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선고

3. 너는 내 것이라. (3)

느리게 숨을 들이쉬었다.

새삼스러우나 공기는 그가 그동안 알고 있던 것보다는 서늘했다.

한 손에 질문을 적었던 종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볼펜을 잡았다. 여전히 누운 채다.

흘끔, 트로이메라이가 종이 너머의 토끼를 관찰했다.

얼굴이 아닌 부분부터 살폈다. 굳게 쥐인 주먹과 힘이 들어찬 어깨가 보인다. 망설이다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얼굴이, 보인다. 아므즈를 닮은 바로 그 얼굴. 그것을 보자마자 초점이 풀린 눈에 다시 힘을 주었다. 그리고 보았다. 굳은 아래턱과 미묘하게 거칠어진 숨을.

그럼에도 여전한 미소. 너는 늘 그렇게 웃었던 것이다. 겨우 끌어올린 입꼬리만이 아니라, 그렇게, 온몸으로 만들어낸 미소를.

평소의 간단한 납득이 아닌 다른 반응에 토끼가 기민하게 아이를 살폈다. 아이가 토끼를 관찰하는 동안, 토끼 또한.

다만 소녀는 늘 아이를 관찰했으므로, 토끼에게 ‘관찰’이란 특별한 것 없었다. 아이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초점이 흐려지는 일은 없다.

아이는 얼굴 근육 쓰는 일에 능하지 않다. 얼굴에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둘 중 하나. 짜증과 뚱함. 둘의 차이란 명백했던 덕에 구분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의 표정에는 정답을 적어 내기 난감했다. 아주 조금 내려간 눈썹 끝과 눈꼬리.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제 위치를 찾는다. 그리고서는 느리게 깜박이는 눈.

그로부터 정확한 어떤 것을 정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화가 난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하던 틈, 트로이메라이가 종이에 다시 볼펜을 가져다 댔다. 질문을 적었던 그 바로 아래에 단 하나의 단어가 그려진다.

질문을 적을 때와는 달리 수첩의 단단한 판조차 덧대어지지 않아 더욱 뭉개지는 글씨를, 아이는 착실하게도 적었던 것이다. 어떤 획은 몇 번 다시 긋기도 하고, 그러다 힘 조절에 실패해 구멍을 내기도 하면서. 아이는 그 하나의 단어를 위해 오랜 시간을 들였다.

「거짓말.」

직전의 질문보다도 엉망인 글자들의 조합. 검은 잉크가 곳곳에 물들여진, 세게 쥔 탓에 조금은 구겨진 종이.

이대로 계속해 읽을 수 없는 척도 괜찮을 것이다. 아이는 소녀가 자신의 글을 읽어내지 못하는 것에 화내었던 적이 없으므로.

소녀의 윗입술이 아랫입술을 옅게 덮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짧은 망설임의 시간 동안 살핀 아이의 눈에 담긴 것은 질책보다는 의문이었다.

토끼는 선택했다. 더 용서받기 쉬운 쪽을.

“죄송합니다. 읽지 못하겠어요.”

아이의 속눈썹이 아래로 처지나 싶더니, 떨구듯 종이를 내려놓았다. 팔랑거리며 침대 위에 놓인 종이를 작은 팔로 멀리 밀어냈다. 수첩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손가락만 꿈틀대고선 다시 거뒀다. 마지막으로는, 볼펜을 조심스레 머리맡에 내려두었다.

그는 손을 내밀지도, 소녀에게 손을 요청하지도 않고.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나오는 것이라고는 여전히 바람 소리뿐이다. 그것을 몇 번 반복하다 상처를 덮은 거즈를 떼어냈다. 상처에 손가락을 올린다. 점검이라도 하듯 약하게 문질렀다. 그렇게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아이가 침대 옆에 두었던 마스크를 가리켰다. 천으로 된 평범하고도 검은 마스크. 그가 이곳에서 손에 넣은 것 중 마지막 하나.

소녀가 급히 움직여 트로이메라이에게 그것을 건넸다. 곧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마스크는 그의 코와 입을 가려냈다. 들이쉬는 공기가 그 자신의 날숨 덕에 보다 따스해진다.

그리고 잠시, 무엇인지 모를 고민을 하던 아이가 손을 뻗어 인형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목의 상처에 아파하면서도 그렇게 했다. 인형을 쥐지 않은 손으로 침대 시트를 쥐고, 바람 소리와 같은 짧은 신음이 몇 번 이어졌다.

소녀에게는 이제 옆으로 돌아누운 아이의 등이 보인다.

토끼는 아이의 표정을 이제 정의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것은 실망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괜찮았다…….

눈앞의 이것이 그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괜찮았다.

소녀는 그를 싫어하지는 않으나 원망했으므로.


토끼가 싫었다.

아므즈를 닮아서도, 닮지 않아서도 싫었지만 그 ‘토끼’가 싫었다.

옆으로 돌아누운 트로이메라이가 수첩을 제 앞으로 옮겼다. 그리고 펜을 쥔다. 옆으로나마 기댈 곳이 생겨 적기에 한결 편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제는 적은 글을 보여 줄 존재가 없다는 것 정도.

글씨 연습. 무언가를 ‘더 좋게’ 만들어 보려 한 것도 아주 오랜만이었으나 쓸모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적었다. 아마 지금 그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반듯하게.

「미워.」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 인형의 입에 얼굴 한쪽을 기대어 볼펜을 까닥였다. 글자를 적은 종이를 찢어냈다가 뚱한 표정으로 곧 그것을 구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죽였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의 나약한 외형과 연약한 내면을 목격한 토끼를, 당장 다음에라도 죽여 없앤다면.

그러면,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이 때문에 고민할 일도 괴로울 일도 없을 테다. 그가 바라지 마지않던 ‘혼자’에 더욱 가까워질 테고. 아므즈를 떠올릴 일도 줄어들 테지. 그리고 그건 아주 편할 것이다.

구긴 종이를 다시 폈다. 누운 그대로 그것을 눈앞에 들어 올려 관찰했다. 샹들리에의 빛이 종이를 통과해 아이에게 닿는다. 내리쬐는 빛 덕택에 반투명한 종이. 구겨졌던 흔적이 그대로 그림자로 남아 그어졌다. 그러니까, 그렇게 된다면…….

——외롭겠지.

구겼다 편 종이가 본래의 반듯함을 되찾을 수 없듯이.

아므즈를 닮은 존재의 죽음은 그에게 그림자가 될 것이라고.

지금의 그에게, 그의 기분만을 위한 약자의 죽음은 죄책감을 안기리라는 것 또한.

자살은 그에게 끝이라도 안겨줄 수 있으나 살해는 그렇지만도 못하므로.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그는 토끼를 죽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 없는 것이다. 해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해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마침내 알아차렸다. 이 모든 것은 토끼를 만난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토끼를 죽이기에 아이는 충분히 아플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고통’을 선택할 수 없다. 그러기에 그것은 너무 괴로웠다. 충동에 죽일 수는 있어도 오래 남아 아플 것이다. 지금 목에 남은 상처가 그렇듯이.

능력이 부족해 죽일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득 토끼가 괴물처럼 느껴졌다. 지배할 수도 죽일 수도 없는 토끼가.

똑같이 지배할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친우들에게의 감정과는 매우 달랐다…….

자존심 상해.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피곤하다. 잠을 자야겠어.

고개를 숙였다. 물론 아팠다. 누군가 칼을 넣고 이리저리 헤집는 것만 같은, 그런 고통. 그러나 지금만큼은 그 감각이 싫지만은 않았다. 덕분에 가슴에 얹힌 고통의 무게가 둔해지는 듯했으므로.

그렇게 숙인 고개로 인형에 얼굴을 파묻었다. 포근하다. 인형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이 적당한 암흑이 마음에 들었다.

생각을 말아야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지…….

그럼에도 잠들지는 못했다.

토끼가 돌아왔다.

늘 그러했듯 쌓인 먼지를 닦아내며 식사를 권유했다. 다만 오늘의 트로이메라이는 달랐다. 토끼가 없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저히 외면했던 것이다.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면서.

소녀의 빗자루질이 멈췄다. 들숨과 날숨에 오르내리는 가슴으로 보아 잠이 드시지 않은 것은 맞는 것 같다.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있지만 결코 토끼는 먼저 입으로 낼 수 없는 주제였으므로, 그녀의 혼잣말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요한 방, 침대 위를 정리하기 위해 다가갔다. 널브러진 종이들을 차곡차곡 모은다. 하나, 둘……. 침대 위 종이의 개수가, 두 개다. 그녀가 모르는 새 하나가 늘었다.

확인할까, 그러지 말까. 어차피 아이는 뒤돌아 있어 그녀를 보지 못한다.

토끼의 갈등은 길지 않았다. 본디 호기심을 이기는 동물이란 많지 않다. 인간을 포함해서도 그렇지 않던가. 동물과 사람의 중간 어드메의 수인이라면 더욱 그러할 테다.

그리고 결국 읽었다. 그것에는 여태까지의 것 중 가장 정갈한 글자로,

「미워.」

항상 그래 왔듯 읽지 못하는 척을 하는 것이 옳음에도 토끼는 반응을 고민했다. 선택지는 간단했다. 발견하지도 못한 척을 하면 된다. 척. 그런 척. 자신은 이 수신인 없는 메세지에 답할 필요도 의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을 뒤져 적당한 말을 찾았다. 사실 ‘적당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저를 향한 감정에 어떤 답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질문도 분석도 아닌 온전한 자신에게의 감정을 향해,

“……저는 당신이 ‘무엇’인지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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