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선고

2.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4)

Noli Timere by YU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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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트앙이 주먹을 쥐고, 엄지손가락만을 빼내 자신의 심장께를 툭툭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본 트로이메라이가 실소했다.

“네가 그럴 리 없어.”

“왜 그렇게 생각했지?”

“굳이 ‘그런’ 외형의 개체를 골라, 내 옆에 놓아두고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할 리가 없잖아. 정확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 것도 같은데.”

말을 끝마친 트로이메라이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내가 추측하는 하나.

―너는 내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것인가?

“너는 내가 그 벌레를 죽이는 것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그것보다는 네가 내게 더 쉬운 방법을 줄 리 없다는 거지.”

어느새 구스트앙이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서는 그것을 빙글 돌렸다.

당연하게도 아이는 질색했다.

“왜.”

“드디어 우리 또라이메라이가 머리라는 걸 굴릴 줄 알게 되었다 싶어서.”

“자꾸 긁을래? 그래서, 내 말이 틀렸어?”

구스트앙이 가볍게 힘을 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담배가 반으로 접히듯 부서졌다. 잔해가 부스러져 소리 없이 떨어졌다. 그의 어조 또한 그만큼이나 가벼웠다.

“뭐, 믿고 싶은 대로 믿어라.”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럴 거거든. 답하기 위해 쏘아보려 입술을 무니, 어느새 그는 이곳에 없다. 구스트앙은 바람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났다. 불붙은 적 없는 담배 잔해가 바닥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기대었던 자세를 바꾸어 움츠려 앉았다. 손등과 손바닥이 스치며 문득 깨닫게 된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긁어 파내었던 손등의 상처가 사라졌다는 것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변화는 싫다. 설령 그것이 치유라 할지라도.

결국 휘둘린 꼴이다. 그러나 상관은 없었다.

트로이메라이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무엇이라도 의미가 될 수 있다. 지나치게 선명하게 다가오는 세계 탓에…….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그는 무엇에도 의미를 두고 싶지 않았다. 어려워진 단절이 더욱 단절을 갈망하게 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일수록 가슴에 박아 되새기게 되지 않던가.

그래, 단절. 연결되지 않는 것. 하여 사랑하지 않는 것.

눈을 떴다. 조용하다. 오롯한 혼자였다. 다만 떠올렸다.

언젠가의 아므즈가 트로이메라이에게 질문했던,

―그는 ‘아직’ 그녀를 사랑하는가?

그때의 그는 당연한 것을 왜 묻는지 모르겠다 답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는?

모르겠다. 그녀가 아주 밉기도 했다가, 그립기도 했다가, 애틋하기도 했다가, 원망스럽기도 했다가, 사과하고 싶기도 했다가.

아므즈로 용을 만들 때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그 시체를 소유하니 어떤 감정도 그를 지배할 수 없었는데.

단지 그런 것을 바랐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너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손을 들어 올려 네 얼룩진 뺨을 쓸어낼 수 있다면.

사람 하나가 사라진 방. 공기가 식어간다. 어쩌면 단순히 느낌만이 그러했던 것뿐일 수도 있다.

아므즈를 떠올릴 때면 그는 더욱 외로워지지 않던가…….


토끼는 아므즈처럼은 웃지 않았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맑은 미소가 아닌, 입꼬리만 겨우 끌어올린 미소만을 지을 줄 아는 사람처럼, 소녀는 그렇게 웃었다.

덜덜 떨리는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달그락거리며 탁자 위에 그리 무겁지 않은 짐을 올려둔 소녀는, 탁자 앞에 그대로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제 트로이메라이가 용건을 먼저 묻는 일은 없다.

“씻, 으시라고 하십니다…….”

가까스로 문장을 완성해 낸 토끼가 그 축 처진 긴 귀를 달랑거리며 방을 나섰다. 소녀가 제게 등을 보이자마자 트로이메라이의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손은 험하지만 누군가의 시중을 들어본 일은 적어 보이는 소녀.

자신을 낮추는 것은 익숙하지만 상대를 높일 줄은 모르는 토끼.

별안간 낯선 곳에 끌려와 의지할 곳 없이 공포에 질린 것이 마치 그 수많던 신해어를 닮은 것도 같았다. 난생처음 수족관에 담겨 어찌할 줄을 모르는 신해어들. 손만 내밀면 다가와 제 손에 머리를 대고 비벼댈.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다루기 쉬운 어떤 것.

흔들리는 토끼의 귀가 신해어의 지느러미를 닮은 것도 같다.

입안이 텁텁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트로이메라이는 돌연 입 안에 작은 자갈이 들어앉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직, 소녀가 눈앞에 있다…….

그러므로 질문했다. 음성에 어떤 온기도 담기지 않도록 노력하며,

“죽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어린 몸과 엷은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 그리고 그보다도 어울리지 않는 내용.

토끼는 그대로 멈춰 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3초나 지났을까. 흠칫 떤 소녀의 어깨가 눈에 띌 정도로 위를 향해 솟았다. 그러더니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된 마냥 삐걱대며 무릎을 꿇고, 그를 향해 읍소하듯 고개를 조아렸다.

트로이메라이는 단지 답을 기다렸다. 소녀 역시 트로이메라이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고요했다. 손톱으로 제 목의 연한 살을 가볍게 긁어낸 아이가 먼저 침묵을 깼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

“나는 언제든 너를 죽일 수 있다.”

“사, 살려, 려 주세요…….”

소녀가 답했다. 형편없는 목소리였다. 아므즈라면 결코 낼 일이 없을.

이어지는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따위의 말들은 흘려 넘기려 했다. 그러나 아이의 고개가 좌우로 갸웃거려진다. 불현듯 궁금하다. 그렇다면 물어야 하지 않겠나.

“왜 그렇게 생각했지?”

말하고서 트로이메라이의 굵은 눈썹이 미간을 향해 좁혀졌다. 꼭 얼마 전 구스트앙처럼의 질문이 아닌가.

토끼가 주먹을 세게 쥐었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를 짜내어도 알 수 있는 것이 없었거나, 혹은 실은 무엇도 사과하고 싶지 않았거나.

“그, 그냥 다…….”

“그래.”

아이의 짧은 답이 떨어지자마자 토끼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또한 상관없었다. 트로이메라이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구스트앙이 서 있던 자리를 다시 확인한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 잔해라면 다음번에는 치우라 해야겠어.

가슴께를 힘주어 세게 긁어냈다.

아프다. 그러고도 그의 표정은 미세한 균열이 인 것 외의 변화가 없었다.

네가 죽고 싶어 해 죽이는 것이라면 내 탓이 아니잖아. 아니다, 꼭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더라도. 저리 공포에 질려 일하는 것보다는 죽여 안식을 주는 것이 소녀를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고. 트로이메라이의 반쯤 감긴 눈이 침잠했다.

익숙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을 이유 또한 없지 않던가?

다시 한번 가슴께를 긁어냈다. 이번에는 심장 부근의 살에 손톱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갉작이기를 몇 번.

무언가 이상했다. 그것도 하필 심장께가.

이번에는 상관없다, 며 뭉갤 수 없었다.

검은 후드의 뒷목 부분을 위로 살짝 끌어올리고, 목 앞의 천을 주욱 당겨 안쪽의 살이 보이도록 했다. 새삼 자각하게 된다. 손과 팔을 섬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제법 어렵다. 아무래도 어린 몸이므로.

이제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 쉬이 확인할 수 있다. 숙여 턱과 목이 닿도록 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은 그저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투명한 옥빛의 균열이 가슴에 주먹 정도의 넓이로 퍼져 있었다. 아이의 작은 주먹에 빗대었으니 절대적인 크기라면 결코 크다고는 말할 수 없을 테다.

그것을 엄지손가락의 옆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살과 다르지 않은 촉감에, 체온과 같은 온도. 움직일 때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감각 역시 제 살과 같이 살아 있다. 하지만 그 위를 단단한 것으로 죽 긁어내면 가벼운 울림이 머리에 닿는다.

아이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러니까, 트로이메라이의 ‘단절’은 분명 그의 심장을 도려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단절로 잘라내어진 구스트앙의 팔이 기계 의수로 대체된 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탑 최고의 의사인 그조차도 단절로 잘라낸 것을 다시 붙일 수는 없다.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나 어려운 일임에는 분명할 테지.

만약 참이라면 단절로 도려낸 심장을 이런 것으로 덧댄다 해서 다시 기능하도록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쿵, 쿵. 규칙적인 심박수가 손바닥에 닿았다. 이것은 기계 아닌, 분명한 그의 심장이다…….

근본적인 의문이 그를 휩쓸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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