 두어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몸을 물리다 발에 채인 모양이었다. 케일럽의 시선이 좀처럼 떠나지 않자 상대가 말을 가로채듯 높은 소리를 터뜨린다.

“그저 쓰, 쓰레기 더미입니다. 이걸 치우려는 것뿐이었습니다. 캐피톨의 방송인들이…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았잖습니까. 여태껏, 땅거미가 온통 짙어질 지금 같은 때까지요....”

“놀라지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말을 마친 케일럽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변명에도 거짓에도 통 재능이 없었고, 사방을 경계해야 했던 드넓은 그늘의 필드에서 돌아온 지 이 주일도 채 되지 않은 지금은 더 그랬다. 선뜩하게 다가온 만남이 누구의 탓은 아니었기에 케일럽은 손전등을 껐다. 멀찍이서 비추는 가로등 불빛만 남았다. 케일럽이 손에 든 것들을 내려놓고 도로로 걸어 나오자, 조금 뒤에서야 기다랗고 야윈 인영이 그의 대문 밖으로 나왔다. 

“...저는 울타리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삭아 문드러져 곧 무너질 것 같아서요.”

“예, 아무렴요. ...직접 하시는군요.”

그들은, 그들이, 당신에게 날붙이를 주던가요? 떠듬거리는 질문이 덧붙여진다. 소냐 이바노바는 소문대로 주눅이 든 모습이었고, 어깨를 굽힌 채 기다란 양 손가락을 연신 매만졌다. 언뜻 비굴하게 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음. 케일럽이 뜸을 들였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상대방의 눈을 또렷하게 쳐다보는 습관 대신 배운 것이었다.

“제가…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죠. 구역 사람들에게나, 캐피톨에게나.”

“아, 하하, 핫.”

발작적인 웃음 뒤 침묵이 이어진다. 뒤늦게 깨닫는다. 소냐 이바노바는 케일럽을 경계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낯설어진, 미지의 무언가를 앞에 둔 사람처럼. 이번 추첨일 울려 퍼진 케일럽의 이름 아래 경련하는 미소를 띠던 모습만은 어렴풋이 기억하건만 이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태양 아래였더라면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지금은 그저 어둠 속에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불안정해 보입니까?”

“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런, 그런 평가를 당신에게 내리겠습니까? 케일럽 윈터, 어두운 그림자에서, 기어코 살아남아 영광을 쟁취한, 예. 그런 이름이지 않나요.”

읊조리는 목소리에서 일견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적어도 그 감정이 케일럽 자신을 향함이 아님은 확실했다. 어쩐지 케일럽은 기시감을 느꼈고, 난처해졌다. 가장 친밀했을 누군가가 자신의 흉터를 보며 저런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이번 게임을 봤군요. 질문에 소냐 이바노바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참 동안 사위가 조용했다. 케일럽은 마을의 초입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어릴 적의 기억에 사로잡힌다. 그 남자, 소냐 이바노바의 집을 바라보고 있던 이름 모를 남자.

소냐와 함께 추첨이 된 어린 조공인과 그의 아비의 이야기는 머리가 더 큰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라리에나가 덧붙이던 말이 떠올렸다. 내게는 다 똑같아. 고작 열네 살에 불과했던 주제에 지키지 못할 약속에 매달리다 놓아버린 그도, 기어코 떠밀어 그를 천칭 위에 세웠던 열두 살 난 아이의 아비라는 작자도, 수많은 어른들이 함께한 침묵과 방조도. 케이브, 너는 알아야 해. 세상에 차선의 목숨 같은 건 없어. 서러운 살인자만이 존재할 뿐이지...

“그 일은, 유감입니다.”

아무런 정황 없이 서투르게 떨어진 말은 미안하다고도 들렸다. 케일럽이 가장 지독한 방식으로 끊어낸 목숨에 대해서, 어쩌면 소냐 이바노바가 겪은 수많은 일에 대해서, 리자베타 이바노바의 죽음에 대해서. 청자는 적절하지 못했고 화자는 자격이 없었다. 케일럽은 한참 동안 소냐의 움푹 들어간 눈을 응시하다가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살인자이자 생존자들은 사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진창 속에 발목을 붙잡혀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거야.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사이에서 괴상하게 일그러진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어째서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합니까?” 케일럽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우승 이후 처음으로 선택한 도망이었다.

소냐 이바노바의 그림자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사라졌다. 판엠의 사람들이 영영 지닐 굴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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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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