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6)
하지만 토끼는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옆으로 감춘 주먹을 작게 쥐었다 편 토끼가, 문어를 감싸인 이불 채로 들어 올려 침대 아래로 내렸다. 그야 주인의 ‘불편’을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사용인의 업무 아니던가.
트로이메라이는 그 행위의 어느 것도 방해하지 않았다.
소녀가 문어를 들어 올릴 때에는 시선을 닫힌 창문 방향으로 돌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제 아이가 어느 곳을 바라보더라도 문어는 없다. 아이가 바라보는 곳은 이제 문어가 ‘있던 곳’이다.
그러나 곧 아이의 눈이 흐려지는 것에 토끼가 몸을 굳혔다. 정답, 이 아니었나?
소녀가 다시 흘끔 바라본 문어는 여전히 얌전했다. 이불로 덮이고도, 이불째로 바닥에 내려놓아지고도, 작은 꿈틀거림 외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녀로서는 좋은 일이다……. 긴장했던 어깨에 의식적으로 힘을 풀어냈다.
아이의 흐려졌던 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의미 없는 하품을 한 트로이메라이가 언제나처럼 무고한 눈으로 토끼를 응시했다. 소녀는 오로지 미소로만 답하며 아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고.
그는 이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다시 말해, 늘 그러했듯 토끼를 적당히 무시했다는 것이다.
트로이메라이가 수첩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떨어뜨렸다.
그가 쓰려던 것이 무엇이든, 굳이 할 필요 없는 의사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토끼는 이 모든 것들이 꽤 잘 흘러가고 있다 생각했다.
자연스레 간이 책상을 침대 위로 올려 그 위로 음식을 늘어놓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번에 올라오는 음식의 가짓수가 늘어난다. 척 봐도 귀하고 값비싸 보이는 것들로 채워지는 식단이 부럽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가질 수 없는 것을 탐내지 않는 법을 토끼 역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다만 소녀는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음식의 맛을 묻는 것처럼도 들리도록. 애정 어린 시선과 그것에 이어졌던 당황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니까, 단지 목격한 그것이 지나치게 선명했기 때문에. 소녀는 궁금했다.
어쩌면 호기심이 아닌 걱정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러자 식기를 놀리던 트로이메라이의 손이 멈췄다.
그가 문어가 있던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떤 답도 돌려주지 않고선, 식기를 내려놓으며 간이 책상을 작게 밀어냈다.
해석하자면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만 치우라는.
토끼는 그 지시를 착실히 이행했다.
소녀는 이런 것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척’을 하지 않는다.
그런 아이는 얼마간 그래왔듯 눕고. 뒤척이다가. 침대를 조금씩 굴러다니기도 했다.
문어는 그러고도 얌전히 침대 아래를 지켰다.
평화로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아이의 숨소리가 천천히 차분해져 간다. 소녀는 직감했다.
잠들었구나.
짧은 안도 끝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방을 둘러보았다.
이런 작은 행동조차 무례라 이름 붙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겠으나, 소녀는 이제 이런 것으로는 그녀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던 소녀의 다리에 잠시 힘이 풀렸다.
그동안 죽은 듯 얌전하던 문어가 인제 와서 움직였던 것이다. 문어를 감싼 이불이 출렁이듯…….
문어의 존재와 갑작스러운 움직임이라는 두 가지의 악재가 겹쳐 하마터면 넘어질 뻔도 했지만, 토끼는 물론 버텨냈다.
꿈틀거리던 문어가 이불 밖으로 삐죽 촉수를 하나 내밀었다. 그 붉은 촉수가 하늘거리는 것에 토끼가 움찔했다.
아이가 깨었는지부터 먼저 살피면서.
일단은, 잠든 것 같지…….
그리고 문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폈다.
문어는 아직 촉수를 흔들듯 꿈틀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는 건가?
그러던 문어가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냈다. 사람은 고작 2개의 손으로도 많은 일을 해내고는 한다. 그렇다면 8개의 손(촉수)으로는 얼마나 많은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겠는가?
그 섬세한 촉수의 움직임에 어째서인지 소녀는 기절할 것도 같았다.
깔끔하게 이불을 벗겨낸 문어가 바닥과 일체 되어 가는 과정을 토끼는 3분여간 그렇게 가만히 지켜보았다. 문어는 흐물거리며 늘어지면서도 붉은 색상만큼은 보호색으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으므로, 바닥에 동화되지 못한 문어의 존재감이 선명했다.
토끼는 이 말할 수 없는 문어가 슬퍼하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오로지 입 모양으로 물었다. 아이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괜찮아?’
하지만 문어는 침대 위의 아이만큼이나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계속해 바닥에 퍼진 채 움직이지 않던 것이다.
저것이 정말 슬퍼하는 것이라면…….
토끼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동물이 부리미를 좋아할 이유가 무어 있다고.
그 모습을 몇 분간 더 지켜보던 토끼가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토끼가 보게 된 것은 수첩의 종이를 한 장 찢어 볼펜으로 적은,
「크라켄」
……이라는 쪽지를 몸에 붙이고선 아이의 다리에 달라붙어 아이와 마주 앉은 문어였다.
자신이 없던 새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기이할 정도로 상상할 수는 없었으나 대충 이해할 수는 있었다.
소녀의 눈이 잠시 대각선 위를 향했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무튼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제 몸에 달라붙은 문어를 가만 내버려 두었다. 문어는 이전에 바닥에 늘어진 채 슬퍼하던―그런 것처럼 보였던— 때와는 생기가 달랐다. 꼭 이 방에 막 들어와 뽈뽈 기어가던 때의 문어처럼.
덧붙여, 아이와 문어 사이에 놓인 것이 체스판과 체스말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을 땐 어떤 반응을 해야 좋을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매번 쉽게만 흘러가는 날은 왜 이렇게 드문 것인지. 하지만 소녀는 눈앞의 소년을 확인하자마자 납득했다. 아무래도 대상이 ‘저것’이라면 당연히…….
일단 기다리자. 이대로 가만 서 있다 나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토끼가 입가에 미소를 그려내며 두 손을 모으고 섰다.
그러나 문어가 토끼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여덟 개의 촉수를 모두 착실히 꿈틀대면서. 그리고는 제 몸에 붙은 쪽지를 가리켰다. 「크라켄」이라 적힌 바로 그것은 분명 아이의 필체였다. 근래엔 아주 많이 괜찮아진 글자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이의 표정이 더욱 뚱해졌다. 토끼가 이해하기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보여주고는 하던 비언어적 표현.
실은 그저 트로이메라이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떻든 결론적으로, 둘 중 누구도 ‘말’은 할 수 없는 탓에 더욱 혼란에 휩싸이는 소녀였다. 정말 뭘까…….
다만 혼란 속에서도 소녀는 사용인으로서 자리를 지킨다는, 의무만은 놓지 않았던 것이다.
곧이어 아이가 검은 체스말을 움직였다. 문어 역시 촉수를 팔랑이다 흰 체스말을 옮겼고. 소녀는 이 작은 게임을 가만히 기다렸다. 적어도 아이는 이 체스에 온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눈을 살짝 내리 깐 토끼가 조심스레 체스판을 살폈다. 소녀가 읽기에 이 판은 현재 분명 아이의 승세다……. 아무래도 마땅히 문어보다는 ‘저것’께서 체스에 능할 테니 당연한 일이지 않나. 그것까지 확인한 토끼가 다시 완벽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체스말 놓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조금 고개 올려 살핀 체스 게임의 결과는,
문어, 「크라켄」의 승리였던 것이다.
아이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으나 무언가 불편해하고 있음을 감지한 토끼가 몸을 굳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그를 위해 사용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듯해서.
그리고 승리를 확인한 크라켄이 수첩을 들어 올려 무언가 글자를 적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기댄 아이가 그 팔의 손에 턱을 기댄 채 그 내용을 지켜보았고.
소녀의 자리에서는 그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을 본 아이가 미간을 구겼다는 사실이었다.
그러고도 아이는 문어를 해치지 않았다는 것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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