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잘

블셀

8ackyard Lovers by 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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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 아닌 거 안다. 그런 말에 크게 반응하는 사람 아니라는 것도 안다. 무슨 일 있겠거니 대화로 풀자고 눈 마주치고 차근차근 얘기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사랑에 질린 적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나 사랑하는 것도 안다. 그동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화근이었을까? 구정모는 홧김에 헤어지자 했고, 형 정말 질린다는 표현을 썼으며 제 반응에 흥분해서 말 뱉어내다가 목소리 높아진 거 스스로 깨닫고 귀를 붉혔다. 키스할 타이밍 아니라는 거 잘 아는데 차라리 화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어색하게 웃으면서 키스해줬으면 했다. 그러다가 말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말해 봐.

이제 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누가?

형이 나를요.

한 번도 구정모에게 너 틀렸다는 말 한 적 없던 박세림은 그날 처음으로 목끝까지 차오른 “너 완전히 틀렸어.” 라는 말을 꾹꾹 삼키며 쓰게 웃었다. 내가 널 안 사랑한다고? 그래… 넌 그렇게 느꼈구나. 그동안 자기가 구정모에게 주었던 애정이나 스킨십 그리고 걱정 같은 것들이 전부 잿가루가 된 것만 같았다. 내가 너에게 준 모든 게 결국엔 다 쓸모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구나 싶었다. 정모는 보란듯이 박세림 앞에서 짐만 챙기기 시작했다. 전에는 신경도 안 썼던 것들, 예를 들면 쓸데없이 많은 핸드폰이나 오늘 일 때문에 힘들었다는 말에 ‘그렇구나.’ 하고 그저 웃어주기만 한 것들, 섹스하다가 키스하고 싶어 입술 들이밀면 은근히 신경질 내며 목에 이 박던 지독한 버릇 같은 것들이 울컥 차올랐다. 나한테 관심 있다고 했었잖아. 그렇게 다가와놓고 이제 와서는 뭐? 내가 널 사랑 안 해? 박세림은 그냥 웃었다.

권태기라서 헤어지는 거면 피부라도 맞닿으면서 몸정이라도 붙게 하려고 억지로 꾸역꾸역 맞추며 붙잡았을 텐데 한 번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서 헤어지자 말하는 구정모를 세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실 구정모가 이러는 건 이유가 있었다. 이유 없이는 화 안 내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연했다. 구정모는 세림이 이렇게 이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봐주길 바랐다. 그러면 정모는 이렇게 말할 셈이었다. 형은 오늘도 늦었고, 연락 한 번 없었으며 평소에도 형 하나만 바라보고 살던 나 앞에 떡하니 딴 놈 품에 거의 안긴 채로 와서는 괜히 무언가 걸린 사람처럼 그딴 표정 지었으니까. 그게 이유였다. 구정모도 정모 나름의 사정이 있단 소리다. 나는 박세림만 만나는데 왜 박세림은 나 말고도 남에게서 사랑을 갈구하냐고, 그러면서 왜 자꾸 외로운 사람처럼 구냐고. 진짜 외로웠던 사람은 나였는데 왜 형이 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고.

웃기게도 그 순간에 구정모는 방금 전 박세림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키스할 타이밍 아니라는 거 아는데, 박세림이 미안하다 말하면서 자기한테 안겨오면 그냥 바보처럼 웃으면서 내가 더 미안해요 형… 같은 말 중얼거리며 안고 싶었다. 아쉽게도 잔뜩 굳어진 세림의 얼굴 보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질린다는 말에 꿈틀거리는 미간, 헤어지자는 말에 눈가 촉촉해진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얼굴 하고 있는 게 마치 자신이 더 나쁜새끼 된 것 같아서 참지 못하고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끝내자고?

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후회 안 해요.

야.

박세림 눈물 흘리는 것만 보면 자동으로 입꼬리 올렸던 구정모는 이 순간만큼은 웃을 수 없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에 잔뜩 고인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흐르는데 우는 소리 한 번 않고 죽일 듯이 자기를 노려보는 그 시선에 정모는 자신도 모르게 제 볼 안 쪽을 세게 씹었다. 후회 같은 거 안한다는 말 내뱉은 걸 후회했다. 사랑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세게 말한 것도 맞고, 상처 받기 싫어서 형한테 상처주는 말만 골라서 내뱉었던 구정모는 되려 자길 바라보는 박세림 얼굴을 더더욱 잊을 수 없게 됐고, 상처까지 받았다. 아래로 내려깐 시선에 꽈악 쥔 손이 보인다. 파드득 떨리는 손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 손의 주인인 박세림은 안쓰럽게 제 뺨만 타고 흐르는 눈물 닦을 생각도 없어보였다. 애써 세게 깨물었던 볼이 점점 아렸다. 그가 입을 떼고 차가운 목소리로 한 마디 내뱉었다.

저 갈게요.

너 여기서 나가면 나랑 더이상 볼 일 없어.

잘 지내요.

정모야….

…….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는데?

이유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 응? 숨을 헐떡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어가던 박세림이 간신히 붙잡은 구정모의 옷소매가 그의 손 안에서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 말에 구정모가 손을 올려 세림이 잡은 소매 위를 가볍게 쓸어내려 그의 손을 떨쳤다. 내가 못나서 그래요. 참으로 구정모다운 답변이었다. 못난 사람, 못난 사랑. 그건 박세림이 그동안 해온 모든 사랑을 무시하는 말이 됐다. ‘형이 사람을 잘 못 봐서, 그런 사람이랑 이상한 사랑을 꾸역꾸역 이어가는 바람에 결국엔 이런 사단을 만들었다고.’ 박세림은 그 짧은 순간에 정모의 말을 이렇게 해석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그건 구정모가 떨치지 못한 일말의 애정 때문에 박세림에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못나서 못난 내가 가는 거라는 그 말을 박세림은 완전히 잘못 이해했단 거다. 세림은 뒷걸음질 쳤고, 구정모는 자신도 모르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적이 감도는 집안에서 박세림은 완전히 가라앉은 채로 정모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제 발끝만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 그러면. 끝까지 고개 들지 않는 박세림 때문에 정모는 결국 마지막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강한 향수 향만 남기고 떠난 자리에서 박세림이 그제야 손을 올려 제 뺨에 말라붙은 눈물자국 같은 걸 벅벅 빨개질 때까지 닦아내기 시작했다. 너무 울어서 더이상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내려고 해봤자 속만 쓰려올 뿐이었다. 술 하나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는 사람이 술이 고플 지경이었다. 맨정신으로 서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서 숨을 몰아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구정모가 제 마지막 사랑이 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는 아니어도 오래오래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겪었던 그 많은 이상한 사랑들을 구정모가 다 덮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또 똑같은 결말이다. 세림은 비참했다.

정모 역시 그랬다. 제 첫사랑이었던 박세림에게 스스로 끝을 말하고 온 자신이 놀라우면서도 끝까지 자기 한 번 더 잡지 않던 세림의 행동에 비참함을 느꼈다. 우리는 거기까지였던 걸까. 한참을 세림의 집 앞에 서서 그동안 자신들이 해온 사랑 같은 걸 다시 정의하던 그가 결국엔 생각하는 걸 그만 두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고비는 있었어도 이런 적은 없어서 자꾸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하길래 태연하게 허벅지 위로 손바닥을 닦으며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던 정모가 갑자기 아, 탄식하며 제 머리를 쿵 정류장 벽에 기댔다. 지갑 두고 왔다.

연락이라도 왔을까 싶어서 혹시 몰라 켜본 핸드폰 화면은 깔끔하기만 했다. 한숨 두어 번 쉬던 그가 10분 뒤 도착한다는 버스의 안내음을 듣고 다리만 덜덜 떨다가 결국 벌떡 일어서 세림의 집으로 향했다. 여기서 나가면 더는 볼 일 없을 거라 했던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문 안 열어주는 거 아니야? 이런 와중에도 그런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 헛웃음이 났다. 엘레베이터 앞에 설 때까지만 해도 태연한 얼굴이었던 그가 문이 열리고 1평도 안되는 작은 직육면체에 갇히자마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아 미치겠다 진짜. 손을 들어 마른 세수를 하던 그가 경쾌한 알림음에 그제야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올려 숫자를 확인했다.

무거운 발걸음 간신히 떼어서는 집 앞에 섰다. 그 짧은 사이에 비밀번호 바꿨을리는 없어서 도어락에 손을 갖다대려는데 문 안에서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서 도어락 누르기도 전에 구정모가 박세림의 이름을 외치며 문고리를 붙잡고 당겼다. 거칠게 덜컹거리던 문 소리에 또다시 깨지는 소리가 났다. 손이 기억하는 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선 구정모가 본능적으로 현관 앞에 서있던 잔뜩 당황한 세림의 손목을 세게 붙잡고 살폈다. 손에 잡은 건 없는지, 다친 곳은 없는지, 밟은 건 없는지 등을 빠르게 훑던 그의 뺨에 세림의 손바닥이 닿았다.

순순히 따라갔다기보다는 뺨에 닿은 손의 온기에 구정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손등 위에 손을 덮으며 고개를 숙여 입 맞췄다. 제 귀를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무는 세림의 행동에 구정모가 제 몸을 더 가까이 붙이고는 입을 벌렸다. 긴장과 불안으로 잔뜩 얼어붙었던 구정모의 숨소리가, 경직된 목 근육 같은 게 한순간에 유하게 풀려서는 무언가 말하려는 세림을 막아세우며 계속해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벼랑 끝에 세운 것도 구정모면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던 사람 다시 당겨 안은 것도 구정모. 집 나가면 더이상 볼 일 없을 거라면서 올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구정모를 안았던 박세림이 또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어라 중얼거린다. 다 먹혀 들어가는 발음을 자세히 들어보니 ‘왜 돌아왔어.’ 라는 문장이 완성됐다. 지갑을 두고 왔다고 사실대로 말할 타이밍 아닌 거 알아서 정모는 아무 말 않고 세림에게 다시 키스했다. 혀가 엉키고, 숨이 겹쳐진다.

사랑한다는 말을, 박세림의 이름을 혀로 굴려보던 구정모가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서 입술을 떼고 세림을 세게 끌어안았다.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하나는 심각한데, 하나는 고작 이런 스킨십 한 번에 모든 걸 후회하고 시간을 돌리고 싶단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부끄러워서였다. 왜 왔냐는 물음이 또다시 이어졌다. 미안해요. 구정모는 고개를 돌려 소파 위에 있던 제 지갑의 위치를 확인했다. 세림의 손이 정모의 등에 닿았다. 어깨에 제 얼굴을 비비며 마른 침을 삼키던 세림이 구정모의 옷을 세게 쥐어잡았다. 갈 거냐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한 채로, 입안에서 맴도는 가지 말라는 그 부탁을 세림은 계속해서 삼키고 삼키다가 또다시 울컥 눈물을 터트렸다.

품에 안긴 그를 간신히 떼어내어 얼굴을 확인하니 눈물에 빨갛게 짓무른 눈가가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젯밤 남에게 안겨서 눈치 보며 들어오던 그 때의 세림은 점점 정모의 머릿속에서 증발되기 시작했다. 떨치지 못한 애정은 더 깊게 뿌리 내려 박히다 못해 잔뜩 엉켜서는 구정모의 목을 죄어오다가 결국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후회 안 한다고 했던 말 번복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세림에게 후회한다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아무 대답 없는 정모를 가만히 보던 세림의 고개가 다시 떨궈졌다. 그런 그의 턱을 가볍게 손으로 잡아 돌린 구정모의 낮게 내려깐 시선 끝에 박세림의 시선이 맞닿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심과 동시에 다시 구정모의 지독한 버릇이 도졌다. 목에 깊게 이 박아넣은 그가 손으로 세림의 허리를 감싸쥐었다.

평범한 연인들이 오해 때문에 심하게 다퉜다가 마치 짠 것마냥 침대로 가는 거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했던 구정모가 결국엔 그들과 똑같은 짓을 했다. 이런 순간에도 제 애인이 너무 예뻐 보여서, 가지 말라고 말하는 그 눈빛이 영원히 자기만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면 해서, 박세림이 외로움을 느끼는 그 모든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이 순간 벅차올라서. 바닥에 떨어진 옷들 하나 둘 주워서 정리할 생각에 머리는 조금 아팠지만 그건 잠시고 세림이 팔을 뻗어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그런 귀찮은 것들은 전부 잊었다.

울 때마다 벅찬 숨 내뱉는 버릇 그대로 유지하며 나중에 과호흡 오지 않으려 입을 벌리고 간헐적으로 턱턱 숨을 뱉는 세림을 위에서 한참 바라보던 정모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헤어지자 해놓고 이러는 거 조금은 이상했지만, 자신과 박세림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결말은 없단 생각이 들었다. 박세림과 알고 지내며 보았던 그의 수많은 사랑들의 결말도 이러했을까. 이러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만났던 걸까. 힘을 주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들리는 턱이, 식은땀 때문에 자꾸만 팔에서 미끄러지는 그 형의 두 손이 갈피를 잃고 허공에서 허둥댈 때마다 절로 뒷목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가지 마.

응.

그제야 세림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완전히 활짝 웃지는 못해도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구정모에게 제 숨을 맡겼다. 헤어지자는 말 하지 마. 나 사랑하잖아.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구정모도 따라 속삭였다. 사랑이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사랑 안 하는 것 같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다시 박세림에게 영원을 약속했다. 마지막 사랑이 되어주겠다고. 얽힌 시선은 무언의 약속. 구정모의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 끝엔 박세림은 처음 고백 받았던 날처럼 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의는 아니고 타의로 이어지는 끄덕임.

정모야.

네.

나한테 질린 적 있어?

없어요.

나 사랑하지?

사랑해요.

…응.

나도 묻고 싶은 거 있어요.

말해 봐.

나 사랑해요?

세림은 그저 웃었다.

사랑이 잘

구정모 X 박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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