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5)
이런 때엔 어떤 말을 해야 하더라. ‘저 나름 잘 두는 편입니다?’ 또는 ‘싫으시다면야 다시 가져갈게요?’ 그것도 아니라면 ‘좋으시겠네요.’ 떠오르는 예상 답안들이란 죄다 예의―라기보다는 싸가지― 함유도가 지나치게 낮았으므로, 토끼는 끌어 올린 입꼬리만을 더욱 경련했다.
일단은,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답인 사죄를 하면…….
하지만 토끼의 뇌와 입보다 아이의 손이 빨랐다. 수첩 위에 휘적인 필체로,
「재미없을 텐데.」
그러시겠지요. 잘 두신다더라고요.
하지만 잘한다는 것은 곧 노력했다는 것이고, 노력했다는 것은 그것을 좋아한다는 의미 아닌가? 좋아하면 재밌기 마련이다. 실생활에 필요치도 않은 체스를 ‘잘한다’는 건 그런 함의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데. 본래 자존심 긁힐 이유조차 없었다. 토끼는 ‘따위’가 맞지 않나.
그의 아이스러운 모습만 보아 자꾸만 풀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자꾸 동생이, 떠올라서.
하지만 결국 모두 합리화다. 소녀가 빠르게 표정을 굳혔다. 이제는 정말 사죄해야 한다. 감히 그의 의중을 짐작해 쓸데없는 일을 한 것에 대해. 그러면 아이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눈을 감을 것이고, 무심히 웅크려 잠들 것이다. 그는 그 정도로는 늘 자비로웠으므로, 토끼는 그 익숙한 풍경을 바랐다.
그러나 어느새 다시 수첩이 앞에 들이밀어져 있다.
방금의 문장 앞에 딱 두 글자가 덧붙여진.
「네가 재미없을 텐데.」
해석하자면, 무엇을 하든 그가 쉽게 이길 테니. 그리 전하는 아이의 눈은 너무도 무고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잠시 정신이 흐트러졌던 것 같다. 토끼는 방금과는 다른 의미로 아이가 꼬와 보였다……. 사죄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말이 필터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쥐지도 않은 손바닥에 땀이 차는 듯하다. 입 밖으로 낸 것이 사과임에는 틀림없으나 이런 형태여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다. 토끼 자신은 본래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는데.
추측했다. 아마 저 하늘빛 눈 때문일 것이라고. 하늘빛 홍채, 그리고 가운데 자리한 원과 고리 모양의 텅 빈 곳. 그것은 늘 지나치게 깨끗했다…….
저 하늘빛 눈은 정말이지 기묘하다. 일전에 이미 경험한 바 있지 않던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게 하며 필요 없는 행동을 하게 하는 저것이, 토끼는 껄끄러웠다. 그녀는 정말이지 실수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는 부리미다. 그리고 부리미의 본질이란 아마.
토끼는 차마 아이로부터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 현상이 지배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첫 만남에서 경험한 바로 지금의 ‘저것’은 부림술로는 그녀의 무엇도 강제할 수는 없었으므로.
아이의 굵은 눈썹이 미세하게 위로 솟았다. 그것을 본다. 시선을 떼어내지 못해 볼 수밖에 없다. 그가 언짢았음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토끼가 겨우 호흡했다. 눈앞의 ‘그’가 죽고 싶으냐 협박을 한 적은 있으나, 그리고 피칠갑이 된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아이가 자신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아니다, 이런 것은 중요치 않다. 어서 이제라도 제대로 된 사죄를 해야 한다. 무릎을 꿇고, 그리고…….
하지만 아이가 홱 이불을 얼굴 위까지 덮는 것이 더 빨랐다.
소녀는 또다시 선수를 빼앗겼다.
토끼가 온 정신을 집중해 ‘저것’을 응시했다.
눈앞에 들이밀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무섭지 않다. 저것은 징그럽지 않다…….
그런 소녀의 앞에 놓인 것은 작은 문어 한 마리.
로 포 비아 가문을 삼키며 포 비더에 다양한 신해어 또한 함께 들여온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방 안의 ‘그것’이 부리미라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일어날 수 있는 일’에 속했다. 그러나 꺼림칙했던 것은, 이 ‘문어’가 제법 신이 나 보였다는 사실이다……. 왜?
그러나 일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해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대로 문어의 아래에 손을 넣자 빨판이 토끼의 손에 문대어진다. 미끈한 감촉에 소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문어는 매우 얌전했다. 소녀로부터 도망을 가지도 긴장을 하지도 않던 것이다.
착하지……, 그리 중얼거리는 토끼가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꼬리만을 겨우 끌어올린 바로 그 미소를.
너도 참 가엾다. 부리미에게 동물로서 쥐어지게 되다니. 그런 면에서라면 너와 나는 닮았을지도 모르겠어.
물론 아이가 ‘이것’에게 관심을 둘지는 또 모르는 일이나.
가자, 방으로.
이제 토끼는 방문을 열기 위해 오랜 시간 망설이지는 않는다. 팔에 문어 빨판을 얹은 토끼는 더욱 그러했다.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온 토끼가 바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아닌 듯 긴장해 경직된 몸을 걸음마다 삐걱이면서.
그리고 방문을 열자마자 문어가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 실수했나? 직전보다도 더욱 굳힌 몸으로 긴장해 아이부터 확인했다. 다행이야, 깨지 않았구나…….
문어는 곧장 아이가 있는 곳을 향해 직진했다. 그때의 문어는 가히 빛이라 해도 괜찮았을 것이다. 움직이던 속도가 빛의 그것에 걸맞았으므로. 덧붙여 빛의 직진성 또한 닮았고.
아직 긴장을 풀어내지 못한 소녀가 우두커니 서서 문어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뽈뽈 기어가는 문어가 이전보다도 신나 보였다. ……정말 어째서? 문어의 자의식이 높다는 것은 책에서 보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부리미로서의 ‘저것’에 끌린 것인가? 여러 가능성이 머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빨판을 이용해 쉽게도 침대를 오른 문어가 마침내 아이의 바로 근처에 도달했다. 곧 다리 중 하나를 꿈틀거린 문어는 그것을 아이에게 가져다 댈 듯 말 듯. 그렇게 잠시 허공을 짚었다가도 다시 제 밑으로 갈무리했다. 그리고 울었다. 해석할 수는 없는 울음소리로,
“구워.”
구워……. 구워 달라고? 물론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것이 문어라서. 토끼의 상상 속에서 문어구이가 자꾸만 아른거렸다. 금방 털어내긴 했지만서도. 보다 긴장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바로 어제이지 않던가. 아이의 그 기묘한 분위기인지 능력인지로부터 모를 것으로부터 헤어나와야 한다.
곧 눈을 뜬 아이가 손가락 끝으로 문어를 쿡 눌렀다. 질감을 확인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것도 잠시, 졸려 멍한 눈이 잠시 커졌다. 그리고 손가락 아닌 손으로 문어의 빨판들을 차분히 만져 간다.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아이가 웃었다. 그것에 서린 여린 애정을 토끼는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길지 않았다. 빠르게 표정을 굳힌 아이의 표정은 이전보다도 냉담했다. 다만 앞서 선명한 애정을 목격한 토끼에게, 그 굳은 얼굴은 무언가를 쥐어 짜낸 결과물로 비쳤을 뿐이다.
아이가 일어나 앉아, 문어를 만지던 손을 들어 올려 제 입가를 막듯이 가져다 댔다. 이미 그는 말을 할 수 없음에도, 굳이.
그러기를 한참. 아이가 드디어 움직였다. 문어 위로 이불을 덮은 것이다. 이제 아이의 시야에 문어는 없다. 단지 문어는 그러고도 얌전했다.
그것을 확인하며 숨을 길게 들이쉰 아이가 침대 구석진 곳으로 몸을 옮겨 움츠렸다.
토끼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그 어떤 괜한 언행 없이. 가만히.
그녀는 이제 안다. 이 문어와 토끼는 무엇도 같지 않다.
다만 토끼는 어떤 ‘무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에게 아이다운 그것이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에. 또한 그것의 존재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 때문에…….
―소녀가 본 아이는,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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