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탑

[화이밤]귀환 - 1

가시찬탈

3부 81화 (둥지전 캣타워, 화이트가 밤의 필드에 소환) 후반부 화이트가 점프하려는 아리아와 비올레를 공격하고 그 공격이 성공했다는 if

화이트 최애인 거 티남

???:그거 원작 설정이랑 다르지 않아요?

└어쩔 수 없어요 그것이 2차

???:그거 작가님이 이미 못박으신 설정이에요

└견디세요 그리고 받아들이세요 어떤 지옥을


날카로운 검격을 따라 필드에 핏자국이 뿌려졌다. 그보다 늦게 하얀 머리칼이 등 뒤로 내려앉았다. 무릎부터 무너진 밤의 몸이 털썩 소리를 내며 자신의 핏물 위에 쓰러졌다. 이 정적을 끝낼 권리가 있는 사람은 필드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

“끝났군.”

마지막까지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화이트는 그제야 검을 내리고 긴장을 풀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힘을 쏟아부은 보람이 있다. 그 여자의 이상한 기술 때문에 인식이 어그러졌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눈앞에서 놓쳤다. 피투성이의 필드를 가로지르는 하얀 맨발은 감히 부정을 허용하지 않고 부드러운 카펫 위를 밟는 듯 깨끗하기만 했다. 답지않게 조바심을 낸 것에 보상하듯 여유 있는 걸음이었다. 밤의 앞에 멈춰 선 화이트는 시선만을 움직여 발밑을 내려다 보았다.

“이렇게 간단히 쓰러질 거면서 여태 짐을 애먹였단 말이냐.”

화이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양어가 남일 구경하듯 공중에서 흥미롭게 귀와 꼬리를 팔랑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화이트가 가볍게 손짓해 제 앞으로 불러냈고 고양어는 화들짝 놀라 귀를 바짝 세웠다.

“냥?!”

“이봐, 너 내부와 통신하는 기능도 있지? 이 녀석의 동료에게 짐의 음성을 전달해라.”

“그, 그건, 가능하긴 하지만 규정 위반이다냥···!”

“목숨보다 소중한 규정인가 보지? 빨리 판단해. 짐의 검은 기다리는 걸 싫어한다.”

“냥!!!!!”

———

제어실로 들어온 호크니, 라크, 엘레인의 앞에 거대한 스크린이 나타났다. 필드의 상황을 보여주는 스크린에는 동료들의 모습이 비쳤다. 쓰러진 야마도 급한 일이었으나 더욱 심상치 않았던 건,

“밤?!”

화면 속 밤은 이미 정신을 잃은 듯했다. 막 그를 쓰러트린 화이트가 검을 갈무리하고 정면으로 돌아섰다. 그가 손짓하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어실에 있는 모두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비올레의 동료들. 듣고 있나?

"···!"

―슬레이어 후보는 짐에게 패배했다. 그래봤자 선별인원- 별 볼 일 없더군.

“이런, 상황이 안 좋아. 호크니, 쿤에게 연락을!”

엘레인이 눈짓했으나 호크니는 그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포켓으로 쿤에게 연락을 걺과 동시에 호크니의 옵저버가 제어실 밖으로 날아갔다. 라크만은 단 한 번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라크는 창을 꽉 쥐었다.

‘검은 거북이…!’

“쿤! 큰일났다! 밤이 화이트에게…!”

―밤이 왜?!

“아무래도 당한 것 같아. 우리도 스크린으로 보고 있는데, 반응이 없어! 일단 포켓의 입력을 증폭시킬게!”

모두가 화이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잘 것 없는 선별인원과의 약속이긴 하나 짐의 명예가 있으니 웬만하면 지키려 했다만.

밤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등을 크게 베였고 늘어진 팔에는 관통당한 흔적이 있었다. 피에 절은 옷을 입은 밤은 이제서야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흰 손이 피투성이의 뺨을 감싸쥐었다.

“짐은 눈앞에 만찬을 두고 더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겠어.”

정신을 잃었지만 비올레의 몸에는 아직 엄청난 힘이 잔존해 있었다. 전성기의 무력을 되찾은 슬레이어와 대적하고도 이만한 힘을 보존하고 있다니, 그 한량없는 힘에 도리어 어이가 없어진 화이트가 실소를 흘렸다. 이 힘을 전부 끌어내지 못하고 패배한 애송이의 무능함이 한심하기도 했고, 힘의 극히 일부만으로도 그만 한 능력을 선보인 슬레이어 후보의 잠재력에 감탄하기도 했으며, 신의 사랑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부당함에 탄식하는 한편 그 영혼을 자신이, 자신만이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희열 또한 느꼈다. 지금에 와 욕념의 감정은 덧없다. 이제 자신의 힘이 될 테니까.

곧고 단단한 몸이 밤의 위로 겹쳐졌다. 참을 수가 없다. 힘이, 영혼이 짐을 부르고 있어. 잘 보란 듯 슬쩍 화면 너머로 시선한 화이트는 조급해 보이기까지 했다.

—똑똑히 봐라. 짐이 이 자의 영혼을 먹고 슬레이어의 권좌를 되찾는 모습을.

“저러다 정말 밤이…!”

—큭… 젠장, 밤-!

그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아니, 필드에 있었다고 해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밤의 심장께에서 청백색의 구가 반짝이더니 목줄기를 타고 올라와 입안에 담겼다. 그것을 받아먹듯 입을 벌린 화이트는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눈꺼풀 아래에 백안을 숨겼다. 미래를 본 호크니가 먼저 “안 돼!” 소리를 질렀다. 고결하게 빛나던 밤의 영혼은 기울여 맞물리는 틈에서 머물다 곧 화이트의 입안으로 삼켜졌다.

“감미롭군.”

화이트가 목젖을 울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환희에 가까운 한숨이 트였다. 화이트의 목으로 넘어간 빛은 그의 명치 언저리를 맴돌다 사라졌다. 백안이 다시금 오만한 색을 내보이고 길게 휘어내린다. 일순 화이트의 주변은 완전히 고요해졌다.

“짐이 수만 년동안 맛본 그 어떤 영혼보다도 감미롭고 흡족하다.”

전쟁의 불길함으로 요동치던 신수의 흐름이 멎고, 순리가 그의 앞에 숨죽인다. 운명이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것만 같은 충족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는 타락이며 쾌락. 범해선 안될 금기의 저편. 그토록 갖고 싶었던 무구한 영혼아- 한껏 매료된 채 화이트는 천장으로 턱을 치들었다. 잦아들지 않는 감미로움은 혀를 적실 때마다 첫입인 듯 새로웠다. 겨우 정신을 붙들고 그가 구경꾼-화면-들에게 시선을 주었을 때, 그들은 화이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화이트는 가라앉는 밤의 몸을 받쳐들었다.

“영혼은 삼키고, 힘은 빼앗고, 몸은 녹여 짐의 검으로 쓸 것이다. 너희들이 볼 수 있는 녀석의 마지막 모습일 테니 잘 봐두었길 바라지.”

등을 보이고 선 화이트는 아, 짧은 소리를 내며 어깨 너머로 곁눈질했다.

―쿤에게는 고맙다고 전해주거라. 그래도 한 부유선을 탔던 사이니.

참으로 오랜만에 맡는 권좌의 공기가 되겠군.

자- 짐의 귀환이니라.

피 묻은 이단의 무리를 불러들이고 짐을 위한 찬양가를 부르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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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상층부 ??층

청라언덕 단애지역

화이트의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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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진 육신 위에 빛을 토해낸 화이트가 흉곽을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는 사이 갈증하는 백안이 말간 얼굴을 뜯어본다. 혼이 육신에 이끌려 흡수되고 창백하던 피부에 생기가 돌자 곧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버님과 닮은 눈을 가진 이가 타락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변하지 않는 아버님이 미워서.

변해버린 자신이 두려워서.

아버님을 꺾을 수 없다면, 네가 타락하는 모습을 봐야겠다.

 

———

 

눈꺼풀이 열리고 불투명한 금안이 빛을 되찾았다. 밤은 아무렇게나 앉혀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발 늦게 정신이 돌아왔지만 감각은 흐릿했고 몸은 과하게 이완돼 힘이 없었다. 자신은 본 적 없는 연청색 도복을 입고 있었으며 바닥과의 거리가 있으니 아마도 침대 위- 미미한 두통을 느끼며 밤이 손을 움직이려 했을 때, 그제서야 밤은 자신의 손이 부자유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묶여있어? 곁눈질한 등 뒤로 팔꿈치 아래가 두터운 구속구에 의해 완전히 결박되어 있었다. 밤은 팔에 힘을 주며 빠르게 눈을 굴렸다. 아리아 씨는? 사부님은? 전쟁은 어떻게 된 거지? 이리저리 뒤틀리는 구속구의 마찰음이 가속되는 불안을 대변했다. 낯선 천장과 바닥, 분위기, 농도, 신수결. 그리고 눈앞에는 천장에서부터 드리운 나위 너머로 가부좌를 튼 고고한 형상이 있었다. 뒷목에 싸늘한 예기가 내달렸다. 그는 적막을 물리고 몸을 일으켰다. 얇은 비단을 걷어내고 드러난 얼굴은 가장 아니길 바랐던 결과를 선고하고 있었다.

 

“요란하게도 일어나는구나.”

 

“화이트….”

 

결국 자신은 패배한 것이다. 지키지 못했다.

밤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떨궜다. 안하무인의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이트가 자리에서 내려왔다. 포로를 향하는 걸음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기품 있는 목소리, 한없이 멸시에 가까운 말투로 화이트는 산뜻한 충고를 건넸다.

 

“네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 자하드군에서 하이랭커를 가둘 때 쓰는 구속구와 같은 것이라더군.”

 

하이랭커를?

구속구의 마찰음이 멎었다. 선별인원을 묶어두기에는 과분한 물건이겠지. 그것을 알고 밤은 저항을 포기한 듯 했으나, 직접 검을 맞대고 싸워본 화이트는 금빛 눈이 더욱 깊어졌음을 알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원래라면 가소로웠을 상상이나 이번만큼은 합당하다. 그러나-

 

“하이랭커를 가두는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니, 안심했나?”

 

거짓말을 참 못하는군. 가까워질수록 높아지는 시선.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을 당연한 듯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화이트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기울었다.

 

“해봐라.”

 

“뭐…?”

 

“풀어보라고. 네가 그것을 파훼할 수 있다면 짐도 도망치는 것을 막지 않겠다.”

 

밤이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기회일까? 신원류의 오브에서 지속적으로 뽑아낸 신수의 힘이라면 부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이랭커라 한들 신수에 한계는 있기 마련. 계속해서 힘을 주입하다보면 반드시 부서진다. 그렇지만 구속구를 부수자마자 화이트가 공격해올 경우에는 반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양손에 붉은 바리와 푸른 바리를 의태해 한번에 힘을 폭발시키면 동시에 화이트의 공격을 막거나 역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마. 행동을 예측해서 즉시 반응해 내는 거야. 밤은 두 손에 힘을 불어넣어 실체시키면서도 화이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경계심과 적개심으로 가득차 상대를 주시하는 금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적대적인 감정은 오만한 군림자에게 쉽사리 경악을 들키곤 텅 비어버렸다.

“힘이… 사라졌어?”

“큭- 크하하하! 표정이 볼 만하구나, 쥬 비올레 그레이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늘 말을 걸던 푸른바리의 기척이 없다. 알벨다가 건네준 영혼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있어야 할 그 이상의 것이 지금 자신의 안에 없었다.

 

“네가 가져올 수 있는 힘을 짐이 가져오지 못한다고 생각한 거냐?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짐이 권좌를 되찾기엔 충분한 힘이었으니 말이다.”

 

화이트가 한 마디 한 마디 더해갈 수록 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갔다.

푸른 바리는 퍼그에 들어오며 강제적으로 부여받은 것. 붉은 바리는 헬조가 소유한 힘을 흡수한 것이다. 영혼의 힘 역시 화이트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빼앗는다면 충분히 빼앗길 수 있는 힘이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가시 조각들과 비선별인원만의 힘인 신원류. 둘 다 치명적인 능력이지만 절대적인 힘의 양 자체가 부족했다. 내부는 한량없이 넓은데도 한 번에 방출할 수 있는 신수의 양은 방 16개 남짓. 신수가 무한하다 한들 가랑비가 끊임없이 내려봤자 유효타는 입힐 수 없다. 이 수준으로는 두 번째 가시 조각을 발동하는 것조차 불안정하다고 느껴졌다.

지금의 자신은 강한 축에 속하는 랭커 정도다. 과거 퍼그의 무력의 상징으로 추존되던 슬레이어와 감히 대적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힘이다.

그렇다는 말은,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네가 형편없이 기절해있는 동안 네 몸을 연구해봤다. 원래는 짐이 직접 종복의 주술을 걸 생각이었는데,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하더군.”

 

주술이 통하지 않는 몸이라. 몇 날 며칠 피를 잇고 손바닥이 너덜거릴 때까지 자신의 혈액을 먹이고 영혼을 저주하고 진에 가둬두려 해도 모조리 실패했다. 마치 운명이 그를 귀애하듯, 이 소년만은 어둠에 물들지 못하도록 보호하려는 듯 타락의 단초조차 이룰 수 없었다. 그 어떤 주술이라도 깔끔하게 포기해버릴 수밖에 없어서 종래엔 허무함마저 느껴야 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화이트는 거의 다 아물어가는 손바닥과 손끝의 연한 자국을 잠시 쳐다보았다. 몇 시간 뒤면 위대한 가문 출신의 경이로운 회복력으로 상처마저 사라질 터다. 스스로의 기분을 환기하려 화이트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설명조의 목소리는 명쾌하고도 안이해서 당혹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반면 신체 자체의 능력은 허접한 수준이지. 신수로 강화한 10가문 출신의 하이랭커도 풀어낼 수 없는 구속을- 혼자만의 힘으로 풀어낼 수 있으려나.”

 

화이트가 악마 같은 미소를 베어물었다. 그 웃음을 마주한 밤의 호흡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잔인한 면은 자신이나 동료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약점을 쥐고 절망하는 것을 즐긴다는 점에 있었다. 애타던 시선이 차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사부님을 구하지 못했다.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면 다들 혼란에 빠질 테고, 약해진 전력으로는 계획을 속행할 수도 없다. 진정이 되질 않아. 두려움이 몸을 엄습했다. 힘을 빼앗긴 채 저를 노리는 자의 눈앞에 던져졌다는 사실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동료들과 지켜야 할 사람들의 안위가 너무도 두려웠다. 쿤 씨, 라크 씨, 야마 씨, 엘레인 씨, 호크니 씨, 카라카 씨, 내가 가야 하는데. 가서 모두를 지키고 사부님을 모셔와야 하는데. 이런 곳에서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는···.

밤은 진정되지 않는 숨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사부님은… 전쟁은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른다. 짐은 잡다한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라.”

 

“…!”

 

“뭐, 요즘 그 애송이 슬레이어가 제법 분주해 보이기는 하더구나.”

 

‘카라카 씨...!’

 

밤이 조금만 더 호흡을 낮추었다면 ‘요즘’이라는 말의 함의를 알아챘을 것이나, 화이트의 태평한 어조에서 그 말은 일말의 강조도 없이 조근하기만 했다. 지킬 것이 많으면 산만하고 성급해진다. 키워서 먹으려면 천 년은 더 걸리겠군. 자기 편이 걸려있으면 한심할 만치 열이 오르는 비올레의 무모함은 편을 만들지 않는 화이트에겐 이해하기 힘든 우둔이었다.

격렬하나 채 날카로워지지 못한 적의로 밤이 눈가를 벌겋게 물들였다. 소리가 높아질수록 뒤틀리는 구속구가 비명을 지른다.

 

“그럼 왜 저를 데려온 겁니까! 전쟁도 목적이 아니라면, 제가 여기에 있는 목적은 대체 뭡니까? 당신은 항상 제 영혼을 탐냈지 않습니까!”

 그에 화이트는 처음으로 작은 한숨과 같은 것을 뱉어냈다. 운명에 대한 푸념, 순리의 폭정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한탄으로 백안은 처연한 빛을 띠었고, 그 안에는 탑의 모든 법칙을 철저히 무시한 한 존재의 인영이 담겼다. 저 녀석은 이곳이 승탑시험도 치르지 않은 고층임을 알기나 할까. 당연한 듯 법칙을 배제하고도 본인은 그 무게를 모르니 애석한 일이다.

 “운명의 총애인 게지. 그 가시라는 것도 뽑아 삼켜봤지만 짐은 시동할 수 없었다. 강한 힘이 느껴졌지만, 위대한 존재에 닿을 수 있는 힘은 아니었어. 그것은 오직 너의 안에 있을 때만 시동했다.”

진정으로 개탄하고 온 마음을 다해 애통한다. 진심으로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절히 안타까워한다. 그에 밤은 심장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화이트의, 이 사람이 가진 힘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고 탑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에 집어삼켜진 살인귀. 가시의 힘만은 그에게 넘어가선 안 된다. 이 사람은 탑에 피와 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화이트의 고개가 살며시 기울었을 때 밤은 가시를 숨기듯 몸을 낮추었다.

“하지만- 짐도 운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군. 쥬 비올레 그레이스, 짐의 도구가 되어라.”

 “싫습-”

 올곧은 반발로 응수하던 밤은 순간 숨을 삼켰다. 내 안에 있을 때만 시동‘했다’고? 모른 척할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감이나 기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밤 자신의 내면이, 그에게 불길할 정도로 강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도구의 의사는 짐이 알 바 아니다.”

 화이트가 몸을 숙이고 밤의 옆에 손을 짚었다. 설백색 머리칼이 드리우고 밤은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서 올려다 본 낯은 그늘졌고, 위험해 보였으며, 영광된 군림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에 없이 가까워지는 심장 간의 거리. 고고한 명검이 자격 있는 주인의 손을 타듯, 어항 안에 든 신해어가 부림을 받듯 밤의 몸과 정신이 강제적으로 화이트에게 이끌렸다.

 “재미있는 걸 알려주마. 어젯밤 짐은 너를 '시동'했다.”

 화이트가 한손을 밤의 왼쪽 가슴에 올린 순간, 스스로를 한계짓던 제약이 끊어지고 맞닿은 곳에서 붉은 빛이 폭렬했다. 밤의 뒤로 가시가 타오르는 형상을 이루며 길게 뻗어 나왔다. 신수가 격동하고, 가시와 공명하여 거세게 휘몰아친다. 머리칼과 옷자락이 위태롭게 날렸다. 맹렬한 해방으로 포화된 힘이 가시 주변에 거대한 전뇌의 고리를 둘렀다. 난폭한 격랑의 중심에서 밤은 막을 수 없는 재앙의 도구가 된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자신은 이 사람에 의해 ‘시동됐다’.

“정확히는 네 안에 있는 가시지. 이 녀석의 힘으로.”

 화이트의 머리 뒤쪽에서 푸른 빛이 자라났다. 서로를 휘감고 얽으며 모습을 갖춘 그것은 신령스러운 사슴 같기도, 오래된 고목의 가지 같기도 했다. 밤은 눈을 부릅 뜨고 새된 소리를 냈다. 가시를 시동할 수 있는 존재. 자신의 안에 있었던 그것-

‘푸른 바리...!‘

“정말 시끄러운 힘이더군. 지금도 짐의 안에서 자격이니 뭐니 하며 저주를 퍼부어대고 있다. 날뛰어봤자 짐의 안인 것을.”

이런 것인가. 탑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기분은. 놓고 싶지 않다. 지금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법칙- 그들의 불사의 계약. 지금이라면 죽일 수 없는 것도 죽일 수 있다. 더더욱 끌어내고 싶다. 이 자의 모든 힘을 폭발시켜 끝을 맛보고 싶다. 붉은 것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런 힘이라. 부럽고도 두렵구나. 운명의 총애가. 이런 기분을, 이런 힘을 항상 숨 쉬듯 가졌다는 거냐, 비올레-

“이 힘이라면 짐을 굴복시킬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 힘을 쓰질 않은 것이냐.”

불안정한 제약이던 가시는 화이트의 손 안에서 완벽하게 안정화를 이루었다. 폭발하는 듯하지만 통제되어 정연했고, 강하면서도 계속해서 일정하게 힘을 방출한다. 무기로서 시동된 밤은 온몸과 정신으로 그것을 느꼈으며 슬레이어 화이트의 강함과 자신의 미숙함을 이 순간 여실히 깨달았다. 화이트는 진득하게 웃었다. 그래, 너도 실감해봐라. 수만 년의 세월동안 짐의 호수에 무수히 파문을 만들어내던 불필요한 감정- 열등감을 말이다.

“아아, 쓸 줄 몰랐던 것이겠군. 자격 없는 자에게 돌아간 힘은 없느니만 못하구나.”

화이트가 손을 물렸다. 무한한 힘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릇 자체는 금 간 유리처럼 약했던 탓이다. 이 몸에 들어왔더라면 더 요긴하게 사용할 것을. 참으로 부조리하다. 신수의 폭풍이 한순간에 멎었다. 가시가 불타 사라지듯 모습을 감췄다. 화이트의 머리 위로 자란 뿔은 눈처럼 흩뿌려졌다. 타의로 몰아붙여진 밤이 맥없이 몸을 무너뜨려 벽에 기댔다. 지친 것보다도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멍한 얼굴이었다. 지고하고 순결한 존엄이 심장부터 내면까지 무참히 범해지고 부정을 머금은 금안이 초점을 잃었다.

“이해했나보군. 너는 이제부터 짐의 물건이다.”

“아리아 씨는….”

끝까지- 이 자에게는 화이트의 심기를 거스르고야 마는 무언가가 있다. 모든 것을 앗아갔는데도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아직 남아있다는 건지. 저 물정 모르는 마음은 사치스럽기 그지 없다. 약자가 되고도 분수를 모르고 행하는 방자함은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는 자에겐 용납할 수 없는 불경이다.

“같이 있던 그 여자 말이냐? 글쎄, 어떻게 됐으려나. 짐이 너를 회수했을 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떠보는 듯한 악의가 묻어나는 말. 밤이 되묻듯 힘없이 배회하던 눈을 화이트에게로 옮겼다. 일부러인 듯 웃음 짓는 얼굴은 고상하고도 잔혹하다.

“형체도 남지 않고 절명했다는 말이다. 주제넘은 여자였지. 감히 짐의 앞을 막아서다니. 뭐, 그 덕분에 너는 죽지 않았군. 힘 조절을 잘못해서 짐도 아차 싶었거든.”

또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남았구나. 축하한다.

화이트는 흐트러진 매무새를 정리하며 뒤돌았다. 그야말로 신수 하나하나가 자신의 것이 된 듯한 지배감, 금기의 너머에 발을 들인 충만감에 손끝이 오싹하게 저려왔다. 수련단에 입단했을 때도 이렇게 설레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 탑의 거대한 존재를 죽일 수 있는 무기의 주인.

그리고 그 무기를 다를 줄 아는 자의 주인.

귀신 같은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적당히 녹여 짐의 검으로 써주마.

영광으로 알거라, 쥬 비올레 그레이스.

 

 


제발 화이밤 먹어주면 안될까 나 연성도 하잖아 2차 안 한 지 몇 년 지났는데 화이밤은 하잖아 제발 한 입만 먹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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