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4)
이 방은 기실 탑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안락함과 구속을 동시에 선물한다는 점에서, 이 작은 방은 트로이메라이가 지배자로서 군림하던 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덧붙여 트로이메라이는 탑을 오른 영광의 13명 중에서도 유난히 이 ‘탑’을 애정하는 축에 속하지 않던가. 단 하나의 변수조차 없는 완벽한 안정을, 그는 원했으므로 이런 구속이라면 아주 싫어할 수만은 없던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제하자면 큰 불만은 없었다.
밖의 정보를 알기 어렵다는 단점도 단점만은 아니었다.
구스트앙과는 다르게, 아이는 때로 어떤 앎은 무지만 못하다는 것을 알 정도로는 오래 살았다.
뚱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아이가 구스트앙에게 손을 내밀었다. 책을 돌려달라는 명백한 의사표시였다. 물론 그것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아이 아닌 타인의 손에 달려 있었지만서도.
구스트앙이 담배를 꼬나쥘 때까지도, 아이는 계속해서 당당하게 팔을 뻗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담배를 보자마자 미간은 구겼으나 내민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그건 내 거야. 제 손에 한 번 쥐인 이상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체스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도 심리전이 주요한 게임이지 않더냐.”
구스트앙의 말이었음에도 틀린 점은 없었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체스말에 담긴 수를 읽는 것 자체보다도 그 사람의 의도를 읽어내는 편이 유리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눈앞의 구스트앙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목덜미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내 거즈를 떼어냈다. 그렇게 피에 푹 젖어 흥건한 거즈를 대충 바닥에 버려두고선 눈 한쪽을 찡그렸다.
바닥에 생길 작은 핏자국과 쓰레기 정도야 저 뒤편에 무릎 꿇은 토끼가 치우지 않겠는가. 다만 그 행동에 심술의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상처를 손끝으로 문질러 그다지 크게 덧나지는 않은 것을 확인했다. 본래 잘 나아가던 중이지 않던가. 일반인에 비하여 나름의 튼튼한 몸은 어디 가지 않았다.
“……뻔뻔한 녀석.”
그 꼴을 가만 바라보다 그리 뱉은 구스트앙이 곧 정말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행위에 라이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작게 신수가 반짝이는 것으로 담배가 끝부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길게 뿜어내는 연기가 숨을 닮은 듯도 했다.
그 담배 연기를 피하지 않은 트로이메라이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구겨진 얼굴로 숨을 참으면서도 꿋꿋하게 ‘책’을 요구했다.
어느새 마르기 시작한 피가 손바닥 위에서 반짝였다.
네가 나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은 네가 나를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나 역시 너를 잘 안다는 것. 체스는 심리전이 중요한 게임이랬던가. 삶에 놓인 수많은 순간 역시 그러하다. 심리전이, 중요하다. 눈앞의 상대가 그의 친우가 아니었다면 그것에 자신이 있다 당당하게 주장할 수는 없었을 터이나,
트로이메라이는 구스트앙을 체스로 몇 번이고 이겨왔다.
이 깐깐한 머저리가 언제 물러서는지, 또 언제 승부를 거는지…….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서, 구스트앙이 들고 온 몇몇 기물들에도 불구하고, 바로 얼마 전의 근접전에서조차 우세를 점할 수 있었지 않던가. 트로이메라이는 ‘심리전’이라 명명할 부분에서만큼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설령 구스트앙이 봐준 부분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로 포 비아 가문의 지파장이나 기린과의 심리전은 배신이라는 패배로 막을 내렸으나, 그것은 그들에게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과 격이 다른 존재를 진정으로 살필 의사 따위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시야에 놓인 것은 ‘포 비더 구스트앙’이다. 아이가 아주 잘 아는…….
바로 앞에 상대를 두고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근접전과 대화는 아주 닮았다.
서로의 표정과 행동과 눈을, 읽을 수 있다.
——밀리기만 하지는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이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서 딱히 지고 싶지도 않았고.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저 ‘지지 않는 것’을 목표 삼기로 했다.
실은 그것조차 쉽지 않을 수 있다. 구스트앙이라는 사람이 만만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다만 분명한 것은,
그는 그런데도 아직 ‘로 포 비아 트로이메라이’를 친애한다.
과거만큼은 아닐지라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트로이메라이를 다루는 것이라 해도.
경애든 존경이든 친애든 동정이든 이용이든, 무엇이든 좋다. 더 사랑하는 쪽이 진다. 아이는 이러한 관계에서만은 결코 약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므즈를 잃었지만, 여하튼 이런 면에서도 트로이메라이는 늘 승리자의 자리를 고수했던 것이다.
지금의 너는 내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목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타들어 가는 담배로부터 담뱃재가 소리 없이 떨어졌다. 회색 잿더미가 방을 더럽히는 것을, 구스트앙은 내버려 두었다. 그가 담배 연기로 방이 채워지는 것을 방치하는 것처럼.
구스트앙의 냉담한 시선을 가릴 듯 안경알이 반짝였다.
트로이메라이의, 수많은 생물을 다루어 실험한 자 특유의 지식이 빛을 발했다. 고작 칼날 하나 만들어낼 양의 신수를 조합해 적당한 약을 만들어냈다. 이전의 그에게라면 통할 리 없는 미약한 성분. 하지만 지금의 어린 몸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조용히 숨을 거둘 그런 즉효성 약. 그 와중에도 아이는 아픈 것은 싫었다…….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댔다.
구스트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만 기다렸다.
그는 아이가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가 그것을 알고, 그가 그것을 알았다.
이것을 식도로 넘기고 나면 그제야 그는 움직일 것이다. 그것만으로 트로이메라이는 충분했다.
심리전이, 중요했다.
구스트앙이 말했듯.
구스트앙이 아주 조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지 한숨과도 같은 행위.
그 탓에 그의 눈을 가리던, 안경에 담긴 조명빛이 약간 비켜나갔다.
그의 눈을 보았다.
아이의 몸이 굳었다.
재차 언급하나, 바로 앞에 상대를 두고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근접전과 대화는 아주 닮았다.
서로의 표정과 행동과 눈을 읽을 수, 있다.
하여 트로이메라이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공포나 걱정 탓이 아니라, 단지…….
눈을 굴려 시선을 피했다. 그런 뒤에도 아이는 약을 입에 집어넣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약이 신수로 돌아갔다. 신수로 만들어낸 물체를 오래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이는 약했다.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어느새 빈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고는 다시 구스트앙을 보았다. 달라진 것은 없다. 변함없이 냉담한 시선과 담배 연기와 바닥에 떨어진 붉은 거즈가 그대로 자리했다. 다만 구스트앙의 짧아진 담배만이 흐른 시간을 증명했다.
아이는 깨달았다.
그러니까, 무게의 경중은 알 수 없으나, 로 포 비아 트로이메라이 또한 구스트앙을 친애한다고.
아이가 바랐던 대로 승자는 없었음에도 진 듯한 기분에 느리게 눈만 끔벅였다.
그러자 구스트앙이 웃었다. 아이가 판단키로는 좋고 즐거울 것도 없음에도.
아이가 생각했다. 그리도 우스웠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그럼에도 아이는 그 웃음에 담긴 묽은 친애를, 이번에야말로 읽어냈다.
“이제 정말로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법도 한데.”
아닌데. 돌려줘.
아이가 입을 꾹 다물고선 다시 손을 내밀었다.
흐음, 소리 낸 구스트앙이 아직 돌려주지 않은 책 어딘가를 단번에 펼쳤다. 그 페이지에 담긴 글은 확인도 않고서는 아이가 읽기 편할 정방향으로 돌려 펼쳐 조용히 들어 기다렸다.
그것을 받아 들기도 전에, 제목 모를 어떤 책의 역시 어디쯤인지 모를 페이지가 아이의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읽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문장은 이러했다.
「“저는 안정을 원하지 않아요. 저는 시를 원하고, 진정한 고난을 원하며, 자유를 원합니다. 선의를 원하는 동시에 죄악을 원합니다.”¹」
순식간에 트로이메라이의 표정이 다시 뚱해졌다. 책을 받아 든 그대로 덮었다. 그것을 쌓인 책 중 아무 곳에나 대충 올려두고선 다른 책을 펼쳤다.
대충 중간즈음 아무 곳이나 짚어 펼치고선 읽었다.
「“두려움을 느끼면 말이야. 일단 몸이 달라져. 지금 심장이 뛰고 있지? 손만 대어도 느낄 수 있을걸.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게 되면 뇌로 피와 산소가 굉장히 많이 공급돼. 그러니까 연료가 들어가듯! 더 빨리 뛸 수 있고, 힘도 더 세지고, 더 높이 뛸 수도 있어. 그러니 공포가 왜 나쁘겠냐고?”²」
그리고 빠르게 다시 덮었다.
애석하게도 두 책의 처음 펼친 곳 모두 마음에 들지 않던 탓이다.
각주는 논문이 아니니 간단하게만 달아두겠어요 (뻔뻔…….)
¹ 멋진 신세계(1932), 올더스 헉슬리
“But I don't want comfort. I want God, I want poetry, I want real danger, I want freedom, I want goodness. I want sin.”
² 닥터후, 뉴시즌 8 4화, “들어 봐(Listen)”
“Let me tell you about scared. Your heart is beating so hard, I can feel it through your hands. There's so much blood and oxygen pumping through your brain, it's like rocket fuel. Right now, you could run faster and you could fight harder, you could jump higher than ever in your life. And you are so alert, it's like you can slow down time. What's wrong with scared?”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