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3)
악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찾아온다더라.
하여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 앞에 나타난다지.
그렇다면,
아주 오래전, 나는 나의 동물들에게…….
그 짧은 말에 구스트앙은 웃음을 참는 것 같은, 다시 말해, 무어라 놀릴지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트로이메라이의 눈이 슬슬 굴러갔다. 왜 그렇게 봐. 그리고 아이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질문이 날아왔다. 아니다. 애초 그는 언제나 그를 향하는 질문 그 자체를 반기지 않았으므로, ‘달갑지 않으며 더욱이 달갑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뭐가 미안한 건지?”
“그런 게 중요해?”
“내가 무엇을 용서해야 할지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나도 몰라.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취소할래. 넌 매번 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면 안 되는 거야?”
“일단은 학자니까, 그러기는 어려운 편이지.”
학자의 본분은 탐구라며 입을 놀리는 구스트앙에게, 트로이메라이가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네 현 외형과 꼭 어울리는 욕설 표현이다’라는 그의 타격감 없는 답에 금방 다시 내리긴 했지만.
짜증 나.
곧 트로이메라이가 침대 머리맡에 머리를 기댔다. 녹색 머리카락이 나무에 닿으며 부드러운 소음이 스쳤다. 아래로 미끄러져 비뚜름하게 앉아 무릎을 더욱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이제 더 말하기 싫다는 의사 표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음에도 그는 트로이메라이의 의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굴었다. 또 다른 ‘질문’을 한 것이다.
“부림술로 쫓았다면서.”
아하, 그 토끼……. 계속해 앞만을 바라봤다. 옆에 앉은 구스트앙이 오래된 라디오라도 되는 것처럼. 단지 엉덩이를 보다 미끄러뜨려 숫제 앉은 것인지 누운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모양이 되어간다.
그리고 기울어졌던 침대가 다시 본래의 모양을 찾았다. 구스트앙이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동시에 아이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이제 가려나.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뚫고 새어 들어온 빛도 시야를 밝히지는 못했다.
시야가 새까맣게 뒤덮였다. 그러나 이제는 어둠 속에서조차 무엇도 둔해지지 않았다. 외려 뚜렷하다. 역시, 세계가 지나치게 선명한 탓이다. 나는 말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은데. 자꾸만…….
팔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으로 귀를 누르려 했다. 한쪽 손이 잡아채이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추측할 필요조차 없이 구스트앙이었다. 굵은 손가락이 아이의 얇은 손목을 쥐었다.
“이걸 어떻게 혼내야 할까.”
하늘색 눈에 잠시 빛이 들어찼다가 꺼졌다. 트로이메라이는 다시 눈을 뜨고도 여전히 앞만을 바라봤다.
“걔가 먼저 나 싫댔어.”
“그래. 차였냐? 그렇다고 울지는 말고.”
“안 울었거든. 그리고 혼내긴 뭘 혼내. 내가 네 아랫사람이야?”
아이가 발로 침대보를 밀어내며 구스트앙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놓아줄 것이라 큰 기대는 없었음에도 단단한 손은 쉽게 떨어졌다. 그렇게 약 1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게다가 ‘그런 것’을 내게 보낸 건 구스트앙, 너잖아.”
“……그래. 울지는 말라니까. 어릴 적에도 딱히 잘 우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안 운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해. 괜히 손을 들어 눈가를 쓸었다. 집게손가락 끝에 속눈썹이 닿았다. 그리고 좌우로 가볍게 기울였다.
흐르지 않은 눈물이 엷게 묻어나왔다.
언제, 그리고 왜? 그러나 의문과 당황 속에서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운 거 아니야.”
기가 막힌다는 듯 보던 구스트앙은,
“네 추정 정신연령을 0.431살쯤 낮춰야겠어.”
“그 쓸데없이 구체적인 수치는 또 뭔데.”
구스트앙이 트로이메라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찾아온 이유는 말이다, 로 열린 서두에 드디어 아이가 그와 시선을 맞췄다. 아차, 하며 바로 앞으로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서도.
“좀 씻고, 밥도 먹고.”
“주지도 않으면서.”
“줄 테니 먹으라는 이야기잖냐.”
“……방구석에만 박혀 있다고 그렇게 잔소리하더니, 밖을 나가라고는 안 하네.”
구스트앙이 말없이 특유의 오만한 미소로 답했다. 트로이메라이는 받아들였다. 그래, 밖의 정세는 눈치로도 알려주기 싫다는 거지. 그러면서도 직접 발로 방을 나서는 것은 말리지 않을 것처럼 굴고. 그렇다는 건 이 근처에는 전쟁과 관련된 무엇도 없다는 건데. 작은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중, 아이의 깐깐한 친구가 녹색 털뭉치 위에 손을 올렸다. 이건 너무 어린애 취급이잖아. 쳐내도 꿈쩍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인상만 찌푸렸다.
“그 벌레의 마음을 얻어 보는 건 어때.”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트로이메라이의 눈이 절로 동그랗게 뜨였다.
“내가 왜?”
너 역시 ‘벌레’라 칭하는 토끼의 마음을 어째서 얻어야 하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귀찮은 일을 감행할 의지가 없었다. 다만 인정하자면, 실은, 그 토끼를 마주하기가 싫었다는 것이. 그러니,
“그 토끼가 다시 들어오면, 그땐 죽일 거야.”
그리고서는 트로이메라이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구스트앙은 가만 지켜보았다.
“내기를 할까. 아니, 탑이라면 내기보다는 게임이 어울리겠지. 관리자의 공증은 따로 받지 않을 테지만.”
“바로 얼마 전에 그 ‘게임’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건데도. 나는 관심 없어.”
무릎에 파묻혀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냉담한 반응에 구스트앙의 엄지와 검지가 맞부딪히며 딱, 소리를 냈다.
“네가 성공한다면, 바라는 것은 뭐든 하나 들어주마.”
“만약 내가 그 보상으로, 나를 죽여 달라고 한다면?”
“죽을 방법을 알려 주겠다.”
“……또 만약, 전쟁을 멈추라고 한다면?”
“포 비더로부터의 도발은 멈추겠지.”
죽여 주는 대신 죽을 방법을 알려 주겠다 하고, 전쟁을 멈추라면 도발을 멈추겠다 하고. 완벽과는 거리가 먼 엉성한 소원권 하나. 구스트앙은 그런 것을 주겠다고 했다. 자의적 판단에 따라 네가 바라는 것과 비슷한 것은 쥐여주겠다고.
트로이메라이가 여전히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그러나 보다 뚜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한은 어떻게 되고, 기준은 어떻게 되는데?”
“네가 포기할 때까지. 하지만 기준은 내가 정해.”
“그럼, 그 기준이 뭔데?”
“미리 전하지는 않을 거다. 보편적일 것이라고는 장담하지. 그렇지만 부림술로는 안 돼.”
“치사하네.”
“하지만 네가 잃는 건 없잖으냐.”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내키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던가. 지배 외의 수단을 쓴 것이 너무나 오래되었다. 힘을 보이고,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스스로 저항을 포기하게 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었다. 상처받지 않기로는 그것이 가장 간단했다. 지난날엔 어떻게 했더라. 몇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래전, 마음을 얻기 위해 마음을 주었던 과거가 스쳤다.
―빠르게 고개를 저어 지워냈다.
그는 다만 그 토끼의 얼굴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하여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기억을 다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 신도 괴물도 사람도 아닌 것을 바라보는 듯했던 그 눈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그런 약해 빠진 토끼에게 숙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그리고 어쩌면, 노력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
실은 성공할 자신이 없는 스스로가.
싫었다. 아니다, 정정한다. 귀찮았다. 그런 것으로 하자…….
구스트앙이 아이의 머리 위에 올려둔 손을 옮겼다. 살짝 굽힌 손가락을 미끄러지듯 뒤로, 뒤통수로, 그리고 목덜미로.
닿은 손끝이 지나치게 차가웠으므로, 침묵을 지키던 트로이메라이의 목이 오므라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네가 경고했듯 죽이면 되는 일이야.”
“일단 이 방에 처넣기는 하겠다는 거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못됐다. 그런 얼굴을 보내 두고선 죽이라고?”
“그녀와 그 벌레가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건 너도 알잖으냐.”
이번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사실에 속이 울렁거렸다.
풀이 죽은 트로이메라이―구스트앙의 관점에서는 그러했다―를 확인한 구스트앙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제법 친절하고도 다정하게.
“싫다면 다른 방법도 없지는 않아. 나로서는 딱히 알려 주고 싶지도 않고, 그닥 유쾌하지 않은 방안이다만.”
뭔데? 트로이메라이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말할까, 그러지 말까. 고민에 잠겼던 구스트앙이 말했다.
“그 벌레가 네 앞에 있을 때, 네가 너를 해치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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