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2)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한 트로이메라이를 구스트앙이 다시 한 번 불렀다. 야, 이리 오라니까.
곧 트로이메라이 특유의 굵은 눈썹이 또 한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갈 거야.”
“이곳을 제하면 갈 곳이나 있고?”
“나는, 네 맞은편 의자로 가겠다고 한 건데.”
“패배가 충격적이긴 했나 봐. 예상했던 것보다야 순순하네.”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묶인 손 탓에 걸음걸이는 엉거주춤. 마음에 차는 것이 없어 굳은 얼굴 근육과 빛을 잃은 눈. 그럼에도 불만을 표현하는 한숨은 여전했다.
그가 의자 끝에 대충 걸터앉고 나서야 구스트앙은 답했다. 트로이메라이의 앞에 찻잔을 하나 더 놓고 찻물을 부으면서.
“그야 문밖은 당연하고, 침대 밖으로도 나오지 않는 방구석 찐…….”
“어쩌라고.”
“반응이 좋네.”
“이런 게 재밌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뭐라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다는 거다.”
실없는 농담들. 이런 것들을 재미있다 느끼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사라진 인간성과 감정에 그때의 즐거움도 함께 희석되어 버린 것 같다. 지금의 구스트앙의 눈에 담긴 감정이란 제법 무정해 보였으므로.
말 없는 하늘색 눈이 찻잔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나저나 차는 또 어떻게 마시라는 것인지. 뒤로 묶인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그리고 눈앞의 구스트앙을 향해 턱을 까닥였다.
그 행동에 담긴 뜻을 간단히 해석하자면, 아마 ‘풀어.’ 정도의 명령.
구스트앙은 무시했지만, 여하튼 의도는 그러했을 것이다.
“야.”
트로이메라이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고, 구스트앙이 탁자를 손으로 툭, 툭 두드렸다. 그러기를 몇 분여가량.
익숙했을 침묵이 이제는 불편하다는 사실이 새삼 생경했던, 트로이메라이가 탁자 다리를 가볍게 찼다.
“손이나 풀어 주던지, 찻잔을 치우던지. 둘 중 하나는 좀 해.”
“고민 중이잖아.”
구스트앙이 손에 턱을 괴고, 그답게도 딱딱한 표정으로 녹색 털뭉치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넌 손 쓸 수 있다고 자랑하는 거야?”
“그냥, 고민 중이라고 했잖아. 보채지 말고 기다려.”
“참 나. 답은 정해져 있는데.”
―그냥 죽이면 되잖아.
빛 잃은 트로이메라이의 눈이 그런 말을 하는 듯했다. 눈을 꾸욱 감았다가 뜬 아이가 어깨와 팔뚝이 걸리는 것은 무시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멍한 눈으로 또다시 천장을 올려다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구스트앙이 웃었다. 그리고 뒷목을 잡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죽음은 너무 쉽잖냐.”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는데.”
“그땐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던 거고. 나는 네게 죽음이 너무 쉬운 선택지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왜?”
“그걸 지금의 네게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군.”
구스트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흰 정장 끝이 의자에 스치는 소리가 났다. 구두와 바닥이 맞닿는 단단한 소리도. 트로이메라이 앞에 선 그가 찻잔의 손잡이를 쥐고, 아래에 앉은 아이의 입에 가져다 댔다. 정확하게는, 아이의 몸을 한 트로이메라이의 입에.
당황한 그가 고개를 돌리고, 몸을 뒤틀어도 찻잔의 끝은 그 창백한 입술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다는 듯 꿋꿋하게 자리했다.
조심해. 중얼거린 구스트앙의 손이 트로이메라이의 한쪽 귀를 덮고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 머리를 고정했다.
밀쳐내도 밀어내어지지 않고, 저항해도 치워 주지 않았다. 완력으로도 신수로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씨근덕거리다가 숨을 고르고,
“뭐 하는 거야.”
“마시고 싶어 했던 것 아닌가?”
“그렇게는 말한 적 없어. 나는 찻잔을 치우든 손을 풀든 하나는 하라고 했었지.”
“둘 다 딱히 해주고 싶지는 않아서. 게다가……. 됐다. 이제 내가 네게 선택지를 주마. 먼저, 나는 이제부터 이 찻잔을 기울여 내용물을 비워 낼 거다. 선택해. 마실지, 찻물에 적셔질지.”
말이 끝맺어진 직후, 찻잔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한 팔에 힘을 실어 강하게 밀어냈지만 꿈쩍도 않는다. 이 무슨 주술인지. 단순히 지배자의 가호가 사라져 주술에 취약해졌다기엔…….
말하기 위해 입을 열자마자 찻물이 조금씩 밀려 들어왔다. 이게 진짜. 밀려오는 찻물 사이로 기침 섞인 말을 뱉어냈다.
“잠깐, 싫어.”
“왜?”
“뜨겁단 말이야.”
구스트앙은 너무 쉽게 멈췄다.
트로이메라이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상의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구스트앙이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디서인지 모를 곳에서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얼굴을 닦았다. 말라 굳은 눈물 자국도, 조금 흘러내렸던 찻물도 깨끗하게.
뚱한 얼굴로 트로이메라이가 말했다.
“참신한 모욕이었어.”
“네 처지를 알려주려 했을 뿐이야. 그래서, 더 하고 싶은 말은?”
“……손, 풀어줘.”
“직전보다는 마음에 드는 표현이지만, 트로이메라이. 그렇다면 나를 설득해야지.”
“내가, 너를?”
녹색 머리카락 아래의 창백한 얼굴에 금이 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살아. 너는 이제 존재 자체로 법칙이 되던 지배자가 아니다. 언행에 당위성을 부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진짜 어린아이 대하듯이 설명하네.”
“네가 애새끼 이상이 되지를 못하니까.”
너는 너밖에 모르잖아. 나도 꽤 이기적인 편이지만 너와는 비교가 어렵지.
구스트앙이 덧붙였다.
왜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래서 어쩌라고.
트로이메라이는 입 밖에 내지만은 않았다. 다만 신경질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또한 않았다.
당장 할 수 있는 것 하나 없이 포 비더에 갇혀 이 모양이 되지 않았나.
지배자의 가호는 사라졌고, 내가 가졌던 것은 모두 저 치의 것이 되었고, 하지만 당장 죽을 수도 없고. 살아서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아무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고. 그냥 다 귀찮고.
그저 늘 그랬듯 방에 처박혀 쭈그려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주 나쁘지는 않겠으나,
그러기엔 이 방은 너무 밝았다.
“나를, 길들이고 싶은 거야?”
너는 어찌하여 나를 살렸나.
“아니.”
고민 없이 답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왜?”
“아주 오래전 일 때문이야.”
“그건, 추억이나 정?”
“내가 네게 레버를 내리게 만들었잖아.”
구스트앙과 자하드를 구하기 위해, 쏟아들어져 오는 물에 무력한 사람들이 죽을 것을 앎에도 수로의 레버를 당겨 열었던 바로 그 일.
이번 게임에서 구스트앙의 도구에 담긴 심판관이 후회하고 참회하느냐 물었던 바로 그 일이다.
“어때, 감정이 돌아온 지금은 후회하고 참회하냐?”
트로이메라이는 오늘 중 처음으로, 손이 묶여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엷게 떨리는 손을 구스트앙의 눈앞에 놓아두어야 했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하지 않나. 위아래로 짧게 오르내린 속눈썹까지 감출 수는 없었으면서도.
내가 옳았다. 그때 그랬지. 나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해. 하지만 너희는 사람을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
하여 현재를 보라. 나는 여전히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나를 제한 우리 중 몇몇은, 너를 포함해 그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니 레버를 내리는 것이 자신인 편이 옳았다.
그러므로 트로이메라이는, 그것만큼은.
“후회 안 해.”
참회에 대해서만큼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입술만을 꾹 깨물었다가,
“……내 자식들은 어떻게 됐어?”
날아들어 온 질문에 구스트앙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렸다.
“고립과 정보 차단? 나를 다루는 방법이 너무 뻔한 거 아니야. 이런 것에 길들여질 만큼 멍청하진 않거든.”
꺼지라며 소리 높여 따지던 틈, 어느새 손을 묶고 있던 장치가 풀렸다. 구스트앙이 한 일일 테다. 풀린 구속에 아이는 스스로 어깨와 손목을 돌리며 상태를 점검했다.
끼익.
열린 방문 앞. 구스트앙이 트로이메라이를 뒤돌아보았다.
“차는 마셔라.”
“이제 다 식었을 텐데.”
손짓 하나 없이도 차는 다시 데워졌다. 올라오는 김만 보아도 적절한 온도일 법하다. 그렇다면 왜, 억지로 차를 입에 넣으려 했을 때에는 이러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나.
이유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음에도 기분이 나빠졌다.
마주한 얼굴로 재차 확인한 구스트앙의 눈이 여전히 차가웠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네가 지금의 그 어린 모습으로 이 모함에 머무는 이상, 나는 너를 보호할 것이다.”
구스트앙은 그런 말만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의문도 질문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바로.
이제 혼자네.
이제는 그럴 수 있게 된 손으로 침대 위 이불을 쓰다듬었다.
이 방은 밝고, 따스했다.
지나치게.
그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트로이메라이는 그 사실에 새로이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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