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라는 선고

3. 너는 내 것이라. (完)

가슴을 몇 번 두드린 것만으로 반사적으로 뜨인 자신의 눈이, 트로이메라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부러 초점을 흐트러뜨렸다. 시야가 뿌옇다. 의식을 잃기 직전 특유의 감각과도 닮았다. 아이는 그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기껏 한 번 깜박인 눈을 다시 감았다.

그러나 트로이메라이는 명백히 ‘머리가 좋은’ 부류의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그 짧은 순간에도 눈앞에 놓였던 것이 수첩의 종이이며, 그 위에 검은 글자들이 적혔다는 것을 의지와 달리 머리가 먼저 이해했다. 의도하지 않아도 뿌옇게 몇 겹이나 겹쳤던 잔상들을 두뇌가 조합해 냈다.

멈추려 해도 멈춰지지 않으며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다.

눈 감은 아이의 미간이 옅게 패였다. 눈꺼풀 아래의 홍채가 데굴 굴러간다.

그러니까, 미안합니다, 라고…….

―어쩌라는 것인가.

토끼의 ‘미안함’이 그에게 어떤 가치가 있나.

반사적으로 이불을 잡아 머리끝까지 올렸다.

그것도 잠시, 어깨에 작은 무게가 얹힌다. 토끼가 아이의 어깨를 두드린 것이다. 그가 필요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던 토끼가, 지금은.

이유든 무엇이든 그다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가만히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들었다. 도망갈 수도 지배할 수도 죽일 수도 없는 그는 그렇게 했다.

속이 쓰렸다. 새삼스럽게도. 며칠째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위장이 자기주장을 한다.

때문에 무어라 중얼거려도 언어가 되지 못하는 바람 소리만이 삐져나올 뿐이다.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말이라도 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이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득 머리맡에 기척이 느껴진다. 토끼 외의 용의자는 없다.

죽일까. 팔다리를 자를까. 자연스레 비집고 올라오는 사고를 외면한다. 반응하지 않으면, 그렇게 해서 아무렇지 않은 일로 만들면, 전부 없던 일이 될 것이라고. 아이는 늘 그렇게 믿어 왔으므로. 오늘도 그는.

그런즉 붙잡은 이불 끝을 놓았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그러나 토끼에게 그것은 승낙이며 허락일 수밖에.

단번에 이불이 걷어내어진다. 그러면서도 그의 목을 건드리지 않으려 아주 신중하게.

조명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천 마스크에 반쯤 가려진 아이의 얼굴이 드러난다.

흐……, 찡그려 눈 감은 아이가 공기 흐르는 소리를 뱉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목에 손을 가져다 대 긁는다. 아물기 위해 간지러운 그곳을. 물론 손톱이 상처에 닿자마자 멈췄지만서도.

그럼에도 손에 무언가가 닿았다. 타인의 체온과 다섯 개의 선과 같은 감촉. 보지 않아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손이다. 역시, 토끼 외의 용의자는 없었다.

약한 힘이다. 그런데도 아이는 제 손에 힘을 뺐다. 단지 무시하기 위해서.

이것 역시 토끼에게는 일종의 허용이었으므로,

멈칫한 토끼가 덜그럭거리면서도 아이의 손을 인형 위로 옮겼다. 그리고도 손을 떼어내지 않다가, 트로이메라이의 손바닥을 조심스레 뒤집었다.

어서 토끼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아이의 손에, 토끼는 글을 적었다. 한 획, 한 획. 천천히. 곱씹어 말하듯.

「식사하셔요.」

그것이 간지러웠다. 목의 상처만큼이나.

그렇지만 긁지 않았다.

그저 미간을 구기는 것만으로는 정확한 감정과 언어를 전할 수 없다.

소통은 의사 표현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 않던가. 심지어 지배에조차도.

그것은 반드시 언어의 형태를 띨 필요는 없으나, 타인의 세계와 맞닿을 수단만은 되어야 한다.

고민은 짧았다. 본래 그는 단순한 사람이다.

토끼를 무시하는 일과 토끼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일의 귀찮음을 비교했다.

지금은 후자가 앞섰다.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였던 것은 토끼다. 토끼는 웃고 있었다. 여전히 어색한 바로 그 미소로. 다만 입꼬리에 들어간 힘만은 달랐다.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그러나 그것이 알 바이던가?

그 미소를 뇌리에서 지워내기 위해 노력하며, 수첩부터 찾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기 있구나. 하지만 토끼가 사용한 후 제자리에 두지 않은 탓에 멀다. 토끼는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 없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 다만 그렇다 해 몸을 움직이기에는 아플, 것 같았다…….

의사를 전하는 일과 고통의 무게를 비교하려던 그 짧은 간극에, 토끼가 먼저 움직였다.

아이의 시선이 수첩에 닿은 것만으로도, 소녀는 볼펜까지 모두 집어 들어 아이의 손 위에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 그는 불쾌했다.

그러나 수첩을 집어 들었다. 볼펜을 쥐었다.

「싫어.」

뚱한 표정으로 그리 적힌 수첩을 내밀었다. 하지만 토끼는 갸웃할 뿐이다.

아이의 손에 쥐인 수첩을 살짝 잡아당겼다. 트로이메라이는 또다시 ‘무시하기 위해’ 힘을 풀었다. 수첩은 손쉽게 토끼의 손에 들어갔다. 소녀가 종이에 획을 그어낸다. 깔끔하고도 경쾌하게.

「그래도 식사는.」

정확하게 말하고도 전달되지 않는 무형의 것들이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쓰이지 않고도 전달되는 무언가는 매우 드묾이 마땅할 것이다.

다시 써낸 문장은 이전보다는 정확했으나 토끼에게 정확히 전달되기에는 부족했다.

「네가 싫어.」

토끼가 그대로 멈췄다.

수첩의 삐뚤빼뚤한 글자들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럴 땐 어떤 반응을 해야 좋을까…….

……일단, 꿇나?


트로이메라이가 제 앞에 놓인 죽 그릇을 뚫어질 듯 보았다.

침대 끝에 반쯤 기대고 앉아, 그것이 몇천 년 묵은 회계 장부라도 되는 마냥 빤히.

토끼가 방에 들인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적당히 식은 그런 말갛고 흰죽.

그것을 그렇게도 오래 보았다.

무언가를 입에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함이 알맞을 것이다. 먹는다는 행위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언제인지조차 흐릿하다. 먹고 마시고. 그런 ‘인간적인’ 행동들. 자신이 ‘그런 것’을 한다니.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나. 기실 영양의 보충이라면 약학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유형有形의 음식을 가져다 두고, 아픈 목을 부여잡고서라도 먹으라는 것은.

지금의 자신에게 고통이란 선명하다는 것을 알려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구스트앙의 역겨운 면상이 절로 눈앞에 그려졌다. 미친 새…….

어느새 토끼가 다소곳하게 다가와 아이의 손에 숟가락을 끼웠다.

멍하니 그것을 구경했다. 의도는 이해하나 딱히 실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숟가락을 까닥이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소녀와 아이는 제법 체격 차이가 난다. 손쉽게 작아진 트로이메라이를 들어 앉혔던 것이다. 토끼의 그런 동작이 익숙해, 보였던 것도 같다. 그 갑작스러운 행각에 항의하려 했으나 곧 그만뒀다. 무시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아주 아프지도 않았기 때문에.

죽에 눈을 고정한 채, 곁눈으로 토끼를 보았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토끼가 보다 빙그레 웃는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탁, 크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근처의 수첩을 집어 든다. 천천히, 무언가에 대고 그리듯 볼펜을 움직였다. 앉아서 책상에 대고 쓰는 글로는 첫 결과물이다.

「왜?」

토끼가 수첩을 잡았으나 이번의 아이는 손에 힘을 주었다. 수첩의 소유권을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도는 한 번뿐이었다. 소녀는 펜 대신 입을 놀리기로 했다.

“숟가락으로의 식사가 보편적이고 편하다고 생각하여…….”

하지만 그는 그런 것을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손에 쥔 볼펜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었다가, 다시 본래의 손으로 옮겨 잡았다. 다시 종이 위에 검은 잉크를 긋는다. 하여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반듯하게.

「너는 왜 나를 먹이려 하지?」

“그러니까, 오늘까지도 식사하지 않으시면 목에 관을 꽂으셔야 합니다만.”

트로이메라이의 눈썹이 완벽하게 구겨졌다. 그런 생각을 할 법한 것은 구스트앙뿐이지 않나. 명백한 짜증에 아이의 눈치를 슬 살피던 소녀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북했던 미소가 더욱 불편해진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 거짓말을 할까, 입을 다물까. 다만 ‘이것’은 나를 죽이지 않는다 했다. 침을 한 번 삼킨 소녀는 결국,

“그 의료적 행위를 제가 해야 합니다.”

그렇구나. 아이는 납득했다. 졸린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하지만 여전히 숟가락을 들어 올리지만은 않았다.

그 뚱한 눈을, 소녀는 읽기 어려웠다.

“그리고 추측입니다만, 그렇게 되었을 때 그… 행위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아마 저는 직장 분들께 살해당할 듯해서. 그게, 또는 성공해도 시도만으로 죽을 확률에 대해 고려해 보았습니다…….”

때문에 냅다 이불부터 들췄나.

마지막 문장에 생략된 단어를 읽어낸다. 내게 죽을 확률.

무시하고 싶어도 거듭 몸이 먼저 일한다.

듣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그러니까 꼭, 사람처럼.

 “저를 죽이지 않는다는 문구가 참이시라면.”

토끼의 긴장 아래, 고요한 슬픔을 읽어낸다.

“……드셔주시면 안 될까요.”

트로이메라이는 증명의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토끼에게 그의 판단을 이해시켜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렇지만 숟가락을 쥐고, 들어 올렸다. 소녀가 한참 쥐고 있던 덕에 따스했던 숟가락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식다 만 죽처럼, 딱 그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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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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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YUSEONG 창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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