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선고

4.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2)

하지만 토끼는 읽지 않았나.

토끼가 읽지 못하는 척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구스트앙도 혹시…….

‘어이없음’을 한껏 담아 눈을 굴리다, 자신과 똑같은 표정의 구스트앙을 발견했다.

트로이메라이의 눈썹이 휜다. 진짜, 인가?

이런 때엔 괜찮은 성능의 유사 리트머스 종이가 있다.

망설이지 않고, 적었던 문장 바로 아래 다시 펜을 놀렸다.

「그러니까 네가 차인 거야.」

그러나 리트머스 종이의 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구스트앙이 어떤 미세한 반응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무슨 글자인지’를 탐구하는 학자만이 앞에 섰을 뿐이다.

읽고도 읽지 못하는 척을 하던 토끼나, 탐구심으로 글자를 살피는 구스트앙이나. 후자에 보다 사감이 담겨, 둘 중 어느 쪽이 더 싫으냐 하면 꼽기 어려웠다.

토끼를 통역사로 사용하고 싶어도 당장 토끼를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단이 없었다. 소통 불가한 구스트앙에게 요청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으므로.

책상에 손톱을 대고 갉작였다.

그러면 나는 고쳐 달라고도 하지 못하고.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구스트앙의 개소리를 듣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그때, 겨우 ‘탐구심’으로부터 빠져나온 구스트앙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대체 내정을 얼마나 놓았던 거냐?”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냥 몸이 이래서 글도 엉망이 된 거라고. 꾹 다문 입으로 항의를 대신했다.

수첩은 그가 다시 가져갔다. 간이 책상도 한 손으로 들어 올려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면서,

“목은.”

느닷없는 낮은 목소리에 시선을 아래로 내려 제 손을 보았다. 아직 펜은 남아 있다. 말 대신 펜이라도 던져 볼까. 손에 쥔 볼펜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내가 아니라, 네가 그렇게 만든 거다.”

빙글 돌아가던 펜이 뚝 멈췄다. 

하지만 네가 고쳐 주지 않았잖아. 네 탓인 거라고.

동의와는 먼 표정이 떠올랐다. 얼굴 근육의 변화란 아주 작았음에도 구스트앙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는 다시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국 전, 기절한 너를 내가 왜 죽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뜬금없이 이런 것은 왜. 가만히 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야 내게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어째서 의식 없던 너를 적으로부터 지켰고.”

의식이 없던 탓에 기억은 없으나, 그러했을 것이라 추측은 하고 있었다…….

아마 그런 형태의 죽음은 네가 그린 그림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대국 후, 죽으려던 너를 어째서 살려냈다 생각하나.”

죽는다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결과인 편이 네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나를 이용하는 쪽이 유용하니.

아이의 낯빛이 점차 어두워진다.

목 언저리에 달라붙어 있던 열이 가슴과 얼굴까지 닿는 듯했다. 더우면서도 답답했다. 이불 속에 온몸을 파묻지 않고도 그랬다. 울렁이는 속과 더불어 어지럽다.

후드 앞, 목덜미 부분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역시 아무것도, 먹지 말았어야…….

식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앎에도.

하지만 정말로 열이 났다.

어차피 답은 할 수 없다.

아무튼, 그런 건 다, 그냥.

—난 잘못한 게 없어.

“나는 네 진실의 일부를 보고도…….”

간이 책상을 내려놓은 구스트앙이 아이에게 몸을 가까이했다.

트로이메라이의 눈이 깜빡여진다. 신수 운용만으로 내려놓을 수 있었을 것을 왜 굳이.

“너는 내 기분을 생각해 본 적 있는지.”

그의 어조는 변함없이 한결같다. 낮고, 차분한. 그럼에도 트로이메라이는 그가 화를 내는 것처럼도 보였다. 어처구니없다. 왜?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은 탓에 물러날 곳도 없다. 밀어내더라도 소용은 없을 것이고. 좌우로 빠르게 한 번 눈을 굴렸다. 그리고,

탁, 데구르르.

볼펜을 던졌다. 당연스레 구스트앙은 그것을 쉽게 잡아챘다. 그리고 놓아 떨어뜨렸다.

그가 웃었다. 결코 좋아서 짓는 것만은 아닌 미소. 토끼의 것과 본질이 같으면서도 다른.

“자꾸 그리 정말 애처럼 굴 테냐.”

트로이메라이가 구스트앙을 쏘아보았다. 왜 내 탓을, 하는 것처럼 말해? 아이에게 방어란 곧 보다 강한 공격이었으므로.

이제는 정말, 가깝다. 뿔테 안경에 반사된 빛이 아이의 눈을 간지럽혔다.

“여하튼 그래서, 네 목은 고치지 않겠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반성하는 시늉 정도는 해. 네가 숙이고 들어가야 할 때를 판별하지 못할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잖냐. 자존심이라도 조금 굽혀 보라는 이야기다.”

무지를 견디지 못하는 구스트앙 치고는 관대하다면 관대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아이는 또다시 억울해졌다. 애초에 그는 말을 할 수도, 글을 적어 전할 수도 없다. 무엇을 어떻게 반성하든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챌 수 있겠나.

—물론 딱히 반성하고 있지는 않았지만서도. 그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무표정에 가까운, 그러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랫입술이 튀어나온, 트로이메라이의 뚱한 얼굴. 그것에 구스트앙은 돌연 담배가 그리워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는 사람처럼. 숨을 아주 조금씩 마시다 목에 손을 댔다. 그리고 튀어나온 것은 옅은 기침. 콜록, 그와 동시에 인형을 세게 쥐었다.

흐으, 가는 숨을 들이쉬며 예상했던 것보다는 아프지 않음에 안심했다. 느린 들숨과 날숨을 몇 번 반복하다가, 손가락 네 개를 뒷목에 대었다. 바로 앞의 구스트앙을 외면하듯 눈을 감고 느껴 본다. 이전보다도 뜨겁다. 아마, 몸살. 자신의 몸임에도 제 것이 아닌 것 같다.

대강 점검을 마치고 이제 하던 것을 계속해보라는 듯 구스트앙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담배가 그리워지다 못해 주먹이 쥐어지는 구스트앙이다. 그러나 빠르게 힘을 풀어냈다.

결국 기어코 이마를 짚고 만다.

이 갑갑한 녀석은 정말이지…….

그리고 그 자신의 눈 아래를 가볍게 문질렀다. 이윽고 한숨처럼,

“‘이건’ 네 탓이 아닌 것이 맞겠어.”

다른 것도 딱히 내 탓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트로이메라이의 눈에 담긴 뻔뻔함을 읽어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눈짓만으로 합을 맞췄던 수많던 시간이 있지 않나.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힘 조절을 하지 않으면 으스러질 그것에.

제법 복슬하다. 손에 닿는 감촉이 동물의 털을 닮은 것도 했다. 트로이메라이가 아주 짧게 움찔했다.

‘미쳤어?’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당연하다는 듯 그의 뇌리에 재생된다.

단지 움직이면 아프다는 이유로, 트로이메라이는 그 모욕―아이의 관점에서―을 가만 견뎠다.

순식간에, 목으로부터 시작해 머리와 가슴까지 퍼져나가던 열이 사그라든다.

잔상으로만 남은 열과 두통, 울렁거림만이 직전까지의 몸살을 짐작게 했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것을……. 다만 굳이 머리에 손을 올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트로이메라이는 구스트앙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다 포기했다. 여튼 목도 고쳐 주면 어디가 덧나나.

끝났으면 꺼져. 그의 손을 쳐내고 싶었으나 어깨를 들어 올리기 싫어 주저했다.

그런 트로이메라이의 얼굴에서 긍정적인 의사 표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취급이 싫다면, 나가면 돼.”

문을 보았다. 네모나게 각진 그것을.

이제는 끝난 몸살에도, 이불을 덮어쓴 것 또한 아님에도, 괜스레 공기가 답답했다.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것은 또, 싫었기 때문에.

트로이메라이는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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