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1)
멍청이.
분명 구스트앙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팔꿈치로 목덜미를 짓누르던 감촉과 시린 약물이 실핏줄 속으로 흘러 들어오던 감각. 그런 것들이 아직 트로이메라이에게 선했다.
빗나간 ‘단절’과 함께 어둠에 휩싸이듯 의식을 잃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
그리고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지나치게 밝은 빛, 그리고 환한 방. 눈이 부셔 몇 번 느리게 끔벅이다가, 주위를 둘러보려 고개를 움직이니 띵한 머리와 쓰린 속이 와닿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손은 묶이고 무엇인지 모를 주술로 신수조차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짜증 섞인 한숨을 뱉어낸 직후, 트로이메라이가 당장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실은 구스트앙이 그를 살렸다는 것이며, 납득한 현황은 자신이 포 비더의 전리품 비스름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뒤로 묶인 손 탓에 어떻게 해도 어깨가 걸리지만, 나름의 편한 자세를 찾아 기대어 앉았다. 그나저나 여긴 또 왜 이렇게 밝아. 엿이나 먹으라는 의도일 것이 분명…….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투덜거릴 수 있는 것도 찰나일 뿐이었다. 상황 파악이 끝나자마자 몰려오는 거대한 어떤 감정, 혹은 감정들 때문에.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주체가 되지를 않았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이 언제인지 아득함에도 그는 울어야만 했다.
진득한 감정에 심장께가 저릿하게 울려 들었다. 후회는 언제라도 늦다. 바꿀 수 있는 것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되찾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죽인 사람이라면 더욱 마땅히 그러하지 않겠나.
그러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에야말로 그 결과만큼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아서, 그 고통 또한 흐려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적어도 트로이메라이는 그렇게 믿었다. 외로움은 버겁다. 앞으로의 그는, 인간성을 되찾은 그는 이전보다도 외로울 것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 무거운 감정을 감당하는 일에도 자신이 없다.
죽어야지. 그리하여 벗어나야지. 되도록 그 순간이 아주 짧았으면 좋겠다. 그다지 아프지 않았으면도 좋겠고, 그러니까, 그냥, 전부.
도망치고 싶어.
숨을 멈춘다. 숨에 흐느낌이 섞이는 것이 싫어 부러 숨을 참아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새삼스레 깨닫는다. 숨을 멈추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구나, 하고. 숨을 참는 것으로는 자신은 죽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역시, 외롭다…….
벌컥.
문이 열렸다.
익숙한 면상이다. 단정한 차림에 뿔테 안경. 그는 제게 갑갑한 얼굴이네 뭐네 지껄였지만, 정말 차림새부터 갑갑한 사람은 저 남자 자신 아닌가? 그리고 눈물에 범벅이 된 얼굴로 구스트앙을 본 것도 잠시, 고개를 홱 돌렸다. 구스트앙은 그를 외면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막 들어온 이 방의 ‘주인’은 담배를 꼬나문 채,
“야, 또라이메라이.”
무릎을 올리고 쭈그려 기대어 있던 몸을 조금 더 움츠렸다. 그냥, 싫어. 전부 다. 그 꼴을 보던 구스트앙이 입꼬리를 올렸다.
“우냐?”
진짜 싫어. 속으로만 뇌까리던 트로이메라이는, 어느새 방에 담배 냄새가 퍼지기 시작해서야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하는 거야.”
“보면 볼라? 담배에 불을 붙이고, 피우고, 그대로 서서, 네가 하는 모양을 구경하고 있지 않아. 내가 널 묶어 놨지 눈을 가린 것도 아닌데. 내가 모르는 새 시각에 이상이라도 생긴 건지. 묻긴 왜 물어. ……그나저나 넌 이래도 폴더폰 자세를 찾아 가는 거냐.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구스트앙이 발을 툭 밀어 문을 닫았다. 단정한 구두처럼 절도 있는 몸짓으로. 그리고 툭, 툭. 이어지는 소리를 귀에 담던 트로이메라이가 눈을 옅게 내리깔았다.
“재수 없어.”
“그래서 뭐, 할 말은 없고?”
“하면, 들어줄 마음은 있고?”
“들어는 줄 수 있지. 나로서는 일단 ‘사람’이 된 감상이라거나.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기쁨이라거나 그런 것들을 기대하긴 했는데.”
구스트앙은 말도 되지 않는 개소리도 설득력 있도록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다. 꽉 조인 셔츠 깃만큼이나 ‘그’라는 사람이 단단해 보여서일까. 어쩌면 단순하게도 이 방이 너무 밝았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죽고, 싶다고?”
트로이메라이의 입이 다물렸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차가운 머리카락과 단단한 손톱만으로 구성된 존재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도 악마도 될 수 없다면 사물이 되는 것은 어떨까. 시체도 일종의 사물이므로.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그가 해야만 했던 말은,
“나는 너를 위해 싸우지는 않을 거야, 구스트앙.”
탑의 왕을 겨눌 무기가 필요해서. 그런 쓸모 때문에 나를 살려둔 것 아니냐. 그가 작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니 죽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트로이메라이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가문은 네게 종속되었지만, 사람의 마음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그것이 바로 탑의 법칙이지 않던가. 그는 저를 포함한 그 어떤 부리미도 사람을 부릴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다른 말을 해도 괜찮아. 가령, 손이라도 풀어 달라던가. 불편할 텐데.”
“꺼져.”
꿈쩍 않고 트로이메라이를 훑어만 보던 구스트앙이 담배 연기를 깊게 뿜어냈다.
“강조하자면, 이곳에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죽을 수는 없다. 네 단절이 아니라면 널 즉사시킬 수 있는 공격은 너 자신도 어렵고, 이 모함엔 탑 최고의 의사가 있으니까.”
물론 그 의사는 포 비더 구스트앙, 자신이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라도 계속 모함에 붙어 있을 수도 없을 텐데. 비웃어야 할지 안도해야 할지 트로이메라이는 짧게 고민했다.
“그러면 왜 왔어? 죽이지도 않고, 설득할 것도 없으면.”
하늘빛 눈이 데굴 굴렀다. 이대로 공방에 팔려 가는 건 아니겠지. 그것보다는 곱게 죽여 줄 정도의 의리와 친애는 남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야만 하는 현실에 어떤 감상을 가져야 할까.
어느새 마른 눈물에 버석한 감촉이 남은 얼굴로, 담배를 떨구고 발로 비벼 끄는 것을 가만 바라만 보았다.
단지 구스트앙은 답지 않게도 답변하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을 고민했던 것이다.
“네가 외롭다고 했잖아.”
답변까지의 시간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간결한 답변. 다시 입을 꾹 다문 트로이메라이를 무시한 구스트앙이 구석에 놓인 탁자에 앉아 차를 우렸다. 그는 따뜻한 김이 그 위로 퍼져나가는 모습을 눈에 담다가, 녹색 털뭉치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이리 오라고 부르는 것 같은 손짓. 신해어라도 부르는 것이냐는 날 선 반응에도 그는 무시한 채 또다시 손만을 까닥였을 뿐이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으냐, 너는.
결국 트로이메라이가 일어섰다. 양손이 뒤로 묶인 이 꼬락서니로 걸어야 하겠느냐는 항의도 당연스레 묵살당했다. 다만 발로 바닥을 짚으니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맨발로 땅을 딛는 것이 오랜만이어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라, 구스트앙이 이렇게 컸던가?
“……뭐야?”
“내가 똥멍청이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멍청이인 건 예상을 못 했는데.”
고개를 숙여 몸을 점검한다. 옷이 갈아입혀진 것이야 이해할 수 있다. 잡혀 들어왔으니 그랬다고 치고, 머리카락이 다시 짧아진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다. 손을 묶을 때 걸리적거렸나 보지. 방이 지나치게 크다고 느껴지고 구스트앙이 커 보이는 것도, 놀리기 위해서였다 가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되짚어 느껴지는 목소리의 높낮이와, 옅어진 숨의 깊이 등으로 미루어 보자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다.
―작아졌네. 어려졌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정말?
구스트앙의 흐느끼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웃음소리가 트로이메라이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게 뭐야. 그가 미간을 구겼다.
“이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주술인지 과학인지. 여튼 싸울 때엔 쓰지도 않더니 이제 와서 꺼내 들고 지ㄹ…….”
“네 정신 연령을 반영했다.”
그리고 또 한 번 이어지는 끅끅거리는 웃음소리.
“잘 어울리네.”
나로서는 이 편이 널 다루기 쉽잖냐. 나는 네 어릴 적 모습에 더 정이 가니 네게 손해만 되지도 않을 테고. 넌 내게 일종의 자비를 기대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더냐?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 이어지는 말들을 뒤로 하고, 트로이메라이는 우두커니 섰다.
이제는 죽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장은.
아무래도 다른 사고보다는 옅은 분노와 그보다 진한 의문이 앞섰으므로.
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이 삐져나왔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다니. 웃을 수가 있다니.
있지, 나는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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