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1)
질 리 없던 것을 졌다.
아이 또한 알고 있다.
앞에 놓인 체스판이 여덟 개의 촉수로 빠르게 정리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가 미간을 보다 깊이 찌푸렸다.
눈앞의 동물은 크라켄. 그러니까, 그의 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만큼이나 작아진 붉은 문어를 그 누구도 아닌 트로이메라이가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으므로.
그것엔 그 어떤 증거도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다만 아이는 지금의 크라켄이 싫었다.
그것이 작고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이 작은 문어가 ‘지나치게 좋다’는 이유만으로 시야에서부터 치워내고 싶었다.
덧붙여, 그는 알고 싶지 않았으므로. 오만이 작아진 이유도, 자신이 이런 모습이 된 이유도, 오만에게 물어 알 수 있는 것들도. 그리고 저가 묻지 않아도 오만이 알릴 그 모든 것들이.
아이가 바라는 것은 그저 계속 이렇게 가만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제 눈앞에서 치웠으니 아무런 일도 없던 것이다. 그런 셈 치기만 하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아이는 그것을 바랐다.
하지만 이불 덮어 크라켄을 시야에서 치워내면서도, 아이는 그것을 쫓아내지만은 않던 것이다.
오만은 똑똑하다. 트로이메라이가 신뢰해 몇몇 귀찮은 일을 맡길 정도로나. 예를 들어, 전쟁 때에만 해도 구스트앙의 미로를 해결하는 일이라던가.
그런 오만은 눈 뜬 아이에게 다가와 체스판을 내밀 수 있을 만큼 또한 머리가 좋았다.
트로이메라이는 토끼가 제안한 것조차 ‘네가 재미없을’ 것이라는 이유 외적으로는 거절하지 않을 만큼 체스를 사랑하지 않던가. 기물을 다루고 이겨내는 것이 좋았으므로.
정확하게는,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기지 않았다.
단지 이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이길 수 없었다…….
스테일메이트—킹이 체스 상태가 아닌 동시에 이번 차례에 어떠한 기물을 움직이더라도 체크의 자충수가 되어 수를 둘 수 없는 상태—의 무승부로 끝난 첫판 이후로는 벌써 두 판을 내리 진 것이다.
바로 얼마 전 구스트앙과의 체스에서 진 것이 트라우마라도 된 것인지.
드높은 자존심 탓에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이 자신조차 인지했다.
그러고도 아이는 게임을 계속했다.
오만이 그에게 체스말 놓은 체스판을 내밀었다는 이유만으로.
첫 승리를 거둔 오만이 요구했던 것은, 제 이름을 적어 자신에게 주는 것.
애초 무엇도 걸지 않은 게임이었으나 트로이메라이는 수긍했다. 승자는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이 탑의 진리 아니던가.
그러므로 아이는 펜을 들어 올렸다.
주저했던가? 그것은 알 수 없으나.
다만 괜스레 종이가 울렁이는 듯했다. 그 단순한 세 글자를 적기가 어려웠다…….
크라켄이 그를 잘 아는 만큼 아이 역시 크라켄을 잘 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그의 첫 동물. 제 친우들보다도 가까운 존재. 이 어려진 몸 나잇대쯤의 그에게라면 크라켄은 분명 친구였다. 자라면서는 아주 그렇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이 작은 문어가 하필 그런 것을 요구한 이유를 감정까지도 되찾은 트로이메라이가 모를 수 없었다. 달라진 모습에도 아이가 크라켄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듯이.
외면하기 위해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그 행위만은 익숙했으나 유독 다시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눌러 감은 눈에 닿은 속눈썹 하나하나를 셀 수도 있을 만큼.
단지 아주 조금, 서러워 눈을 떴다.
이긴다는 것은 제법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똑똑한 문어를 상대하는 체스 역시 아무리 그라도 머리를 전혀 굴리지 않고는 이길 수 없다.
—오지 말지 그랬어.
말할 수 없어 뱉지 못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그리고 두 번째 승리를 거둔 크라켄이 내민 종이에 적혀 있던 것은,
「안아줘요.」
재차 언급하나 오만은 똑똑하다.
지금 트로이메라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 문어는 안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가 미간을 구겼다.
그가 「크라켄」이라 적힌 종이를 제 몸에 붙인 문어를 빤히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아이가 뒤편에 선 토끼를 보았다.
아므즈를 닮은 토끼는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아므즈에게서는 결코 볼 일 없던 것이다……. 그런데도 토끼는 분명 아므즈를 닮았다.
다시 문어를 본다. 그가 알던 크라켄은 아니나 분명 크라켄이다.
그러니까, 토끼도 문어도 모두 과거의 잔해를 닮은 것들.
그런 문어도 토끼도 얌전히 아이를 기다렸다.
아이는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아마 우스워서.
마침내 아이가 오만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무릎을 침대에 대니 그 부분이 움푹 파인다. 성능이 좋아 외려 움직이기 불편했다. 한숨을 내쉰 그가 손을 뻗어 침대에 대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잠시 망설인 아이가 곧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다시 손을 침대로부터 떼어내고, 그리고.
—문어를 이불로 덮었다.
하지만 크라켄은 계속해 얌전히 기다렸다. 곧이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는 듯이.
다시 몸을 세워 반쯤 꿇은 무릎으로 문어를 응시하던 아이가 이불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불과 함께 문어가 끌려온다.
이제는 몸 바로 앞에 크라켄을 두고도 고민하던 아이가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불에 감싸인 문어는 제법 고대종 모양 인형의 촉감을 닮은 것도 같았다.
부드럽고도 말랑했다…….
문어를 끌어안은 채로 편하게 고쳐 앉았다.
몸을 뒤로 물려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은 아이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토닥이는 것처럼 툭, 툭 하고. 토닥거리는 탓에 함께 흔들리는 크라켄의 몸이 가슴 위로 닿았다. 균열 진 가슴으로도 그 촉감은 뚜렷했다.
그러자 토끼가 물었다.
토끼는 저 질문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괜찮으신가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까닥이려다 그만두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법 나아가는 듯했던 목 언저리의 고통이 다시 선명했기 때문에.
바로 어제 역시 그러했듯 답할 필요는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크라켄을 제 다리에 올려둔 아이가 펜을 들어 적어 내렸다.
「내가 이것보다 일찍 죽을 테니.」
그러니 이 정도는 ‘괜찮다’고.
수첩을 내려놓은 아이가 문어를 몇 번 더 토닥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가 토끼를 해치지 않는 이유와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너를 앞서 죽을 것이다.
그는 보기보다 마음을 쉽게 여는 사람이다. 그 자신이 언젠가 말했듯.
이전의 그는 상처받기 전에 상처 줌으로 고통을 회피했으나, 감정을 돌려받은 그는 그가 타인에게 준 상처로도 상처받는 ‘사람’일 수밖에. 그것도 아주 오래 없던 감정과 감각을 되찾아 작은 상처로도 고통에 허덕이는.
하여 로 포 비아 트로이메라이는 이 ‘삶’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크라켄이 이불 밖으로 쏙 빠져나왔다. 유연한 문어이니만큼 아주 쉽사리. 아이 또한 쉽게 오만을 보내주었고.
침대 한켠을 차지한 크라켄이 네 개의 촉수로 체스판을 들어 올렸다. 흑백의 체스판 위에 역시 하얗거나 검은 체스말이 다시 내려놓아진다.
아이는 적과 아군이 명확하다는 이유로도 체스를 좋아했으나,
또? 그런 함의를 잔뜩 담아 아이가 입술을 작게 삐죽였다.
토끼가 그 표정으로부터 명백한 언짢음을 읽어냈다. 슬그머니 다가와 문어를 침대 아래로 내린 것이다. 그리고 소녀는 그녀 자신에게 감탄했다. 이번 일은 꽤 ‘사용인’스러웠던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이번의 문어는 얌전히 굴지 않았다. 다시 무려 여덟 개의 촉수로 빠르게 침대를 올라탄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뚱했다. 토끼가 읽어내기에 —확신은 없지만— 이 정도의 표정이란 괜찮음’의 신호였으므로 소녀 또한 조용히 관람했다.
그렇게 뽈뽈 기어간 크라켄이 옷 위로 아이의 팔을 휘감아 자리했다.
다른 촉수로는 고대종 모양의 인형을 침대 구석진 자리로 밀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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