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너는 내 것이라. (4)
트로이메라이가 처음 들여다보았던 토끼의 눈에 담긴 ‘그’는 괴물도 신도 사람도 아닌 어떤 것. 그러니까, ‘무엇’.
아차, 문장을 끝마친 토끼가 아이의 반응을 확인했다. 여전히 웅크려 누워선 어떤 움직임도 없다. 소녀는 그제야 말 꺼낸 것을 후회했다. 홧홧한 열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쓸데없는 일을 했구나. 필요 없던 걱정까지도 함께.
청소를 마무리했다. 정리가 이어진다. 그다지 정리랄 것도 없었다. 아이는 늘 침대 밖을 나서지 않았고, 어질러진 것이라고 해 보아야 이불 정도였으니.
종이를 버리기 위해 구겼다. 자연스레 다시 읽게 된다.
「미워.」
소녀의 입가에 자리했던 미소가 부서진다. 아이가 자신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덕택에.
방에 들어설 때마다 계속되던 떨림이 멈췄다. 왜 ‘저것’은 화를 내지도 질책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상처받은 것처럼 구는가?
이미 구긴 종이를 다시 한번 구겼다. 이제,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먼지는 물론 ‘쓰레기’까지 모두 치워낸 소녀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돌아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이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할 일은 해야 했다. 조심스레 다가간다. 무릎을 하나 침대 위에 얹었다. 몸을 기울여 보다 가까이, 그리고,
습관인지 허리춤까지 내려가 있는 이불을 아이의 어깨 위로 올렸다.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아 꽤 수척해진 모습이 보다 명확히 눈에 들어왔다.
소녀의 손이 옷에 닿을 때엔 아이의 오르내리던 가슴도 멈추었으나, 그것도 잠시, 아무런 일 없던 듯 방은 적막하다.
서로가 사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처음 토끼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처럼.
방을 나선다. 문고리를 잡아, 문을 연다. 그 행위는 매우 간단하고도 쉬웠다. 약하디약한 토끼마저도 쉽사리 해낼 수 있을 정도로.
문을 닫기 전, 방 안을 들여다본다. 방의 넓이와 고풍스러운 가구만 보아도 과연, 값비싼 곳이다.
아이가 있는 곳을 스치듯 보았다. 직전과는 아주 조금 달랐다. 아마 인형의 위치가…….
그것까지 확인한 순간 아이와 눈이 마주쳤던 듯도 했다.
토끼는 반사적으로 문을 닫았다.
“오늘까지도 식사하지 않으시면 식도에 관을 꽂아 주시겠다고…….”
침대 앞, 공손히 손을 모아 선 토끼가 읊듯이 전했다. 물론 그것은 트로이메라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소녀의 목소리에 담긴 것 역시 궁금하지 않았다.
“이후엔 강제로라도 식사를,”
토끼가 흡, 빠르게 숨을 들이쉬고는 아이의 등을 두드렸다.
“하게 되실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토끼의 미소만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색하고도 처절한 그것. 괜히 인형을 더 세게 쥐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네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나 역시 네 목소리를 듣지 않겠다.
“그러니 직접 드시는, 그, 편이.”
토끼가 이번에는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툭.
“낫지 않으실까요…….”
계약의 종료로 예민해진 몸이 지나치게 기민했다. 예상치 못했으나 이번 것은 제법 간지러웠다. 원치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움찔한 것이다. 이게 뭐야. 트로이메라이는 이 방에서의 모든 일들보다도 지금이 가장,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낫, 지 않…으실까요?”
토끼가 재차 물었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는 가늠이라도 해보던 선을, 토끼는 언젠가부터 쉽사리 넘나든다.
기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트로이메라이 자신에게. 오랜 시간, 선을 넘은 존재는 전부 죽여 왔으나 지금의 그는 토끼를 죽일 수 없다. 그러니 선을 넘어도 넘지 않아도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죽일 수 없다면 존재를 지워내면 되는 일 아니겠나. 다시 한 번 침묵을 지켰다.
“평범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은 아오나, 오랜만의 식사는 위장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트로이메라이에게 어쩔 줄 모르는 토끼의 호흡이 ‘들렸다’. 답답하다. 얇은 숨을 내쉬었다. 실은 모두 듣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는다 해 모든 빛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마음먹는다 해서 아무것도 듣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던 토끼가 이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늘 그랬듯 어깨 위로 올리려는 것인가. 그 정도는 괜찮았다. 다시 잠이 들기 위해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그러나 아이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식사를… 하셔야 하지 말입니다.”
토끼가 이불을 걷어낸 것이다. 추위가 훅 끼쳤다. 이불이 끌리며 인형도 함께 끌렸다. 인형이 배꼽까지 내려간다. 이제 인형은 아이의 얼굴을 가리지 못한다.
트로이메라이는 황당했다. 그것도 매우. 반사적으로 토끼를 보았다. 토끼는 아이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마는.
“저, 이불도 바꿀 때가 됐으니까요.”
정말이지 황당했다…….
토끼의 여느 때보다 공포에 질린 눈을 보았을 때엔 더.
모르겠다. 귀찮다. 대충 그대로 눈만 감았다.
아니다. 눈 감은 채 손을 휘적여 수첩을 잡았다. 단단한 표지가 먼저 손끝에 닿았다. 손을 더 뻗어 볼펜까지도 쥐었다. 그리고 눈을 반쯤 떴다. 반듯하게 적으려는 시도는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토끼는 읽지 ‘않을’ 테니. 그럼에도 이것만큼은 적어야 할 것 같았다. 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말이 있듯이.
이불을 개던 토끼도 그즈음엔 멈추고 아이의 행동을 감상했다.
아이는 시야각 탓에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다. 토끼의 떨리는 손과 희게 질린 입술을.
휘적거리던 볼펜은 한참 뒤에야 다시 침대 위에 놓였다. 트로이메라이는 종이를 찢어 토끼에게 건네지도, 수첩을 들어 보여주지도 않았다. 완성된 문장을 고이 침대 위에 올려두었을 뿐이다. 그러고는 곧 다시 눈을 감았다. 아이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방을 채워간다.
토끼는 고뇌했다. 볼 것인가, 말 것인가. 드물게도 삶의 선택지가 토끼의 손에 쥐어진 순간이다.
해도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선택지.
이불을 개어 정리하는 척하며 다가갔다. 고이 놓인 그 수첩을 향해. 그런 척을 하며.
그리고 읽었다. 이제는 대충 휘갈겨도 그림처럼은 보이지 않는 글자들이 모여, 그러나 삐뚤빼뚤하게,
「나는 너를 죽이지 않는다.」
트로이메라이는 단지 억울했다. 다른 모든 것들보다도 토끼의 공포만은 외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녀는 아이와 수첩을 번갈아 보았다. 고개까지 돌리며 몇 번이고. 토끼의 귀가 그와 똑같은 횟수만큼 흔들렸다. 적힌 말은 정확히 읽었으나 그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엔 죽이겠다 협박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바뀐 것인가? 변덕이라면 또다시 언제든 뒤바뀔지 모른다.
그러나 구스트앙이 ‘고른’ 토끼는 충분히 약하고 여렸으므로,
개던 이불을 대강 침대에 올려두었다.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었다. 무릎 하나를 침대에 올리고, 이어 다른 무릎 하나를 침대에 올렸다. 끙, 짧은 신음을 했다. 그리고 수첩을 들어 올렸다. 바로 옆에 놓인 볼펜도 함께.
볼펜과 종이가 맞닿으며 얼마간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의 어깨를 손끝으로 건드린다. 그럼에도 눈을 뜨지는 않는다. 어쩌지. 고민하다 손바닥으로 아이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주 약하게. 그것만으로 트로이메라이는 놀라 움직였다. 눈을, 떴다.
글을 쓰고 공부해 본 적 있는 사람 특유의 힘있고 정갈한 글자들이 바로 앞에 놓였다.
「미안합니다.」
—토끼는 충분히 약하고 여렸다.
물리적으로는 트로이메라이를 해치지 못할 만큼, 정신적으로는 누구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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