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선고

3. 너는 내 것이라. (2)

Noli Timere by YU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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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메라이는 방에 가만 누워서도 제법 많은 것들을 손에 넣었다.

볼펜부터 마스크까지. 아주 사소하고도 대단치는 않은 것들이었지만, 아이 자신은 제법 만족스러워했다.

상처는 아주 천천히 나았다.

아직 움직일 수는 없을 만큼.

그러나 익숙해질 수는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어 예민해진 것이지, 본래부터 아프다 해서 드러누워 우는 성정도 아니었다. 표현하는 것보다는 참는 것이 더 적성에 맞기도 했고.

무시와 단절은 결이 제법 비슷하다.

요 며칠 트로이메라이가 먼저 구스트앙을 부른 적이—정확하게는 토끼를 통해 구스트앙을 호출한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구스트앙 또한 아이를 먼저 찾지는 않았다. 바쁜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단순히 보기 싫거나. 트로이메라이 자신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달았거나.

그는 그것이 불편하면서도 편했다. 구스트앙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밖’과 연결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으므로.

밥은, 굶었다.

위장이 비었다는 감각은 익숙했다. 하지만 구스트앙이 몸을 조정해주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지, 사흘째에는 배가 고파 괴롭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던지 몸으로 새기게 되었다.

배고프다. 하지만 아파. 눈을 감고 고통의 크기를 비교했다. 식사를 위해 앉아 목으로 음식물을 넘기는 것과 굶주림. 고민할 것도 없이 지금은 전자가 압도적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딱히 먹을 이유는 없었다.

토끼가 무어라도 드셔야 하지 않겠느냐며 누워 있는 그에게 음식을 떠먹이려 들 때엔, 토끼를 죽이면 다른 시중이 올지 진지하게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음식 냄새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므즈를 닮은, 그러나 아므즈가 아닌 존재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구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럼에도 결국 죽이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서 손에 넣은 것 중 하나인, 볼펜을 손에 두고 굴렸다.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것이 언제였더라. 잘 떠오르지 않았다. 로 포 비아에 필요한 문서들은 죄다 기린의 손을 거쳤으니, 트로이메라이가 직접 문서를 만질 일부터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더욱 난감했던 점은 작아진 몸 때문에 근육을 섬세하게 다루기 어려웠다는 것에 있다.

‘어린이’의 몸이란 어른의 것보다도 한없이 미숙해서, 작은 움직임일수록 힘이 들어간다. 덧붙여 아직 작아진 몸에 익숙해지지도 못했지 않나. 몸을 움직여야 시행착오를 거칠 수 있을 테지만, 그는 이 방을 나선 적도, 하다못해 거세게 움직인 적조차 없었다.

처음 수첩에 글자를 써냈을 때는 그 스스로 보기에도 그림인지 글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고도 당당하게 소녀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그야 당연히 알아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읽을 수 없다면 토끼의 능력 부족 탓이다.

토끼는 그렇게 몇 분가량 수첩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저, 그러니까… 명랑……? 제가 더 명랑하셨으면 하나요?”

다시 수첩을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다시 적어도 당연히 바뀌는 것은 없다. 처음부터, 수첩을 들고 허공에 적는 글이 반듯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다시 적었다. 그것 이외의 방법이 없었으므로. 저번 같은 접촉을 제하자면.

그렇게 접촉하지 않기 위한, 그러고도 의사소통하기 위한, 두 사람만의 조별 과제가 시작되었다.

가끔 인내심이 먼저 닳은 트로이메라이가 소녀에게 손바닥을 내어놓으라 요구하기도 했지만, 소녀는 완강했다.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해내겠습니다. 그 개선장군이라 해도 좋을 기백에 아이는 늘 졌다.

보다 정확한 이유라면,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보아야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토끼를 보는 것 외에는 없었으므로, 그 이상의 회유 시도를 할 수 없었다는 것에 있었지만.

과연 지배가 훨씬 편리했다. 설득도 회유도 필요치 않은, 의지까지 지배하에 두는 그런.

아이가 잠시 눈을 빛냈다. 물리적인 의미다. 부림술의 사용과 함께 발생하는 바로 그 빛.

하지만 곧 꺼뜨렸다. 어린 몸으로 수인에게 발동하는 부림술이라고 해 보아야 강제력은 없다시피 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죽일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해칠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나의 사람인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토끼가 그에게 먼저 칼을 들이대지 않는 이상은, 영 그럴 의지가 발생할 것 같지 않았다.

수첩과 볼펜을 대충 옆에 던져두고, 인형을 주물거렸다. 적잖이 부드러웠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주물거리다가, 인형의 얼굴 부분을 눈앞에 들어 올려 살폈다. 트로이메라이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 ‘못생겼어.’라고 한 번쯤은 뱉었을 법했다. 아이는 귀여운 것보다는 강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으므로. 그러니 그의 동물들 생김새가 ‘그런’ 것 아니었겠는가.

두 손으로 인형의 입을 각각 잡았다. 위아래의 그것들을 움직여 본다. 열었다가, 닫았다가.

인형의 입을 움직여 보아도 인형이 말을 하는 일은 없다. 당연하다. 인형이니까.

왜인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인형을 내려, 그 입 속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가 다는 아니지만 대충 어느 정도라면 들어가기는 했다. 진짜 왜 들어가는 거지. 그러고 있으니 졸린 것도 같았다.

토끼가 이불을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잠들었을 것이다.

뭉근한 의식 속에서, 소녀가 아이의 허리춤까지 내려가 있던 이불을 어깨 위까지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작게 속삭였다.

“추, 우실까봐.”

그런가. 납득한 트로이메라이가 다시 의식을 저 아래로 가라앉혔다.

꿈은, 꾸지 않는다면 좋겠다.

아니, 꾸어도 좋으니 기억되지 않기를.


이번 글씨는 꽤 괜찮았다. 트로이메라이 자신이 보기에도, 그림보다는 글자 같았다. 완성된 문장은 이러했다. 그는 꾸준히 이것만을 물었다. 손짓이나 발짓으로는 할 수 없던 질문이다.

「어떤 명령을 받았지?」

명랑이 아닌, 명령.

아이는 결코 토끼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다. ‘아므즈를 닮은 토끼’ 정도로 족했다. 토끼의 삶은 궁금하지 않았다. 그의 자비는 무지로부터 나왔다. 아므즈를 닮았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으나, 아므즈를 닮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은 알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손끝으로 글자들을 가볍게 쓸어 본다. 힘주어 써 볼펜에 눌린 자국들이 그대로 오돌토돌 닿았다.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수첩을 찢어 토끼에게 건넸다.

그런데도 토끼는 또 ‘그렇게’ 웃었다. 입꼬리만을 겨우 끌어올려 짓는 그 미소. 이전과 다른 점을 꼽자면 눈썹이 휘었다는 것 정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해요.”

늘 그러했듯 종이를 다시 가져와 살폈다. 이제 와 글자 연습을 해야 할 일이 생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치솟는 짜증에 이것은 토끼의 탓이 아닌 구스트앙의 탓이라 되새겨야 했다. 그 깐깐한 머저리 자식.

돌연 아이의 동공이 작아졌다. 글쎄, 종이를 앞뒤로 뒤집으면서도 확인한다. 인쇄한 것처럼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아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히 그랬다.

아이가 토끼를 본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다. 처음 수첩에 질문을 적어 보여 주었을 때와 같다.

속았다고 해야 할지, 이것 또한 배신이라 해야 할지. 트로이메라이는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웠다.

오래 살았으나 사람을 많이 접하지는 않았다. 시간으로 인한 관록이란 이제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계약이 종료되어 이제는 운명을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 그래서 몰랐다…….

—너는 처음부터 내가 무엇을 적었는지 알고 있었구나.

혹은, 그저 아이가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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