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선고

4.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1)

토끼가 없는 방. 식사는 마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입 안에 남아 맴도는 미처 사라지지 않은 감각들이 그를 괴롭혔다. 질척했던 액체, 그리고 건더기들의 까슬한 감촉.

그런 것들이 불쾌했다. 그리고,

​트로이메라이가 손바닥을 이마에 얹었다.

글쎄, 모르겠다. 손이나 이마나 온도가 비슷해 위화감을 느끼기 어렵다. 이마에 얹은 손을 꾹 눌러 그 차이를 음미라도 해보려 했다가, 손끝을 짧게 까닥였다. 그리고 손을 뒤집어 이마에 손등을 대어 본다.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근래에 신체에 이상이 생겼던 적이 없어 비교 대상이 없다.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목 안쪽에서 퍼져 올라오는 열감만은 분명했다.

부러 아주 느린 숨을 뱉었다. 그에 맞추어 가슴이 천천히 내려간다. 입술에 닿는 숨이 덥다. 입 안을 맴도는 공기 역시 단순히 뜨뜻한 수준은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열이 난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한데.

​눈을 가늘게 떴다.

속이 좋지 않았다. 가만 누워 있어도 어지럽다. 금방이라도 속에 든 것을 게워낼 수 있을 법했다. 심리적인 의미가 아닌 물리적인 의미로.

수많던 생체 실험 수행 경험으로부터 원인 정도는 마땅히 유추할 수 있다.

간만의 식사에 위장만이 아닌 몸이 당황한 것이다.

​먹지, 말걸…….

​놀라운 정도로 연약한 제 몸에의 감탄도 잠시, 열감에 느려진 머리가 일했다.

목에 열이 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곧 부을 텐데. 그리고 다음으로는 콧물이나 기침이 기다릴 테지.

​목의 상처를 문질렀다. 이전처럼 비명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고통은 아니나, 완치까지는 갈 길이 먼 듯하다. 아프다. 손을 옮겨 쇄골 아래를 손톱으로 꾹 눌러 그었다. 이 역시 아팠다. 그래도 덕택에 목의 상처로부터의 고통은 옅어졌으므로.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기침. 재채기. 그런 것들. 이 목과 몸으로는 영 쉽사리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차라리 미리 기절이라도 하는 편이. 기절하기 위한 수단들을 머릿속으로 주욱 나열하다가 눈을 반쯤 감았다. 떠올려도 실행할 기운이 없다.

​……잠이라도 자자.

눈을 감기 전 둘러본 방은 적막했다.

토끼도 구스트앙도 없는 방. 오로지 그 혼자.

​그것이 좋으면서도 언짢았던 것 같다.

​괜시리 인형을 들어 올려 껴안았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관절 마디가 묘하게 뻐근하다. 정말이지 지나칠 정도로 나약한 몸이지 않나.

그러나 실소할 체력이나 의지조차도 남지 않아서.

​느려지는 심장 박동의 울림이,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퍼져나가던 때.

​달칵.

​문고리가 돌아갔다.

​구스트앙이다.

정갈한 구두 소리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문고리 돌리는 소리만으로 알아챘다. 익숙한 사람인만큼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몸이 된 이후로부터는 불길하고도 무겁게 다가오는 기척.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아이는 토끼만이 아닌, 구스트앙 또한 싫어한다.

그는 좋아하는 것보다는 싫어하는 것이 쉬운 사람이었으므로.

​이대로 잠든 척을 했을 때의 결과를 예상해 본다…….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깨우지 않을 리가 없을 테지. 억지로 굴려지든 앉히든, 어느 쪽이든 불쾌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먼저 아는 척을 할 만큼 구스트앙을 덜 싫어하지조차도 않았으므로.

​시선을 천장에 고정하고선 구스트앙이 무엇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방에 들어서고서 한참을 가만 서 있던 것이다. 관찰, 하나? 그 침묵이 기이하게도 불편했다.

불평이라도 꺼내려 입을 열었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애초 아는 척을 하려 했더라도 말을 할 수 없다. 여하튼 모두 구스트앙의 탓인 것이다.

이제 망설이지 않고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구스트앙은 마땅히 그 정도의 얄팍한 모욕에는 꿈쩍 않았고. 다만 이번에는 ‘네 현 외형과 꼭 어울리는 욕설’이라는 첨언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침묵만을 지켰다. 아이와는 달리 말을 할 능력이 있음에도.

들어 올린 가운뎃손가락 역시 아직 그대로다. 왜, 조용하지……. 방에 쭈그리고 앉아 박혀 있으면 찾아와 어떤 말이라도 건네던 그 아니었던가. 아이는 적막을 사랑하나 어색했다. 천장에 박혀 있던 눈을 굴려 그를 보았다. 자연스레 눈이 얽힌다.

그리고 드디어 무정한 그의 입이 열렸다.

“감상은 어떠냐.”

이 방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들에 대해, 트로이메라이는 인상을 구기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싫고, 불편하고, 짜증 나며, 불쾌한 동시에, 역겨웠다고.

그것이 구스트앙에게 정확히 전해졌을지는 모르는 일이나, 그 외의 표현 방법을 트로이메라이는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구스트앙의 시선이 수첩에 가 닿는다. 찢겨 나간 종이들 탓에 제법 얇아진 그 수첩. 사용 횟수를 짐작할 수 있는 그 흔적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곧 손가락으로 자신의 뒷목을 가볍게 누르며,

“반성이라도 했을까 싶었다만.”

아무래도 그럴 리는 없었던 걸 테지.

그 말에, 직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기운이 깊은 곳에서 스며들었다. 들었던 가운뎃손가락을 조심스레 접어 내리며, 언젠가 수첩에 적어 토끼에게 건넸던 그 문장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잘못한 게 없어. 그 짜증 섞인 눈에 구스트앙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흥, 트로이메라이가 인형을 끌어안은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그것을 가만 구경하던 구스트앙이 결국 웃고 만다.

“정신연령만이 아니라 정말 애가 된 것 같은데. 되찾은 인간성의 영향이 이쪽으로 발휘될 줄은.”

그런 거 아니거든.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 보았자 어떻게든 반박당할 것을 알아서이기도 하고,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느새 구스트앙이 다가왔다. 침대 옆에 서서 아이를 지켜본다. 옆으로 돌아누운 아이의 앞에서.

싫다……. 잠시 고민하던 트로이메라이가 수첩을 들어 올렸다. 이전의 거리에서도 수첩에 적힌 글자를 구스트앙이 보지 못할 리는 없었음을, 아이 또한 앎에도 그가 다가오고서야 볼펜을 수첩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한 획을 채 긋기도 전에 펜을 멈춰야 했다.

구스트앙이 수첩을 빼앗아 든 것이다. 내놔. 하지만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있는 것은 허공뿐이다.

“누워서가 뭐냐, 누워서가.”

움직이면 아파서 앉기 싫다고. 너 때문이잖아. 뚱한 눈으로 째려봤다.

그럼에도 그는 토끼가 옆에 두었던 간이 책상을 침대 위로 올리며,

“할 거라면 제대로 해. 앉아서, 책상에 대고 똑바로 써야지 않겠나.”

짜증보다도 먼저 억울했다. 네가 아프게 만들었잖아. 말하지 못하는 것도 네 탓이고.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진짜 싫다.

금방 펜을 내렸다. 볼펜이 침대 위에서 한 바퀴를 채 구르지 못하고 멈춘다. 그렇게 포기하려 했으나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구스트앙의 기척을 느끼고 만다. 또, 억지로 앉히려고?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그의 것에 비하면 미약한 힘으로. 여하튼 아이로서는 최선을 다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멈췄다. 그러고서 아이를 빤히 보기만 했다. 길들일 동물을 보는 것도 같은 시선이라고, 트로이메라이는 생각했다. 싫으면 알아서 일어나 앉으라는 거지. 하지만 그 행위에 ‘지배’ 이외의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차라리 수첩 같은 건 처음부터 들지 말 걸 그랬나. 어쩌면 구스트앙은 단지 그의 언어를 듣지도 보지도 않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때문은 아닐지라도 조금, 우울해졌다.

굳이 앉아야 한다면 앉혀지는 쪽이 아프기로는 덜하다. 토끼로부터의 경험으로 유추하자면 그랬다. 그래, 앉혀라……. 그대로 누워 구스트앙과 시선을 맞대니 그가 의문했다.

“안기는 것 같아서 싫다더니.”

일단 지금은, 아픈 게 더 싫어서.

계속 가만 누워 있으니 달랑 들어 올려져 앉혔다. 얌전히 앉아 있으니 앞에 간이 책상이 놓인다. 손에는 볼펜이 쥐어졌고. 책상 위에 수첩이 놓여 펼쳐진다. 이것까지 직접 해야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럴 리가. 이 깐깐한 머저리 자식이.

쭉쭉 펜을 그어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깔끔해지는 글자가 트로이메라이 자신은 신기했다. 나아지고, 달라지는……. 실은 신기한 것보다도 이상했다.

당당히 완성해 내밀었다, 그러나 구스트앙은,

“녀석, 이걸 읽으라고 쓴 거냐?”

아무려면 일생의 대부분을 깔끔하다 못해 결벽적일 정도의 글자만 보아 왔으므로.

그런 글이 아니라면 그의 책상에 오를 수 없었으므로.

어떤 모욕도 함의도 없이 오로지 궁금증만을 담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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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Non-CP

댓글 1


  • YUSEONG 창작자

    비밀댓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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