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2)
사랑해요.
품에 끌어안은 작은 문어가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언제 잠들었더라.
트로이메라이는 일단 욱신거리는 이마부터 부여잡았다. 잠결에 얻어맞은 예상치 못한 딱밤이 제법 아팠으므로. 뭐야. 왜 이러는 건데. 꿈틀거리는 움직임과 함께 머리 뒤편의 베개가 부스럭거렸다.
잠이 덜 깼을 때 특유의 희뿌연 시야에 갈색 형체가 담겼다. 구스트앙, 굳이 이런 방법으로 깨웠어야 했어?
그는 항의를 논리적인 개소리로 간단하게 일축했다.
“하지만 엎드려 자는 널 뒤집는 동안에도 깨지 못한 건 온전히 네 탓 아니냐?”
“뻔뻔하네. 성격 진짜 왜 그래.”
“너한테 들을 만한 말은 아닌데.”
아직 이마가 얼얼했다. 대충 앉아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손목으로 이마를 반복해 누르기를 여러 번. 금방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렸다. 아니, 생각해 보자면 딱히 일어나 있을 이유도 없었다. 트로이메라이가 다시 이불을 끌어당기며 침대를 파고들었다가, 곧 몇 번 눈을 끔벅이고는 천천히 감았다.
결국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침대 시트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옆으로 누운 트로이메라이의 바로 앞 방향으로. 구스트앙이 침대 한쪽을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꿋꿋하게 눈을 감고 버티던 트로이메라이는 ‘굳이 매를 벌겠다면 거부하지는 않겠다’는 구스트앙의 말에는 결국 일어나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하게는, 구스트앙의 기척이 코 바로 앞까지 오자 항복한 것이지만.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알겠어. 일어나겠다니까…….
“용건은 그냥 말로 하면 되잖아. 여긴 내 방이야.”
“그리고 내 집이기도 하지.”
“한 마디를 안 지네.”
“단순히 네가 말을 너무 못하는 거다.”
“남이사.”
누운 채 반쯤 감긴 눈의 트로이메라이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구스트앙은 트로이메라이 뒷덜미의 후드를 잡아채 위로 당겼고.
그러기를 잠시, 후드와 연결된 앞부분의 옷이 목에 닿자 인상을 찡그린 그를 보고는 손을 놓았다. 다시 몸의 자유를 얻은 아이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러나 침대가 한 번 더 기울어진다. 구스트앙과의 거리가 보다 가까워졌다. 그가 다가와 두 손을 아이의 어깨 아래에 넣었다.
트로이메라이의 미간이 어느 때보다도 험하게 일그러졌다. 무어라 입을 뻐끔거리던 아이가 몸을 뒤로 뺐다. 물론 바로 근처에 침대 머리맡이 있었으므로 멀리 갈 수는 없었지만서도.
“그거, 하지 마.”
“싫었으면 네가 진작 움직였어야지 않겠나.”
구스트앙의 손목에 제 손을 올린 트로이메라이는 직전보다는 둥글어진 미간으로,
“……안아주는 것 같아서 싫다고.”
구스트앙은 답하지 않았다. 단지 천과 천이 맞닿는 소리가 부드러이 울리며, 트로이메라이의 몸이 자연스레 앉혀졌을 뿐이다. 접촉은 금방 끝났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가 발을 까닥여 이불을 제 쪽으로 끌어왔다. 무릎까지 당긴 이불을 잡아 허리까지 올렸고.
구스트앙이 이마를 짚었다. 너는 맞지도 않았으면서 이마는 왜 짚어, 트로이메라이는 차마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말을 뱉는 대신, 용건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내기로 했다.
돌아온 답은 ‘용건’이라는 것과는 제법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저번엔 죽비로 맞아도 아픈 티는 내지 않더니.”
“무슨 소리야. 너도 알잖아, 구스트앙.”
“모르겠는데.”
탑의 현자라는 자가 이런 간단한 사실을 모를 수가 있던가. 망설이던 트로이메라이의 입이 열렸다.
“고통은 인간성의 증명이라는 것을.”
그러니 그는 감정을 버리며, 인간성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으며, 고통도 함께 버렸던 것이라고. 그러나 구스트앙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나는 아니었거든.”
“그럼 팔 잘린 건 어떻게 버텼대.”
“그냥. 아팠지.”
그는 책을 읽는다 해도 좋을 어조로 답했다. 그 무감한 눈을 보고야 만 트로이메라이는 돌연 어떤 엷고도 미약한 무게가 심장에 얹히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싫다. 무형의 고통으로부터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 자기 무릎을 끌어당겨 고쳐 앉았다.
그제야 구스트앙은 웃었다. 표정을 직접 본 것은 아니나 그것은 분명 비웃음이었을 것이라고, 트로이메라이는 추측했다. 그럴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래야만 했던 것일지도.
아직, 아팠다.
―어느 곳이?
구스트앙이 트로이메라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짧게 움찔거린 것 외에는 반응이 없었다.
“여기 봐라. 대화할 땐 마주하는 것이 예의 아니던가?”
“하지만 나는 이제 너와 동등한 존재도 아닌데.”
“그런 방식으로 대해지고 싶다고? 지금의 ‘배려’가 없어도 괜찮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이가 눈만 굴려 깐깐한 머저리를 바라보았다가, 주저하던 몸을 그가 있는 방향으로 돌리고 들릴 듯 말듯 웅얼거렸다. 치사하게.
“미안해서 그러냐?”
“아닌데.” 즉답했다.
“하지만 사과하고 싶다면 적어도 말로는 해야 하지 않겠냐.”
“안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게다가 뭐, 네가 알아서 다시 잘 붙인 것 같고.”
구스트앙이 와이셔츠의 왼쪽 소매 단추를 풀어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왼팔이 드러났다. 아이가 입을 우물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그가 곧 그가 오른손으로 왼팔 위를 주욱 그었다.
이어진 것은 상쾌하다고도 할 수 있을 목소리였다.
“붙인 건 아니고, 의수다.”
빠르게 눈을 깜박인 트로이메라이의 동공이 오른쪽 위를 잠깐 향했다.
“……안 미안해.”
“일단은 그렇게 들어두마.”
“게다가 의사면서 자기 팔도 못 붙이고…….”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멍청이 같아, 구스트앙.”
아이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우물거리던 말이 보다 또렷해진다.
“이번 전쟁도 그래. 네 목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결국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다른 무엇보다도 네게 멍청이라는 말을 듣는 건 꽤 타격이 있군.”
구스트앙이 안경을 고쳐 썼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이어지는 말을 듣는다.
“10가문의 전복을 꿈꾸던 자 중 10가문의 완벽한 절멸을 바라던 자가 있었어? 단지 자신들이 그 권력을 똑같은 형태로 나누어 가지기를 바랄 뿐이지.”
“뒤의 일은 내 알 바가 아니다.”
“달라지는 건 없어. 그러니까 넌 고작 그따위 일에 네 힘을 쏟고 ‘우리’의 분열을 일으킨 거야. 탑을…… 무너뜨리려 한 거라고.”
알 수 없는 고통이 문득 트로이메라이에게 얹혔다. 이번에는 심장이 아닌, 심장과 목 사이 어딘가가 저릿했다. 목에 무언가 걸린 듯한,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기분.
“탑은, 바뀌지 않아. 설령 막힌 135층이 새로 개방된다 해도 똑같을 거야.”
“그래서?”
“그렇다면 그냥 ‘우리’가 우리로 남는 편이 낫잖아.”
아이의 목소리는 엷었으나 분명 확신만은 담겨 있었다.
구스트앙이 웃었다. 이번 그의 미소는 트로이메라이가 직접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비웃음도 조롱도 조소도 아니었다. 아이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너는…….
그러나 언어를 완성한 것은 구스트앙이 먼저였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가 바뀌겠지.”
두 시선이 맞닿았다.
트로이메라이가 제 이마를 문질렀다. 이제는 아프지 않음에도 그러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꼭, 누군가를 만나고 싶음에도 만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침묵이 서럽고도 길게 다가왔다.
다만,
“미안해.”
정확히 무엇을 사과하는 것인지는 트로이메라이 자신조차 몰랐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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