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SIUM

Mission 1

834194 by 경위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세 개의 질문은 이미 한참 낡고 녹슬었다. 토대가 되는 이야기는 본래의 종교적 의미를 잃고 퇴색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뿌리에서 느껴지는 힘만은 간직한 채였다. 일부 털어놓자면 케일럽은 그것이 라리에나가 만들어낸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추가 뜯어진 시계가 기상 시간을 울리면 일어나 거친 무명옷을 기워 입고 밭으로, 공장으로, 시장으로 나가는 삶. 집과 거리, 건물과 광장에서 들려오는 복종과 찬양의 송가. 질은 땅과 경직된 사람들. 친애는 공기와 같이 사람과 함께하나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삼켜내고 마는 개념이다. 그리하여 판엠의 삶에서 사랑이란 가족이 아닌, 친구가 아닌, 그저 땅을 함께 밟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다. 타인에게로 확장되지 못한다. “내가 왜 얼굴조차 모르던 아이의 헛된 죽음을 슬퍼하는지, 슬퍼할 수밖에 없는지. 가슴으로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기르는 단 한 명이라도. 내가 걷는 이 길 밖에는 없다고 느껴주었으면 좋겠어.” 이 서러운 우승자는 단지 사랑의 대상을 모조리 잃어 한없이 외로워졌기에 이러한 말을 한다. 23명의 죽음을 짓밟고 올라오며 변질된 목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을 자신이 이고 갈 짐으로 삼았기에 이러한 말을 한다. 그렇게 불타는 원망과 맹렬한 복수심에 이타심을 덧씌워 성모의 행세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땅의 누구도 다시는 자신과 같은 슬픔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진실을 직조해낸 대가로 사람이라 할 수 없는 삶을 선사 받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사람이 사랑을 모르고, 슬픔을 외면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 땅에 나기를, 도무지 그렇게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실을 모두가 알아야 하기에 라리에나 샌드는 광인이 되었다. 미쳐버린 여인은 소년을 하나 길렀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음을 가르치고, 사람은 자신에게 정확히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수 없음을 가르쳤다. 그리고 유약하고 이기적이며 방황하는 소년에게 마지막 질문을 심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케일럽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리둥절한 낯은 마땅히 그가 보여내야 할 이미지에 비하면 심히 어수룩한 사람처럼 보인다. 곁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든다. 8구역의 스타일리스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케일럽-윈터! 지금까지 한 말 듣긴 했어? 컨셉 말이야.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굴까?”

스타일리스트는 ‘까다롭다’ 는 말로 이어지는 잡다한 불만을 전부 포괄한다. 넌 어릴 때가 더 똑똑했어. 영리했거나. 적어도 그때는 무슨 얘기를 하든 끄덕이긴 했잖아. 이 얼뜨기 소년이 대체 나 없는 동안 방송은 어떻게 출연했는지 모르겠네! 그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케일럽의 손에 책자를 억지로라도 들려주고야 만다.

대개의 스타일리스트와 준비팀은 그들의 손에서 나온 우승자를ㅡ어떤 의미로든, 어느 정도로든ㅡ각별히 여겼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돌아오자마자 그는 올해 발탁된 세 명의 조공인을 아울러 하나로 묶고자 했다. 어떤 의미로든 한 데에 묶이기 어려운 8구역의 우승자들이 나란히 앉아 스타일리스트의 일장 연설을 듣고 있는 진풍경도 같은 맥락이었다. 케일럽은 다른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있던 것치고는 나지막하고 순순하게 답했다.

“듣고 있어요. 과거의 신화, 석상, 이전 경기, 손을 들어 올릴 것."

“그래. 자, 이제 네 몫의 책자를 펼치는 성의라도 보이렴.”

대부분의 명령 혹은 권유에 군말 없이 응하기. 우승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지켜왔던 규칙 중 하나였다. 책자 안에는 여러 장의 스케치와 원단의 샘플들이 겹겹이 끼워져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조각을 매만진다.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풍경에 비해 너무나 작고 여리게 느껴졌다.

그것을 옆으로 치우자, 당장 등에 매달아야 할 히마티온의 디자인들이 늘어놓아졌다. 가장 첫 번째 시안은 선명하게 찢어진 얼굴로도 창을 휘두르며 마지막 싸움을 펼치는 케일럽 윈터의 모습이었다. 뺨이 갈라져 치아가 보이던 모습까지 섬세하게 재현해둔 모습은 그를 순식간에 질리게 했다. 무심코 페이지를 넘긴 케일럽은 펼쳐진 광경을 보고 손을 멈춘다.

“이 뒤쪽의 그림도 준비되어 있어요?”

“…물론. 그것들 역시 내 팀원들이 야심차게 준비했거든. 하지만 난 추천하지 않아.”

스타일리스트는 구태여 부연을 덧붙이진 않았으나 케일럽은 그가 말할 이유를 여러 개는 댈 수 있었다.

첫째.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케일럽 윈터가 맡아야 하는 역할은 비정한 사냥꾼 이상의 무엇이 아니었고 지금도 다르지 않다. 둘째. 높은 확률로 우승자들에 대한 응징이 될 이 게임에서라면, 캐피톨이 아닌 누군가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셋째. 늘 그렇듯, 주연이 아닌 배역의 형태는 간결할수록 좋다.

그리하여, 사냥꾼 소년은 그저 사냥꾼 소년이었다.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직물로 짜내 보여줄 권리를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수많은 히마티온에 시선이 묶인다.

솔직해지자면 케일럽은 사냥꾼이 아니었다. 오히려 운이 좋은 우승자 중 하나에 속했다. 전통적으로 머테이션과의 사투는 후반부의 걱정거리였고, 코뉴코피아의 주인은 프로 조공인들과 그의 동맹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의 중심일 그들은 어떤 거대한 존재 앞에서 무력해지고 말았고 그것은 케일럽의 목숨을 구했다. 하여 케일럽 윈터라는 우승자를 논할 때 매번 간과되는 사실이 있다. 그 경기장 안에서 패닉을 겪지 않은 조공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

그리고 베틀로 짜낸 반투명한 그림 속에는 신화처럼 재현된 수많은 그가 있었다. 캐피톨에서 비추어지는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림 속의 케일럽 윈터는 어미뿌리가 올라앉은 나무 뒤에 숨어 웅크려 떨고 있기도 했고, 윤기가 흐르는 검은 파도 속에 파묻힌 조공인들 사이에서 기어 나오고 있기도 했다. 패닉에 빠진 프로 조공인 중 하나를 겨우 제압해 창을 빼앗고, 어미뿌리가 잠든 사이 그것의 독이 묻은 나무껍질을 뜯고, 덫을 놓고, 밧줄을 만들고, 코뉴코피아에서 짧은 몸싸움을 겪고 팔에 상처를 입고. 모든 일들이 그가 겪은 오랜 전쟁의 서사시처럼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그중 하나는 아리아 라이징과 윌리엄 시틀을 죽이고 있었다. 

모든 케일럽이 살아남고자 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겁에 질린 채였다. 속이 울렁거렸다. 다행히도 그의 역치는 캐피톨에서 지내며 점차 높아졌다. 게워낼 정도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케일럽은 마지막 시안을 펼쳤다. 어느 순간부터 책자를 함께 바라보던 스타일리스트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난처한 얼굴로 마치 아이를 어르듯 한다.

“오, 자기야Sweetheart. 설마 그 시험작을 두르고 싶은 건 아니지? 그건 무척-”

“추상적이죠. 게다가 제 이미지에 어울리지도 않고. 저도 알아요.”

이윽고 우렁찬 트럼펫 소리와 음악, 함성, 마차가 단단한 바닥을 밟고 구르는 소리. 행진하는 대열 위에서 케일럽 윈터가 그 ‘정적인’ 히마티온을 두르기 위해서는 긴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정말로, 제 마지막 개최식이 될 테니까요. 스타일리스트는 드문 고집을 피우는 그의 조공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이 사건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목숨이 세 번째로 밀어 넣어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케일럽에게 넉넉한 품으로 걸쳐진 미색의 튜닉은 허리선에서 한 번 묶였다. 가죽을 쓸 법도 한데 굳이 여러 색의 끈을 꼬아 감았다는 점에서 스타일리스트의 고집을 느꼈다. 면과 실크를 섞어 지은 가장 부드러운 천은 마차의 움직임과 불어오는 바람으로 발목 위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튜닉 위를 휘감은 히마티온은 달랐다. 광택이 도는 반투명한 천은 그 무늬를 아직 허락하지 않았으나, 마치 좀먹은 듯, 독에 삭은 듯 끄트머리가 거슬거린다는 특징이 있었다. 케일럽은 느릿한 동작으로 좌중을 둘러보고, 소냐와 델피니움의 모습을 확인한다. 때는 모든 구역의 마차가 모습을 드러낸 후, 8구역의 조공인 셋 모두가 준비되었다고 여겨지는 행렬의 중반이다. 케일럽은 마차 손잡이를 틀어쥔 채 다른 손으로 히마티온을 풀어 헤친다. 머리 위로 들면 그것은 마치 휘날리는 깃발이나 휘장 같았다. 과거의 가장 좋은 것들만을 모으리라 다짐한 지미 툴리우스의 저택 홀을 장식하는, 커다란 태피스트리와도 흡사했다.

머리 위로 펼쳐지는 것은 아름다운 거미집 위에 거꾸로 매달린 거대한 거미-어미뿌리다. 거미줄은 허공에서 정형과 비정형을 오가는 아름다운 무늬를 그렸고, 여덟 개의 무지갯빛 눈은 눈앞의 청년에게 고정되어 있다. 관중에게 얼굴을 허락하지 않은 뒷모습의 청년은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뻗은 손만큼은 어미뿌리의 가장 커다란 앞니를 짚고 있었다. 그 광경에서 다른 조공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장면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화는 변형되고 상징은 수많은 비유를 내포한다. 케일럽 윈터는 원초적인 공포를 극복한 우승자였고, 어떤 독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의지가 꺾이지 않는 청년이었고, 진실을 외치다 영원한 벌을 받은 여인 곁을 끝까지 떠나지 않을 소년이었다. 어째서 사냥꾼은 거미를 사냥하고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관중은 의아해하리라. 그러나 여전히 하늘을 울리고 땅을 떨게 하는 박수와 함성 속에서 행렬은 마무리된다.

두 번의 우승자, 싸늘하게 식은 시체. 둘 중 어느 쪽도 다시는 아레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 사건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와 같은 고민은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실질적인 해결책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케일럽은 그저 그런 감흥과 우울한 서러움을 느꼈다. 주노 아이리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문제의 선언이 끝나자 묵직한 침묵이 트레이닝센터를 짓눌렀다. 점차 몇몇의 소곤거림이나 헛웃음 소리, 재빨리 자리를 뜨는 발소리에 쫓겨 사라졌지만, 케일럽은 오래도록 트레이닝센터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 남아있는 다른 조공인에게 시선을 준 뒤에야 제 몫의 숙소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걷는 내내 머리가 멍했다.

무성인이 그를 자연스럽게 테이블로 안내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간혹 착잡하거나 혼란스러울 때 케일럽은 조용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과거를 반복해서 떠올려 삼키는 행위는 그럴싸한 말을 만들기 어렵게 했다. 반복해서 떠올린다. 

정말로 라리에나 샌드는 호명되었고 케일럽 윈터는 대신해 자원했으며 우는 여인은 울지 않았다. 조공인이 결정된 후에도 평화유지군은 줄곧 라리에나를 주시했다. 캐피톨로 가는 열차에서는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쳤다. 오세트 파텔과 르네 라이징, 그리고 이브 솔로비요프ㅡ케일럽 윈터가 혁명단의 인원이라 확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들ㅡ. 개중에서도 주노 아이리스의 선언이 가장 혼란스러웠다. 그는 마치 이번 회차의 헝거게임에 엄청난 계획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혹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거대한 사건의 당도를 예고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신하건대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리라. (게임메이커가 이런 거짓을 말해서 대체 어떤 이득을 보겠는가?) 그러나 그렇다면 어째서 24명의 생존자를 죽음의 경기장으로 내모는가? 캐피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혁명단의 알 수 없는 계획에 동행할 수 있는가? 어떤 의미로든 믿지 못할 우승자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가? 수많은 의문 속에서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어떤 가장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라면 날것의 진실로밖에 대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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