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3)
트로이메라이가 눈을 내리깔고, 그러나 뚱한 표정으로 침대 어드메를 시선에 두었다.
나가기 싫다. 명확한 이유조차 실은 없다. 단지 그가 행해왔던 수많은 선택처럼,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아니다, 알고 있다. 그가 행했던 일들은 모두 그 시발점이…….
구스트앙의 치료 덕에 이제는 어지럽지 않아야 할 머리가 띵했다.
그저 분명 아직 제 머리 위에 놓인 그의 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 손이 너무 무겁기 때문에.
고통 탓에 고개를 저어 털어낼 수는 없었으므로 손톱으로 손바닥을 짧게 눌러 생각을 떨쳐냈다.
구스트앙은 다만 권태로이,
“외로우냐?”
트로이메라이가 무표정으로 응수했다.
질문을 던지는 이유조차 아이는 딱히 이해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저 구스트앙이 어서 이 방에서 나가주었으면 했다. 고쳐주지도 않을 것이라면 더더욱.
“여부 정도는 글이 아니더라도 표현할 수 있지 않아.”
답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런 눈으로 구스트앙을 응시했다. 불만을 가득 담아.
그러니 이것부터 치우고…….
손을 들어 올리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목을 붙잡아 밀어냈다. 언어가 아님에도 의사는 전달될 행위.
당연하게도 밀리지 않는다. 새삼스러우나 구스트앙은 힘이 셌다. 기실 아이 자신이 약해진 것뿐이지만.
이런 때마다 제법 자존심이 구겨진다. 입술을 살짝 물었다.
“이런 취급이 싫다면, 나가라고 했어.”
절로 미간부터 구겨졌다.
왜, 쫓아내려고? 내 존재가 무용하다는 걸 깨달았나. 하여 이제 내가 필요하지 않아서?
그가 말했듯 이곳을 나간다면.
아이가 바랐듯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곳에 머무는 로 포 비아 트로이메라이’를 보호한다고 했다…….
오로지 그것만을.
그리하여, 나간다면.
다만 아이는 그렇게 해서까지 죽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무엇도 하고 싶지 않고, 무엇도 견디고 싶지 않아 죽고 싶은 것이다. ‘바깥’의 그 어떤 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다. 무無를 위해 또 다른 무언가를 한다니. 어불성설이지 않나.
구스트앙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구스트앙은 그제야 녹색 털뭉치 위에 두었던 손을 옮겼다. 빛 꺼진 아이의 눈이 데구르 구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돌연 트로이메라이의 볼을 잡아당겼다. ‘미쳤어?’ 들리지 않으나 이어질 불만들을 상상하며.
얼굴 근육을 자주 쓰지 않는, 표정 적은 사람일수록 볼이 말랑하다던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주물거렸다.
그 표정에 아이는 기분이 더 상했던 것 같지만. 여하튼,
“뭐, 됐다. 지낼만하다면 이렇게 지내. 사과든 반성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불러라.”
트로이메라이는 생각했다. 영원히 보지 않겠다는 건가?
그러니까, 아주 나쁜 일도 아니다. 저 깐깐한 머저리의 면상을 보는 것도 슬슬 힘에 부친다. 애초 그와 자신은 잘 맞는 편이 결코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또, 구스트앙은 귀찮은 일들을 굳이 시키고, 제 탓을 하며, 내가 잘못한 것처럼 굴고, 그리고…….
여하튼 싫은 사람이다.
그래, 오지 마라. 그런 사념을 담아 구스트앙을 봤다.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굴면서도 그는 아직 이곳에.
다만 구스트앙은 그 시선에서 무엇을 읽어냈는지,
“외로우냐?”
여전히 트로이메라이는 말할 수 없다.
눈을 꾹 감았다 뜨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며 눈을 좌우로 빠르게 굴렸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외롭지 않아.
그 기색을 살피던 구스트앙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겁 많은 녀석.”
중요한 일 앞에서는 도망쳐 버리는 겁쟁이, 라고.
로 포 비아의 모함에 발 디딘 구스트앙이 트로이메라이에게 했던 말.
하지만 이번엔 닥치라는 말을 할 수 없다. 화를 내어도 닿지 않을 것이고, 당연하지만 그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도 없다.
아이가 말할 수 없는 입을 더욱 꾹 다물었다. 힘이 들어가 손에 쥔 인형이 자꾸만 구겨진다.
구스트앙은 더 덧붙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트로이메라이는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흰 코트 자락이 잔상처럼 남아 맴돈다.
눕지 않고 천장을 시야에 담았다.
이곳은 환하고 따스한 방. 눈부신 샹들리에는 꺼지는 일 없이 방을 비춘다.
그것은 너무도 환한, 하얀빛.
트로이메라이는 깨달았다.
이곳은,
실험실을 닮았다.
……외로워.
플레이트를 놓아 배양하고, 플라스크에 담아 관찰하는 그런 실험실.
하지만 그래서, 그것이 알 바인가?
볼펜으로의 손장난이 갈수록 는다. 그러려 했던 적 없음에도 그랬다. 가볍게 건드리자 볼펜이 손등 위에서 몇 바퀴고 빙빙 돌아간다. 펜이 돌아가며 작은 원이 손등에 띄워진다. 그것을 들여다보다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느는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에 익숙해져 간다.
토끼의 존재뿐만이 아니라, 제법 많은 것들이. 식사하는 것과 글 쓰는 행위, 덧붙여 자꾸만 방구석에 놓이는 쓸데없는 책들까지도.
닫힌 창문 때문에 밖을 볼 수 없음에도 식사 탓에 시간을 추정하게 된다. 식사는 하루 두 번. 그러니까, 식사 두 번을 하면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 그것을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안다. 예컨대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거나 하는 사실이라거나 하는 것. 때문에 시간을 마냥 공허 속에서 흘려보내기 어려웠다. 인지란 그런 것이므로.
그럼에도 트로이메라이는 노력했다. 무엇에도 의미를 두지 않기 위해.
어느 순간, 빙글 돌던 펜이 멈췄다. 그 펜을 검지만 까닥여 손가락 사이에 끼운다. 그리고 정성스레 써 내렸다. 새삼 자각한다. 볼펜심이 종이에 닿으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거슬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필기감은 만년필이 더 좋은데. 아쉽죠……. 하나 가져다드릴까요?”
무시하며 계속 적었다. 만년필이든 볼펜이든 다를 것이 무언가.
그 냉한 태도를 익숙히 흘려넘긴 토끼가 수첩에 적히는 글을 살폈다.
「구스트앙 개자」
까지만 적었음에도 토끼가 뒷걸음질 쳤다. 그녀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이.
하지만 ‘반응’했다는 것은 곧 ‘인지’했다는 것 아닌가? 이전, 글을 읽지 못하는 척을 하던 토끼였다면 단지 빙글 웃기만 했을 것이다. 뒤로 물러난 토끼를 아주 잠시 눈에 담은 트로이메라이가 어절을 완성했다.
「구스트앙 개자식」
어느 순간부터 토끼보다는 깔끔한 글자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이는 유능했으므로. 하지만 이것이 다 무슨 의미인가……. 펜 끝으로 수첩을 두 번 두드린 트로이메라이가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느낌표를 덧붙였다. 토끼조차도 이 글에 관심이 없어 결과물을 보는 것은 아이 자신뿐이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물이 만족스러웠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좋은 분이시지 않나요.”
눈치를 살피던 토끼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듣고 있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음에도 소녀는 계속해 말했다. 혼잣말인지, 그가 들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인지. 물론 아이는 안다. 이번 것은 후자다. 토끼에게 익숙해질수록 더욱 쉬이 알게 된다. 아무래도 그는 역시 유능하므로.
하지만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렇다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 주장까지 해야 할 정도라고는 더욱. ‘우리’는 본질적으로 기실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계약 이후로는 보다 그러하다.
“저, 는 포 비더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구출되어서, 그게……. 이곳에서 먹는 따뜻한 식사도. 잠자리도. 공부도. 이 모든 것들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토끼가 쓸모없었다면 일어나지조차 않았을 일이다. 필요에 의해 발생한 일로 ‘좋음’을 판별할 수는 없을 텐데.
역시 이 토끼는 지나치게 연약하다. 그런 면에서조차 구스트앙은 개자식임이 옳다…….
그러나 적었다.
「그렇군.」
토끼가 아이에게 주장을 설명할 의무까지는 없었듯, 아이 역시 토끼를 납득시켜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토끼가 웃었다.
트로이메라이는 그 미소를 오래는 바라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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